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호 남동쪽 훌룬부이르부이르호반 할힌골{흘승골,홀본,졸본}에서

騎馬射術로 유목과 수렵생활을 하던 우리 민족은 BC8000년경 정든 땅을 떠나,

아리랑고개{북흥안령 아리령(阿里嶺)}를 넘어 지금의 적봉(홍산) 부근으로 이동하여

황하유역의 앙소문화보다 2000년이상 앞선 동이문화(홍산문화,발해문화)를 이루었다.

 

 

* 참고

 

1. 경향신문사 창간 61주년 기념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2. 주채혁 『몽.러 활겨레 문화론』

3. 김운회 『한국인의 뿌리를 찾아서』

 

 

몽골 동쪽 할흐골솜과 다리강가솜, 나란솜 지역에서는

韓민족의 기원과 관련된 코리족 이동 설화가 전해진다.

 

이 지역에서는 고올리칸 석인상을 경계로 하여 동쪽에 고려사람,

서쪽에 몽골사람이 살았는데 서로 왕래하며 혼인도 했다고 한다.

 

초원에서 양쪽 여자들이 서로 만나면 몽골 쪽 여자는 왼쪽 손을

고려 여자는 오른쪽 손을 흔들어 서로 우의를 표시했다.

 

고려 사람들은 성을 쌓고 살았는데 그 성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그러나 고려 사람들은 오래 머물지 않고 동남쪽으로 이동해 갔다고 전한다.

<박원길 ‘몽골지역에 전승되는 고대 한민족 관련 설화에 대하여 ’2011>

 

 

 

<우리 민족 이동로>

 

 

 

 

 

 

 

 

<발해문명 주요유적>

 

 

 

<훌룬부이르 초원의 한 리조트의 벽면 장식물>

 

 

위의 사진은 훌룬부이르 초원의 한 리조트의 벽면 장식물이다

 

몽골 문자와 한자로 다섯 민족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훌룬부이르는 지금은 몽골족 자치구이다.

 

이 지역의 토착민인 몽골족들의 생각에도,

이 다섯 민족의 혈연적 지리적 문화적 인접성이 인식돼 있다는 것을 알수있다.

 

 

 

 

중국 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蘇秉琦)(1909-1999)는

 

“동이의 랴오허문명과 한족의 황허문명이 조화를 이뤘으며,

여기에 남방·서북문화가 중원으로 집합해 오늘날의 중국 문명이 완성됐다”

고 결론내렸다.

 

중국 문명을 황하문명 일원일체에서 다원일체의 문명으로 바꿔 해석한 것이다.

 

중국은 황하문명을 고수하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발해문명이 발굴되자

다원문명으로 해석하여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동북공정을 내세우고 있다. 

 

중국인들의 ‘용 신앙’이 중원이 아닌 대릉하 상류의 동이족 본거지에서,

그것도 BC 5600년 차하이, (사해, 査海)) 유적에서

‘용 형상의 돌무더기’ 형태로 확인된 것도 충격이었다.

 

또한 차하이 유적과 동시대(BC 6200~BC 5200년)인

싱룽와(흥륭와, 興隆窪) 유적에서는

요즘의 전원주택단지와 같은 주거유적이 발견되었다.

 

중국인들은 차하이와 싱룽와 유적의 이름을

‘중화(中華) 제1촌(차하이)’, ‘중화시조의 취락(싱룽와)’이라고 명명했다.

이 차하이-싱룽와 문화는

뒤에 이어지는 훙산문화(紅山·BC 4500~BC 3000년)의 원형이었다.

 

랴오닝성 차오양시 젠핑(건평, 建平)과 링위안(능원, 凌源) 양현 경계에 걸쳐있는

뉴허량(우하량, 牛河梁) 유적은 무덤과 제단, 신전(여신묘) 등

고대사회의 3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츠펑(적봉, 赤峰) 싼줘뎬(삼좌점, 三座店)과 청쯔산(성자산, 城子山·샤자뎬 하층문화

즉, BC 2000~BC 1200년)에서 확인한 엄청난 규모의 석성과 돌무덤떼, 제단,

주거지 등도 이미 고국(古國)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쑤빙치는 “훙산문화와 샤자뎬(하가점, 夏家店) 하층문화, 진(秦)·연(燕)의 문화는

고국(古國·훙산)-방국(邦國·샤자뎬 하층)-제국(帝國, 진·연)으로 발전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이것은 중국 문명과 국가 형성의 기원 형태를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쑤빙치가 말하는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는 

이족이 세운 동이문명인 것이

 

요서 대릉하 유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적봉(赤峰)이란 지명이 있다.

적봉 가까이에는 또 홍산(紅山)이 있다.

적봉과 홍산은 우리말 '밝달' '밝산' 의 한자식 표기일 가능성이 높다.

아사달을 의미하는 조양(朝陽), 밝달을 의미하는 홍산, 적봉,

이런 지명들이 오늘의 대릉하 유역에서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박달'과 '아사달'의 흔적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오직 대릉하 유역뿐이다.

 

이것은 대릉하유역이 고조선과 고조선을 계승한 부여의 발상지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지금 중국은 홍산유적이 발굴되자 우리가 신화로 여기고 있는 고조선의 역사를

그들의 역사로 편입시키고자 동북공정을 내 세우고 있다.

 

중국은 조선족 전통민요와 아리랑을 자기네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코자 시도 중이며

우리 문화재청은 아리랑을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해달라는 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하였다.

 

이번 유네스코 등재신청에서 중국은 아리랑의 등재를 신청하지 않았지만

우리 아리랑이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가 되더라도

중국이 아리랑을 자국 전통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유네스코는 원천이 어디냐가 아니라 전승방법과 내용에 더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 동이민족 문명의 발전사

 

 

그동안 한국의 교단을 완전히 장악한 일본 식민사관 추종자들에 의하여

우리의 역사 교육은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서양의 로마제국이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고,

중국대륙에서 영웅호걸들이 출현하여 천하를 쟁패하고 있을 때

한민족의 시조들은 이제 겨우 알속에서 태어났다고 배웠다.

 

게다가 민족의 시조로 추앙받는 단군조차도

곰이 둔갑한 여인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1959년 중국 산동성 태안현(泰安縣)에서

역사를 뒤흔들 놀라운 고대유적들이 발굴되었다.

 

이른바 대문구유적(大汶口遺跡)으로, 시기는 대략 4300여년 전,

범위는 산동성 태산지역으로부터 중부를 거쳐 江蘇, 河北 일대에 분포되었다.

이곳에서는 밭갈이에 필요한 각종 삽과, 노루 뿔로 만든 낫 등을 비롯하여

농산물 생산에 필요한 각종 공구들이 다량 출토되어

당시의 농업수준이 상상 이상으로 발달되었음을 말해준다.

 

이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당시를 원시사회로 주장해왔던 학자들은

그들의 오판을 인정하고 정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이 지역이 바로 우리 동이민족들의 생활터전이었다는 사실이다.

 

대문구유적은 목축을 주로 하던 우리 동이민족이 일단 정복지에 정착하면

곧 점령지역을 개척·개간하여 착수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대문구문화 유적과 이에 앞서 1956년에 발굴한

앙소문화(仰韶文化 : 약 4000년전) 유적, 용봉문화(龍鳳文化)

그리고 홍산문화 유적의 수준을 종합하여 볼 때

배달국으로부터 대쥬신제국으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 고대사의 역사적인 실존은

틀림없는 사실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만의 역사학자 노간(勞幹)은,

 

“고대에 있어서 중국의 동서는 종족으로나 문화적인 특징이 서로 다르다.

서방측은 하(夏), 은(殷), 주(周)를 주축으로 하는 화하족(華夏族)이,

동방측은 비한어계(非漢語系)의 동이족이 주축을 이루었다.”고 주장하였다.

 

문화적으로도 화하족은 채도문화(採陶文化)

그리고 동이족은 흑도문화(黑陶文化)로 양자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흑도문화는 전 발해만 연안을 중심으로 하여 산동반도까지 깊숙이 전파되었으므로

고대사에 있어서는 현 중국의 동쪽이 모두 동이족의 영역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명쾌하게 단언하였다.

 

참고로 동이를 뜻하는 큰활민족[大弓民族]의 ‘이(夷)’자는

역사의 초기부터 갑골문에 뚜렷이 새겨져 있으나

한족(漢族)의 ‘한(漢)’자는 AD 220년이 되어서야 역사의 기록에 나타난다.

 

그러면 한자(漢字)는 과연 중국 글인가?

 

중국에 대한 존화사대(尊華事大) 사상(思想)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이씨조선 500년 동안의 유림학자들에게는 한문자는 성스러운 문자였다.

 

그런데 최근 농초(聾樵) 박문기(朴文基)씨를 비롯한 여러 한학자들이

한문자는 애초에 우리 동이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농초는 최초의 한자들이 중국식의 언어가 아닌

우리 식(알타이어)의 말과 뜻으로만 풀어지는 놀라운 예문을 무수히 제시하였다.

 

이것은 한자가 중국 황제의 명을 받아 만들었다는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엎은 것이다.

 

그런데 그의 주장을 하나씩 주의 깊게 살피던 중 뜻밖의 복음서를 만나게 되었으니

『금문의 비밀(김대성 엮음)』과 『금문신고(金文新攷)』였다.


  
『금문신고』(駱賓基-本名: 張璞君 1917~1994)를 해석하여 소개한

소남자(召南子){한국문자학회장 金載燮}의 증언에 의하면,

『금문신고(金文新攷)』는 1987년에 중국산서인민출판사에 의하여 출판되었다.

 

그런데 이 책을 검열하던 중국 사회과학원의 학자들이

책의 내용에 무척 당황하며 이미 배포된 책들을 황급히 회수하여

대부분의 책들은 빛을 보기도 전에 압수되는 운명을 맞았다.

 

다행히 소수의 선발매 책들이 벌써 뜻있는 학자들의 손에 넘어가버린 후여서

완벽하게 은폐하려던 그들의 음모는 실패하고 말았다.

 

상형문자인 금문(金文)이란?

 

상고금문(上古金文) : BC 6000~5000년
오제금문(五帝金文) : BC 4500~2000년(三皇五帝)
은주금문(殷周金文) : BC 1800~1100년(갑골문)
춘추금문(春秋金文) : BC 1134~ 250년
대전(大篆)→소전(小篆) : BC 250~210년 진시황의 통일문자 소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상의 금문은 전·후한(B. C 206~219년) 때 이르러

『예서(隸書)』와 『해서(楷書)』로 다시 정리되면서

한문이라는 이름으로 현대 한자의 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중국학계에서는 그동안 상고금문을 해득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상고금문으로 기록된 삼황오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었으므로

귀중한 고대의 역사를 신화와 전설시대로 설정해버리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20세기에 이르러 금문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한평생을 받친

소설가 낙빈기에 의하여 4500여년 금문의 비밀이 풀어지게 되었다.

 

낙빈기는 청동기와 갑골에 새겨진 1만여 글자 중

겨우 1천여 자만 해득하는데 성공하였을 뿐인데도

한국과 중국고대사에 얽힌 비사(秘事)들이 낱낱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우리의 상고사 기록인 「태백일사(太白逸史)」, 「삼성기(三聖記)」,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를 묶어놓은 『한단고기[桓檀古記]』

의 정확성이 입증된 것이다.

  
 
금문(金文)이란 청동기로 만든 제기, 농기구, 무기들에 새겨진 옛 글,

즉 원시 상형문자를 말하는데,

지금까지 중국의 한자로만 알았던 이 글들의 뜻과 발음이 놀랍게도

우리의 소리 말에 의해서 비로소 정확하게 풀이된다고 소남자 선생은 말한다.

 

최초에 신농계(神農系)의 발음은 배달국과 같은 본음(本音)이었고

황제계(黃帝系)는 지방 사투리에 해당하는 변음이었으나

역사가 흐르면서 식민지 지배계층인 동이 배달족이 토착화되면서

변음이 본음으로 바뀌어갔다.

 

중국인들이 신농 당시의 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본음에 해당하는 배달한국의 소리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금문은 발해연안을 중심으로 태행산 이동지역과 황하의 북쪽,

흥안령 이남과 요령지방 그리고 요동반도를 비롯하여

흑룡강과 두만강 변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 민족의 옛 터전인 발해 연안의 것들은

은나라의 것들보다 연대가 훨씬 더 오래되어

갑골문이 본래 동이족의 문자였음을 알게 한다.

 

즉 ‘금문(金文)’으로 부르고 있는 원시 상형문자(象形文字)는

동이(東夷)의 말과 뜻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부사년(傅斯年)은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서

최근 산동, 강소, 안휘성 등지에서 발굴되는 古朝鮮式 분묘(墳墓)들을 근거로

“은(殷)나라는 동이(東夷)족이 세운 나라”라고 학계에 보고하였다.

 

또 『만성통보(萬姓通譜)』에도

“은상(殷商)은 단백달(檀伯達)의 후예”라 기록하고 있으니

밝달과 단백달은 같은 뜻이 아닌가.

 

심지어 중국의 정사(正史)라는 사마천의 『사기』조차도

“은나라는 동이족이고 주나라는 화족(殷曰夷周曰華丈云東曰夷西曰夏)”이라 하였다.

 

 

배달한국의 우사부 장관이며 태우의 한웅의 막내 황자인 태호 복희가

화족 정벌군을 이끌고 서녁[西進]으로 나아가 화산족의 반란을 평정한 후,

그곳에 나라(分國)를 세웠다.

 

복희는 진(陳,지금의 河南省)에 도읍하고

본국의 승인을 얻은 후 총독(總督)의 자격으로 임금이 되었다.

 

그는 치세 중에 팔괘(八卦)와 상형문자(象形文字)를 만들고,

혼인법을 제정하여 인륜의 도를 밝히는 등

화하족을 문명으로 이끄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복희가 붕(崩)한 후 여와가 뒤를 이었고,

왕위는 공공씨(工共氏)를 거쳐 15대 무회씨(無懷氏)에 이르렀다.

 

이때 신농씨(神農氏)가 일어나 복희의 나라를 치고

도읍을 진(陳)에서 산동성의 곡부(曲阜)로 천도하여

다시 8대를 전하다가 유망(楡罔)대에 이르러 헌원(軒轅) 황제에게 망하고 만다.

 

이상이 한국과 중국 상고사의 핵심 내용이다.

 

그러나 상고금문(上古金文) 연구에 자신의 전생애를 바친 낙빈기는

신농과 헌원을 동시대의 사람들로 보고 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신농과 헌원이

서로 겹겹사돈간이라는 놀라운 사실도 밝혀냈다.

 

 

맹자는 순임금이 동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孟子曰: “舜生於諸馮, 遷於負夏, 卒於鳴條, 東夷之人也.

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人也.

地之相去也, 千有餘里; 世之相後也, 千有餘歲.

得志行乎中國, 若合符節. 先聖後聖, 其揆一也.”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은 저풍(諸馮)에서 태어나 부하(負夏)에 옮겨 살다가

명조(鳴條)에서 죽었는데 동이(東夷) 사람이다.

 

문왕(文王)은 기주(岐周)에서 태어나 필영(畢郢)에서 죽었는데

서이(西夷) 사람이다.

 

출신지역의 거리가 떨어진 것이 천여 리이고,

세월을 서로 격한 것만 해도 천여 년이나 되는데,

그러나 뜻을 얻어 천하의 중심인 중원에서 도를 행하였다는

측면에서는 두 사람이 부절(符節)을 맞추는 것으로 정확히 일치한다.

 

선성(先聖)인 순()과 후성(後聖)인 문왕(文王)생각이나 행동이

한 몸에서 나온 것처럼 동일하다.”

 

 

※ 참고

 

저풍(諸馮): 산동성 제성현(諸城縣).


부하(負夏):()나라 지역으로 추정.


명조(鳴條): 산동성 정도현(定陶縣) 부근,

[서경] [탕서] 편의 서()에는 탕왕(湯王)과 걸왕(桀王)이 싸운 곳으로 나온다.


기주(岐周): 섬서성 기산현(岐山縣) 동북. ‘나라의 구읍.


필영(畢郢): [여씨춘추] [구비具備] 편에서 필정(畢程)으로 되어있다.

필정은 섬서성 함양시(咸陽市) 동쪽 21리에 있다.

필영은 문왕이 도읍한 풍() 지역으로 보는 살도 있고,

무왕(武王)이 도읍한 호() 지역으로 보는 설도 있다.


부절(符節): 돌이나 대나무, 옥 따위로 만들어 신표로 삼던 물건.

주로 사신들이 가지고 다녔으며,

둘로 갈라서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하나는 본인이 가지고 다니면서

신분의 증거로 사용했다.


 

 

 

 참고 <낙빈기의 남근신앙>

 

낙빈기가 말하는 좆(祖:남근신앙)과 황실을 잇는 혈통의 중심으로

최고의 존칭으로 칭한 자지(自持),

다음 임금자리를 이을 태보(太保:왕자)를 잉태하는

존귀한 여자라는 뜻의 보지(保地)에 대한 금석문학적 해석

 

 

 

"ㅣ"자는 신농이 지금 중국 산동성 곡부 태산(泰山)아래에서 나라를 열고
임금을 할 당시 시장터에서 유통되었던 청동으로 만든 돈(화폐)에 새겨져 있다.

소남자는 "ㅣ"을 하나님 신(神)으로 풀이하여 신패(神貝)로 불러야 한다고 했고
님(壬)이라 읽고 임금님(壬金任)으로도 새김질 했다.

 

또  "ㅣ"을 곤이라 읽는 것인데 이는 옛날부터 근본이란 뜻이고 보면
곤은 당연히 '꽂는다'는 뜻이다

"ㅣ"의 위쪽을 하늘 위라 했을 때 천신(天神)이 되고
밑둥치쪽을 땅 아래라고 했을 때 곤(坤)은 지신(地神)이 된다.

곤이란 소리값은 '꽂는다'의 '꼰'에서 온 것이라면

 "ㅣ"을 양(陽)을 상징하는 양물(陽物)이 꽂혀야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이치에 합당한 말이 될 것이다.

 

금문에서 십(十)은 "ㅣ" 의 허리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알을 밴 형상을 하고 있는데
십을 어원으로 하고 있는 우리말의 씹은 씨(種ㆍ卵)의 입이라는 뜻으로
입이 열려 삼라만상이 태어난다는 의미이다.

"ㅣ"은 한 분밖에 없는 하나님 님으로 읽을 수 있는 글자나 말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신의 최초의 글자가 'ㅣ'이다.

 

따라서 불의 씨, 불의 알, 남자의 양물이 바로 조상이라는 금문적인 해석을 모르고는
절대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 '도조(陶祖)'이다.

우리가 무심코 말하는 부랄ㆍ불알도 사실은 불의 알, 불의 씨
즉 염제 신농의 씨알, 신농의 후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자이다.

 

"│"자에서 자지 또는 좆의 'ㅈ'을 뿌리로 하는 음이 나온다.

 

"│"자는 바로 자지이며 성인 남자의 좆이다.

 

조상이라는 조(祖)의 어원도 바로 좆이고

조선이라는 조(朝)의 음운도 첫획 "│"에서 나온다.

 

"│"자는 신(申)자에서 신(神)으로 변해간다.

"│"자가 '자지 신'으로 발전하는 것은 다음단계인 '신(申)'에서 확인된다.

 

「설문해자」에서 "신(申)은 신(神)이다...

 

'확 구(臼)를 좇아서 스스로 가진 것(자지)이다(從臼 自持也)"라고 하였으며,

또 "환할 신, 아홉째 지지신"이라고 하였다.

즉, 여성의 음물을 표시하는 '절구 구(臼)'가 남자의 양물을 상징하는 절구공이,

즉, '기둥 주(│)를 둘러싸면서 "│"자가 다음 단계인 '신(申)'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확 구를 따르고 스스로 가진 것'이란 말에서 자지(自持)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여자를 쫓아(따라,從臼) 남자(自持)'라는 뜻으로

신(申)은 여자의 음물을 쫓는 남자의 양물이라는 뜻이다.

결국 '신'에서 나온 자지라는 말은 "│"의 순수 조선말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는 곧 자지가 곧 하나님이며 스스로 사람의 씨를 가진 사람으로

신농이 그 중에서도 으뜸 하나님이다.

「설문해자」에서는

"신(神), 하나님으로 만물을 끄집어낸 사람(天神引出萬物者也)이라 하는데,

신농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세상의 새로운 세상을 연(열 10)

하나님 신(神)으로"│"자는 열 십으로도 읽는다.

조정 또는 나라 '조(朝)'는 '사당 묘(廟), 할아버지 조(祖)'와 음이 같고,

그 뜻 또한 '하나 아비 조, 한 아비 조, 하나님 조(祖)'와 같은데

이는 고조선 문자인

남자의 생식기처럼 생긴 '조(且·남근모양)'자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자지 조(自持且)'의 조(祖)가 그 소릿값이기 때문이다.

 

 

 

 

※ 참고 <농초 박문기의 소리와 문자> 

 

 

 

원래가 자국의 글자라면

어느 글자이든지 다 단음(單音)으로 발음을 할 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나 일본 등 漢子를 쓰는 여러 나라 중에

단음으로 발음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오직 우리만이 어떠한 글자든지 다 단음으로 발음을 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해(海)’자를 중국에서는 ‘하이’라 발음하고

일본에서는 ‘우미’라 발음하는데

우리는 그저 한 소리로 ‘해’하는 것이다.

 

우린 이처럼 어떤 글자든 전부 한 소리로 발음되는 것이다.

또 형성문자(形聲文字)에 이르러서는 두 나라의 발음이 더욱 이치에 맞지 않는다.

 

가장 늦게 우리나라를 통해 받아들인 일본은 차치하고라도

중국은 어느 정도 근접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예를 들자면 합(合)이라는 글자는 사람의 입이 하나가 되는 소리를 형상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허’하고 발음한다.

 

즉 우리는 합하면 입이 닫혀 하나가 되는데

저들은 ‘허’하면 입이 되레 열려 버리는 것이다.

 

입(入)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입하면 소리가 들어감이 형상되는데

저들은 ‘루’라고 발음하므로 소리가 되레 나가는 형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출입(出入)이라는 단어를 읽으면 소리의 나가고 들어옴이 분명한데

저들은 ‘츄루’하고 발음하기 때문에

소리가 다 밖으로 나가는 형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여자의 아랫동네를 비(匕)자보다 더 원색적으로 형상한 글자가 있는데,

바로 구멍을 형상한 구(臼)자이다.

 

이 글자를 보면 양쪽으로 대음순, 소음순, 내음순이 다 그려져 있다.

 

한데 그 안에 도끼를 형상한 且(남자의 성숙한 양물같이 생긴 금문의 조자)자가

들어가면 이 사람들의 윗입에서 과연 어떠한 소리가 나겠는가.

바로 ‘흥, 흥’하는 소리가 나지 않겠는가.

 

흥(興)자는 바로 그러한 소리를 형상한 글자인 것이다.

 

여기서 且자 안에 일(一)자가 더 들어 있음은 바로 且가 들락날락할 때의 주름살이요,

 

아래의 팔(八)자는 양쪽 다리를 형상한 것이다.

그러한데 이 흥(興)자를 중국사람들은 ‘씽’하고 발음하고,

일본사람들은 ‘고’하고 발음한다.

 

저들도 다 그 일을 할 때엔 ‘흥, 흥’할 터인데 말이다.

 

한데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다.

 

그렇게 ‘흥, 흥’하면서도 이 글자를 원래 중국에서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與.与)자는 본시 남자의 도끼에 힘줄이 불끈 솟아오른 것을 그린 글자다.

 

이 도끼는 힘줄이 불끈 솟아야만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도끼가 여자의 아랫동네를 형상한 구(臼)자 안에 들어가면

그냥 좋아서 입이 떡 벌어지는 것이다.

‘여’하고 말이다.

 

여(與)자는 바로 그렇게 도끼가 들어가는 것을 소리로써 형상한 글자이다.

 

그러한데 중국사람들은 앞에서 대략 말했듯이

이 여(與)자를 ‘유이’하고 발음하고 있다.

 

이는 들어감을 형상하는 소리가 아니라 되레 빠져나옴을 형상하는 소리에 가깝다.

 

때문에 저들은 자연의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발음으로

‘참여한다’는 뜻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구(臼)자 안에 그 무엇이 들어갔지만 단단하지 못해

그냥 빠져 나오는 소리를 형상하는 글자가 따로 있다.

 

바로 늙은 남자를 상징하는 수(叟)자인데,

이 글자는 흥(興)자나 여(與)자처럼 구(臼)자 안을 꽉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또 해보고 또 해보지만 ‘수(叟)하고 그냥 빠져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수(叟)자를 양기가 다 된 늙은 남자를 표현할 때 써 왔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사람들은 이 수(叟)자를 ‘써우’하고 발음하고 있다.

 

이는 빠져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되레 들어가는 소리에 가깝다.

 

힘줄이 불끈 솟은 것은 되레 빠져나오는 소리를 형상하고,

 

달아질 대로 달아져 채워주지도 못하는 것은

되레 들어가는 소리를 형상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중국인들은 지금까지 무엇을 기준으로 성운학(聲韻學)을 익혀 왔단 말인가.

 

그들이 세계에 유래가 없다며 자랑하는

사성(四聲․上聲 去聲 平聲 入聲) 발음의 성운학이란

이렇듯 천지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구(臼)자의 속은 꽉 채워진 연후라야 아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또한 인간이란 구(臼)자에서 막 나온 벌거숭이 아이 때에

가장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臼)자 아래 어진 사람을 상징하는 인(儿)자를 쓰면

아이 아(兒)가 되는 것이다.

 

이 아(兒)자의 발음 또한 우리는 세상에 이미 나온 형상의 소리로써 ‘아’하는데,

중국발음은 되레 들어가는 형상의 소리로써 ‘얼’하고 있다.

경상도 사투리에서는 아이를 ‘얼라’라 이르기도 하지만,

이는 소리가 들어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오는 형상이기 때문에

중국발음처럼 무리하지가 않은 것이다.

이제 독자 제위께서는 잠시 구(臼)자 안에 그 무엇이 들어간

흥(興) 여(與) 수(叟) 등의 글자를 중국음과 비교하여 발음해 보시고,

구(臼)자에서 어진 사람이 나온 아(兒)자 역시 중국음과 비교하여 발음해 보시라.

과연 어느 발음이 천지자연의 이치에 맞는가 말이다.

 

또한 그러한 글자의 이치로 미루어 각(覺) 학(學) 등의 글자들을 생각해 보면

더욱 흥미로운 바가 있을 것이니 말이다.

 

박문기 선생의 같은 책 '혼인과 관련된 글자들'에서 그대로 퍼온 것임.

대저 혼인(婚姻)이라는 말은

본시 남녀가 어두울 때 예식을 하고 결합하는 일을 말함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혼인이라는 혼(婚)자를

녀(女) 변이 없이 어둡다는 뜻의 혼(昏)자로 썼던 것이다.

이 혼(昏)자는 씨(氏)자와 일(日)자가 합쳐졌으므로

 ‘씨 내리는 날’ ‘씨 받는 날’ 등으로 그 뜻이 통했다.

 

뒷날 녀(女) 변을 붙여 혼(婚)자로 쓰니

그 뜻이 더욱 분명해 져 ‘계집이 씨 받는 날’이라는 형상을 그린 글자가 된 것이다.

사위란 딸의 짝을 말한 것이므로

그 글자가 짝을 뜻하는 필(疋)자와 딸(月)자가 합쳐진 것이다.

 

즉 옛날에는 사위라는 글자를 사(士) 변 없이

서(胥)자로 써도 세상에 다 통했던 것이다.

 

뒷날에 이르러 사(士) 변을 붙여 서(壻)자로 쓰고 있지만 원래의 뜻만 못한 것이다.

며느리란 아들의 처를 말함인데, 여자가 빗자루를 지닌 뜻이므로

글자가 녀(女)자와 빗자루를 상징한 추(帚)자가 합쳐진 것이다.

 

즉 며느리는 빗자루를 들고 집안을 청소하는 일부터 익힌다는 뜻의 글자인 것이다.

그리고 며느리라는 본래의 말은 젖이 아직 다 크지 않은 소녀를 뜻함인데,

이를 맞아들여 손자를 낳게 하고 가계를 잇게 한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딸의 지아비를 사위(査尉)라 하고

양가의 부모가 서로 이르기를 사돈(査頓)이라 하는데,

목(木)자와 조(且)자가 합쳐진 이 사(査)는

바로 남의 조지(祖至.좆)의 형상을 그려 놓은 것이다.

이는 다른 이를 일컫는 ‘남’이라는 말을 우리 속언에 흔히 ‘나무’라 발음하기 때문이다.

 

즉 나무라는 목(木)자와 할아버지라는 조(且)자를 뜻으로 읽지 아니하고

소리나는대로 읽음에 ‘나무(남의) 조지’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또한 목(木)자를 파자한 十 八을 조금 된소리로 읽으면 ‘씹할’이 되기도 하므로,

且자를 합하여 읽는다면 ‘씹할 좆’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물형을 그린 글자를 물형을 말하는 소리로써 사용한 예는

갑골문에도 간혹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갑골문에 새를 형상한 조(鳥)자를

새로이 다시 한다는 ‘새’자로 표기했던 것을 말할 수 있다.

원래 우리가 날이 어두울 때 혼인을 했다는 사실은

중국의 사서 '삼국지' 「고구려전」에도 대략 기록되어 있다.

‘그 풍속에 혼인을 하려면 혼담이 이미 정해진 후에

처녀집에서 집 뒤에다 작은 집을 짓는데, 이름하기를 서옥(婿屋)이라 했다.

사윗감은 날이 저물 때 집 밖에 이르러 이름을 밝히고 무릎 꿇어 절을 하고서

처녀의 방에 들어감을 허락해 주기를 빈다.

이와 같이 하기를 두세 차례 한 후에야 처녀의 부모가 드디어 허락하고

사윗감으로 하여금 그 작은 집에 들어가 잠을 자게 한다.

집 곁에는 돈과 비단을 쌓아 두고서 아들을 낳아 다 자라야

신부를 데리고 집에 돌아간다’

대개 이러한 풍속은 근세에 까지 이어져 왔다.

 

구한말까지만 해도 양가의 규수가 혼인을 하면 바로 시집에 들어가 사는 것이 아니라

3년 혹은 5~7년 동안 친정에서 예법을 익힌 후에야 시집에 들어가서 살았던 것이다.

대략 상기한 바를 뭉뚱그려 보자면 글자란 어느 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여러 철인이 다듬어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동양에서 쓰고 있는 대부분의 글자가

다 우리의 말과 우리의 풍속에 근원을 두고 있어

중국인의 조상들이 만든 글자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사람(史覽) 집(家) 조지(祖至) 보지(보{숟가락 匕 아래에 열 十} 至)

혼인(婚) 사위(胥) 등등 어느 하나도 중국의 문화와 말에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데도 지금 사람들은 글자의 유래나 우리말의 근원을 연구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한문이라 하여 중국의 문자로만 알고 있다.

 

가르치는 선생도 그러하고 배우는 제자도 그러하니 실로 괴이하기만 한 일이다.

 

 

 

 

 

- 아리랑고개-“북대흥안령”, ·한 분족의 천년 석별 고개

 

주채혁 <김동길교수의 Freedom Watch 2012/10/01()>

 

 

북대흥안령 훌룬부이르 몽골스텝 대선비산에 조선(朝鮮선비(鮮卑)의 선족겨레,

조상 제사동굴이 있지요.

 

난 그 화강암 동굴을 단군 탄신의 그 동굴 가셴둥”(嘎仙洞)이라고 부릅니다.

 

그 앞을 영동 쪽으로 흐르는 강물이 아리수이고,

아리수의 원천을 따라 오르다가

영동에서 영서로 넘는 고개가 아리령(阿里嶺) 고개랍니다.

 

원천명(源泉名)을 고려해 고개이름을 부르는 현지관행을 따라서 명명한 이름이지요.

 

아리랑(阿里嶺)고개”: 아리랑의 아리(阿里)맑은 물이라는 뜻인데

요즘 한반도에서 이르는 건강 생수와는 조금 다른 의미인가 봅니다.

 

몽골스텝에는 담수호와 염수호가 반반 쯤 있는데,

담수만 생명이 마시고 사는 물이라니까 맑은 물은 생물의 생명수인 셈이지요.

 

북대흥안령을 넘나드는 열차에서는 천안 명물 호두과자 식으로

흥안령 명물 아리표 볶은 수박씨도 판답니다.

 

유목민은 유목목초를 따라 몽골리안 루트를 타고

남미까지 이동해 가도 태생지 땅이름을 가지고 가는 관행이 있다네요.

 

영원한 탈향난민으로 태어난 이들이 유목민들이어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서울의 한강을 광개토대왕 비문엔 아리수(阿利水)라 했는데,

아마도 그 뜻은 맑은 강물이 아닐까 합니다.

 

청천(淸川)도 같은 의미일 수가 있겠지요.

 

아리령 고개를 좌우로 영동은 태평양의 해풍권(海風圈)()지대

()순록 순록 유목권이고

영서는 해풍이 못 미치는 몽골스텝이란 기()양 유목권이지요.

 

아리령을 좌우로 바다와도 같은 두 권역이 병존합니다.

 

기원전 6~7세기경 스키타이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영동의 순록유목이 이지대 대세를 아주 오랫동안 주도해오지요.

 

그러다가 철기가 들어와 생산력이 그보다 10여배는 높지만 개방공간이라

무한경쟁이 강요되는 몽골스텝으로 진입해 기마 양 유목을 하게 됐습니다.

 

이로부터 최첨단 유목무력 기마사술(騎馬射術)을 확보해

영동의 순록치기를 영서의 양치기가 주도해

호눈(呼嫩)평원을 최후로 통합한 유목제국의 칸인

활의 임금(弓王) 동명성왕 고올리칸 또는 놈온 한이 출현합니다.

 

인류사는 세계제국을 지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유라시아 구대륙의 그것은 13세기 팍스 몽골리카로 이룩됐으니

그 씨앗이 이때 여기에 심어진 터이지요.

 

그래서 동북아시아 유목제국의 태반 맥고려(貊高麗)

 

몽골의 기원지 부이르호반

2000여년 천신(薦新)을 거듭하며 모셔져오는 고올리칸(Goolikhan) 석인상이

동북아 유목 제국사의 부동의 중심으로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1960년경에 저우언라이(周恩來) 수상이

·중 합동 호눈평원 상고사유적 발굴 직후에 직접,

한국사가들의 이 성역 출입 차후 절대금지 긴급조치를 황급히 취해버렸지요.

 

작금의 글로벌 시장경제체제 하에서 생존상 부득이 종중(從中)을 하더라도

사실은 바로 알고 해야, 죽어도 살고 살면 반드시 이기지요.

 

사실(史實)은 오직 하나!

 

남북분단 2000여 년 전의 이야깁니다.

 

그 후 그런데 일단 광대한 고올리농장터를 일구며

천하의 요새 부이르호반 할힌골-홀본(弓江)일대에 고올리칸국을 창업하고 나서,

그 중의 고지대 맥()사냥꾼 출신의 후예들을 주축으로 하는 일부는

몽골스텝을 향해 계속 서남진을 해 몽골(貊高麗)인이 되고

순록유목태반 지향 성향의 상당부분은 헤이룽 강 쪽 동토지대 순록유목지를 향해

동북진하여 조선-부여-고구려의 주류를 이루게 됐다고 봅니다.

 

추정컨대, () 주도 예() 통합으로

예맥(濊貊)의 고올리칸국을 드디어 창업해낸 후에 다시,

태평양 해풍권 저습지대 순록치기의 정통성을 밀도 높게 이어받은

예족(濊族: Buir-숫수달 사냥꾼)

태평양 해풍 소외권 고원지대로 진출해 기마 양치기의 정통성을 지향하며

계속 발전해간 맥족(貊族: Elbenkü-山獺=너구리) 위주의 계열이

일대의 역사적인 분화를 일으켰겠지요.

 

맥계(貊系)와 예계(濊系)의 일대 분화,

그러니까 미(: 양치기)와 려(: 순록치기; Chaatang)태반 지향세력

곧 몽·한 간의 일대 분열이 야기된 셈이겠지요.

 

양 유목민 주도의 순록 유목민 통합이 진정한 유목제국의 효시라면,

그 과정에서 형성된 동북아시아권

“Meili심미안”(美麗審美眼메이리”: Beautiful; 謝光輝 主編 󰡔常用漢字圖解󰡕

北京대학교 출판사 1997. 38, 472쪽 참조)의 대대적인 이합집산이 감행된

한민족 천년의 석별(惜別)이 아리령고개를 기점으로 감행된 듯합니다.

 

이런 유장하고 처절한 한민족의 극적인 일대 분화가 빚은 문화의 역사적 총화로

아리랑 민요가, 한겨레의 영혼심층에 시공을 넘어서

깊고 넓게 아로새겨져 온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즈음에 여기서 이 지역 원주민들의

몽골과 한국의 할힌골(忽本: 弓江 추정) 언저리 분족(分族)”

증언과 맞아 떨어지는 한민족사상 최대의 민족집단 천년 석별 서사시가

쓰이게 되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이보다 더 크고 본질적인 한민족 집단별 일대 분화 사건이

역사상에 더는 없어서이지요.

 

대부분이 문맹으로 보이는 이곳 호눈평원 원주민들이

이런 사시(史詩)를 구전할 뿐만 아니라 아직도 이 석별의 천년 한을 되새기는

일정한 상호간의 의례를 서로 간에 베풀고 있습니다.

 

몽 공동 동몽골 대탐사단이 1992728일에

·한 수교후 처음으로 부이르 호숫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촌로 잠스랑수렝(Жамсарансүрзн: 67)과의 회견에서

이런 관계 구비전승자료를 채집합니다.

[당년 연말 SBS-TV 송년특집 다큐멘터리유목민의 땅 몽골을 가다

(홍성주 PD 제작)로 방영]

 

이곳의 부녀자들은 게르()에서 나와 말()을 보러 가면서,

곧 화장실에 가면서 몽골 부녀자와 고올리 부녀자가 서로 마주치면,

몽골 부녀자들은 서남쪽에서 왼쪽 손을 들어 북동쪽을 향해 한번 돌리고

고올리 부녀자들은 북동쪽에서 오른손을 들어

서남쪽을 향해 한번 돌려 인사를 합니다.

 

몽골 사람과 고올리 사람은 본래 한 종족이었는데,

몽골 사람들은 여기서 서남쪽으로 가서 몽골 초원의 유목민이 되었고

고올리 사람은 여기서 북동쪽으로 가서 고올리 사람이 되었으므로

서로 한 피붙이인 동기간임을 일깨우는 인사의례이지요.

 

일찍이 1970년경에 베. 수미야바아타르 교수는

부이르호반 숑크() 타반() 톨로고이()에 있는 고올리칸 석인상은

동명성왕상으로 몽골과 고()려의 공동조상임을 지적하고,

여기서 동북쪽으로 이동해간 이들이 오늘날의 농경 한국인이고

서남쪽으로 이동해간 이들이 오늘날의 기마 양유목민 몽골인이라고 설파했지요.

 

그의 이러한 견해는 이에서 그대로 입증됐습니다.

 

그 후 박창범 교수의 고구려 일식기록 분석결과

<『하늘에 아로새긴 우리의 역사김영사 2002>에서

그 최적 관측지가 압록강 일대가 결코 아니고 바이칼호 우측 몽골지역이라고 한 것이,

놀랍게도 이 지역 원주민들의 몽골과 한국의 할힌골 언저리 분족 증언과

맞아떨어지기도 했답니다.

 

같은 일식현상이라도 측정지에 따라 그 모양이 판이하게 다를 수 있어서

그 천착이 가능한 연구였습니다.

 

아리랑고개”: 아리령(阿里嶺)고개의 말뜻을 여러모로 헤아려 짐작들을 해 보지만

무애와 두계의 고지명설이 가장 무게가 있는 것 같다던

은사 서여 선생님의 혼잣말을,

곁에서 엿들어 몽골스텝의 거대축제 나담(Naadam)의 장가조 축문가락을

아련한 기억 속에 이에 곁들이며 IT시대를 맞아서도 난 아직껏 되새기고 있습니다.

 

1994년 초가을에 우리는 파른 선생님을 모시고 홍산문화권 서북단

다리강가 몽골스텝에서 고올리 돌각담 무덤을 발굴하면서 그해 한가위를 맞았지요.

 

날짜를 조금 앞당겨 맞는 한반도의 추석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놀랍게도 가을걷이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에

정확한 추석날을 누림을 깨닫게 됐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도 내가 수고해 만들어 태어난 게 없는 이 목숨이,

보내신 부모님 심정을 저마다 보름달보다 더 무겁고 환하게

올 한가위에 더불어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多勿(Ergune)

 

 

 

 (사진 위) 文泉 裵永一의 글씨.

 

多勿都는 몽골의 기원지 Ergone('되물림': 額爾古納市),

그 땅에 활겨레同胞 胎盤인 불함(Burqan) - 紅柳동산이 있음에서다.

 

내가 내 목숨과 내 목숨사랑을 빚지고 태어 났으니, 가르침의 핵심은 그 생명사랑.

세상에 어느 聖母의 배움집이 유안진 시인의 모태 '무릅학교'보다 크랴!

 

 

(사진 아래) 가셴둥(嘎仙洞) 단군신화의 무대로 추정되는 훌룬부이르시

 

오룬춘기(鄂倫春旗) 대흥안령분수령 바로 동쪽 嫩江(눈강) 최상류에 있다.

1980년 米文平의, '위서'의 탁발선비 선조 석실 석각축문(443년) 발견으로 확인,

조선 · 선비의 鮮(Soyan)족 조상제사터.

화강암 절벽의 석굴입구: 서남향, 20m(너비) ×12m(높이).

석굴내부: 최고치 90m(남북 길이) × 27m (너비) ×20m(높이).

석기시대 ∼ 철기시대 유물출토.

 

 

 

헤이룽장성 최북부에 위치하는 이레이후리산(伊勒呼里山)에서 발원해

대싱안링(大興安嶺)과 샤오싱안링(小興安嶺)산맥에서 각각 흘러내리는

30여 개 하천이 합류하여 남쪽으로 향하면서 넌쟝(嫩江)을 이루는데,

백두산 호랑이로 상징되는 한국의 白頭山(2744m)과는 달리

이곳은 지하에 빙하가 흐르는 드넓은 순록”-Chaabog 유목지대랍니다.

 

순록의 주식 선(:Niokq)이 나는 선(: Sopka, 小山)이 산 이름을 이루고 있지요.

 

바로 이 이레이후리산맥~대선비(大鮮卑: Sayan; 러시아어발음)산맥 중에

그 유서 깊은 (Soyon)의 조상제사동굴 가셴둥(嘎仙洞)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조선(朝鮮)의 선(: 공활한 툰드라 이끼밭)이 눈앞에 어른거리지 않나요?

 

호랑이의 생존생태 한계선이 이지대 이남이어서,

난 곧잘 수림툰드라지대에 자리 잡은 여기 이 가셴둥(嘎仙洞)

곰녀와 범녀의 환웅(桓雄)을 둔 사랑겨루기 동굴자리로 상정해보곤 하지요.

 

그 서남향의, 최고로 저명한 드넓은 양목초지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을 지향해

에르구네(多勿)도 있고 할힌골(忽本)도 있으며

유구한 계기적 전승유적 고올리칸(東明王) 석인상도 좌정해 있답니다.

 

이후에, 이런 나의 뜻밖의 특이한 행보에 관해서는 이듬해 봄 어느 목요일엔가

 김동길의 목요강좌에서 더불어 얘기들을 나눴습니다.

 

담소 중에도 속으론 요동과 요서의 목초(牧草)가 어떻게 성격이 다르며,

대싱안링 남부 홍산문화권과 북부 호눈선원(呼嫩鮮原)문화권

15,000년전 후기빙하기말 이래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어떠한 생태 변화와 차별성을 지니면서 각각 발전되어왔나를 생각해보았지요.

 

돌아오는 길에는,

삭풍(朔風)과 황해 및 동해의 바람길들이 상충하며 일으키는 미친 듯 한 거대돌풍과

요서 사해(査海) ()의 기원지 기괴한 초대형 광풍풍경도 상상해봤습니다.

 

몽골고원에는 담수호와 염수호가 대략 반반쯤 분포돼 있는데,

물론 담수(淡水) - 맑은 물(Ali=阿里水)이어야 뭇생명이 마시고 살 수 있지요.

 

선족(鮮族=선비족)의 조상제사터 가셴둥(嘎仙洞) 앞을 흐르는 아리하(阿里河)

원천을 지나 더 올라가노라면 넘어야하는 고개를 아리령(阿里嶺) 고개로 추정해보고는

근래에 이를 검증키 위한 답사를 추진해 감행하려 했으나,

당지의 당국이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는 간접적인 기별을 보내와서 접고 말았습니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이행하는 순록치기 Chaatang 조선의 기마 양치기화와

 Ergune-Burqan 구토회귀 과정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조선민족 유목태반제국

창업사상의 결정적인 일대의 역사적 사건이 빚어낸 노랫가락이어서

그 후 시공을 넘어서 모든 조선겨레에게

구석구석 빠짐없이 배어든 아리랑 타령일 수 있다는 생각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사뭇 내 뇌리에 감돌아오고 있지요.

 

19936월 중순,

바로 이 지역 울란우데 부리아드 코리(Qori) 동네에서

학술회의 뒤풀이 잔치자리 노래판이 벌어졌지요.

 

바이칼호반 원주민들과 이탈리아인들은 세계적으로 가창력을 인정받는 터라서

그렇지 않아도 음치 수준인 내가 기가 푹 죽어 있는 판에,

먼데서 온 코리(高麗: ‘’) 부리아드 동포 교수라며

굳이 내게 막무가내로 한 곡을 청해댔지요.

 

어쩔 수 없이 입을 떼긴 했는데 부르는 족족

그만! 그만!”하며 사정없이 다 퇴짜를 놨습니다.

 

역시 난...!” 궁지에 몰려 난감해진 나는

마침내 비장의 무기 아리랑 타령을 되든 안 되든 한껏 신명나게 내뽑아댔습니다.

 

앙코르! 앙코르! 앙코르! 그건 당신네 가락이 아니고 우리네 가락이야 앙코르!”

 

역시 활겨레(弓族) 동포 코리족(高麗族)!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피는 못 속이는구나보다했지요.

 

비록 연구내용의 핵심에 유목성 본질이 깊이 각인돼 있는

본격적인 논저는 아직 아니라지만,

그래서 박치정 교수님의 고구려 아리랑(도서출판 더씬 2012)

코페르니쿠스적 역사생태인식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절체절명의 계제인 정보화혁명시대에 오랜 분단조국의 통일을 하루라도 빨리

앞당겨야 할 지금의 우리가 문제제기 차원에서라도 눈여겨볼만 하다고 하겠습니다.

<주채혁 전 세종대교수>

 

 

 

- 고대 문명의 발상지는 발해만 연안이다 

 

 

“빗살무늬를 쓰던 사람들은 시베리아, 몽고의 신석기 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각지의 문화를 발전시켰다.”(1983년판 국사교과서)

 

“빗살무늬 토기와 함께 빗살무늬 토기를 쓰던 사람들이

시베리아에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한국고고학개설’ 73년판)

 

“한반도 신석기문화는 기원전 8000년 시베리아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고아시아족

(고 시베리아족)들이 중국 동북지방과 연해주 지역을 거쳐

한반도로 이주해오면서부터다.

빗살무늬를 비롯한 출토 유물은 내몽고, 바이칼호 주변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연관

관계를 갖고 있고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뿌리를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신석기문화의 시베리아 전래설을 처음 주장한 것은

일본인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 였다.

 

“1930년대 한반도에서 출토된 새김무늬(선무늬의 일종)를 유럽과 시베리아에서

보이는 토기와 연결시켜 즐목문(櫛目文) 토기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우리민족의 시베리아 기원설이 정설로 되어왔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신석기문화는 빨라봐야 BC 4500년이다.

사해 흥륭와 문화보다 1000년이상이나 뒤진 문화이다.

 

사해 흥륭와 유적의 발굴로 고대문화의 시베리아 기원설은 발붙일 곳이 없다.

 

발해연안이 신석기 유적의 본향이며

발해연안에 정착한 우리민족이 자생하여 창조한 찬란한 신석기문화와

청동기문화 및 총(塚), 묘(廟), 단(壇)이 모두 나타나는 홍산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문명을 일궈내는 젖줄이었다.

 

총,묘, 단이 모두 나타나는 우하량은 홍산인의 성지였고

제정일치 시대였던 당시에 임금이 하늘과 소통하던 곳이었다.

 

홍산문화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문명보다

무려 1-2천년이나 앞선 인류의 시원문명이다.

 

홍산문화는 환단시대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환국.배달국.고조선이라는 동북아 시원역사를 인정해야

홍산문화를 포함한 발해연안의 그 엄청난 유적과 유물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  밝달민족

 

 

국가에서 四時의 대대적인 사냥을 시작할 적에 사냥하는 장소에

남쪽에서부터 북쪽까지 모두 네 군데 표시를 해두고 표시한 곳마다

軍法의 창시자인 軍神에게 제사를 지낸다.

제사의 명칭은 貊祭라고 한다.

<周禮 5券 春官宗伯 第3>

 

後漢의 한학대가인 <鄭玄(127-200)>은 周禮에 나오는 이 貊祭에 대한 주석을 내면서

貊祭의 제사 지내는 대상은 軍神 <치우蚩尤>라고 하였고,

 '貊'자에 대해서는 '貊讀爲十百之百'이라고 말하였다.

 

<鄭玄>은 貊자를 맥이 아니라 십 백의 백과 같은 발음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鄭玄>은 貊族의 東夷문화에 대한 조예가 깊은 인물이다.

 

<鄭玄>의 주장에 따르면 西周시대에 사냥을 할 때 지냈던 貊祭는

밝달족의 승리의 화신으로 일컬어지는 <치우>에게 지냈던 제사인데

그 제사의 명칭은 맥제가 아니라 '밝제'로 발음해야 된다는 것이다.

 

貊은 '밝'의 한자음을 표기한 것이다.

 

貊은 곧 '밝'이며 貊族은 곧 '밝달족'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濊貊민족은 鳥夷민족과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비교적 합당할 것이다.

 

예맥족은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이며 동시에 또한 강대한 민족이기도 하였다.

 

漢나라 초기에 중국의 북쪽지역(섬서성, 산서성, 하북성의 북쪽)과

황해, 발해연안(조선반도를 포함)에 모두 그들의 足跡이 있었다.

 

그들은 일찍이 자신들의 피와 땀으로 이 일대의 황무지를 개척하였는데,

그것보다 빠른 西漢 이전의 시기에는 鳥夷민족(새 토템집단)의 한 갈래로서

소호(少皞)씨 족에 속해 있었다. 

 

舜 임금과 그리고 殷나라와는 혈통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동이집단 중의 각 민족들과도 많게 혹은 적게 혈연관계를 유지하였다.

 

史前의 흑도문화시기로부터 有史시대에 이르기까지

저들은 하나의 일관된 맥을 유지하며 발전해 왔다.

 

우리가 만일 저들이 오늘날의 누구인가를 가정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역사사에서 볼 때,

민족의 혼합사건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미 한두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文崇一 「濊貊民族及其文化」 「中國古文化」 東大圖書公司 1990 p 233-234>

 

 

중국의 역사학자 <文崇一>은

 

"예맥민족은 중국민족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鳥夷민족의 시조 소호의 후손이고,

동양사회에서 문명을 연 지도자로 일컬어지는 舜임금과

또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중국의 첫 국가인 殷나라와는 혈통이 같은 종족이며,

중국의 산서성, 하북성 일대 북방과 황해. 발해 유역에서 활동한 강대한 민족이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예맥민족은 중국 역사문화에서 아류가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고 개척한 주체요 주인이었다.

그리고 그 적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인인 것이다.

 

 

 

 

맥족은 동양역사상에서 한족을 제외하고는 이 민족의 程度가 가장 높았다.

 

옛 '동방의 군자의 나라'라고 지칭했던 것은 바로 이 맥족을 가리켜서 말 한 것이다.

 

고대의 맥족들은 요녕성. 열하성(청나라 때 설치한 성. 현재의 요녕성과 하북성 사이).

하북성의 사이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다가 燕나라가 5郡(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을 개척한 이후로부터

발전하여 동북 지방에 도달하였다.

 

이 민족에서 갈려나간 分支가 건국한 나라로 지금 길림성 서쪽 지역에 부여가 있었다.

 

조선반도쪽으로 남하한 이 민족은 고구려와 백제로 나뉘어졌다.

 

부여는 3세기 초에 멸망했는데 고구려. 백제는 날로 더욱 창대하여

끝내 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이 민족의 문화가 殷나라와 유사한데 그것은 箕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고대의 조선은 한반도에 있을 수가 없었다.

 

대체로 燕나라의 개척에 의해서 동쪽으로 발전해 나아간 것이다.

<呂思勉 「總論」「中國民族史」 중국대백과전서출판사 1987, p.3>

 

 

중국 근현대 역사학계의 태두(泰斗)인 <呂思勉(1884-1957>은

漢族이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秦.漢이 南越을 평정하고

西南夷를 개척한 이후부터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秦.漢 이전 동양역사상에서

가장 수준이 높았던 위대한 민족은 맥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은 한반도에 있을 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대동강 낙랑설을 중심으로 반도사관에 빠져있는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다.

 

 

밝달민족은 상고시대에 내몽고 적봉시의 요서 사해유적과 홍산문화 유적에서

활동하다가 하북성 남쪽 역수(易水)(濊水: 중국발음에서 역과 예가 유사함)유역으로

이동하여 예맥(濊貊)을 형성하였다.

 

 

동북방의 홍산지역에서 동아시아 문명의 서광이 먼저 열리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이 지역은 오늘날의 내몽고 남쪽, 하북성의 동쪽으로 농경과 수렵이 동시에 가능하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초원이 있고 서쪽으로 들어가면 농경지대가 있으며

내려가면 발해만이 있어 농경과 목축과 수렵이 동시에 가능한,

드넓은 중국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은 천혜의 땅이다.

 

따라서 중원이 아닌 이곳에서 동아시아문명의 서광이 최초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우리 한국인은 아침해가 선명한 밝달에 첫 국가 고조선을 세우고 오늘까지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밝달민족의 적자. 적손에 해당한다.

 

 

중국의 역사학자 서량지(徐亮之)의 증언을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연구를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세석기(細石器) 때 한 무리의 문화부족(文化部族)이 맨 처음으로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수 근방에서 살았었는데,

그들이 바로 중국의 전설적인 염제신농(炎帝神農)의 본족(本族)이다.

 

그들 민족은 『서전(書傳)』 「우공편(禹貢編)」의 기록에 보이는

조이(鳥夷), 우이(隅夷), 래이(萊夷), 회이(淮夷), 석지직피(析支織皮)이며

은(殷)나라 당시의 복사(卜辭)로 적은

이방(夷方), 토방(土方), 길방(吉方), 강방(羌方), 괴방(鬼方)

또 주(周)나라 때의 이(夷), 적(狄), 험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호(胡), 맥(貊), 흉노(匈奴) 그리고

위(魏)나라, 진(晋)나라 때의 오환(烏丸), 선비(鮮卑) 등이 모두 그들의 후손이다.”

 

 

또 다른 중국의 역사학자 임혜상(林惠祥)의 연구결과를 살펴보자.

 

“한족(漢族)의 대부분은 동이(東夷)로부터 나왔다.

 

중국의 진(秦)나라 이전의 동이(東夷)는

중국의 동부지역인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및 회수 일대를 넓게 점령하고 살았고,

그 갈래로는 우이(隅夷), 회이(淮夷), 서융(徐戎), 도이(島夷), 래이(萊夷), 개이(介夷),

근모이(根牟夷) 등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순(舜)임검은 동이(東夷)사람이다.

 

제(齊)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도 동이(東夷)인이고,

은(殷)나라도 동이(東夷)가 세운 나라이다.

 

그러나 B.C 246년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중국 내의 동이족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졌거나 한족(漢族)에 동화되었다.”

 

 

우리 밝달민족이 지난날 동아시아의 역사문화를 창조한 주역으로서

漢族과 함께 중국 대륙을 지배한 위대한 민족이었다는 주장은

국수주의자의 잠꼬대나 민족주의자의 자화자찬이 아니라

중국의 권위있는 역사학자들도 이미 인정한 엄연한 역사적 진실인 것이다.

 

단지 아직도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일부 강단사학자들만이 이를 부정하고 있을 뿐이다.

 

일제의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1875-1953)>는

지금 일본의 아베 수상의 할아버지이다.


일본이 패전하고 조선총독부가 폐지되자 1945. 9.12 일본으로 떠나면서


"일본은 졌다.

그러나 조선이 승리한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란 세월이 훨씬 더 걸릴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사관을 심어 놓았다.

결국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사람으로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 일본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광복 75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는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우리의 시간마저도 가지지 못한 채 일본 동경의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국제 공항의 시계를 보라!

 

중국의 북경이 10시일때 북한의 평양은 10시 30분, 도쿄 11시, 서울도 11시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원활한 무역을 위하여

일본의 시간을 그대로 사용하여 온것이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시간은 바로 책력이다.

 

우리는 아직도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대로 일본의 책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가 말한 실로 위대하고 찬란했던 조선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는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의 세월이 걸린다 하였으니

이제야말로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하루속히 우리의 손으로 쓴 우리의 역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참된 역사를 찾기 위하여는 우선 식민사관에 의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외국 학자들이 보는 동이족(東夷族) - 오소운 목사

 

 

지금의 중국 중심부, 이 지역의 역사를 논할 때,
그 중심에 있으면서 동아시아를 지배한 어질고, 예절바르고, 창의력이 넘치고

또 평화를 사랑하는「동이족(東夷族)」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해동성인(海東聖人)으로 추앙받는 공자(孔子)도 동이족이요,

주역과 역법(曆法)을 창안했다는 희화자(羲和子)는 물론,
농사법과 의학을 발전시켰다는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도 동이족이다. 
 

동양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는 최고의 성군(聖君)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 동이족이요,

최초로 철갑(鐵甲)에 구리투구로 무장한 치우(蚩尤) 천황도 동이족이요,

갑골문자, 상형문자, 표의문자, 한문자(漢文字, 소위 漢文)를 만든 것도 동이족이요,

절개로 유명한 백이(伯夷)숙제(叔弟)까지도 동이족이다.

 

 

 

(1) 서량지(徐亮之)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 선생이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대만학자 서량지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으로서,

문자를 창제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로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뜻으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한국식으로 넙죽 큰 절을 올렸다 한다.

 

서량지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년10월초판)에서 이렇게 썼다.

 

 “4천 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그는 또 이렇게 썼다.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서량지 교수는 또 이렇게 썼다.


“중국의 책력법(冊曆法*달력)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小 以前便已發明.

 

세석기(細石器) 문화를 지닌 부족이 최초로 거주한 곳은,

지금의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근처이다.
곧 중국의 전설 가운데 등장하는 염제신농 등의 본래 종족이 있던 곳이다.”

 

“동방 인종의 오행(五行) 관념은 원래 동북아에서 창시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東方人種之五行觀念 原係創始于東北亞洲).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2) 장개석(蔣介石) 

 

중국 총통 장개석(1887-1995)은 이시형 상해 임시정부 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고향이 옛날 백제{대륙백제} 이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의 선조는 대륙의 주인이었는데 당신은 그것도 모르고 있었소? 
 그러니 나라를 빼앗겼지."

 

 

(3) 임어당(林語堂)


중국의 석학이요 저명한 문학평론가인 임어당(1895-1976)을 만난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1902-1999) 박사가 여담으로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안호상 :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놓아서 한자를 사용하는 우리나라는

             한글 전용에 문제가 많다."
    

그러자 임어당이 놀라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임어당 :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동이족 조상이 만든 문자를 우리가 빌려 쓰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무안을 당한 안호상 박사는
이후 평생을 민족사관에 매진 역사를 다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4) 왕동령(王棟齡) 

 

중국 역사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 《중국사》에서 이렇게 썼다.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
현재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 등

지방은 본래 묘족(苗族=東夷)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묘족(苗族)은 오늘날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호북, 호남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소수민족이며,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도 고대에는 동이족의 한 지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려(句麗)는 구려(九黎), 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으로,

구이의 군주가 치우(蚩尤)라는 사실말하고 있다.

 

黎東夷國名也 九黎君號蚩尤是也 蚩尤古天子 三苗在江淮荊州 

<史記 五帝本紀>  

 

그는 이런 글도 썼다.
 
“4천 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이다.”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묘족(苗族)은 오늘날 현재 중국변방에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묘족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치우천황을 기리는 정통 구전가요가 올라 있어 원문과 함께 번역해 실린다.

 

치우만가(蚩尤挽歌) (묘족 전통 구전 가요)

千古奇才横空贤   천고기재 영웅이신 치우 천황을

可堪并论炎黄间。염제씨나 황제씨와 어찌 비하랴
五兵刑法君始点   5병기와 형법까지 친히 만드사
九黎生气冲云天。구려백성 사기높여 충천케 했네
席卷中原华夏联   중원땅의 하화연맹 쳐서 이기니
血染江河五千年。오천년의 강의 물이 피로 흐르네
英名不因涿鹿   탁록에서 패한것이 원인 아님은
老黑石山百花鲜。흑석산의 고운꽃이 증언 하누나
   
예기(禮記)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묘족은 구려(九黎)의 후예다. 구려를 묘(苗) 민족의 선조로 삼고 있다.”
苗九黎之後 九黎爲苗民先祖

<禮記>
 
 
   
(5) 임혜상(林惠詳) 

 

 

홍콩대학의 임혜상(林惠詳) 교수는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맹자가 말하기를「순(舜)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우리가 순(舜)임금은 은(殷)나라 사람의 조상임을 추측하여 알 수 있다.
은나라 사람이 바로 동이인데 동방에서 흥기(興起)하였다."

   
 

 

(6) 양관(楊寬)

 

중국의 학자 양관(楊寬)은 그의 저서《고사변(古史辯), 1927》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현조(玄鳥)는 은(殷)나라 사람과 동이(東夷)의 조상신이다.”

玄鳥是殷人東夷的祖先神.
 

또 같은 책 상편에서는,

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
태호(太昊), 제준(帝俊), 제곡(帝곡), 제순(帝舜), 소호(小昊),

그리고 설(契) 등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근래의 사람들이 이미 명확히 증명하는 바다.”

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
   
 

 

(7) 노간(勞幹) 

 

대만학자 노간(勞幹)은 중국문화론집(中國文化論集(2), 中韓關係論略)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들은 동방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이(夷)자와 인(仁)자는 통용된다.
인(仁)자와 인(人)자 또한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서 인(人)자를 일컫는 것은 그 근원이 동방에서 나왔으며,

만약 동이족이 문화적으로 선진이고, 먼저 '인(人)'을 사용하였다고 하면

후대에 와서 서방에서 기원한 부족들이 이를 빌어 전 인류의 명사로 쓴 것이다….
만일 이(夷)가 먼저 문화를 이루어 앞서 나갔다면,

이 사람들이 먼저 사용한 사람 인(人)자는 전 인류적인 이름에 들 것이다.

서방사람들이 이를 빌려 쓴 것이다.”
   
 

 

(8) 필장박(畢長樸)

 

중국의 학자 필장박은《중국인종북래설(中國人種北來說)》에서

중국의 고대 문헌, 고고학적 유물, 언어적 특성, 인류학적 특성,

민속 문화적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한 뒤,
중국 인종의 시원(始原)이 북방의 시베리아 일대와

동북아 쪽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필장박은 위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 문자(文字)가 만들어진 것은 필시 중국 중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계통은 멀리 추운 북방에서 시작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中國文字之制作 必非始于中國中原而係遠始于寒的北方.
   

 

 

(9) 고꾜 야스히꼬(吾鄕淸彦) 

 

일본 학자 고꾜 야스히꼬(오향청언, 吾鄕淸彦, こきょうきやひこ)는 이렇게 썼다. 
 
사마천의《사기(史記)》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10) 유 엠 부찐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고조선(古朝鮮)》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
 
그러면서,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강조하고 있다.
 
 

 

(11) 시로코고르프 

 

소련의 역사학자요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シロコゴルフ)는

《중국사》에서 이렇게 썼다.

 

"BC 3,000년경 동이족은

이미 황하 양자강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의 중간 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支那族)은 이보다 1,500~2,000년 후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
   
 
 

 

이들의 주장에서 보았듯이 우리 한민족[東夷族]의 활동무대가

은(殷)·주(周) 이전부터 이미 중국의 산동성, 하북성, 밝해연안,

하남성의 동남녘, 강서성의 서북 지역, 안휘성 일대, 호북성의 동반부,

요동반도와 만주 전역 그리고 한반도 등 실로 엄청난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밝달민족을 일컬어 중국 한족의 소수민족. 지방정권 운운하는

동북공정의 논리는 역사의 무지를 넘어 치졸한 배은망덕에 속하는 것이다.

 

 

 

 

<대쥬신천손 영역>

 

 

 

- 동이족의 숨겨진 역사와 인류의 미래

 

 

 

 

 

 

 

 

 

 

 

 

 

 

 

- 동이족의 숨겨진 역사

 

 

 

 

 

 

 

 

 

- 한민족 뿌리탐사, 바이칼을 가다

 

 

 

지구 상에는 많은 호수가 있지만

시베리아의 오지에 숨어 있는 바이칼(Baikal)호만큼 관심을 끄는 호수는 드물다.

 

이 호수는 달리 부르는 이름도 많아서 ‘성스러운 바다’, ‘세계의 민물 창고’,

‘시베리아의 푸른 눈’, ‘시베리아의 진주’ 등으로 불린다.

 

특히 지구 상에서 가장 깊은 오지에 묻혀 있고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인지

지구 상에서 가장 깨끗한 물로 남아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바이칼 호는 러시아의 이르쿠츠크(Irkutsk) 시 부근에 위치하며,

호수의 넓이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다.

 

호수의 최대 깊이는 1,621m로 세계에서 가장 깊으며,

주변은 2,000m급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호수에는 전 세계 민물(담수)의 1/5이 담겨 있다고 한다.

 

바이칼 호의 표면적은 북아메리카 5대호의 13%밖에 안 되지만

물의 양은 5대호를 합친 것보다 3배나 더 많기 때문에 ‘세계의 민물 창고’라고 불린다.

바이칼 호에는 약 365개의 강에서 물이 흘러 들어오고 있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직 앙가라(Angara) 강뿐이다.

 

이 물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으로 합류되어 북극해로 흘러든다.

언젠가는 바이칼 호의 깨끗한 물이 먹는 물로 포장되어 우리나라까지 올지도 모른다.

 

바이칼 호는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이름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곳에 우리 민족의 뿌리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바이칼 호 주변에는 여러 소수 민족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부랴트(Buryat)족은 인구 40만의 소수 민족으로서

자치 공화국을 이루어 살고 있다.

 

이들은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과 같은 설화를 갖고 있고,

특히 그들이 간직한 샤머니즘의 원형은 우리 민속과 비슷한 점이 정말 많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을 달리다 보면

오색 천 조각을 두른 나무 말뚝을 수없이 만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솟대나 서낭당과 비슷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부랴트 족도 우리의 ‘개똥이’처럼 아기에게 천한 이름을 지어 주어야

오래 산다고 믿어 ‘개’란 뜻의 ‘사바까’란 이름이 흔하다고 한다.

 

아기를 낳으면 탯줄을 문지방 아래 묻는 전통도 우리와 비슷하다.

 

함께 따라서 추는 춤은 강강술래와 비슷하며,

예전의 샤먼이 썼던 모자는 사슴뿔 모양으로 신라의 왕관과 비슷하다.

이들은 17세기에 시베리아를 정복한 러시아에 동화되어

부랴트족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남쪽 국경 너머 몽골과 중국 북부의 몽골인과 뿌리가 같고 언어도 비슷하다.

 

유목민인 이들은 자신들을 칭기즈 칸의 후예로 믿고 있다.

 

 

 

- 민족의 뿌리, 상고사를 말하다

 

 

 

 

 

- 환단고기 북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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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