미천대제19년{AD318}무인,

 

하5월, 현도태수 <고경高卿>을 보내서 하성(河城)을 공격하여 빼앗으니,

평주(平州)자사 <최비崔毖>가 이 소릴 듣고는

우문(宇文)에게 사신을 보내 신하를 칭하면서

함께 모용(慕容)을 쳐서 땅을 나누어 가지자고 청을 하였다.

 

<담하談河>를 우문(宇文)씨와 단(段)씨에게 보내어 <외廆>를 치자 공모하였다.

 

 

미천대제20년{AD319}을묘,

 

10월, <선옥仙玉>에게 명하여

<휴도休都>와 <우경于京>의 군대를 끌고나가 <외>를 쳤더니,

<외>가 딸을 바치면서 화친하고자 하였다.

 

이에 상이 <담하談河>에게 물으니,

 

<담하談河>는

 

“<외>는 <단段>씨의 집에 장가를 들고 그 도하(徒河) 땅을 취하였으며,

겉은 어질지만 속은 험합니다. 화친은 아니 됩니다.”라 하였다.

 

우문(宇文) 및 단(段)국과 함께 진공하였더니,

<외>는 크게 두려운 나머지 나오지는 못하고,

몰래 술과 음식을 보내와 화친을 청하였다.

 

<선옥仙玉>은 이를 거절하였고, 우문(宇文)만이 이를 수락하였다.

 

이때, 날씨는 춥고 군사들은 지쳐 있었으니 <선옥仙玉>도 걱정스런 낯빛이었다.

 

사마 <현슬玄膝>이 <선옥仙玉>을 설득하길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깊숙이 들어가되 싸우지는 말라고 합니다.

지금 우문(宇文)은 갑자기 변심하였고, 단(段)국은 본래 <모용외>와 한 족속입니다.

물러나서 변화를 살피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서서히 도모하여 만전을 기하시지요."라 하였다.

 

<선옥仙玉>도 그것이 좋겠다고 여겨 물러났다. 단(段)국 또한 물러났다.

 

<외廆>가 아들 <한翰>과 함께 우문을 습파하고는 요동을 진공하니,

<최비>가 홀몸으로 우리에게 귀의하여 도움을 요청하였고,

<선옥仙玉>이 나아가 싸우다 <외廆>에게 패하여 죽으니,

상이 이를 애통히 여겼다.

 

<휴도>에게 <선옥>의 군사를 이끌라 하였다.

 

<외廆>가 아들 <인仁>을 요동태수를 삼고, <휴도休都>를 쳤다.

 

우리가 연패하여 평곽(平郭)을 잃으니,

이에 <소우萧友>가 안평태수가 되어 2만군을 이끌고 가서 <휴도>의 군대를 구하였다.

 

<청견靑見>을 남부대사자로 삼아 <선옥仙玉>을 우보의 예로 장사하고,

<선옥仙玉>의 처 <불弗>씨에게는 매년 곡식을 주게 하였다.

 

<선옥仙玉>은 <선방仙方>의 동생으로

상대를 겁주는 힘과 담력이 있었고 활을 잘 쏘았다.

 

형인 <선방仙方>을 도와 후산(候山)의 공을 세웠고,

<상보尙寶>의 처 <불弗>씨를 빼앗았다.

 

<선옥仙玉>은 용감하고 싸움은 잘하였으나 적을 얕잡는 기질이 있었다.

 

평소에 번번이 휘하를 욕보였기에,

혼자서 말을 몰아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패하여 죽은 것이다.

 

그의 휘하들은 힘들여 싸우지도 그를 구하지도 않았으니,

사람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12월, <고경高卿>이 하성(河城)에서 <장통張統>과 싸워 패하여 죽었다.

 

상이 <방부方夫>에게 명하여 현도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를 구하라 하였다.

 

<방부方夫>는 하성(河城)으로 가지 않고 요동으로 곧바로 달려갔고,

<외廆>는 아들 <한翰>을 시켜 <인仁>을 구하게 하였더니, <한翰>이 잘도 싸워냈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방부方夫>에게 명하여 피아간의 경계를 지키라 하였다.

 

이는 오래 버티기를 하는 계략이었다.

 

<장통張統>은 하성(河城)에 있던 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돌아갔다.

 

북해(北海)의 <정림鄭林>이 <외廆>에게 귀부하니,

<외廆>는 수레·소·조·비단을 하나도 거두어 가지 않고, 스스로는 들판에서 경작하였다.

 

<외廆>가 옥쇄 3개를 건강(建康)에 바쳤다.

 

<고구리>가 수차 요동에 침입하였으나, <외廆>가 <한翰>과 <인仁>을 보내 막아냈다.

 

이 시절 <포홍蒲洪>은 <趙>主인 <유요劉曜>에게 투항하였다.

<고구려사초>

 

 

12월, 평주자사 <최비>는 중주(中州) 사람이고

요동을 바라다보면서 진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많은 선비와 백성들이 <모용외>에게 귀복하니, 마음이 편안치 않았다.

 

사신을 보내서 돌아오라고 불렀으나 그들 모두는 복귀할 뜻이 없었다.

 

<외廆>는 이들을 잡아 가두어 놓고,

<고구리>·<단>씨·<우문>씨의 사신들이 <외>를 멸하여

그 땅을 나누어갖자는 약속을 하였다고 은밀히 설명하였다.

 

<최비>는 발해와 친하였었다.

 

<고담高膽>이 공들여 간하여도 <최비>는 3국이 군대를 합쳐서

<외廆>를 치는 일에 따라 나서질 않았다.

 

여러 장수들이 {<고구리>·<단>씨·<우문>씨를} 치자고 청을 하니,

 

<외廆>가 말하길;

 

"저쪽은 <최비>의 수에 넘어가서, 한데 뭉친 이점을 노리고 있다.

 

저쪽의 군세가 초기에는 합쳐졌기에 심히 날카로울 것이니,

맞싸워서는 아니 되고 꼼짝 말고 단단히 지켜야 한다.

 

저들은 서로 다른 군대들이 합쳐져서 왔기에, 아직 한 사람의 지휘 하에 있지 않으니,

서로가 한 사람의 아래로 들어가기는 불가할 것이고,

시일이 지나면 필시 사이가 나빠질 것이다.

 

그리되면, 한편으로는 우리가 <최비>와 함께 속여서

자기들을 이길 것이라 걱정하기도 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끼리 시기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들의 마음이 둘로 갈라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을 공격하면 반드시 저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3국이 극성으로 진공하자, <외廆>는 성문을 닫고 지키면서,

사람을 보내서 소와 술로 우문의 군대만을 먹였다.

 

이에 다른 두 나라는, 우문이 <외廆>와 모의한 것으로 의심하여,

각자의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 대인 실독관은 비록 두 나라가 돌아갔어도,

당당하게 나 혼자서 {<모용>의 땅을} 차지하겠다고 하였다.

 

우문씨의 사졸 수십만은 40 리에 걸쳐 연이어서 병영을 세웠다.

 

<외廆>가 사신을 보내 도하(徒河)에 있는 아들을 불러들이려 하였는데,

 

<한翰>이 아뢰길;

 

"실독관이 거국적으로 도적질을 하고 있습니다.

 

저쪽은 수가 많고 저희는 수가 적어서, 계책을 써서 파하기는 쉬워도,

힘으로만 이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제 성안의 사람들이면 적을 막기에는 충분합니다.

 

<한翰>은 밖에서 기습적인 출병을 하여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때까지 {막으면서} 기다리다가, 안팎에서 저들을 공격하여 함께 치면,

저들은 벌벌 떨며 어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을 것이니,

반드시 이기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저들은 병력을 하나로 합쳐서 성을 공격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더불어서 다른 것을 걱정하거나 책략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군사들이 많음을 시위하여 겁주어서,

우리 군사들의 사기를 싸워보기도 전에 꺾으려고 덤빌 것입니다."라 하였다.

 

<외廆>가 아직도 이를 믿지 않아,

 

요동의 <한도韓壽>가 <외廆>에게 말하길

 

"실독관은 큰 것을 믿고 기댈 생각이겠으나,

장차 우쭐한 병졸들이 처연해지면 군대는 엉성하여 질 것입니다.

이에 느닷없이 군병으로 기습하면, 준비 없이 우왕좌왕 할 것이니,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계책인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외廆>가 <한翰>을 도하(徒河)에 머물러 있으라고 허락하였다.

 

실독관은 이 소식을 듣고서 말하길

 

"<한翰>은 평소에 날래기로 이름이 있더니만, 과연 지금 성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다.

혹시라도 골칫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니, 먼저 빼앗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성이 충분히 크지 않음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라 하고는,

 

수천 기를 나누어 보내 <한翰>을 습격하게 하였다.

 

<한翰>은 이러할 것을 알고는 거짓 행위를 한 것이었다.

 

<단>씨 사자가 돌아가는 길에 말하길

 

"<모용한>은 우리에게 오래 된 골칫거리였습니다.

소식을 들으시는 대로 그를 치십시오.

우리는 이미 엄중한 병력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속히 진격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라 하였었다.

 

사자가 떠난 다음에,

<한翰>은 성 밖으로 나가서 매복을 두어 <우문>씨의 군대를 기다리게 하였다.

 

<우문>씨의 기병이 눈에 보이니 사자는 크게 기뻐하면서 걸음을 재촉하였다.

 

제대로 대비를 하지 않은 채 복병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니,

<한翰>이 두들겨 짓이기거나 사로잡으며 승승하여 빠르게 진격하면서,

몰래 사자를 보내 <외廆>에게 출병하여 큰 싸움을 벌이자고 말하였다.

 

<외廆>가 자기의 아들 <황皝>과 장사 <배억裵嶷>를 시켜

정예병을 끌고 전봉을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뒤따랐다.

 

실독관은 당초에 대적 준비를 하지 않았었고,

<외廆>가 다가오고 있음을 듣고는 놀라서 모든 병사를 나아가 싸우게 하였다.

 

전봉이 서로 부닥치자,

<한翰>이 1,000기를 거느리고 들입다 영내로 달려 들어와 불을 질러 태우니,

무리들 모두가 놀라며 걱정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대패하였고,

실독관은 가까스로 몸을 피하였다.

 

<외廆>가 무리들을 모조리 사로잡고 황제 옥새 세 개를 노획하였다.

 

<최비>가 이 소식을 듣고는 두려워하며,

자기 형의 아들인 <도燾>를 시켜 극성으로 가서 거짓 축하모임을 하게 하였다.

 

세 나라의 사신들 역시 도착하여 화친을 청하며 말하길

 

"우리의 본뜻은 아니었습니다.

<崔> 평주가 우리에게 그리 하라고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외廆>가 병사를 시켜서 <도燾>를 곁에 잡아다 세우니,

<도燾>는 두려워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외廆>가 <도燾>를 돌려보내어 <비毖>에게 이르길;

 

"항복하면 상책이고, 도망하는 것은 하책이다."라 하고는,

 

병사를 이끌고 사자의 뒤를 따랐다.

 

<비毖>는 수십 기만을 데리고, 가속은 버린 채, <고구리>로 도망하였다.

 

그의 무리는 모두 <외廆>에게 투항하였다.

 

<외廆>가 자기 아들 <인仁>을 정노장군으로 삼아 요동 관부에 진을 설치하니,

저자와 향리 모두가 옛날과 같이 평안하였다.

 

<고구리>의 장수 <여노자如奴子>가 하성(河城)에 진을 치니,

<외廆>가 <장통張統>을 보내 엄격하여 그를 사로잡고,

그의 무리 천여 가를 사로잡았다.

 

<최도崔燾>·<고담高膽>·<한긍韓恆>·<석종石琮>이

극성으로 귀부하여 객례로 대하였다.

<자치통감>

 

 

(동진 원제) 태흥(太興: 318-321년) 초,

세 나라(고구려,우문,단국)가 (모용)외를 쳤다.

 

(모용)외가 말했다,

 

“저들은 <최비崔毖>의 헛소리를 믿고 한때의 이익을 노려 까마귀가 모이듯이 하여

쳐들어왔을 뿐이다.

 

(저들은) 통일되어 있지 않은데다 서로 귀복(歸伏)하지 않으니

우리가 지금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

 

그러나 저들은 군(軍)이 이제 막 합쳐져 그 예봉이 매우 날카로워

우리가 속전(速戰)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만약 (지금 바로) 역격(逆擊)한다면 저들의 계책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편안히 기다리면 필시 의심과 두마음을 품게 되어

번갈아 서로 시기하고 방비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우리와 <최비>가 함께 휼계를 꾸며 자신들을 무너뜨릴까 의심할 것이고,

둘째로는 세 나라 중 한 나라가 우리에게 한 나라와 모책이 있을까 의심할 것이니,

저들의 마음이 저혹(沮惑,어그러지고 미혹됨)되기를 기다려

그 연후에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세 나라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자 (모용)외는 성문을 닫고 싸우지 않고는,

사자를 보내 쇠고기와 술로써 우문(宇文)(의 군사들)을 호궤하고 무리들에게

 

“<최비崔毖>의 사자가 저번에 왔었다.”

라고 크게 떠벌렸다.

 

그러자 두 나라(고구려와 단국)가 과연 우문(宇文)이

(모용)외와 한 편인 것으로 의심하고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실독관(宇文悉獨官)이 말했다,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으나 우리는 응당 단독으로라도 그 나라를 겸병할 것이다.

다른 나라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모든 군사로써 (극)성을 핍박하고 30 리에 걸쳐 영(營)을 늘어세웠다.

 

(모용)외는 정예군사(銳士)를 가려 뽑아

(모용)황(皝)에게 배속하여 선두에서 적진을 돌파하게 하고,

(모용)한(翰)에게는 정예기병(精騎)을 거느리게 하여

기병(奇兵,기습군)으로 삼아 우회해 곧바로 그(우문실독관의) 영(營)을 찌르도록 하고,

(모용)외(廆) 자신은 방진(方陣)을 치고 진격하였다.

 

(우문)실독관(悉獨官)은 그들의 무릿수를 믿고 방비하지 않다가

(모용)외의 군대가 이르는 것을 보고 바야흐로 군을 이끌고 이에 맞섰다.

 

전봉(前鋒)이 이제 막 교전을 시작했을 때

(모용)한(의 奇兵)이 자신의 영(營)으로 치고 들어와 불을 놓고 영(營)을 불태우자

그 무리들이 모두 놀라고 어지러워져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 마침내 대패하였다.

 

(우문)실독관은 간신히 몸을 피했으나 그의 무리들은 모두 붙잡혔다.

 

그의 영후(營候)에서 황제(皇帝)의 옥새(玉璽) 삼뉴(三紐)를 노획하고는

이를 장사(長史) <배억裴嶷>을 시켜 건업(建鄴)으로 보냈다.

 

<최비崔毖>는 (모용)외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질까 두려워하여

형자(兄子,형의 아들) (최)<도燾>를 (모용)외에게 보내 거짓으로 (승전을) 축하했다.

 

때마침 세 나라의 사자들 또한 (모용외에게) 이르러 화친을 청하며,

 

“(쳐들어 온 것은) 우리의 본의가 아니고, 최평주(崔平州)(평주자사 최비)가

(그리하도록) 우리를 가르쳤습니다.”라고 하였다.

 

(모용)외가 (최)도를 데리고 공격하며 포위한 곳을 보여주고는

군사들을 벌여놓고 그에게 말했다,

 

“너희 숙부(叔父)(최비)가 나를 멸하라고 세 나라를 가르쳐놓고는,

어찌 속임수를 쓰며 내게 와서는 축하하는가?”

 

(최)도가 두려워하며 수복(首服,자백)했다.

 

그러자 (모용)외는 (최)도를 보내주며 돌아가서 (최)비에게 전하라 하며 말했다,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이 하책이다.”

 

뒤따라 군대를 보내자 (최)비는 가실(家室,가족)을 버린 채

수십 기(騎)와 함께 고구려(高句麗)로 달아났다.

 

(모용)외는 그의 무리를 모두 항복시키고

(최)도와 <고첨高瞻> 등을 극성(棘城)으로 옮기고는 빈객으로 예우했다.

 

이듬해,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침범하자 (모용)외가 무리를 보내 이를 공격해 격파했다.

 

<배억裴嶷>이 건업(建鄴)으로부터 돌아올 때 황제가 사자를 보내

(모용)외를 감평주제군사(監平州諸軍事), 안북장군(安北將軍),

평주자사(平州刺史)로 임명하고 식읍을 2천 호(戶) 늘려주었다.

 

 

평주자사 <최비崔毖>와 우문부 단부와 공모하여 <모용외>를 공격코자한 고구려는

<선옥仙玉>과 <고경高卿> 두 장수만 잃었을 뿐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이 시기 <모용외>는 晉의 유민과 인재를 받아들여 막강한 신흥세력이 되어 있었다.

 

 

<극성(棘城)과 도하(徒河)>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