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의 북정(北征)으로 보는 고구려의 강역
- 발기의 난과 고구려의 천도
고구려는 <발기>의 난(197년)으로 요동을 <공손도>에게 내어주고
광개토태왕이 다시 요동을 수복하는 200년의 세월을 기다려여만 했다.
<공손도>가 3만의 군사로, 말로는 <발기>를 돕는다고 하면서,
개마(盖馬)・구리(丘利)・하양(河陽)・도성(菟城)・둔유(屯有)・장령(長岺)・
서안평(西安平)・평곽(平郭) 등을 엄습하여 차지하고는,
<발기>를 돕지는 않았으니, <발기>는 울분으로 인해 등창이 났다.
<발기>의 난으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요동군 지역을
<공손도>가 차지하게 된다.
위의 지명은 모두 지금의 남역수(요수)를 경계로 동,서에 있던 고구려의 강역이었다.
추모대제 이후 200년 동안을 지배하며 漢과 국경을 다투던 고구려의 서부지역이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고 통채로 <공손도>에게 넘어가고
고구려는 산상대제 13년(209년) 난하를 건너
대릉하 상류인 환도성(今 朝陽)으로 천도하게 된다.
고구려는 요동을 상실한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기 위하여
구다국(句茶國)에 창남산성을 쌓고 밀도(密都)를 두어 이주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요서의 구다국은 이미 <공손도>의 손에 넘어가버린 상태였다.
백제는 구지왕(仇知王) 3년(190년)에 <공손도>의 딸 <보루宝婁>를
구지왕 30년(217년)에는 <공손강>의 여동생 <보고宝皐>를 잉첩으로 받아들여
<공손강>과 함께 고구려를 견제하게 된다.
구지왕의 이름은 <백고伯古(155-226) 재위 188-225>인데
기루왕과 흘씨의 아들로 개루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이 구지왕 <백고伯古>와 신라 <지마祗摩(131-191)>왕의 외손자
<길선吉宣(172-226)>의 딸인<전씨田氏(197-268)>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초고肖古(214~274) 재위 226-253>왕으로
일본서기에 <스사노오須佐之男命>로 기록되고
교토 굴지의 사당인 야스카 신사에 모셔진다.
- 오환(烏丸) 선우 <답돈踏頓>의 요서 진출
三郡烏丸承天下亂 破幽州略有漢民合十餘萬戶
袁紹皆立其酋豪為單于 以家人子為己女 妻焉
遼西單于蹋頓尤強 為紹所厚 故尚兄弟歸之 數入塞為害
公將征之 鑿渠 自呼沲入泒水 泒音孤 名平虜渠
又從泃河口泃音句 鑿入潞河 名泉州渠 以通海
<삼국지 위서 무제기>
삼군(三郡) 오환(烏丸)이 천하가 어지러운 틈을 타 유주(幽州)를 파하고,
한(漢)나라 백성 합계 10여 만 호를 장악하였다.
삼군(三郡)은 <답돈>이 193년에 오환족을 규합한
요서군, 우북평군, 요동속국을 말한다.
요서군은 지금의 보정시 만성구지역이고 우북평군은 보정시 순평현지역이고
요동속국은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지역이다.
유주의 치소는 지금의 보정시 당현이다.
오환 선우 <답돈>이 오환족을 규합하여 200년경
지금의 하북성 북부에서 백성 6-7십만 명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물러난 요동은 <공손도>가, 요서는 오환의 <답돈>이 차지한 것이다.
<원소>가 함께 그 추호(酋豪)를 선우로 세우고,
가신(家臣)의 자식을 자신의 딸로 삼아 시집보냈다.
추호(酋豪)는 오환족 추장 즉, <답돈>을 말한다.
요서(遼西) 선우 <답돈蹋頓>은 세력이 특히 강하여 <원소>의 후한 대접을 받았기에,
<원상> 형제는 그에게 의탁하고 여러 차례 새(塞)로 들어와 해를 입혔다.
당시 중원에선 <원소>가 죽고 후계자인 <원상袁尙>은
<조조曹操>에게 패하여 <답돈>에게 망명해 와 있었다.
AD 200년 관도대전 후 조조가 업(今 한단)을 점령하자
<원상>은 상곡을 본거지로 하여 거용관과 자형관을 넘어 인근의 백성을 규합한다.
상곡은 지금의 보정시 역현의 서남부와 보정시 순평현의 동북부지역으로 인근에 거용관과 자형관이 있었다.
공(조조)이 장차 그를 정벌하고자 도랑을 팠는데,
호타(呼沲)로부터 고수(泒水)로 들어가는 것은, 평로거(平虜渠)라고 불렀으며,
또한 구하(泃河)의 입구로부터 도랑을 파 노하(潞河)로 들어가는 것을
천주거(泉州渠)라고 했는데, 이로서 해(하)와 통했다.
건안 10년(205년) 조조는 군사와 양곡을 운송하기 위해 천주거와 평로거를 굴착한다.
建安十年鑿渠自滹沱河入汾 名平虜渠
<讀史方輿紀要>
독사방여기요는 호타하(滹沱河)에서 분하(汾河)로 들어가는 곳에
평로거를 뚫었다고 한다.
산서성 삭주지역에 평로거를 뚫어
황하와 호타호를 연결하여 대(代)지역으로 연결한 것이다.
조조가 205년에 원소와 손잡은 요서 오환을 치려고 [평로거]를 뚫은 사건을 말한다.
- 조조의 북정로
건안 12년(207년) 5월 조조는 무종(無終)에 도착하나
여름에 비가 내려 해안지대가 물에 잠기고 흙탕물에 길이 끊겼다.
게다가 적들이 요충지를 틀어막아 <조조> 군대가 전진하지 못했다.
"지금 여름인데 날씨는 덥고 도로는 끊겨
잠시 가을 겨울까지 기다려 다시 진군하겠소."
조조는 거짓 정보를 흘리고 7월에 전수(田疇)를 향도로 삼아
역현(易縣)→무종(武終)→서무산(西無山)→노룡새(盧龍塞)→백단(白檀)→평강(平岡)
→선비정(鮮卑庭)→백랑산(白狼山)→유성(柳城)으로 적을 속여 사잇길로 잠행한다.
통설은 유성(柳城)을 지금의 요녕성 조양(朝陽)이라고 하고
훗날 모용황이 극성에서 조양(朝陽)의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조양(朝陽)은 조조 북정이 있은 2년 후인 209년에
고구려가 천도한 고구려의 수도이며 백랑산에서 유성까지의 거리는 20리이다.
오환 선우 <답돈>의 참모부인 요서의 유성(柳城)은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지역이다.
훗날 이 유성에 모용황이 전연前燕을 세운다.
무종은 지금의 보정시 순평현으로 여기에 서무산이 있었다.
조조는 유성을 근거로 한 원씨 형제와 오환들을 치기 위해 대군을 발동하면서
상대에게 일찍 알려지면 미리 방비를 단단히 하게 될까봐 최대한 기밀을 유지한 채
200리까지 근접했던 것으로 되어있다.(다른 기록에는 100리 라고도 한다).
8월에 백랑산(白狼山)에 올랐다는데 백랑산에서 답돈의 본거지인 유성까지는 20리 거리이다.
<노룡새의 위치>
- 백랑산 전투
조조의 군대가 우회하여 공격해 오니 <답돈>은 백랑산에 올라갔다가
<조조>와 갑작스럽게 조우하였는데,
당시 <조조>는 본대에서 이탈해 있어 거느린 군사는 적었으나
고지에 위치하고 있었고, <답돈>의 군사들은 제대로 대오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조조>는 <장료張遼>에게 명해 <답돈>을 공격하게 했고
여기서 <답돈>은 <조순曹純>의 부하들에게 생포당하여 참수되었다.
<조조>는 북정로를 따라 진격하지 않고 백랑산에서 장료와 조순 등
부하 장졸들을 데리고 답돈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조> 본대의 북정로는 위장전술인 것이다.
<답돈>은 조조의 본대가 우회하여 진격해 오자 낭아산의 고지를 먼저 점령하고자
낭아산에 오르다가 생포된 것이다.
- 노룡새(盧龍塞)
<노룡새의 상세 위치도>
自秦隴亂大河 東抵太和 紫荊繞出盧龍之塞
列關數十而居庸關在幽州之北 最為深阻 號天下四塞之一
"居庸關銘", <欽定四庫全書 陵川集> 巻21
진롱(秦隴)으로부터 대하(황하)를 건너면 태화(太和)가 동쪽을 가로막고
자형(紫荊)이 노룡의 새(盧龍之塞)를 둘러싼다.
줄지은 관문이 수십이며 거용관(居庸關)은 유주의 북쪽에 있다.
가장 깊고 험하여 천하사새(天下四塞)의 하나로 불린다.
노룡새가 자형(紫荊) 인근에 있다는 것이다.
濡水自發源至入盧龍塞
<欽定四庫全書 欽定熱河志> 卷69
유수는 발원지로부터 (노룡새에) 이르러 노룡새로 들어간다.
濡水又東南逕盧龍塞
<水經注> 卷14
유수는 또 동남쪽으로 흘러 노룡새를 지난다.
거마하의 상류가 래수(淶水)인데 이 래수가 유수(濡水)라는 것이다.
故安, 閻鄉, 易水所出, 東至范陽入濡也. 并州䆮. 水亦至范陽入淶.
師古曰, 言易水又至范陽入淶也. 濡音乃官反
<漢書/地理志> 幽州 涿郡
고안현(故安縣), 염향(閻鄉)이다.
역수(易水)가 나와서 동쪽으로 범양(范陽)에 이르러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병주(并州)에 물을 댄다.
역수(易水)는 또한 범양(范陽)에서 래수(淶水)로 들어간다.
[주석] 안사고가 말하기를 역수(易水)가 범양(范陽)에 이르러
래수(淶水)로 들어간다고도 말하여진다고 했다.
濡(유)의 음은 놘(乃官反)이다.
범양(范陽)군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의 정흥현(定興縣), 래수현(淶水縣), 역현(易縣),
그리고 탁주(涿州)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안사고는 주석에서 유수(濡水=놘수)를 난(놘)수라고 하였으니
난하(灤河) 역시 갈석, 노룡 등과 함께
보정에서 진황도시 방면으로 이치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廣昌, 淶水東南至容城入河, 過郡三, 行五百里, 并州䆮. 莽曰廣屏.
<漢書/地理志> 幽州 代郡
광창현(廣昌縣), 래수(淶水)가 동남쪽으로 흘러 용성(容城)에 이르러
하수(河水)로 들어가는데 3개의 군을 지나며 500리를 간다.
병주(并州)에 물을 댄다. 왕망이 말하기를 광병(廣屏)이라 했다.
<한서/지리지> "유주 탁군 고안(幽州 涿郡 故安)" 조항에서
유수(濡水)가 "병주에 물을 댄다(并州䆮)"는 기록이
"유주 대군 광창(幽州 涿郡 廣昌)" 조항에서
강 이름만 래수로 바뀌어 똑같이 "병주에 물을 댄다(并州䆮)"고 하였다.
盧龍塞在(平州)城西北二百里
<通典> 卷178
노룡새는 (평주)성 서북쪽 200리에 있다.
노룡성(평주성)은 노룡새의 동남쪽 200리(100km)
지금의 보정시 인근에 있다는 것이다.
括地志云 孤竹古城在盧龍縣 南十二里 殷時諸侯孤竹國也
<史記正義> 卷61
<괄지지>에 이르기를
"고죽의 옛성은 노룡현 남쪽 12리에 있으며, 은나라 제후국인 고죽국" 이라 했다.
高麗之地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于箕子
<隋書> 卷67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으로 주나라 때 기자에게 봉해진 곳이다.
지금의 보정시 인근에 고죽국이 있었고, 낙랑군이 있었고 고구려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갈석산(今 낭아산)이 중원과 고구려의 경계라는 것이다.
[지도설명]
지금 하북성 난하 유역에 있는 노룡은
金 세종 29년(1189년)에 창려현과 함께 이치된 지명이다.
노룡현은 이치되기 전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 인근에 있었다.
유성은 서수구 인근, 우북평은 순평현인근, 상곡은 자형관 인근,
낙랑은 보정시 직할구지역, 현도는 역현 북쪽의 야삼파지역, 요서와 요동은 남역수(요수) 경계이다.
래수(淶水)가 래수현을 지나 거마하(拒馬河)로 바뀌고
패주(유성) 남쪽을 지나 영정하와 합쳐진다.
이 래수(淶水)가 유수(濡水)이다.
울주와 영구 사이에 거용새가 있다.
북경 서북쪽에 있는 거용관은 본래 군도산이 있어 군도관이라고 하였다.
고수전쟁과 고당전쟁 시 군사를 집결한 곳이 정주(定州)이고
융거(戎車)를 집결한 곳이 고양(高陽)이다.
- <학경郝經>의 능천집(陵川集)
於是有城數十, 地方千餘里, 節度之州二, 刺史之州五, 勝兵數萬, 而戸不啻十餘萬,
西盡常山之尾, 繞出鎮定, 左轉蜚狐之口; 東包河間, 出九河; 南入糞野; 北盡涿, 易,
横絡上谷, 盧龍之塞, 而跨有燕趙.
恒嶽之鎮有滹沱淶易之浸, 有桑麻魚鹽之利, 棗栗五榖之饒.
"左副元帥祁陽賈侯神道碑銘", <欽定四庫全書 陵川集> 巻35
여기에는 수십 개의 성이있다.
사방 천여 리에 절도사(節度使)의 주(州)가 둘, 자사(刺史)의 주(州)가 다섯,
그리고 십여 만 가구 뿐만 아니라 훌륭한 병사 수만이 있다.
서(西)로 상산(常山)의 꼬리에 다다라 정주(定州)를 둘러싸고 지키며
좌(左)로 비호의 구(蜚狐之口)를 돌아서 동(東)으로 하간(河間)을 취하고
구하(九河)로 나간다.
남(南)에서 분야(糞野)로 들어와서 북으로 탁(涿)주와 역(易)주에 이르러
가로로 상곡(上谷)과 노룡의 새(盧龍之塞)에 이어졌는데,
그 너머에 연(燕)과 조(趙)가 있었다.
항악(恒嶽)의 진영은 호타(滹沱)하, 래(淶)수, 역(易)수에 젖어들어
뽕나무, 삼, 물고기, 소금의 이로움이 있고 대추, 밤, 오곡의 넉넉함이 있다.
원(元)나라의 관료이자 유학자인 학경(郝經, 1223 ~ 1275)의 저작 <능천집(陵川集)>
의 "左副元帥祁陽賈侯神道碑銘"에 보정의 지리 범위를 설명한 내용이다.
원문에 기록된 대로 상산, 정주, 비호구, 하간, 탁주, 역주 등
보정을 중심으로 그 언저리에 위치한 지명들을 해설과 함께 나열하였다.
<학경郝經>이 보정에 실제로 거주하였던 인물인 점을 감안하면
그의 기록은 정확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학경郝經>은 역주(易州)에서 가로로 상곡과 노룡새가 이어지고
상곡을 너머 燕이 있었고 노룡새를 너머 趙가 있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지금 장가구시 울현(상곡)을 너머 燕나라가 있었고
보정시 래원현의 갈석산(노룡새)을 너머 趙나라가 있었다는 것이다.
- 거용새(居庸塞)
오늘날 거용관은 북경시 창평구(昌平區)에 있다.
그러나 사서는 규주 회융현 동남쪽 50리에 있는데
그 인근에 노룡새와 갈석산이 있으며 밀운과 백단이 있고
영무관과 태항산, 상산이 있다고 한다.
媯州媯川郡. 上. 本北燕州, 武德七年 平 髙開道, 以幽州之懷戎置.
貞觀八年更名.
土貢.., 樺皮 胡禄 甲榆 髇矢 麝香.
户二千二百六十三, 口萬一千五百八十四,
縣一. 有府二, 曰密雲 白檀.
有清夷軍, 垂拱中置. 有 堆北 白陽度 雲治 廣邉 四鎮兵. 有 横河 柴城 二戍. 有 陽門城.
有 永定 窯子 二闗. 又有 懷柔軍, 在 媯 蔚 二州之境.
懷戎. 上. 天寳中析置媯川縣, 尋省. 媯水貫中. 北九十里有長城, 開元中張說築.
東南五十里有居庸塞, 東連 盧龍 碣石, 西屬 太行 常山, 實天下之險.
有鐵門闗. 西有寧武軍. 又北有 廣邉軍, 故白雲城也.
<신당서지리지 하북도>
규주(媯州) 규천군(媯川郡)
원래 북연주(北燕州)이다.
무덕(武德) 7년(626년)에 <고개도髙開道>를 평정하여
유주(幽州)의 회융(懷戎)으로 설치하였다.
정관(貞觀) 8년(634년)에 이름을 바꿨다.
토산물 조공품으로는 자작나무껍데기(樺皮)와 호록(胡禄) 갑유(甲榆)와
고시(髇矢)와 사향(麝香)이 있다.
가구수는 2,263이고 인구수는 11,584명이다. 현은 1개이다.
2개의 부(府)가 있는데 밀운(密雲)과 백단(白檀)이다.
청이군(清夷軍)이 있어 수공(垂拱) 연간에 설치하였다.
퇴북(堆北)과 백양도(白陽度)와 운치(雲治)와 광변(廣邉) 등 4개의 진병(鎮兵)이 있다.
횡하(横河)와 시성(柴城) 등 2개의 수(戍)가 있다.
양문성(陽門城)이 있다.
영정(永定)과 요자(窯子) 등 2개의 관(闗)이 있다.
또한 회유군(懷柔軍)이 있는데 규주(媯州)와 울주(蔚州)의 지경에 있다.
회융현(懷戎縣).
천보(天寳) 연간에 규천현(媯川縣)을 쪼개서 설치하였다가 곧 없앴다.
규수(媯水)가 가운데를 지나간다.
북쪽 90리에 장성이 있는데 개원(開元) 연간에 <장설張說>이 쌓은 것이다.
동남쪽 50리에 거용새(居庸塞)가 있고
동쪽으로 연이어 노룡(盧龍)과 갈석(碣石)이 있고
서쪽으로는 태행산(太行)과 상산(常山)이 잇닿아 있는데
실로 천하의 험한 곳이다.
철문관(鐵門闗)이 있다.
서쪽으로 영무군(寧武軍)이 있다.
또한 북쪽으로 광변군(廣邉軍)이 있는데 옛날 백운성(白雲城)이다.
규주(媯州)는 울주(蔚州) 인근에 있다.
울주는 연 <진개>의 동정 후 설치한 상곡군이 있던 곳이다.
규주 회융현 동남쪽 50 리에 거용새가 있고 그 동쪽으로 노룡새와 갈석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태항산과 상산과 영무관이 있다는 것이다.
宋祁曰 唐媯州懷戎縣東南五十里 有居庸塞
東連盧龍,碣石 西屬太行,常山 實天下之險
[資治通鑒 (胡三省音注) 卷060]
규주 회융현 동남쪽 50리에 거용새(居庸塞)가 있고
동쪽으로 연이어 노룡(盧龍)과 갈석(碣石)이 있고
서쪽으로는 태행산(太行)과 상산(常山)이 잇닿아 있는데 실로 천하의 험한 곳이다.
자치통감의 호삼성의 주석도 똑같이 설명하고 있다.
又曰 媯州涿鹿城 卽黃帝擒蚩尤處
[太平御覽 0193]
그리고 태평어람은 규주에 탁록성이 있다고 한다.
탁록은 지금의 울현 인근이다.
史記正義曰 上谷 今媯州
[資治通鑒 (胡三省音注) 卷006]
秦漢시대의 상곡(上谷)이 당나라의 규주(媯州)라는 것이다.
史己 趙襄子殺代王于夏屋 其妹爲代王夫人 襄子迎之
至此日 代已亡矣 吾將安歸乎
遂磨拜於山而自殺
代人憐之 爲立祠焉 因名爲磨拜山
每夜有野鷄韋鳴王祠屋上 故亦謂之鳴鷄山
杜佑曰 媯州治懷戎縣 有鳴鷄山 本名磨拜山
<자치통감(호삼성음주) 권129>
규주 회융현에 대 왕 부인이 자살한 명계산(마배산)이 있다는 것이다.
上居晉陽 聞冒頓居代谷 欲擊之
(史記正義曰 代谷 今媯州
余據唐규州在幽州西北 此代谷在句注之北
後魏都平城 建爲代都 蓋因代谷而名也 唐屬雲州界)
[資治通監]
산서성 흔주시 대현의 북쪽으로 유명한 안문관, 영무관, 편두관인 내삼관이 있고
그 바깥으로 외관인 거용관이 지금의 울현 인근에 있었다.
호화호특 인근의 흉노는 이 외관인 거용관을 지나
다시 내삼관인 영무관이나 안문관을 지나 산서성 태원으로 진격하였지
결코 북경을 돌아오지 않았다.
거용새, 노룡새, 밀운. 백단, 무종 등 많은 지명들이 이치 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