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하늘의 중심, 자미원(紫微垣)>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우리의 하늘을 잊어 버리는 줄도 모르며 통채로 잊어 버리고 말았다.
나침반과 시계의 대량 보급,
그리고 정보의 발달 등으로 하늘의 별에 의존하던 생활패턴이 바뀐 탓 때문일 것이다.
그보다는 민족의 역사와 정체성을 잃고 부터 하늘과 더욱 멀어 졌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하늘에서 내려 온 천손족이라 할 만큼
하늘은 우리들 정신문화의 바탕이었다.
600년전 조선조 초에 만들어진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지금 국보로 정해져 있다.
이 천문도는 고구려때 만들어진 것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돌에다 새겨 놓은 것이었다.
세계 최초의 천문도라 할 수 있다.
4000년도 훨씬 전에 천문만을 당담하는 ‘감성(監星)’이라는 관직이 있을 만큼
우리 선조들은 천문에 밝았고 하늘과 가까웠다.
고구려 고분안에는 온통 별그림이다.
선조들이 하늘의 별자리를 밝히고 있는 것은 땅에서 사는 우리들을 위해서 였다.
지상의 모든 변화는 하늘로 부터 온 것이라고 믿었다.
거칠고 험한 지상의 변화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하늘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농경과 삶의 기본 질서를 위해 바라보던 하늘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땅으로 그 이야기의 무대가 옮겨 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하늘의 반영이고 거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늘의 별자리를 땅에서 찾기 시작한다.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는 것,
지방의 관아 자리며 개인의 집까지 하늘의 별자리를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산이름이며 땅이름, 집이름까지 심한 경우는 사람의 이름에 까지
하늘의 별자리를 붙이기도 했다.
죽으면 뭍히는 소위 명당이라는 것이 하늘의 별자리를 그대로 흉내내고 있는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옛 유적을 조명하면서도
바탕에 깔려있는 별자리는 잃어 버리고
땅만을 보고 이해를 하려했고 이해를 시키려 했다.
제아무리 심층분석을 해봤자 반쪽 이상은 벗어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바탕에 깔려있는 하늘, 별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우리의 강산을,
그리고 선조들의 생각을,
그 유적과 유물의 깊은 뜻을 헤아리리기는 역부족일 수 밖에 없다.
선조들이 남겨놓은 우리의 유적을 천문을 바탕으로 해서 접근해 봐야 한다.
천문과 함께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고 잊어버린 우리의 별을 찾아 내야 할 것이다.
조선을 일으킨 태조가 개성에서 천도를 할때
자미원의 하늘이 그대로 땅에 내려와 있는 곳인 서울을 택했다고 했다.
서울 뿐 아니라 창덕궁의 배치나 경복궁의 배치,
근정전과 창덕궁의 후원(秘苑) 등은 하늘의 별자리를 그대로 본따 지은 것이라 했다.
서울과 고궁 그리고 삼각산 등을 다시 찾아
하늘의 별자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천문공부의 시작이 될 것이다.
<삼각산은 北極星, 남한산성은 北斗七星>
압록강을 건너 바로 북쪽 땅,
지금은 중국의 땅이 되어 버린 옛 고구려 땅 지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고분속의 벽화를 보면 하나같이 북두칠성과 해와 달, 28수가 가득 그려져 있다.
시조들의 탄강 신화나 설화,
그리고 우리의 기층 신앙에는 아직도 북두칠성이나 남두칠성 또 28수 별이야기가
바닥에 깔려 있다.
모두가 하늘의 별과 관련된 것인데
우리는 애써 이를 외면하려고만 하고 있고 누구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있다.
서울이라고 하는 땅덩어리도 예외는 아니다.
고려왕조를 붕괴시키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지금의 서울로 도읍을 옮길때 그 첫째 조건이 하늘의 중앙,
자미원 하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가 초미의 관심이었다고 했다.
삼각산을 주산으로 하는 서울의 지형만큼
하늘의 자미원을 쏙 빼낸 것 같은 곳은 드물다.
서울을 위해 자미원이 그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도 했다.
북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려면 포천, 동두천, 파주, 양주, 고양 등을 이루고 있는
높고 낮은 산자락 관문을 통해야 한다.
이런 고을이 서울의 북쪽 외곽을 지키고 있다.
또 포천 남쪽 향적산 아래로 주엽산, 천보산, 수락산, 검암산,
망우리를 이어 아차산이 한강에 발을 담그며 서울의 동쪽을 에워싸고 있다.
이들 산자락을 가평 북쪽의 운악산에서 남쪽으로 동학산, 금단산, 천마산, 운길산,
적갑산, 팔당에서 끝나는 예봉산까지 긴 산자락이 그 동쪽 외곽을 애워싸고 있다.
자미원의 중심 북극오성의 동쪽을 애워싸고 있는 별들을
지상에 그대로 가져다 놓고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또 궁궐 오른쪽 가까이를 감싸고 있는 백련산, 인왕산, 안산을 노고산, 국사봉, 구파발,
서오릉, 수색이 또 이 산들을 이중으로 감싸고 있는 것도 자미원 하늘 그대로이다.
예부터 한 국가가 도읍을 정하는 요구 조건의 첫째가
하늘의 중심인 자미원이나 태미원 천시원 등 하늘의 형국에 부합되어야 하고
지리적으로는 산과 강의 기가 모인 곳,
또 국토의 중심, 교통의 편리함, 외침으로 부터 방어능력을 갖춘 곳이라야 한다 했다.
일단 서울이란 곳에 도읍을 정하고는 궁궐을 어디에
어느 방향으로 세울 것인가를 놓고 정도전과 무학대사에 얽힌 이야기는 유명하다.
서울이라는 지형이 하늘의 중심인 자미원 자리를
그대로 옮겨다 놓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견해가 일치됐다.
문제는 대궐을 어떻게 앉히느냐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정도전은 백악(白岳)을 중심으로
임좌병향(壬坐丙向․북서쪽을 등지고 남동으로 향한 방향)을 주장했다.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유좌묘향(酉坐卯向․서쪽을 등지고 동으로 향한 방향)을 주장했으나
이성계는 정도전의 말을 따른 것으로 되어 있다.
무학이 탄식한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신라 명승 의상대사의 산수비기에 의하면
도읍을 정할 때 중의 말을 들으면 국운은 연장할 것이나
만약 정씨 성을 가진 자가 나타나 시비를 하면 5대가 안가 찬탈의 화가 생기고
200년 내에 외란의 액을 입는다'고 하였으며
'이 비기는 지금까지 한마디도 틀린 바가 없다'고 했다.
무학의 말은 사실 그대로 적중했다는 얘기이나
무학의 주장대로 유좌묘향으로 궁궐을 앉혔다면
어떻게 돼었을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문제는 지금 경복궁이 서있는 방향이 정도전이 주장한 대로 임좌병향이 아니고
자좌오향(子坐午向․정북쪽을 등지고 정남으로 향한 방향)이라는 점이다.
불에 탄 경복궁을 중건 증축하는 과정에서 이 방향을 택했다느니
사사건건 명나라의 눈치를 보는 조선조가 천자만이 택할 수 있는
자미원 북극성의 방향인 자좌오향을 그대로 썼다는 것을 숨기고
임좌병향으로 보고를 했다느니 여러 설이 있지만
지금의 방향이 정확하게 자미원의 북극성의 방향이라는 데는 의견이 없다.
옛 전적이나 천문관계자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서울을 에워싸고 있는 지형을 두고
자미원 별자리를 그대로 지상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 감탄을 한다.
그래서 서울을 하늘이 내려준 땅이라고 입에 침이 마른다.
지난 91년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향토 서울』50호에서
내무부연수원 김동규(金東奎)씨가 쓴 논문
『서울의 풍수지리-서울주위의 산세와 천성(天星)을 비교하여-』는
‘삼각산은 백두산으로 부터 종계(宗系)를 이어 받은 묘향 송악 등
삼산의 하나로 형세도 신령스럽지만
내용면에서도 생기를 모은 산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서울의 지형지세를 자미원국에 부합시키고 삼각산을 북극성과 일치시켜 말함에는
여운이 없다’고 자신있게 논증을 하고 있다.
옛 선조들의 생각은 하늘에서는 성수(星宿)로 분별되고 땅에서는 산천으로 분류하여
기는 땅에서 행하고 형세(形)는 하늘에서 비춰준다.
그러므로 하늘에는 모양(象)이 있고 땅에는 형세(形)가 있으니
아래 위가 서로 기다리고 상응하여야만이 하나의 예(禮)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봤다.
도성의 모양은 하늘과 부합되어야 오래가고 흥성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경복궁은 북극5성의 혈(穴)중 혈>
경복궁이나 창덕궁 후원등 궁궐과 별자리에 관한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서울을 형성하고 있는 주변의 지리와 자미원 별자리의 관계부터 먼저 살펴 본다.
자미원국은 가장 중심별(尊星)인 북극성을 축으로 하고
주위의 별들은 북극성을 보호하듯 겹겹이 감싸고 있다.
따라서 이 북극성이 서울의 어디냐하는 것에 초점이 모아 진다.
서울에서는 삼각산이 북극성이며
도봉산과 남장대 북악1봉 북악 2봉을 북극5성이라는 것이 김씨의 생각이다.
지금 경복궁이 있는 자리는 삼각산 주맥을 잇는 보현봉 백악의 바로 아래에 있다.
그래서 경복궁이 북극5성의 제일 끝별인 태자성(太子星)이라고도 하고
태자성의 바로 아래자리에 위치한다고도 한다.
말하자면 혈(穴)중의 혈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혈은 크게 보아 서울의 4대문 안을 전부 포함하기도 하지만
좁게는 경복궁, 창덕궁 자리가 어머니의 자궁, 자궁 속의 아기자리로 보고 있다.
한배달 역사천문학회 노중평부회장은
북극5성 중 태자를 바로 단군 왕검의 별로 보고 있다.
그러니 대를 잇는 임금들이 바로 왕검의 자손이라는 얘기다.
아무튼 북극성을 비롯한 북극5성 주위에는
대단한 위력을 가진 큰 별들이 한치의 빈틈없이 겹겹이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다.
북극성의 북쪽을 감싸고 있는 자미원 별중에서도
최전방 외곽을 맡아 있는 대표적인 별들이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의 숙소라는
전사(傳舍)의 검은 색 아홉개 별과 문운을 주관하는 별로
북극성의 머리를 가리는 우산과 같은 일곱 개의 별 화개(華盖)이다.
그 아래로 화개의 자루에 해당하는 강(杠)이라고 부르는 아홉 개의 별,
4계절과 24절기를 맡아 있는 정육각형의 육갑(六甲) 여섯 개의 별,
천자가 제후를 만날 때 등 뒤에 치는 병풍인 오제좌(五帝坐) 다섯 개의 별,
왕비와 후궁이 살고 있는 궁궐인 구진(勾陳) 여섯개 별 등이다.
그리고 북극성 전후좌우에서 밀접 경호를 하고 있는 사보(四輔) 네 개의 별이 있다.
사신들의 숙소, 전사라는 전방위를 맡아 있는 것은
동북쪽의 가평 운악산에서 시작한다.
운악산이 전사 아홉 개 별중에서 동북방의 끝쪽이다.
그 서쪽으로 천주산, 소요산, 마차산, 감악산, 석적산 등이 외곽을 가로 막아 있다.
전사별 남쪽 두 번째 방어벽의 형국인 화개는 동쪽 포천의 천보산에서
서쪽으로 불곡산, 계명산, 상운산, 양주와 파주의 한고산을 잇는 산자락이다.
화개의 아래에서 북극성인 삼각산을 밀착 경호하고 있는 사보성을
서북쪽 한고산 아래쪽 벽제 송추 양주군 주내면의 호명산 등으로 보고 있다.
사보성과 화개사이 즉 도봉산 서북쪽 벽제와 송추의 머리를 맞대고 있는
크고 작은 산들이 강, 육갑, 오제좌, 구진성 등이다.
물샐틈없이 도성의 북쪽을 에워싸고 있다.
동쪽은 어떤가.
가평의 운악산에서 남쪽으로 동학산, 검단산, 천마산, 묘적산, 운길산에서
분원 앞의 한강까지 이어지는 산들이 우추성(右樞星).
외곽에 포진하고 있는 풍년과 흉년을 주관하는 팔곡(八穀) 여덟 개 별,
임금의 뜰이라는 내계(內階) 여섯 개 별,
임금의 덕을 널리 베풀고 칠정(七政)을 조화롭게는 삼공(三公) 세 개의 별,
하늘의 여섯 개 부서인 북두칠성의 오른쪽위에 있는 문창(文昌) 여섯 개 별자리이다.
또한 이들 별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 가평 동학산 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불정산, 향적산, 주엽산, 천보산, 수락산, 검암산,
망우리를 지나 한강변 아차산까지가 좌청룡인 우추 아홉 개의 별이다.
삼각산 남쪽 남장대에서 서쪽으로 구파발 서오릉 망월산에서
수색 마포나루 성산까지가 좌추(左樞) 여덟 개의 별이고
좌추는 또 인왕산에서 남쪽을 잇는 산줄기를 튼튼히 방비하고 있다.
우추성 외곽으로 삼각산 서쪽으로
상장봉, 노고산, 국사봉, 원당, 한강변, 행주산성까지 한줄기가 우람하게 감싸고 있고
그 서쪽에 현달산, 고봉산, 일산 등 고양시가 밖에서 호위하고 있는 것이다.
좌추성 밖에 있는 성대한 음식을 주관하는 천주(天廚) 여섯 개의 별,
임금의 선봉장인 천봉(天棓) 다섯 개의 별 등이다.
도성의 남쪽을 맡아 있는 남산은 북극5성의 끝,
태자성 남쪽에 있는 천자가 잠을 자는 침소로
또 잔치를 벌이며 쉬는 곳인 검은 색의 천상(天床) 여섯 개의 별이다.
남산은 한강 너머에 있는 조산(朝山) 즉 관악산의 호위를 받고 있다.
별자리는 천상의 남쪽에 있는 무운을 주관하는 붉은 별인 천창(天槍) 세 개의 별이다.
그러면 우리 민족의 기층신앙을 이루고 있는 북두칠성은
서울의 어느자리로 비정하고 있는 것인가.
성남시와 하남시 송파구 강동구 일대의 주산으로 백제의 도읍지인 남한산성군이다.
삼각산, 관악산, 남한산성은
서울이라는 도읍에 있어서 절대로 빠져서는 않될 삼현급(三賢級)의 산이다.
북두칠성의 쪽박안에 있는 감옥별인 네 개의 짙은 검은 색 별 천리(天理),
임금을 보필하는 재상별인 한 개의 별인 상(相),
대장이나 대신의 별인 태양수(太陽守) 한 개의 별,
음양을 조화롭게 하는 삼공(三公) 세 개의 별,
귀인을 가두는 감옥별인 천뢰(天牢) 여섯 개의 별,
내시의 별이라는 세(勢)라고 불리는 네 개의 별 등이 칠성과 함께 이곳에 펼쳐져 있다.
이 일대에 사는 사람들은 칠성의 보호를 받는다고 보면 된다.
북극성을 위해 자미원의 수많은 별들이
동서남북 상하에서 철두철미하게 에워싸며 보호막을 치고 있듯
서울이라는 도성도 하늘의 자미원 못지않게
상하좌우로 두겹 세겹으로 에워싸여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창덕궁 후원에 내려 온 자미원>
우리가 흔히 부르는 秘苑은 비원이 아니고 후원이라고 불러야 제대로이다.
창덕궁 북쪽에 있는 자미원이라는 뜻이다.
일본이 이 나라를 강점했을 때 저들 마음대로 대궐을 뜯어 고치고
마음대로 이름을 붙인 것이 비원이다.
그 후원에 가보면 연못을 만들고 정자를 짓고 폭포를 만드는 등
인공적으로 정원을 만들면서 하늘의 별자리를 흉내내고 있음을 금새 눈치 챌 수 있다.
북극오성이며 천추성, 북두칠성 등
하늘의 궁궐인 자미궁(紫微宮)을 그대로 이곳에 내려다 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 쓴 글, ‘서울은 하늘의 중심 자미원’이라는 글을 보고
몇몇 식구들이 질문을 던져 왔다.
“무슨 의도에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자미원은 도대체 무슨 뜻”이며 “태미원 천시원은 무엇을 하는 것”이냐는 등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이해가 될 수 있게 할 수는 없느냐”고
애교있는 항의를 보내 왔다.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 카페를 만들었고
하늘에, 천문에 깊이 들어 가고 싶어 하는 식구들이라면
기초적인 용어는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우리가 관심을 보이는 하늘의 별에는
그토록 찾아 헤메던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소롯이 담겨 있다는 것이 소중하다.
우리의 별을 모르고 민족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고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내가 내노라는 어떤 민속학자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는 만큼, 눈 높이 만큼 보인다”고….
그러면서 그는 고인돌 위에 패여 있는 7개의 구멍 자리를 보고
무속의 하나일 뿐 별다른 의미는 없는 것이라며
주목할 만한 유적은 아니라고 애써 지나치고 있었다.
고인돌이 한자로 쓰여지지 않았으니
단순히 ‘고이고 있는’, ‘받치고 있는’ 뜻의 돌로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고’와 ‘인’이라는 우리 말의 뿌리, 어원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고’가 무슨 뜻인지 또 ‘인’이 무슨 뜻인지 가름이나 했을까.
‘고’ ‘인’ 돌위에 패어진 북두칠성과 남두칠성 그리고 직녀성 등
빽빽하게 곰보처럼 패어있는 그 구멍자리들을 이해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정신과 사상, 그리고 유구한 문화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별자리를 모르고도
언제까지 그렇게 큰소리 칠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아무튼 선조들은 그들이 살고있는 곳에 가급적이면 하늘을 옮겨다 놓으려고 했다.
대궐의 노른자위, 인정전은 물론이고 궁궐 속의 많은 전각이나 정자, 정원,
또 장식물인 石物(석물), 심지어 실개천의 물길이나 후원의 오솔길까지,
그 모양이나 꾸밈새가 민족의 기층신앙인 북두칠성을 비롯한
하늘의 별자리를 바탕에 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천궁궐이 곧 구중궁궐>
대궐을 구중궁궐이라고 했다.
문과 담이 겹겹이 둘러 쳐저있는 깊은 곳에 자리한 궁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구중궁궐의 뜻은 하늘에서 찾아야 한다.
가장 높이 있는 하늘을 상원(上垣)이라 하고 이를 태미원(太微垣)이라 했다.
태미원의 아래에 있는 하늘이 바로 하늘의 중심이 되는 중원(中垣),
자미원(紫微垣)이다.
자미원의 아래에 있는 하늘이 천시원(天市垣)이다.
하늘의 중심 자미원에 있는 중심별을 북극성, 天樞星(천추성)이라 부른다.
이 천추성을 하늘의 임금으로 天皇大帝(천황대제)라 했다.
천황대제를 호위하고 있는 왼쪽의 별자리, 좌추성 8개별과
오른쪽의 별자리, 우추성 9개별, 또 그 위를 둘러치고 있는 華蓋星(화개성) 일곱별과
句陳星(구진성) 여섯 개 별 등이 측근에서 북극성을 호위하고 있다.
그 바로 옆에서 북두칠성과 그 약간 아래 천시원이
쪽의 동서남북으로 28수가 또 호위를 하고 있다.
북극성인 천추성이 있는 하늘의 중심을 하늘의 궁전, 紫微宮(자미궁)이라 했다.
자미궁을 또 九天(구천)의 궁궐이라 했다.
구천궁궐이 하늘의 궁이라면 구중궁궐은 땅의 궁궐이다.
하늘의 자미궁을 땅에 그대로 가져왔다면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중심지 창덕궁 인정전도 작은 자미궁이다.
그렇게 꾸며 놓은 것이 조선조의 대궐이다.
창덕궁의 후원, 후원에서도 가장 북쪽 끝에 있는 옥류천쪽도 구천의 세계,
자미궁을 땅에 내려다 놓고 있다.
세계에 자랑하고도 남을 조경, 천문이 있는 조경이다.
‘모른다는 것은 죄는 되지 않을 지언정 자랑은 아니라’는 선조들의 글귀가 생각난다.
<세계적인 걸작, 후원의 옥류정>
후원 중에서도 가장 백미는 인정전 앞에서 왼쪽으로 난 큰 길을 따라
북쪽으로 꾀나 올라가면 취규정(聚奎亭)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그 북쪽 언덕 아래로 보이는 옥류천(玉流川)이 흐르는 계곡 일대가 바로 그 곳이다.
취규정이라는 현판의 글 뜻이 서방 7수중 규성(奎星)으로
文(문)과 學(학)을 관장하는 별이다.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의 영혼이 이 별에서 왔다고 하는
서양별 이름으로는 안드로메타라는 별이다.
또 취규정에서 보면 북쪽으로 난 가파른 언덕 아래에
옥류천 일대를 죄다 감싸고 있는 듯한 翠寒亭(취한정)이 있다.
취한정 왼쪽에 있는 소요정(逍遙亭)에 와서 뒤 돌아보면
산등성이에 우뚝 서있는 정자를 취규라고 한 뜻을 알 수 있다.
소요라면 한적하게 산보한다는 뜻이다.
어디를 거닌다는 말인가.
소요의 요자는 바로 북두칠성을 뜻하는 璇, 璿(선)과 같이 쓰는 瑤,
遙(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 북쪽 하늘, 우리가 죽으면 ‘칠성 판을 지고 가야’하는,
영혼의 고향인 북두에서 마음 편하게 산책을 한다는 뜻도 된다.
소요정 바로 코앞, 서쪽 산비탈 아래에 샘 하나가 보인다.
대궐의 많은 샘중에서 가장 물이 좋다는 어정(御井), 임금샘이다.
1636년 인조임금이 팠다.
바위 속에서 솟아오르는 석간수가 동쪽 바로 옆에 직경 30cm정도로 얕게 파놓은
둥근 돌확에 일단 고였다가 동쪽으로 흐르도록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
서쪽에서 솟아나 동쪽으로 흐르는 서출동류하는 물이다.
옛 사람들은 하늘의 정기와 별의 기가 서린 정화수(靜華水 · 井華水 · 甘露)는
하늘의 문이 열리는 子時(밤 12시)에 북두칠성이 내려 준다고 보고 있다.
하늘이 먼저 물을 만든다는 천일생수(天一生水)이다.
밤 12시께 북두칠성의 국자부분이 땅을 향해 기울 때
국자 속의 하늘 물(紫井, 天井, 遙井)이 이 땅에 흘러내리는 것으로 보았다.
우리의 역사서 『한단고기』에 인류의 조상인 나반과 아만이
하늘의 게시를 받아 정한수(明水, 玉水) 한잔을 나누어 마시며 혼례를 한 물이다.
하늘(北)에서 땅(南)의 제일 높은 곳(天池)에 내려온 이 물은
서쪽 제일 높은 곳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봤다.
바로 이 같은 생각이 이 어정의 물을 동쪽으로 흐르도록 해 놓았다고 보는 것이다.
널따란 바위에 활 弓(궁)자 모양의 도랑을 파고
북두칠성과 천일생수하는 자미원의 모양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절묘하다.
여기다 물이 지나가는 도랑의 한 복판에
높이 2m가량의 우람한 뫼 산(山)자 모양의 바위가 솟아올라 있다.
바로 泰山(태산)일 것이다.
역부러 만든 것인지 원래 그렇게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손질을 한 흔적을 찾기 힘들다.
태산을 휘돌아 흐르도록 물길을 얕게 파고
소요정 바로 눈아래에다 뫼 산자 높이 만큼의 폭포를 또 파내
흘러오는 물이 그 아래로 떨어지도록 연출을 해놓았다.
그렇게 생긴 자연도 절묘하지만 그 자연을 절묘하게 손질을 한 것이 더욱 돋보인다.
바위 몸통에 음각으로 새겨진 ‘옥류천(玉流川)’이라는 세 글자는
16대 인조(재위 1623~1649) 임금이 직접 썼다.
그위에 1690년 19대 숙종(재위 1674~1720) 임금이 지은 오언시가 눈길을 끈다.
흐르는 물은 삼백 척 멀리 날아(飛流三百尺)
구천에서 떨어지는 물(遙落九天來)
흰 무지개 일고(看是白虹起)
온 골짜기에 천둥 번개로다(翻成萬壑雷)
시 속의 遙(요)는 북두칠성의 별칭이고 구천은 북극 자미원일 것이다.
고작 높이 2m 가량의 작은 폭포지만 그 위에 버티고 앉은 바위산을 태산으로 본다면
‘날아 흐르는 물 삼백 척’이란 표현이 실감이 난다.
축소된 조형물이지만 이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소요정이 바로 자미원인 것이다.
여기서 북쪽 아래로 ‘임금샘’인 북두와 구천을 내려다 보며
땅의 세계를 조망하겠금 해 두었다.
하늘의 신선이 된 기분으로 실눈을 뜨고 봐야 옥류천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상상력을 갖느냐 이다.
임금샘에서 솟아 오른 물이 펀펀한 암반에 활처럼 굽은 물길을 따라
태산의 북쪽을 돌아 동쪽으로 또 남쪽으로 기분 좋게 흐르는 모양이
경주의 포석정을 염두에 둔 분위기 같다.
또 한번 유심히 봐야 한다.
소요정에서 서북쪽 乾(건)방향,
임금샘 어정이 있는 바로 북쪽에 청의정(淸漪亭)이라는 아담한 정자가 또 하나 있다.
청의란 맑고 잔잔한 물결이라는 뜻이다.
또 이 漪(의)자가 물놀이를 한다는 뜻이다.
푸른 물에 발을 담그고 놀 듯, 물장난을 하는 그런 모양의 뜻인 모양이다.
청의정은 손바닥만하게 만들어 놓은 정방형의 논(水田)속에 앉아 있다.
논속에다 정방형으로 돌을 깔고
그 위에는 대궐에서는 유일하게 볏짚으로 상투를 틀어 놓듯 이엉을 한 모양이
정이 뚝뚝 흘러 넘친다.
이 정자가 앉아 있는 한 뼘 논에서 백성들이 하듯 임금이 직접 논을 메고 가꾸고 하여
추수한 볏짚으로 해마다 가을이면 이엉을 고쳐 이었다.
정자의 바닥은 방형, 지붕은 원형, 서까래는 삼각을 8개로 한 8각형으로
민족의 기층사상인 삼신신앙의 바탕인 원 · 방 · 각을 표현해 놓았다.
남쪽 눈앞의 북두칠성의 국자형 천지에서 물놀이를 하는 듯 하다고도 하고
자미원의 남쪽에서 서쪽으로 하여 동쪽 하늘 끝을 가로 지르는
거대한 은하수에 발을 담구고 노는 모양이라고도 했다.
그보다는 팔괘의 시작점인 서북쪽 건방향에
국가 기간산업이자 덕을 일으키는 근본(農者興德之本)인
농사를 의미하는 정자와 수전을 만든 것일 것이다.
또 있다. 소요정에서 보면 정 북쪽에 삼각산 인수봉이 있다.
삼각산의 정 남향 소요정의 북쪽, 청의정의 동쪽 옆에 8각형 절구 모양의 돌확이 있다.
돌확의 8각이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四正(사정),
서북 서남 동북 동남을 가리키는 四維(사유)를 정확히 표시하고 있다.
돌확을 중심으로 왼쪽에서 오는 물길과 오른 쪽에서 오는 계류가
돌확 바로 아래 남쪽에서 합쳐 태산쪽으로 흐르게 해 두었다.
이 돌확이 자미원의 중심별인 북극성이자 천추성으로 보인다.
돌확이 있는 동쪽, 소요정에서 보면 동북 艮(간)방향에 묘하게 또 한채의 정자가 있다.
태극정(太極亭)이다.
하늘과 땅이 아직 나뉘어지기 전의 세상, 만물의 원시를 그린 것이 태극이다.
이 땅이 앉아 있는 곳을 동북 艮(간) 방향이라고 한다.
바로 하늘과 땅의 운행을 의미하는 태극을 그려 이 땅을 표현하고 있다.
태극기가 오늘의 국기가 되기 이전에 이 땅을 태극으로 표시해 둔 것이다.
태극정에서 어정이나 청의정으로 가려면
천추성, 돌확의 남쪽으로 흐르는 옥류천 작은 도랑에 걸쳐진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돌다리 남쪽 아래 물속에 네모난 방형의 돌확이 있다.
가운데 물 괴는 곳은 둥근 원형으로 태극무늬가 또 하나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소요정을 정점으로 삼각산이 있는 정북에 천추성 8각의 돌확,
생명의 시원인 물이 솟아나는 서쪽 兌(태) 방향에 임금샘 어정이,
그 위쪽 서북쪽 乾(건) 방향에 논(水田)과 청의정(淸漪亭)이,
대궐인 창덕궁이 땅이 앉아 있는 동북쪽 간방향에 태극정(太極亭)을,
또 동쪽에 취한정을 그 중심자리 자미원에 태산과 북두칠성을
절묘하게 배치한 조경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石年>
*비원에서 가장 좋은 물이 솟아나는 御井(어정). 1636년 인조가 판 것이다.
어정에서 흐르는 물은 동쪽 아래 둥글게 판 돌확에 일단 모였다가
삼각산을 돌아 폭포로 흘러 떨어진다.
북두칠성에서 흘러내린 정화수가 어정에 고여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모양이다.
오른쪽의 정자가 소요정.
소요정에서 본 옥류천의 폭포와 바로 앞에 있는 태산.
왼쪽 어정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태산의 뒤를 돌아 크게 弓(궁)자를 그리며
폭포를 이루고 있다.
태산에 음각된 인조임금의 글씨 옥류천과 숙종임금이 지은 오언시.
<왼통 별자리,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은 하늘의 중심, 자미원의 한 가운데에 있는 북극성이다.
대궐이 서있는 자리는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를 고루 갖춘
나라안의 대표적인 명당자리라 할 것이다.
한 왕조의 중심자리이니 최고의 명당을 골랐을 것은 물어 보나 마나이다.
명당자리를 고를때는 그 땅이 하늘과 어떤 관계인가를 맨 먼저 따진다.
조선을 개국하고 그 궁궐을 삼각산 남쪽을 택했을 때
삼각산이 북극성의 자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궐을 구중궁궐이라 한다.
문과 담, 또 전각이 겹겹이 둘러 쳐저있는 깊은 곳에 자리한 궁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구중궁궐의 원뜻은 하늘에서 찾아야 한다.
하늘의 중심이 되는 자미원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별이 북극성, 즉 천추성이다.
이 천추성이 하늘의 임금으로 천황대제, 구천상제라 한다.
이 천추성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곳을 자미궁, 하늘의 궁전이라 한다.
자미궁은 제후 격인 28수(二八宿)라는 경성(經星)이
또 하늘의 사방을 맡아 호위하고 있다.
28수는 28수대로
해와 달, 목· 화· 토· 금· 수성의 7개 별인 칠정(七政)의 호위를 받고 있다.
하늘의 많고 많은 별이 천추성을 겹겹이 호위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자미궁을 구천(九天)의 궁궐, 하늘의 궁궐이라면 구중궁궐은 땅의 궁궐이다.
광화문 앞, 근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화강석 월대가 펼쳐지고 그 위에 근정전이 우람하게 서 있다.
남쪽을 보고 있다.
근정전의 뒤, 북쪽은 삼각형 모양의 백악(白岳)이 호위를 하듯 서있다.
남쪽의 일곱 계단을 오르면 사방에 돌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동서남북 계단으로 통하는 월대의 문로주에
화강석으로 12지상(十二支像)의 동물 한쌍이 각각 서로 마주보고 있다.
사방신(四方神)과 십이지상들이다.
사방신의 하나인, 청룡은 동쪽을 지키는 신령으로 동방 별자리 이름이다.
동방의 일곱별인 각 항 저 방 심 미 기의 총칭이다.
동쪽 방위의 목의 기운을 맡은 태세신(太歲神)을 상징하는 용의 모습이다.
백호는 서쪽 일곱 별인 규 루 위 묘 필 자 삼을 거느리고 있다.
서쪽 방위의 금의 기운을 맡은 태백신(太白神)으로 범의 형상으로 했다.
주작은 남방을 지키는 신령으로 남쪽 일곱별인 정 귀 유 성 장 익 진을 가리킨다.
남방의 불기운을 맡은 염제신(炎帝)으로 붉은 봉황의 형상이다.
현무는 북쪽 일곱 별인 두 우 여 허 위 실 벽의 총칭이다.
북쪽 방위의 물 기운을 맡은 태음신(太陰神)을 상징하는 거북모양을 하고 있다.
십이지는 각 방위를 지키는 열두 신장(神將)이다.
북쪽으로부터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남쪽에서 말로부터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등 신장을 세워
근정전, 천추성을 호위하고 있다.
<근정전 바닥은 하늘색 玄>
근정전 안을 들여다 본다.
바닥에는 흙을 구운 방전을 깔았다.
넓은 내전 바닥이 모두 거무스름한 색이다.
북쪽하늘의 색깔인 검색, 현(玄)의 색깔이다.
왕실에서 돈이 없어 백관을 거느리고 나랏일을 보는 가장 중요한 대전의 바닥을
아무 멋대가리도 없는 거무스름한 색깔의 전돌을 깔았을까.
마루 바닥 중간 중간에 하얀 주초석이 놓이고 붉은 색 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
내전을 장식하고 있는 색깔을 눈여겨 보면
북두 자미원을 상징하는 색깔인 검붉은 색, 자주 색, 비취색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근정전을 오르는 돌계단의 소맷돌에 새겨진 구름무늬가
이미 하늘 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니 근정전은 그야말로 구천의 하늘이다.
대전에서도 임금이 앉아 있는 용상으로 오르는 계단과 단의 주위도
구름 문양 일색일 것은 물어보나 마나이다.
<일월오악도는 북극성의 화개성>
임금의 용상 뒤로 해와 달이 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청록색 다섯 봉우리의 산과 쏟아지는 두 줄기 폭포,
붉은 소나무, 푸른 물결이 뚜렷이 나타난다.
「오봉산일월도(五峰山日月圖)」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 한다.
대전의 용상 뒤는 물론이고 임금이 앉은 자리 뒤에는
어디에나 둘러 쳐지는 병풍 그림이다.
임금을 상징하는 수많은 장식물이 있지만
이처럼 임금 가까이에 따라 다니는 그림도 드물 것이다.
임금이 과거 시험장에 나가 앉을 때도 그 뒤에는 의례 이 병풍이 둘러 쳐지고
거실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자미원 북극성 북쪽을 언제나 병풍처럼 가리어 주고 있는
화개성(華蓋星) 7개의 별일 것이다.
하늘에 해와 달이 떠 있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있다.
이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면
몇 마디의 말로서는 표현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세계가 펼쳐져 있다.
쉽게 풀이하면 해와 달이 있으니 음양이고 산이 다섯 개가 있으니 오행이다.
민족의 기층사상인 천신 사상을 보여 주고 있다고 봐야 한다.
해, 달, 산, 소나무, 파도 등은
왕실의 번영과 융성을 칭송하는 상징물로 이해할 수 있다.
임금을 칭송하는 노래인 시경(詩經)의 천보(天保)에
「산과 같이, 해와 같이, 달과 같이, 소나무와 같이…」
왕권의 무궁한 발전과 융성을 이들에 비유해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다섯 산을 자세히 보면
유독 가운데 산봉우리를 다른 산봉우리보다 우람하고 크게 그려 놓았다.
오악의 중심에 있는 산은 임금, 나라의 수도를 상징한다.
대궐의 북쪽을 감싸 안고 있는 삼각산을 뜻한다고 했다.
오봉산이란 우리나라 동서남북에 위치한 주산을 말한다.
동쪽에 금강산, 서쪽 묘향산, 남쪽 지리산, 북쪽 백두산, 중앙에 있는 것이 삼각산이다.
조선 왕실의 주산은 민족의 정기를 이어 받았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백두산이 아니라 서울의 북부, 즉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삼각산이 바로 주산이라는 것이
'유적에 나타난 북두칠성'(97년 도서출판 백영사刊)의 저자 노중평씨의 시각이다.
일월오악도에 삼각산을 크게 그려야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조선의 대궐이 삼각산을 주산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경복궁이나 창덕궁 등 임금의 용상이 있는 자리가
바로 삼각산의 정기가 내려꽂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각산은 또 북두칠성의 기가 바로 내려꽂히는 곳이다.
'칠성주(七星呪)'에
북두칠성이 있는 곳을 ‘상조금궐 하복곤륜(上照金闕 下覆崑崙)’이라 했다.
위로는 금궐을 비추고 아래로는 땅의 중심인 곤륜을 비추는 곳에 있다고 했다.
곤륜산은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땅의 중심이라고 했다.
이땅의 곤륜은 바로 삼각산이라는 것이 선조들의 시각이었다.
일제의 강점기부터 「천 지 인」이며 「해 달 북두」,「삼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삼각산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북한산으로 둔갑해 버렸다.
“삼각산이 아니다. 북한산으로 불러야 한다.”
시키면 시키는 데로 잘 길들여진 민족이 아니라면
삼각산의 이름은 다시 불려져야 한다.
일본은 이 땅을 강점했을 때 조선의 진산인 삼각산을 빼앗아 버렸다.
중앙청을 지어 경복궁을 누르고,
서울의 안산인 남산(木覓山)에 신사(神社)를 지어
일본의 기운을 이곳에 끌어들이려 했다.
총독의 관저를 경복궁의 뒤에 짓고 관저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켰다.
앞뒤로 나라의 숨통을 죄려는 속셈에서 였다.
말하자면 삼각산에 모이는 정기,
즉 동서남북에 배치된 백두산과 묘향산과 금강산, 지리산에서 흘러오는
이 나라의 정기를 삼각산에서 질식시켜 버리자는
정략적인 음흉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임금들은 삼각산을 진산으로 여겨 신성시했다.
일본은 이 진산의 기를 왜 그토록 기를 쓰고 누르려고 했던 것일까.
조선이라는 땅은 동북쪽 간방(艮方)에 앉아 있다.
동북 간방은 북극성과 천추성이 관장하는 곳이다.
북극성과 천추성의 성기(星氣)가 언제나 나라의 중심이 되는
산봉우리인 삼각산의 주봉인 인수봉을 향하여 떨어져 내린다고 보고 있다.
북두칠성은 오랜 옛적 상고 때부터 민족의 별로 삼아 왔다.
모든 것을 칠성을 중심으로 이해하려 했다.
인간의 모든 길흉화복이 칠성이 주관한다고 봤다.
인간 삶의 길흉화복 뿐 아니라
북두칠성에 있는 삼신할머니로부터 명줄을 받아 어머니 태에 인연을 얻어 태어난다.
죽으면 관 바닥에 칠성을 그려 넣고 그 칠성판에 누워 북망산천으로 간다는 생각이다.
북망산천이 있는 북두의 구천세계에서 살다가
다시 명을 받아 지상에 환생하게 된다고 믿었다.
생명을 창조하는 북두칠성에 삼신할머니가 있는 이상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이 옛 선조들의 생각이었다.
칠성신앙의 뿌리는 깊고 깊다.
북두칠성은 하늘의 모든 별, 동서남북 사방 28수의 운행을 관장하는 별이다.
이 별의 기가 떨어지는 신산(神山)이라면
이 땅에서 가락, 고구려, 백제 세나라가 멸망할 때마다
일본 땅으로 쫓겨간 망국의 후예인 일부 일본인들에게도 신산이 될 수밖에 없다는
그 숙명성이 일본으로 하여금 진산을 빼앗게 했던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월오악도의 진원지는 7000년전
우리의 선조인 동이족이 살았던 중국 산동성 대문구(大汶口)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진 해와 달, 산이 그려진 최초의 그림문자의 모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문자학자들은 이 모양을 아침 단(旦) 또는 빛날 욱(旭)으로 읽고 있다.
일월오악도는 분명 대문구의 그림글자와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일월오악도 뿐 아니라 임금의 용상 앞의 천장에는
한발에 일곱 개의 발가락이 달린 황금색 용 두 마리가
보주(寶主, 如意珠)를 가운데 두고 희롱하는
이른바 이룡희주(二龍戱珠)의 채색그림이 있다.
용의 주변에는 황홀한 채색 구름조각이 어지러이 날고
그 사이사이의 어둑한 공간이 먼 하늘 나라 세계처럼 느껴진다.
황금빛 황룡은 동· 서· 남· 북· 중앙, 오방 중에서 중앙을 의미한다.
근정전의 동서남북에 배치되어 있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사방위신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방위신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오행의 질서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다.
용이 승천하기 위해서는 여의주가 있어야 한다.
용이 승천한다는 것은 지극한 상서로움이요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함을 의미한다.
용이 승천하여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려 만물을 적셔 주듯
임금이 등극하여 백성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을 용의 덕이라 한다.
용을 임금에 비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천장에 있는 두 마리 용의 발가락을 보면 발가락이 7개이다.
시대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용의 발가락이 3개에서 5개로 됐다가 조선조 말에 오면 발가락은 7개가 된다.
용 한 마리가 네 개의 발을 가지고 있으니 발가락의 수는 모두 28개이다.
북극성을 호위하는 동서남북 하늘의 28수라는 해석이다.
바로 두 마리의 용은 북두칠성의 양두성과 음두성이요 가운데 여의주는 북극성,
곧 구천상제를 뜻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용이 호위하고 있는 여의주가 바로 임금이라는 뜻이다.*
<대궐을 지키는 서수(瑞獸) 해치(獬豸)>
경복궁의 들머리인 광화문 입구에 해치 두마리가 앉아있다.
또 광화문 문루에 한, 칸이라 부르는 들개 두마리가 앉아 있다.
돌을 깎아 만든 석수(石獸)인 해치는 부리부리한 퉁방울 눈에 슬며시 고개를 들고
대궐 남쪽인 관악산 쪽을 넌지시 바라다 보고 있다.
유달리 큰 코를 실룩이는 품이 뭔가 냄새를 맡은 듯 한데도
그저 송곳니를 드러내고 씩 웃고 있을 뿐이다.
돌아가는 모든 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품너른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다.
이 해치는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세욱(李世旭)이라는 뛰어난 석공의 손에 만들어 졌다.
본래는 지금 자리에서 80~90미터 떨어진 정부종합청사 정문 근처와 그 맞은 편
길 건너에 있었다.
임금과 만조 백관의 성원 속에 태어나 늠름하게 광화문을 지키던 이 해치는
1923년 10월 일본이 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청사 서쪽 담장 밑에 버려져 있다가
청사가 완공된 26년 청사 앞으로 옮겨졌다.
조선왕궁을 지키던 것이 일제의 아성을 지키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다 제 3공화국때 광화문이 복원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앉게 됐다.
이 해치를 보고 흔히들 '해태'라 하면서
서울 남쪽 관악산의 불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관악산 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알은 체한다.
그러나 내가 내로라는 조선의 두뇌들이
대궐문 앞에다 고작 불을 겁내 해태를 세워 둘 정도로 좀생이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왕조의 임금이 살고 있는 구중궁궐의 들머리를 지키고 있는 짐승이라면
적어도 하늘의 짐승, 해치라야 격이 맞다.
바로 이 해치가 조선궁궐의 정체를 파악해 낼 수 있는 핵심적인 '키'이다.
궁궐의 들머리에 품너른 미소를 짓고 있는 이 해치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야
조선의 궁궐이 하늘에 있는 자미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민기(金玟基)씨가 쓴 '한국의 부작(符作)'(보림사刊)이나
천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해치를 하늘의 궁궐인 자미궁(紫微宮)의
북쪽 하늘의 칠수인 斗 牛 女 虛 危 室 壁 중 斗宿를 지키는 서수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생명을 관장하는 南斗六星의 정령이 바로 이 해치이다.
그리고 이 해치와 짝을 이루며 문루에 앉아있는 큰 들개,
즉 한(豻.豕옆에 干, 한 또는 간)은
남쪽 하늘, 즉 남쪽 불의 신인 염제(炎帝)가 지키고 있는
남방칠수(南方七宿) 井 鬼 柳 星 張 翼 軫의 井宿의 정령이다.
정동유(鄭東愈.1744~1808)가 1805년에 간행한 '주영편(晝永篇)'에
'이참의 수봉이 옥황상제에게 불려가 화수전의 상량문을 쓰게 됐다.
그가 하늘로 불려 올라갈 때 하늘의 한 문에 도착하니
붉은 개가 있어서 사람을 물려고 하였으나
저승사자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붉은 개는 옥경(玉瓊.북두칠성)의 하늘 문을 지키는 짐승이라는 풀이이다.
이 개를 지상에 끌고 와 대궐의 문지기로 쓰기 시작한 사람들이 고구려 사람들이었다.
북두칠성을 추앙한 고구려 사람들은
하늘 문을 지키고 있는 이 개의 형상을 만들어 절문에도 배치했던 것이다.
땅의 개와 구별하기 위해 뿔하나를 이마에 붙여 놓았다.
죄가 있는지 없는지 의심스러울 때 이 개를 데려다 놓으면
죄가 있는 사람이면 뿔로 받고 죄가 없는 사람이면 받지 않았다.
인간의 시비곡절을 판단하여 성군을 도왔다는 영물로 숭상하고 있다.
法자는 원래 은하수의 해치가 간다는 의미의 글자인 삼수변에 해치 치(廌)를 쓰고
그 아래에 갈 去를 한 좀 복잡한 글이 法으로 줄어 들었던 것이다.
해치는 즉 요새 말로 하면 법관인 셈이다.
해치를 궁문 앞에 세운 것은 바로 이러한 상징성 때문이다.
곧 현재 궁궐에 있는 임금이 성군임을 칭송하는 의미도 되고
한편으로는 백관들이 궁궐을 출입할 때 스스로의 마음을 가다듬고
경계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해치가 세워진 자리에 이르면 말이나 탈 것에서 모두가 내렸다.
해천(解薦) 신양(神羊) 해타(海駝) 산예(狻淣)라고도 했다.
이 하늘을 지키는 개를 재빠르게 받아 들인 것이 일본이다.
일본의 절 문엔 지금도 이 뿔난 개가 남아 있다.
해치는 용이나 봉황처럼 인간이 그려 낸 상상의 동물이지만
개처럼 문 하나만을 지키지 않고 구천세계의 남쪽과 북쪽,
우주를 지키는 영물인 것이다.
왕을 지켜 줄 수 있는 동물은
오로지 하늘나라 구천에서 내려온 해치와 들개 뿐 이라는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익살스런 경복궁 영제교의 해치>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에 들려면 영제교(永濟橋)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도랑 축대 사방에 엎드려 있는 4마리의 짐승이 있다.
온몸이 비늘에 덮여 있고 정수리에 두 가닥으로 갈라진 뿔이 달려 있다.
무섭게 생긴 모양인데 얼굴을 보면 오히려 친근감을 풍긴다.
4마리 모두가 다리 아래 도랑 바닥을 뚫어 져라 내려다보고 있다.
행여 도랑을 통해 침입할 지 모르는 잡귀를 감시하고 있는 해치다.
이 해치는 원래는 지금의 위치에 있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는 지금의 영제교가 근정문 앞에 있었다고 했다.
임란 때 종군하여 궁궐에 입성했던 승려 석시탁의 '조선일기'에는
"정면에 돌다리가 있는데 돌을 깎아 연화 난간 기둥을 만들고,
다리 좌우에 돌사자 네마리를 두어 다리를 호위하게 하였다.
다리 중앙에 깎은 돌로 여덟자의 어도를 마련하고
돌사자를 간손건곤(艮巽乾坤) 모서리에 두었는데 모두 16마리다"라 기록하고 있다.
영제교가 근정문 앞에 남북으로 놓여 있을 때 서쪽에 있었으니까
지금으로 치면 남쪽에 있어야 할 것이 반대편인 북쪽에 앉아 있는 것이다.
다리를 이곳으로 옮길 때 서수의 자리 따위는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땅의 개가 문 하나만을 지키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해
하늘나라 구천세계의 남쪽을 지키는 해치는
한편으로 왕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서수였다.
그래서 무령왕릉의 무덤에서 나온 서수가 해치일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해치는 왜 왕의 무덤을 지키고 궁을 지켜야 하는가.
악귀들로 부터 임금의 유해와 임금의 지위를 보호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중신인 대사헌과 대간의 갓 꼭지에 달고 다니는 정옥(頂玉)의 모양도
해치로 한 것은 임금을 호위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임금을 보호하는 해치는 잡귀를 제압하기 위해서라도
엄한 얼굴을 해야 할 터이지만 영제교 아래의 해치는 오히려 친근감을 풍긴다.
더욱이 도랑 아래쪽에서 보면 돌난간에 턱을 괴고 있는 모양이 걸작이다.
능청스러울 정도로 여유작작한 모습이다.
사팔뜨기 눈을 하며 혀를 속 내고 “용용 죽겠지”하며 피식 웃고 있는 것도 있다.
잡귀를 지키는 소임이라면 긴장하고 응시해야 한다.
위엄을 갖추고 있어야 할 텐데, 저렇게 싱글거리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빙긋이 웃는 그것이 오히려 더 무서울지 모른다.
까짓, 하잘 것 없는 잡귀 따위의 동태 쯤이야 열 수나 스무 수쯤 앞서 읽고 있어서
내버려 두어도 거칠 것이 없다는 느긋한 표정이다.
구천 하늘에서 자미궁궐 남쪽을 지키는 해치가 하필이면 영제교에 있을까.
천상의 해치는 하늘에서 은하수 물길을 타고 잠입할지 모르는
사악한 것들을 색출하여 자미궁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옛 사람들은 하늘의 자미궁에 비유되는 지상의 구중궁궐에서
그 출입처인 영제교 아래로 흐르는 물도 필시 은하수로 보고,
해치로 하여금 영제교 밑을 지키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배치는 이곳을 신성한 공간으로 만들려했던
옛 사람들의 염원을 표출시킨 것임에 틀임없다.
옛 사람들이 영제교 밑에 흐르던 물을 은하수로 보았다면,
영제교 안의 경복궁은 하늘의 자미궁임은 물어 보나 마나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대궐, 창덕궁도 마찬가지이다.
돈화문을 지나 인정전(仁政殿)으로 들려면 금천교(錦川橋)를 건너야 한다.
금천교는 북 현무(玄武)에서 발원하여
외당(外堂)을 돌아 흐르는 명당수 위에 놓인 돌다리이다.
경복궁의 영제교나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橋)도 같은 의미의 다리이다.
길이 12.9m, 너비 12.5m. 태종 11년(1411년)에 만들었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다리는 홍예(虹蜺)틀 두 개를 짜고 그 중앙에 홍예기석(基石)을 놓고
그 끝에 좌대를 마련하여 남쪽에는 해치 한 마리가 남쪽을 지키고 있고
북쪽에는 북을 지키는 거북(玄武) 한 마리가 북쪽을 보고 앉아 있다.
해치와 현무의 뒤쪽, 홍예틀이 만나는 기단석에는 귀면이 조각되어 잡귀를 쫒고 있다.
다리의 난간 사방 귀퉁이에도 해치 한 마리씩을 얹어
왕궁 들머리부터 여기서 부터가 구천의 자미궁이라는 것을 내비치고 있다.
금천교 돌다리 주변은 느티나무와 회화나무의 숲이 울창하다.
옛날부터 궁문 안에는 회화나무인 괴수(槐樹)를 심는 제도가 있다.
하늘의 입구라는 것을 나무로 암시하고 있다.
괴목숲이 있기 때문에 궁의 별칭을 괴신(槐宸)이라고도 한다.
회화나무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삼공(三公)이라해
임금을 보좌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신(宸)은 대궐, 엄격히 말해서 하늘의 궁궐을 뜻하는 글자이다.
신자는 집을 뜻하는 갓머리 밑에 용(龍)과 별을 뜻하는 진(辰)을 합한 글자이다.
별 진은 바로 별중에서 북극성 자미원을 가리키고 있으며 신은 바로 자미궁을 뜻한다.
해치는 위풍 당당하고 근엄하고 인자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자리매김을 할 날이 올 것이다.*
[출처] [聽巖] 천문으로 푸는 유적 - 서울은 자미원 하늘 (금문과 차 이야기)
|작성자 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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