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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01 45. 신라 건국년도 BC57년은 김부식의 뻥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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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역사 시간에 신라는 BC57년에 건국하였고 

고구려는 BC37년에 건국하였다고 배울 때부터 

내 머리 속을 혼란하게 만들었던 이 의문부호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래서 고대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정리하다보니


왜 고대사를 논하는 모든 사람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영원불변한 진리처럼 굳게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과연 신라는 혁거세가 고구려보다 20년이나 빠른 BC57년에 세웠을까?

 

 

 

1. 탈해 원년은 107년이다.

 

 

삼국사기는 <탈해>57년에 즉위하였다고 한다.

 

남당유고 달문대모기에 <달문><탈해>의 딸로 정유년(97)에 태어났다.

 

<달문>의 나이 11(107)<탈해>가 제위에 올랐다고 하였다.

 

 <탈해>107년에 즉위하여 125년에 <파사>에게 선위하고 130년에 죽었다.

 

 

 

- 達門大母紀

 

達門大母者脫解尼今女也母曰長氏也

<달문>대모는 <탈해>니금의 딸이고 어머니는 <>씨이다.

 

初月光聖母生陽公女

처음에 <월광月光>성모가 <양공陽公>의 딸을 낳았다.

 

양공(월광) - 월장

 

月長仙母有秀色 大盧神君取之爲妃

<월장月長> 선모(仙母)는 색()이 빼어나서,

<대노大盧> 신군(神君)이 그녀를 취하여 로 삼았다.

 

일광(알영) - 차웅(28?-84)

                  대노

<대노>는 남해왕 차웅의 동생이다.

 

神君好獵 逐獸深入仙母與嬖臣仇須知從之 遇雨入岩穴 情發而痛生長氏

신군(神君)은 사냥을 좋아하여, 짐승을 쫓아서 깊이 들어갔는데,

<월장>선모는 폐신(嬖臣) <구수지仇須知>와 함께 따라 갔다가,

우연히 비를 만나서 동굴에 들어가니,

정이 일어나 통하여 <장씨長氏>를 낳았다.

 

구수지(월장) - 장씨(70?-114)

 

長氏潤麗善媚與大盧神君之子河婁相通 而生子車門

<장씨>는 빛나고 곱고 아양 떨기를 잘 하니,

<대노>신군의 아들 <하루河婁>와 서로 통하여, 아들 <거문車門>을 낳았다.

 

대노(자산) - 하루(장씨) - 거문(90?- )

                                    길문(93?-152)

 

月長仙母 怒其無媒 不肯妻之

<월장>선모는 그녀의 무매함에 화가 나서, 시집보내기를 꺼려하였다.

 

河婁與長氏 避匿欲死

<하루><장씨>는 도망하여 숨어서 죽으려고 하였다.

 

時脫解有寵于月長力勸妻之 二人乃服于脫解 結爲死友

때에 <탈해><월장>선모에게 총애가 있어서 힘써 시집보내기를 권하니,

두 사람은 곧 <탈해>에게 복종하여 맺어져 죽음을 함께하는 벗이 되었다.

 

河婁之母曰觜山 有女宋那 花山奴裏內出也

<하루河婁>의 어머니는 <자산觜山>인데 딸 <송내宋那>가 있고

<자산><화산花山>과 종() <리내裏內>사이에서 태어났다.

 

自幼 爲河婁所嬖 及取長氏 棄之 宋那怨之

<송내>는 어려서부터 <하루河婁>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마침내 (하루가) <장씨長氏>를 취하여 그녀(송내)를 버리니,

<송내>는 그를 원망하였다.

 

脫解爲之娶爲密妻 生子所亥

<탈해>는 그녀를 취하여 밀처(密妻)로 삼아서 아들 <소해所亥>를 낳았다.

 

탈해(송내) - 소해 

 

宋那以吐解英雄生好子 喜不自勝 有驕矝色

<송내><탈해>라는 영웅을 통해서 좋은 아들을 낳았으므로

스스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교만하고 뽐내는 기색이 있었다.


翌年長氏生河婁子吉門  甚俊

다음해 <장씨><하루>의 아들 <길문吉門>을 낳았는데 심히 준수하였다.

 

하루(장씨) - 길문(93?-152)

 

人皆賀之 而宋那獨誹之曰 爲吾兒之奴 則幸矣

사람들 모두 축하하였으나 <송내>만이 헐뜯으면서 말하길,

"내 아이의 종()이 된다면 다행이다" 라고 하였다.

 

長氏聞而大發妬心 欲折宋那之驕 乃私近于脫解

<장씨>가 듣고서 질투심이 크게 일어나,

<송내>의 교만함을 꺾어 버리려고 <탈해>와 사사로이 가까이 하였다.

 

脫解曰 河婁事我以信 我不可私汝也

<탈해>가 말하길

"<하루>는 믿음으로서 나를 섬기니,

나는 그대를 가까이 할 수 없소" 라고 하였다.

 

長氏乃謂河婁曰 汝與脫解腹心 而我不色供 則勢難符合

吾已生汝二子 願生脫解一子 而倍好 河婁然之

이에 <장씨><하루>에게 일러 말하길

"당신은 <탈해>의 심복(心腹)이니,

내가 색공(色供)을 하지 않으면 세()가 부합(符合)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미 당신의 두 아들을 낳았으니,

<탈해>의 아들 하나를 낳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갑절로 좋습니다." 

 

<하루>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邀脫解于林舍

숲속의 막사에서 <탈해>를 맞이하였다.

 

醉飮使長氏裸舞於前 曰 今夕奉之

술이 취하여 <장씨>로 하여금 (탈해) 앞에서 옷을 벗고 춤을 추게 하니

<장씨>가 말하길,

"오늘 저녁 당신을 받들 것입니다."

 

脫解乘醉抱入于床 而通之

<탈해>는 취기(醉氣)가 올라 침상으로 안고 들어가서 그녀와 통정하였다.

 

夜深而醒悔之曰 吾何至此 宋那必待我 而不眠也

밤이 깊어지자 술이 깨어서 후회하며 말하길,

"내가 어찌 여기에 있는가?

<송내>가 필시 나를 기다리며 자지 않고 있을 것이다"

 

長氏媚之 不捨曰 今夜色供之初夕也

何發不祥之言乎 汝已結花于我 鴛鴦之情已熾 連理之露且洽加合 而不可離也

古人曰 心腹之臣必結色供之臣 汝愛吾夫 而不共妻我是外親 而內踈也

豈丈夫乎

<장씨>가 아양을 떨면서 서운해 하면서 말하길

"오늘밤은 색공(色供)의 첫날 밤입니다

어찌 상서롭지 않는 말을 하십니까?

그대는 이미 저와 인연을 맺었으니, 원앙(鴛鴦)은 이미 타올랐습니다.

연리(連理)의 이슬은 장차 화합하여 부합 할 것이니떨어질 수 없습니다.

옛사람들이 말하길

심복(心腹)의 신하는 필히 색공(色供)의 신로 맺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대가 저의 남편을 좋아하는 만큼, 저를 처로 대하지 않는다면,

이는 겉으로 친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멀리 하는 것이니,

어찌 대장부라고 하겠습니까?"

 

脫解曰 諾 乃盡情 而歡

<탈해>가 말하길, "좋소" 라고 하며, 이내 을 다하여 합환하였다.

 

自是長氏伺其將就 宋那必先迎 而供之

이때부터 <장씨>는 그의 앞일을 엿보면서,

<송내宋那>가 필히 먼저 맞이하고 나서 그를 모셨다.

 

脫解遂愛長氏 而踈宋那歲餘 長

<탈해>는 마침내 <장씨>를 사랑하여, <송내>1년이 넘도록 멀리하였다.

 

長氏 夢見 紫鸞 浴池 與脫解 解衣入池 有一鸞 誹浪 而來入 二人之間

<장씨>가 꿈에 못에서 목욕을 하는데 탈해가 옷을 벗고 못에 들어오니

한 마리의 자주색 난새가 표류하여 두 사람 사이에 들어왔다.

 

脫解取 而視之曰 此鳥之美 如汝 可藏汝 懷 長氏 乃抱于懷 而覺之 告于脫解

<탈해>가 난새를 잡아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이 새의 아름다움은 마치 너와 같으니

너를 숨겨두고 품고자 한다.“라고 하며

<장씨>를 품고 안으니 깨어났다고 <탈해>에게 고하였다.

 

脫解曰 好夢也 可以成之

탈해가 말하기를

좋은 꿈이니 가히 이루어 질 것이다.”

 

乃沐浴禱神 而同枕結花

이에 목욕을 한 후 신에게 기도하고 동침하여 합궁하였다.

 

時 月長 仙母 望見 雙虹下垂 逐氣 而至 長氏寢 見 彩虹達乎

때에 <월장月長> 선모(仙母)가 멀리서 바라보니 쌍무지개가 아래로 드리워져

그 기운이 나와 <장씨>의 침실에 까지 일곱 빛 무지개가 뻗어있었다.

 

其門 瑞氣玲瓏 不能直視 怳惚 難狀 家人皆異之

침실 문에는 상스러운 기운이 영롱하여 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황홀하고 마음이 어지러우니 한집안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俄而虹收 月長 排門入室 見兩人 泥醉 如濡鳳醉凰

잠시 무지개가 걷혀 <월장>이 문을 밀고 방에 들어가

두 사람을 보니 술에 흠뻑 취해 마치 적신 수컷 봉황과 취한 암컷 봉황 같았다.

 

月長乃抱長氏 而告喜曰 天彩達門 吾兒必有大慶

이에 <월장><장씨>를 안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하늘의 빛이 문에 닿았으니 우리 아이에게 반드시 큰 경사스러움이 있다.”

 

果有娠 而生 乃丁酉馬月 二鷄之夕也

과연 임신하여 낳으니

정유(丁酉)년 마월(馬月 : 음력 5) 이계(二鷄)의 저녁이었다.

 

탈해(장씨) - 달문(97-171)

97년은 丁酉년이다.

달문은 지마 13년(171년)에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脫解洗之 授衣曰 此兒可名達門

<탈해>가 아이를 씻고 옷을 주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이름은 <달문達門>이라고 함이 옳다.”

 

時異香滿室 天樂聞於空中 皆言 高貴位 降臨 人間世

때에 기이한 향이 산실에 가득하고 천락(天樂)이 공중에 울리니

모두들 말이 고귀한 이가 인간 세상에 내려온 것이라 하였다.

 

旣長 月面 玉膚 鸞質 鳳態 窈窕 成德 自合隂敎

자라남에 따라 얼굴은 달과 같고 피부는 옥 같으며

난새의 기질과 봉황의 자태를 지녔고 요조숙녀의 덕을 갖추고

스스로 여인의 가르침에 부합하였다.

 

年十一 脫解受禪 卽帝位 封爲宮主 置宮奴婢田宅

11살에 탈해가 선양을 받아 에 등극하여 궁주로 봉하고

궁에 노비와 전택을 내렸다.

 

<탈해(46-130) 4대왕 재위(107-125)>가 제에 등극한 해는 107년이다.

 

受帝女牒位眞骨品 一門 得以榮達

의 딸의 첩지와 진골의 골품을 받아 가문의 영달(榮達)을 득하였다.

 

十四受戒入權井 次九葉牧丹衣 大綬蜻蛉衣

14살에 권정(權井 : 가 기거하는 궁)에 들어오라는 계()를 받고

구엽목단의(九葉牧丹衣)와 대수청령의(大綬蜻蛉衣)를 받았다.

 

時惠后 專內 帝 不得私寵 達門在權井 不得殊寵 唯祀樹王

때에 혜후(惠后)가 내실로 를 독차지하니 사사로운 총애를 얻지 못하여

달문은 권정(權井)에 있어도 특별한 총애를 받지 못하고

오로지 수왕(樹王)에게 제사를 지냈다.

 

혜후(惠后)<탈해><운제>의 딸 <아혜阿惠(83-136)>이다.

 

後宮多 以鬪草 爲樂搬

많은 후궁들이 투초(鬪草)로 즐거움을 삼았다.

 

珍奇于湥山 民多苦之 達門聞之 禁奴勿採于民 又以種馬爲戱

돌산(湥山)에 진기(珍奇)함이 있어 많은 백성이 이를 괴로워하니

<달문>이 이를 듣고 백성들에게 종()을 뽑지 못하도록 금하고

또 종마(種馬)의 놀이를 금하였다.

 

畜神 牧于牧 取 諸兵官之 駿牧字之 奪 其强者 勝

종마의 놀이는 축신(畜神)이 기른 말을 여러 병관이 취하여

그 중에서 가장 강한 말을 빼앗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日知神君 駿馬有名 而馬奴 汗兒不肯 與 他宮 獨許 于達門

<일지日知> 신군(神君)의 준마(駿馬)는 유명한데

마노(馬奴) <한아汗兒>는 다른 궁이 독단으로

<달문達門>에게 주는 것을 수긍하지 않았다.

 

대노(아리) - 일지(85?-129)

 

汗兒 年才十二 驍勇 而美

<한아>는 나이 겨우 12살로 날래고 용기가 있고 아름다웠다.

 

達門 欲賞其許種 而問其願 則笑 而不答

强之 則曰 願得宮主爲妻 奴輩怒欲笞之

<달문>이 그 씨를 감상하고자 물으니 웃기만하고 대답을 하지 않아

이를 강제하니 말하기를

궁주를 처로 하기를 바라나 종()들이 노여워할 것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達門止之曰 此兒有食虎 狀非 汝輩所窘也

<달문>이 이를 저지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호랑이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범하니

너희 무리들이 막을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乃謂汗兒曰 汝能阿飡 則可娶我矣 遂絶種馬之戱

이에 <한아>에게 일러 말하기를

네가 아찬이 되면 나에게 장가들 수 있다.”라고 하며

마침내 종마의 놀이를 끊었다.

 

年十八 長氏難産 而薨

<달문>의 나이 18살에 <장씨>가 난산으로 죽었다.

 

臨暝謂達門曰 吾死 兒曹 不可委於他人 汝可代我 爲河婁妻 而子 育兒曹

죽음에 임하여 <달문>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아조兒曹>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불가하니

네가 나를 대신하여 <하루>의 처가 되어 <아조>를 기르도록 하라.“

 

達門許之 請于帝 帝嘉之曰 不可一日無軍母 卽命行吉 出 受諸將 拜賀

<달문>이 이를 허락하고 에게 청하니 제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군모(軍母)는 하루도 없으면 안 되니 즉시 길례를 행하여

여러 장수의 축하 절을 받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河婁喜 新妻如舊妻 可以 忘優 軍之 乃呼 以忘優 軍母

<하루>가 옛 처와 같이 새로운 처를 맞이하여 기뻐하며

근심을 잊고 군모(軍母)로 불렀다.

 

達門曰 軍母之樂 勝於權妻 常 以戎服騎馬 視軍 撫愛士卒

<달문>이 말하기를

군모의 낙()은 권처(權妻)보다 나으니 언제나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군을 둘러보며 사병을 어루만져 달래는데 있습니다.”

 

軍中歌之曰 少主賢 於老主 河婁與達門抱臥于營府

군에서 이를 노래하기를

작은 주인(달문)이 늙은 주인(장씨)보다 현명하다.”

 

聞歌 而喜曰 軍心服于汝也

노래를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군의 마음이 너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達門曰 汝知其喜 不知怒

달문이 말하기를

당신은 그 기뻐함을 알지만 노여움은 모릅니다.”

 

河婁曰 一軍媚吾夫妻 而歌 何可怒乎

<하루>가 말하기를

모든 군이 우리 부부에게 아첨하여 노래하는데 어찌 노여움이 있겠는가?”

 

達門曰 吾賢於母 則何以慰母靈乎

<달문>이 말하기를

내가 어머니보다 현명하다고 하는데 어찌 어머니의 혼령을 위로하겠습니까?

 

乃招行軍兵官 于帳外曰 汝等雖媚于我 不媚吾母 安得爲媚

이에 장막 밖에 행군 병관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나의 어머니에게 아첨하지 않고 나에게 아첨하는가?”

 

兵官等乃議 以賢主 生賢主 改之 一時歌之

이에 병관 등이 의논하여

현주(賢主)가 현주(賢主)를 낳았다고 고쳐서 잠시 노래하였다.

 

 

 

 

 

2, 수로의 금관가야 건국

 

 

삼국사기는 수로가 42년에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고 한다.

 

파사왕 25(AD150)

 

1, 加耶世主(가야세주, 正見)가 그녀의 셋째아들 <청예靑裔>를 보내 入朝하였다.

 

12, 음즙벌(音汁伐)과 실직곡(悉直谷)이 경계를 다투었다.

 

왕은 그 지로(地老)에게 명하여 변별하도록 하였다.

 

지로(地老)가 말하기를 加耶王子 <청예靑裔(142-199)>가 지혜가 많으니

의견을 세울만합니다.” 라고 하였다. 상이 허락하였다.

 

 

<수로>42년에 금관가야를 건국한 것이 아니라 142년에 태어나

156년에 금관가야를 세우고 161년에 黃玉(146-189)과 혼인하고 199년에 죽었다.

 

 

 

3. 倭 神女 卑彌呼 관련기사

 

 

삼국유사 신라 8대 아달라 이사금 4(서기157)

 

동해 바닷가에 살던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가 일본에 가서 왕이 되었다.

 

그들이 사라진 뒤 신라에 해와 달의 광채가 사라졌다.

 

사람을 보내 세오녀가 짠 비단을 가져와서

영일현에서 제사를 지내자 광채가 옛날처럼 돌아왔다.

 

이 세오녀가 卑彌呼이다.

 

 

 

삼국유사의 아달라 4년은 남당유고에 따르면 216년이 된다.

 

216년 아달라가 영일 방면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자

영일 지역의 군장이 큐우슈우 방면으로 이동하여 간 것을 말한다.

 

박창화의 남당유고에 따르면 아달라(180-243)의 재위기간은 213-243년이며,

아달라 20(232)에 왜 여왕 비미호가 동생 박비고를 보내 교역을 청하기에

처음으로 왜전(倭典)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히미코의 역사 기록은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나온다.

 

왜 나라에 원래 남자 왕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전쟁만 계속되고 나라가 편안하지 않아

합의에 의하여 히미코라는 무당여인을 왕으로 뽑은 뒤 야마다이국에 평화가 왔다.

 

여왕은 결혼하지 않았고 망루와 목책으로 둘러싸인 궁에서 살았으며

무장한 경비들이 항상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처음 위나라에 사신이 온 것은 서기 238년이며

히미코의 사망을 247년으로 기록했다.

 

사망 후 지름이 백 보를 넘는 거대한 분묘를 세우고

순장자가 백 명을 넘었다고 한다.

 

왜 신녀 히미코(卑彌呼) 세오녀는 3세기 초 아달라 왕 때의 인물이다.

 

남당유고에 의한 아달라의 재위기간과 히미코의 활동기간이 일치하게 된다.

 

 

 

4. 실성 원년 402년부터 기년이 일치한다.

 

실성은 고구려에 인질로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역사 기록을 맞추기 위하여

기년을 일치 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생몰년과 재위기간이 일치하는 실성왕의 가계를 추적해 보자

 

구도(녹모) - 말흔(유모) - 대서지(예생) - 실성(359-417)

 

실성(359-417)은 대서지(314-382)와 예생(339?-403)의 아들이다.

 

예생은 아이혜(286-362)의 딸인 삼원(316-?)과 등보(317-380)의 딸이다.

 

삼원(316-?)316년생으로 335년에 소날과의 사이에 삼희를 낳고

장선과의 사이에 장생을 낳고, 등보와의 사이에 삼생과 예생을 낳는다.

 

삼생은 예생의 남동생이다.

 

예생의 출생년도는 339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성의 할아버지 말흔(278-350)과 유모(277-366)는 생몰년을 알 수 있다.

 

실성의 증조할아버지 구도(218-301)는 옥모(238-311)의 아버지다.

 

옥모(238-311)와 골정(207-285)의 딸인 녹모는 조분(254-329)의 동생이므로

256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당유고 신라사초의 기년이 정확함을 알 수 있다.

 

 

 

5. 흘해와 내물의 재위기간 및 주요기사

 

삼국사기는 흘해와 내물의 재위기간을 각 46년으로 하여 92년간 재위하였다하고

남당유고는 흘해의 재위기간을 7, 내물의 재위기간을 25년이라 하였다.

삼국사기는 18대 실성왕때부터 기년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16대 흘해와 17대 내물의 재위기간을 합쳐 1갑자(60) 이상을 늘여 놓았다.

 

 

흘해와 내물의 주요기사를 삼국사기와 남당유고를 통하여 검토해 보자

 

 

흘해3(312)

3,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자기 아들의 혼처를 요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삼국사기>

 

 

기림왕 7(A.D.370) 백마(白馬=庚午)

<접황蝶皇>의 형부 <급리急利>를 왕을 대신하여 이벌찬으로 삼고,

<소황素皇>을 품주로 삼아 정사를 행하였다.

왕이 <강세康世>의 딸 <천강千康>을 부여(夫余)태자 <길회吉湏>에게 시집보내고,

<급리急利>의 딸 <수황水皇>을 왜() 태자에게 시집보냈다.

먼 나라는 유화하고 가까운 나라는 달래기 위해서다.

<남당유고>

 

기림왕은 강세의 딸 천강을 근초고왕의 아들 근구수(330-384)에게 시집보내고

이벌찬 급리의 딸 수황(水皇)을 근구수의 아들인 인덕(355-427)에게 시집보낸다

 

이벌찬 <급리急利>의 딸 <수황水皇>을 왜() 태자 인덕에게 시집보낸 것은

기림왕 7(370)이다

 

 

 

흘해21(330)

처음으로 벽골지에 물을 대기 시작하였다. 둑의 길이가 18백 보였다.

<삼국사기>

 

흘해왕 2(371) 백양(白羊=辛未)

3월 벽골지(碧骨池)를 준설하여 개통하였다.

깊고 가파르며 길이가 1,800()였다.

<남당유고>

 

남당 유고와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시기가 좀 차이가 나더라도

같은 기사가 있는 것을 보면

김부식이 없는 사실을 기록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벽골지가 전북 김제라면 그 곳이 신라의 땅이였을까?

 

백제는 근초고왕 때 마한을 평정하기 시작하는데

371년은 백제 근초고왕 26, 신라 흘해왕 2, 대가야 수극 20년에 해당된다.

 

 

내물기 13(土牛:기축389)

정월, 경도(京都)에 크게 역병이 돌고 가야(加耶) 또한 크게 역병이 돌아

선실태후(宣失太后)가 역질로 붕()했다.

()가 그를 위해 궁중에서 발상(發喪)하며 말했다.

선실(宣失)(327-389)은 곧 우리 사씨(思氏)의 어머니이니

또한 나의 어머니 아닌가.”

명을 내려 그에게 후한 부의를 보내도록 했다.

궁중에서 많이 그를 위하는 효()로써 제()에게 아첨하였다.

 

수극은 선실의 남편이고, 선실은 신라계이다

 

아마도 근초고왕이 김제까지는 평정하지 못하여

흘해왕이 신라계인 선실태후를 설득하여 가야인을 동원하여

벽골지를 준설한 것이 아닐까?

 

 

벽골지(碧骨池)를 준설하여 개통한 것은 흘해왕 2371년이다.

 

 

 

흘해35(344)

2, 왜국이 사신을 보내 청혼하였으나,

딸이 이미 출가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삼국사기>

 

흘해왕 5(374) 목시(木豕=甲戌)

2월 왜왕이 절교(絶交)한다는 글을 보내왔다.

<남당유고>

 

신라가 왜의 청혼을 거절한 것은 흘해 5374년이다.

 

 

 

흘해37(346)

 

왜병이 갑자기 풍도에 와서 변경의 민가를 약탈하고,

또한 금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전투를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벌찬 강세가 말했다.

 

"적병이 멀리서 왔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공격 시간을 늦추어 그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왕이 그렇다고 생각하여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퇴각하려 하였다.

 

이 때 왕이 강세로 하여금 강한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하여 그들을 격퇴하였다

<삼국사기>

 

 

흘해왕 6(375) 청시(靑豕=乙亥)

 

4월 왜()가 풍도(風島)에서 약탈하고, 더하여 금성(金城)을 포위하였다.

그 식량이 떨어지를 기다렸다가, 강세(康世)가 출격하여 크게 깨뜨려서,

그 우두머리 부부(夫妻)를 사로잡아 바쳤다.

<남당유고>

 

왜의 청혼이 거절되자 이듬해 왜가 신라를 침공한다.

이벌찬 강세(康世)가 왜를 격파한 것은 흘해왕 6375년이다.

 

 

 

흘해47(356)

 

여름 4, 왕이 별세하였다.

내물[나밀이라고도 한다.]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구도 갈문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말구 각간이며, 어머니는 김씨 휴례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미추왕의 딸이다.

흘해가 죽고 아들이 없었므로 내물이 그 뒤를 이었다.

[말구는 미추 이사금의 동생이다.]

 

저자의 견해

부인을 얻을 때,

같은 성의 여인을 얻지 않는 것은 동성과 타성의 구별을 철저히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이유로 진 사패와 정 자산은, 노공이 오나라 왕실에서 아내를 얻고,

진후가 성이 같은 네명의 첩을 가진 것을 몹시 비방하였다.

신라의 경우에는 같은 성씨끼리 혼인하는 행위를 그치지 않았고,

사촌이나, 고종, 이종 누이들까지도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과 우리 나라의 풍속이 각각 다르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예법을 기준으로 따지자면 이는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오랑캐들이 어미나 자식을 간음하는 것은 또한 이보다도 더욱 심한 경우이다.

<삼국사기>

 

 

흘해왕 8(377)

 

정월 신후(神后)와 부군(副君)이 조회를 받았다.

 

왕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이전에 왕이 누차로 (신후의) 총애를 다시 받고자 하여

후의 곁에서 아첨하여 말하기를

 

신은 스스로 총애를 믿어 바깥사람에게 바람을 피웠으니

성처(聖妻)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금일부터는 두 번 다시 (남편을) 경신(更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짐은 본래 시새움을 하지 않는다. 너 또한 시새움하지 않음이 옳은 일이다.

신선의 약이 비록 여기에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시새움은 백악(百惡)의 으뜸이니 너는 시새움을 하지 말거라.

짐은 새로운 남편을 사랑하고 아들을 낳으니 몹시 즐겁다.

애련(愛憐)하나 너를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너는 마땅히 기다려야 한다.”

라고 하였다.

 

왕이 한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다시 유례(儒禮)와 기림(基臨)의 꼴이 되겠구나!”라고 하며 선위하려 하였다.

 

산공(山公) 등이 선위를 막으며, 다시 후의 총애가 돌아오기를 바랐으나

후의 총애할 뜻이 없으므로 부군에게 정치를 오로지 하도록 명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후와 부군이 호동(好童)을 안고 조회를 받으며 말하기를

 

이와 같이 호동(好童)을 낳았으니 짐은 소원을 충족하였다.”라고 하였다.

 

흥란(興蘭)을 이벌찬, 석화(石華)를 품주로 삼았다.

 

역시 세기(世己)의 무리다.

 

 

2월 황새가 월성(月城)의 모퉁이에 둥지를 틀었다.

 

목공(木公)이 아뢰어 말하기를

 

황새는 본래 물가에서 사는 새인데

성안에서 살고 있으니 그 터전을 잃은 탓입니다.”

라고 하며 푸닥거리를 하기를 청하였다. (후가 혹은 부군이) 허락하였다.

 

 

4월 신후(神后)와 부군(副君)이 도산(桃山)에 들어와

아들 호동(好童)을 주()하였다.

 

선무(仙巫) 200명을 거느리고

세기(世己)와 홀명(忽明)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벽해碧解> 국공(國公)이 죽었다.

 

공은 아름다운 풍의(風儀)를 가졌으며 윗사람을 섬기기에 능하여,

그런 연유로 <명원命元>태후가 사랑하여 남편으로 삼았다.

 

<명원>태후가 죽음에 이르자 <광원光元>으로 대신하였는데

이 때에 <광원>과 날기신산(捺己神山)에 들어가다가 중도(中途)에 죽었다.

 

왕이 맞이하여 귀장(歸葬)하였다.

 

후와 부군 복을 빌기를 마치고 하산하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큰 비가 열흘(浹旬)동안 왔다.

 

평지가 서너 자() 잠기고, 표류하는 관사와 개인주택이 무수하였다.

 

각지(各地)의 산이 무너지니 무릇 30여소였다.

 

후가 두려워하여 세기에게 점을 치도록 명하였다.

 

세기가 말하기를

 

덕을 닦아야 할 일이며, 하필(何必)이면 점을 치려하십니까?”라고 하였다.

 

후가 덕을 닦는 방법이 묻자, 세기가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법()은 해가 오래되면 폐단이 많으므로

많은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여 고치기를 청하는데

이로써 민서(民庶)를 안심시키며, 궁중의 씀씀이를 검약(儉約)함에 힘쓰면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후가 옳다고 하였다.

 

52일 비가 또 그치지 아니하였다.

 

집서(執書) <화종華宗> 등이 왕의 거처에 이르러 힘써 말하기를

 

재이(災異)가 거듭하여 나타나니 마땅히 선양(禪讓)을 결정하여

이로써 하늘에 대답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신후(神后)의 의중이 어떠하냐?”라고 물었다.

 

<화종>이 말하기를

 

성인은 하늘의 뜻에 따를 뿐이고, 신후 또한 성인일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광원光元>궁주와 정사의 큰일을 의논하고, 도산(挑山)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부군(副君)에게 선위를 행하자 비를 거두고 하늘이 맑아졌다.

 

사람들이 다 기이하다 하게 여겼는데

왕이 이미 양위를 하여 도산에 머물며 내려오지 않았다.

 

새로운 왕(新帝, 내물)이 왕과 <광원光元>을 높이어

선제(仙帝)와 선후(仙后)로 삼고,

받들어 모심이 왕일 때보다 배(, 곱절)는 나았다.

 

또 도산에 선궁을 경영하여 행재소(行在所)로 삼았다.

 

왕이 이에 스스로 기쁘게 생각하여 비빈등과 더불어

신산(神山)을 우유(優遊)하고 선문(仙門)을 지원하였다.

 

신후(神后)가 죽음에 이르자 애훼(哀毁)하여 병이 되었다.

 

장사를 지내는 기간이 가까워지자 따라 죽었다.

 

<광원>후 또한 3일후에 죽었다.

 

그 유명(遺命)에 따라 우곡(牛谷)에 장사를 지냈으며,

신후 또한 분골하여 <광원>, <명원命元>과 함께 묻었다.

 

그런 연유로 자모릉(子母陵)이라 불렀고,

사당은 황릉(黃陵)이라 하여, 그의 자녀 32인을 봉()하였다.

 

우도(牛徒)가 제사()지내고 새로운 산주(山主)로 하였다.

 

왕은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어려서부터 신후에게 종사(從事)하였으며

총애를 받는 자리에 무릇 46년 동안 있었다.

 

후의 뜻을 거스름이 없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정성을 다하였다.

 

후를 존중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선선의 무리를 어루만졌다.

 

공적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 선사(仙史)에서 보이는데,

여러 기록에서 울며 부르짖었다고 한다.

 

참으로 지극히 성인이라 하겠다.

 

 

내물왕 원년(377) 정축(丁丑)

 

5월 도산(桃山)에서 선위를 받아 명궁(明宮)에서 즉위하였다.

 

천하의 죄인을 사면하였다.

 

아버지 <말구末仇>각간을 높이어 제(),

어머니 <휴례休禮>궁주를 태성(太聖)으로 하였다.

 

의붓아버지 <대서지大西知>를 태공(太公)으로 삼았다.

 

 

7월 <화종華宗>을 이벌찬, <명백明白>을 품주로 삼았다.

 

<명백>은 계부(季父) <장흔長昕>공의 딸이다.

 

그의 남편 <화종>과 더불어 <장흔>공의 명을 받아 선양받는 큰일을 해냈는데

그런 연유로 첫머리로 총상(寵相, 이벌찬)에 올랐다.

 

대서(大西, 대서지)와 <장흔>은 미제(味帝, 미추)시기부터 말구제(末仇帝)를 계승하여

오래도록 병권을 잡고 있어 위세가 나라 안을 떨쳤다.

 

이때에 이르러 천하가 결국 김씨(金氏)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신후(神后)가 꿈에 해궁신(海宮神)을 보고, 해궁(海宮)을 다시 짓도록 명하였다.

 

 

9월 도산(桃山)에서 말을 선별하였는데, <장백長白>이 주재하였다.

왕과 후가 남교(南郊)에서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태성이 태공의 딸 <성물成勿>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명으로 <세기世己>에게 대행하게 하고,

태공댁으로 되돌아와서 아이를 살펴보고 쌀과 옷을 내렸다.

 

11월 가야(加耶, 대가야)왕 <수극守克>이 죽어 <모가慕訶>가 섰고,

<선실宣失>을 태후로 삼았다.

 

당시 가야와 왜가 상통하여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는 왜 왕녀를 처로 삼고 <선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신을 보내어 꾸지람하였다.

 

부여(夫餘)가 고구려와 쟁지(爭地)하여 청목(靑木)에서 싸웠다.

 

10월에 근수(謹須, 근구수왕)가 병사 3만으로 평양(平壤)성을 습격하였는데,

그런 연유로 이때에 이르러 구부(丘夫, 소수림왕)

그의 동생 이연(伊連, 고국양왕)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한 것이다.

 

12월 우제(牛祭)를 남교(南桃)에서 행하였다.

<남당유고>

 

 

삼국사기 흘해 47년은 흘해 8, 내물 원년으로 377년이다.

김부식의 비판은 신라가 여왕과 남왕의 이성의 나라이며,

모계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신국의 도를 알지 못한 데 기인한 것이다.

 

 

 

 

내물2(357)

 

봄에 왕이 특사를 보내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그들에게 각각 곡식 3곡 씩을 주었다.

특별히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은 자들에게는 직위를 한 급씩 주었다.

<삼국사기>

 

 

내물왕 2(378) 병인(丙寅)

 

정월 호제(虎祭)를 행하였다.

<세기世己>를 이벌찬, <장생長生>을 품주로 삼았다.

사궁(四窮,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을 방문하여 어루만지게 하고

각각 곡식 3(, 10)을 내렸다.

 

효제(孝悌)가 남보다 특별한 자에게는 작위를 일급씩 내리고,

 

보통의 재술(才術)이 있는 자라도 서로 천거하여 쓰게 하고,

시험적으로 써보아 효과가 있으면 곧 상을 내림에 차등이 있었다.

<남당유고>

 

 

내물왕 2년은 378년이다.

 

 

내물9(364)

 

여름 4, 왜병의 대부대가 공격해왔다.

왕이 이를 듣고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옷을 입힌 허수아비마다 병기를 들게 하여 토함산 아래에 열지어 세워놓고,

용사 1천 명을 부현 동쪽 벌판에 매복시켰다.

왜인은 자신의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곧장 진격해왔다.

복병들이 갑자기 공격하여 허를 찌르니, 왜인이 대패하여 도주하였다.

우리 군사가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다.

<삼국사기>

 

 

내물왕 3(379) 기묘(己卯)

 

4월 왜병이 크게 이르러 <등억登檍>과 <내개乃芥>에게 막도록 하였다.

풀로 허수아비 수천을 토함산(吐含山)에 아래에 만들어 놓고,

용사 1천명을 부현(斧峴) 동쪽 벌판에 매복하였다.

왜가 마침내 계산하는 대로 걸려들어 크게 패하였다.

추격하여 모두 사로잡았다.

이 때부터 왜와 가야(加耶)가 상통하여 축년(逐年, 해마다) 와서 구하였다.

<남당유고>

 

 

토함산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왜를 격퇴한 것은 내물왕 3379년이다.

 

 

 

 

내물18(373)

 

백제 독산성주가 백성 3백 명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왕은 이들을 받아 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왕은 "두 나라가 화목하여 형제처럼 지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지금 대왕은 우리 나라에서 도망간 백성들을 받아 들였다.

이는 화친하자는 뜻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며, 대왕에게 기대했던 바가 아니다.

청컨대 그들을 돌려 보내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글을 보내왔다.

왕은 "백성이란 항시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왕이 그들을 돌보아 주면 오고, 힘들게 하면 가나니, 백성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대왕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지 않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과인을 책망함이 어찌 이토록 심한가?"라고 대답하였다.

백제가 이를 듣고 다시 말을 하지 못했다.

여름 5, 서울에 비가 왔는데 물고기가 빗속에 섞여 떨어졌다.

<삼국사기>

 

 

내물왕 6(382) 임오

 

5월 <마아馬兒>를 위두(衛頭)로 삼았다.

경도(京都)에 물고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부여(夫余)의 독산성주(禿山城主) 포륭(布隆)3백인을 이끌고 투항해 오자

육부(六部)에 거주하도록 명했다.

부여(夫余)가 그를 송환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남당유고>

 

 

독산성주(禿山城主) 포륭(布隆)3백인을 이끌고 투항해 온 것은

내물왕 6382년이다.

 

 

 

내물26(381)

 

봄과 여름에 가물어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렸다.

위두를 부진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부견이 위두에게 물었다."그대가 해동의 사정을 이야기함에 있어,

사용하는 언어가 옛날과 같지 않으니 무슨 까닭인가?"위두가 대답했다.

"이는 또한 중국과 동일한 현상입니다.

시대가 변하면 명칭과 호칭도 바뀌는 법이니,

오늘날의 언어가 어찌 예전과 같겠습니까?"

<삼국사기>

 

 

내물왕 5(A.D.381) 금사(金蛇=辛巳)

 

7<등억登檍>을 이벌찬, <선운仙雲>을 품주로 삼았다.



위두(衛頭) 등이 진(, 전진)으로부터 돌아와 금인(金人)과 옥마(玉馬)


보기(宝器)를 바쳤다.



처음에 왕의 명으로 위두(衛頭) 7인에게


<부량苻良> 7인을 으로 보내게 하였다.



진왕 부견(苻堅, 前秦3대왕, 재위 357385)이 묻기를


계림(鷄林)을 어찌하여 신라(新羅)라고 하는가?” 라고 물었다.



답을 하여


()의 상서로움이 있었던 연유로 계림이라고 말합니다.


()를 새로이 한다는 연유로 신라라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부견이 말하기를


듣기에 너희 나라 임금(國君)(성씨가) 변했다는데 어떠한가?”


라고 하였다.



답을 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어진사람을 택하여 서로 전하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한 연유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연유로 계림과 신라는 글자가 비록 다르지만 그 말은 실상 같은 뜻입니다.”


라고 하였다.



()견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같다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답을 하여 말하기를


월주(月主)가 사는 성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부견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여왕은 젊은 남편을 좋아하여 수차례 여러 남편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배우자로 삼을 만한 남자가 없는 것이냐?


짐이 장가들고자 하는데 어떠하냐?”라고 하였다.



답을 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신()을 높이 숭상하고 현명한 자를 받드는 것이지


젊은 남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부견이 그 대답함이 정당하다하여,


도타운 예절로 송별해주고 신후(神后)와 왕에게는 보물을 바쳤다.



()의 명으로 부견의 상을 조각하였다.


<남당유고>


 

위두를 부견에게 보낸 것은 내물왕 5381년이다.

 

 

 

내물37(392)

봄 정월,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왔다.

고구려가 강성했기 때문에 왕은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인질로 보냈다.

<삼국사기>

 

내물왕 16(392) 흑룡(黑龍:임진)

정월, <마아馬兒>를 <담덕談德>에게 보냈다.

<남당유고>

 

실성을 인질로 보낸것은 내물왕 16392년이다.

 

 

 

내물38(393)

 

여름 5,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으니,

모든 장병들이 나아가 싸우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깊이 들어 와서

죽음을 각오하는 마당에 있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은 성과없이 물러갔다.

왕이 먼저 용감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들의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죽은 적병과 포로로 잡힌 적병이 아주 많았다.

<삼국사기>

 

 

내물왕 17(393) 수사(水蛇:계사)

5, 야인(野人)이 쳐들어오자 그 공효()없이 물러감을 기다렸다가 추격하여

독산(獨山)에서 크게 쳐부쉈다.

 

왜인의 침입을 독산에서 격퇴한 것은 내물왕 17393년이다.

 

 

 

내물46(401)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7, 고구려에 인질로 가있던 실성이 돌아왔다.

 

 

내물왕 25(401) 백우(白牛:신축)

 

4, 봄부터 큰 가뭄이 들고 제() 또한 (몸이) 편치 못한데

여러 왕자들은 모두 황음(荒淫)으로 일을 삼았다.


()가 이에 <일동一同>과 <구리내仇里迺>등을 고구려에 보내

비단과 진주등을 선사하고 <마아馬兒>의 귀환을 청하였다.


두씨(杜氏) 또한 <마아馬兒>를 위하여 <담덕談德>을 설득했다


“<마아馬兒>는 우리나라에게는 구우일모(九牛一毛)입니다.

돌아가 그 나라에 왕 노릇함만 못합니다.

연중(兗中)으로써 전한다면 대왕(大王)의 골육이 남방에서 왕 노릇함이니

또한 좋지 않습니까?”  


<담덕談德>은 그럴듯하게 여기고 마침내 보화를 7수레에 싣고

<마아馬兒>와 두씨(杜氏)를 정기(精騎) 3백으로 호송하여 보냈다.


9, 두씨(杜氏)가 그 세 아들과 더불어 성산(聖山)에서 제()를 알현하였다.


()가 두씨(杜氏)에게 골품(骨品)과 자의(紫衣)를 내렸다. <남당유고>

 

실성이 돌아온 것은 내물왕 25401년이다.

 

 

 

내물47(402)

 

2, 왕이 별세하였다.

실성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알지의 후손이며, 대서지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리부인[''''라고도 한다.]은 석등보 아간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은 키가 75촌이요, 총명하여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이 있었다.

내물이 별세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원년 3,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26(402) 수호(水虎:임인)

 

2, ()의 병이 다시 심해지자 신산(神山)에 약()을 구하였는데

()가 말하기를

천명(天命)이 자재(自在)하거늘 약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하고는

편안한 모습으로 붕하였다.

 

()는 성품이 관인호덕(寬仁好德)하며 무사(武事)에 능하여

남의 업신여김을 능히 제어할 수 있었다.

 

만년에는 신선(神仙)을 좋아하여 정사를 내궁에 위임하였고,

초년에는 오직 신후(神后)에게 순종해서 받들 뿐

(자신의)뜻을위해 새로 창출한 바가 없었다.

 

그러나 신민(臣民)들은 그 덕에 감동하지 않음이 없어서

부모를 잃은 것처럼 애통해하였으니 또한 현()이었더라.

즉일로 부군(副君)이 보반궁(保反宮)에서 상례()를 행하고 보위(寶位)에 오르니

이가 바로 실성제(實聖帝)이다.

 

실성(實聖)은 고구려에 있으면서 돌아갈 생각으로

여러 차례 볼모를 바꿔 줄 것(代質)을 청하였으나 되지 않자 안으로 불평을 품었었다.

 

급기야 즉위함에 이르자 비록 <보반保反>으로 후()를 삼았으나

()으로는 보복할 뜻을 가지고

<보해寶海>와 <미해美海>를 나누어서 볼모로 보내고 <눌기訥祇>를 내쫓았는데

<호물好勿>등이 이에 <눌기訥祇>를 옹위하여 그를 안돈시켰다.

부제(父帝)를 추존하여 나물대성신제(奈勿大聖神帝)라 하였다.

 

그 보록()에서 말한다.


아효성모(阿孝聖母)가 아호성모(阿好聖母)를 낳고 아호(阿好)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가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을 낳았고, 구도갈문왕이 골정태자(骨正太子)의 딸



녹모골모(綠帽骨母)를 취하여 말흔세신(末昕世神)을 낳았고,



말흔세신이 미추대성태제(味鄒大聖太帝)의 어머니 술례성모(述禮聖母)를 취하여



말구세신(末仇世神)을 낳았으니, 이가 바로 제()의 아버지가 된다.



(미추)태제(太帝)에게서 제()인 까닭에



내외(內外)가 중시하고 총애가 지극히 깊어 진골(眞骨) 중흥(中興)의 조상이 되었다.



그 천명(天命)이었음 이련가.” 

 

 

 

내물왕 47(402) 2, 왕이 별세하였다.

 

실성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알지의 후손이며, 대서지 이찬의 아들이다.

 

어머니 이리부인[''''라고도 한다.]은 석등보 아간의 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실성은 키가 75촌이요, 총명하여 미래를 예견하는 식견이 있었다.

 

내물이 별세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삼국사기>

 

 

- 실성(實聖)이 실성을 했나?

 

 

實聖尼師今立 閼智裔孫 大西知伊飡之子 母 伊利夫人[伊一作企] 昔登保阿干之女

妃 味鄒王女也 實聖身長七尺五寸 明達有遠識 奈勿薨 其子幼少 國人立實聖繼位

 

삼국사기는 4022월에 내물왕이 죽으니 실성이 왕위에 올랐는데

왕비는 미추왕(재위 261-283)의 딸이라고 한다.

 

남당유고에 의하면


실성의 왕비는 <미추味鄒(292-362)><광명光明(324-392)의 딸인


<보반保反(360-428)><내류內留(362-432)>


고구려 소수림왕 <구부丘夫(339-384)>母后 <해씨觧氏(323-404)>의 딸인


<천성天星 ,杜氏(367?- )>이다.

 

<보반><내류>는 미추왕이 69세와 71세에 낳은 딸이다.


<내류>는 미추왕이 죽은 해에 태어 난 딸이다.

 

삼국사기가 말하는 미추왕의 딸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르면 미추왕이 283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보반>281년생, <내류> 283년생이 되는 것이다.

 

<실성(359-417) 재위 402-417> 즉위한 해 402년에


<보반>122, <내류>120세가 되는 것이다.

 

<실성>44세에 즉위하였다.

 

44세의 왕이 120세가 되는 미추왕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실성>이 실성을 했던지 김부식이 실성을 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기사를 우리가 정사로 믿고있는 삼국사기에 어떻게 기록을 한단 말인가

 

<실성>의 생몰년과 재위기간은 남당유고와 삼국사기가 일치하는 불변의 사실이다.

 

남당유고와 화랑세기를 박창화의 창작이고,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기사를 어떻게 설명할까?

 

아직도 삼국사기를 우리의 정사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학자들은

삼국사기 기록의 이 자체 모순을 무엇이라고 항변할까?

 

남당유고를 박창화의 창작이라고 주장하는 우리의 사학자들도

실성과 김부식과 같이 모두 다 실성한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수호(水虎:임인402)

 

원년 27일 나물제(奈勿帝)가 붕()하였다.

 

보반후(保反后)가 유명(遺命)으로써 실성(實聖)을 세워 계군(繼君)을 삼았다.

 

이에 앞서 삼원공주(三元公主)에게 딸이 있어 <예생禮生>이라했는데

꿈에서 백대마(白大馬)를 보고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때마침 대서공(大西公)이 이르러 꿈 이야기를 듣고는

그를 사통하여 실성(實聖)을 낳았다.

 

처음에는 <마아馬兒>라 불렀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부드러우므로

사람들이 유마아(柔馬兒)라고 했다.

 

말구공(末仇公)이 몰()하고 대서지공(大西知公)

그 처 <휴례休禮>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자

이로써 <마아馬兒>는 <나물奈勿>과 한집에 동거하게 되었는데

정호(情好)가 심히 도타웠다.

 

<나물奈勿>이 뜻을 얻기에 이르자 그를 이끌어서 등용하였는데

고구려가 남침(南侵)하게 되자 사절을 받들고

고구려에 가서는 10년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여주(麗主) <담덕談德>이 그 누이() 두씨(杜氏)로 처를 삼게하여 세 아들을 낳았다.

 

두씨가 마침내 그를 위해 <담덕談德>을 설득해 말했다.

 

현주(賢主)는 신의()를 숭상하니 볼모를 잡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금 첩의 남편은 저쪽으로 돌아가면 금지옥엽(金枝玉葉)이지만

여기에 머무르면 구우일모(九牛一毛)일 따름입니다.

첩은 원컨대 그 나라에 함께 돌아감으로써 대왕을 위한 계책이 되고 싶습니다.”

 

<담덕談德>이 그를 허락하였다.

 

때에 <나물奈勿>은 병질로 정사를 볼 수 없어 <마아馬兒>를 보기 원했는데

돌아오게 되자 기뻐서 그 연고를 물으니 <마아馬兒>가 말했다.

 

제가 형의 병환을 듣고서 돌아가고자 하여 음식을 먹지 않고 하늘에 기도하니

하룻밤 사이에 까마귀의 머리가 남김없이 하얗게 되므로

고구려인들이 크게 놀라서 내가 돌아가는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나물奈勿>은 그를 신()이라 여겨 이에 실성(實聖)이라 이름하고

부군(副君)의 지위에 있게 했는데 이에 이르러 보위에 오르니 춘추 44세였다.

 

<보반保反>을 상궁(上宮)으로 삼고, <내류內留>는 하궁(下宮)으로 삼고,

두씨(杜氏)는 난궁(暖宮)으로 삼아 이를 삼궁(三宮)으로 하였다.

 

왕제(王弟) <대물大勿>과 <길막吉莫>을 좌우잡판(左右匝判)으로 삼고,

부공(父公) <대서지大西知>를 추존하여 세신(世神)으로 삼으며,

모주(母主) <예생禮生>을 성모(聖母)로 삼았다.

 

<눌기訥祇>를 태자로 삼고 <초로初老>를 태자비(太子妃)로 삼으니

대개 <나물奈勿>이 남긴 유촉(遺囑)이었다.

 

 

3월에 <나물奈勿>을 옥릉(玉陵)에 장사하고

<옹판雍判>으로 능문사주(陵門祀主)를 삼았다.

 

보반후(保反后)가 신제(新帝)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계부(繼夫)로 삼은 까닭은 그대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선제(先帝)가 그대를 아낀 까닭이오.

원컨대 선제(先帝)가 남긴 아이(遺兒)들을 보호하여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오.”

 

하니 제()()”하고 대답했다.

 

이에 <보반保反>이 마침내 신제(新帝)와 더불어 성모사(聖母祠)에 참배하고

남도(南桃)에서 하례를 받았다.

 

 

5, ()가 <보반保反>에게 말했다.

 

고구려(句麗)의 부강함은 다른 것이 없고 정치가 남자에게 있음이다.

우리나라는 골모(骨母)를 귀하게 여겨

정사가 부인(婦人)의 손에서 많이 나오니 강해질 수가 없다.

내가 네 남편이 되었으니 너는() 나와 한 몸이다.

이제부터 나로 하여금 정사를 맡게 하여 마땅히 고구려와 같은 강성함을 닮게 하라.”

 

<보반>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있을 것 같으면 무슨 일인들 따르지 않으랴.

이제부터는 네게 맡겨 그리하리라.”

 

이에 제()가 옛 제도(舊制)를 크게 개편하여 새로운 관제(新官)를 많이 설치하니

종신(宗臣)들이 그를 많이 불편해 하였다.

 

성산주(聖山主) <방단方丹>이 <나물奈勿>의 아들 <방석方石>을 낳았다.

 

 

7, 고구려()사람 <토오세土五稅>에게 명하여 우마(牛馬)의 목축을 가르치게 했다.

 

<마삼馬三>을 이벌찬(伊伐湌)으로 삼고 <개신芥臣>을 품주(稟主)로 하였다.

 

 

9, <일동一同>을 서로군주(西路軍主)로 삼았다.

 

 

삼국사기 내물 47년은 내물 26년 실성 원년 402년이다.

 

 

 

6. 김부식은 왜 신라기년을 위로 끌어 올렸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김부식은 서경파인 묘청, 정지상, 백수한 등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신라의 역사를 首位에 올리고 부여와 발해의 역사를 뺀 다음 신라 다음으로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함으로서 고려가 구구려를 이은 나라가 아닌 통일신라의 뒤를

이은 나라로 정통성을 가졌음을 강조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 기년을 60년정도 올려 놓은 것이다.

 

 

 

7. 박창화 필사본 고구려사초의 신라, 백제 기사

 

박창화 필사본 고구려사초나 고구려사략에 보이는 신라, 백제에 관한 기사는

고구려 기사와는 연결도 되지 않고 순서도 맞지 않게

후세의 누군가가 삼국사기의 기사를 가필하여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사초와 사략의 신라, 백제 기사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차대제 4년의 기사를 보자

 

기축{AD149},

 

정월, <미유>를 좌보로, <어질>을 우보로 삼았다.  

 

4월 정묘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5, 오성{토성}이 동방에 하늘에서 한데 모였다.

태사{점치는 관리의 우두머리}가 거짓으로 길조라 아뢰었더니, 주가 기뻐하였다.  

 

12, 물이 얼지 않았다.  

 

<신라>는 정월엔 <득훈>을 사찬으로 <선충>을 내마로 삼았고,

8월엔 혜성이 천시{}좌를 범했으며,

11월엔 우레가 일고 경도에서는 돌림병이 크게 돌았다.

 

 

일성16(149)

봄 정월, <득훈>을 사찬, <선충>을 내마로 삼았다.

가을 8, 혜성이 천시 성좌에 나타났다.

겨울 11, 우레가 있었고, 서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삼국사기>

 

 

일성왕 16(A.D.207)

 

정월 <홍완洪完>을 경로장군으로, 장씨(章氏)를 경모로,

<득훈得訓>을 사찬으로, <선충宣忠>과 <대관大貫>을 내마로 삼았다.

모두 장령(長岺)에서 공이 있는 자다.

 

2월 <문기>를 대모로 하여, 백대마(白大馬)를 내리고,

<현방玄方>8품권처로 하였다.

 

문기(文其, 현방의 시어머니)가 <현방>이 경모(京母)가 되지 못함을 가엾게 여겨,

권처로 삼기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3월 품주 <난화暖花>가 병이 들었다.

 

왕이 약사(藥師)에게 질병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이에 <천덕>을 면직하였다.

 

<골안骨安>을 이벌찬, 잠씨(潛氏)를 품주로 삼았다.

 

5월 가물었다. 문천(蚊川)에서 비가 오기를 기도하였다.

 

7월 <난화暖花>공주가 죽었다. <천덕>이 목을 찔러 따라 죽었다.

 

왕이 가엽게 여겨, 비익지총(比翼之塚, 새의 가지런한 날개모양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당시 사람들이 같은 구멍의 형제라고 하였다(=同母兄弟).

왕이 그들의 아들 <천백天白>을 위두사인으로 삼았다.

 

9월 경로(京路) <홍완洪完>을 차기대사(車騎大師),

권처 <현방玄方>을 차모(車母)로 삼았다.

 

이로써 군사(軍事)와 대사(大師)의 직을 겸하여 행하도록 하였는데

예로부터 없던 일이다. 집서 등이 불가함을 따지었으나,

왕이 특별히 그 직을 내렸다.

 

10월 왕과 <문기>대모가 이산(伊山)에 행차하여 대도사(大刀祠)에서 잤다.

 

<문기>가 이산의 백성들에게 큰 상을 주었다.

 

이로써 그 복을 모두에게 베풀었는데, 사람들이 이산대모가 다시 왔다고 하였다.

 

당시 역병이 돌았기 때문에 푸닥거리를 하였다.

 

11월 <문기>의 딸 가씨(可氏)를 <홍부洪夫>의 처로 하여

포사에서 결혼식을 행하였다.

 

12월 <토기吐己>를 이벌찬으로, <한자汗子>를 품주로 하였다.

 

<자리紫理>성모가 병으로 죽어 왕이 애통해 하였다.

정후례(正后禮)로 장사를 지냈다

 

 

 

차대제 4년의 신라기사는  차대제 기사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기사이다.

후대 누군가가 삼국사기 일성 16년 기사를 그대로 가필한 것을 알 수 있다.

 

남당유고 일성이사금 16(207)의 기록과 대비해 보라.

어느것이 역사적 실체이겠는가?

 

 

 

8. 달문대모의 가계도

 

月光 = 陽公                                                      花山

       |                                                                |

    月長 = 大盧 = 仇須知                                大盧=觜山

                     |                                                |

   長氏(70?-114) = 탈해(46-130) = 宋那  長氏   =  河婁 - 許婁(80?-155)

                         |                     |                 |

        達門(97-171) = 許婁  所亥     車門 - 吉門(?-152) = 경원

                                 |                                                 |                                                                      

                      許乙(乙公)(131-176)                            吉元(?-178) = 密華

                                                                                                 |  

                                                                                        吉宣(172 -226)

 

 

9.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년조정

 

묘호

(생몰년도)

삼국사기 재위기

(재위년수)

조정 재위기

(재위년수)


1. 혁거세

(BC5-66)

혁서거

仙桃

 

BC57- 3

(60)

 

8-65

(58)


2. 남해

(28-84)

혁거세

 

閼英

(BC3-65)

 

4-23

(20)

 

66-83

(18)


3. 유리

(46-107)

남해

 

雲梯

(36?-108)

 

24-56

(33)

 

84-106

(23)


4. 탈해

(46-130)

다파나

聖梯

 

57-79

(23)

 

107-125

(19)


5. 파사

(90-158)

유리

 

阿利

(73-133)

 

80-111

(32)

 

126-158

(33)


6. 지마

(131-191)

파사

 

史省

(100-173)

 

112-133

(22)

 

159-191

(33)


7. 일성

(135-212)

尹公

伊利生

 

134-153

(20)

 

192-212

(21)


8. 아달라

(180-243)

일성

 

只珍內禮

(155-212)

 

154-183

(30)

 

213-243

(31)


9. 벌휴

(189-256)

 

석추

(155-209)

 

只珍內禮

(155-212

 

184-195

(12)

 

244-256

(13)


10. 내해

(230-291)

 

伊買

(211-235)

 

內禮

(186-263)

 

196-229

(34)

 

257-291

(35)


11. 조분

(254-329)

 

骨正

(207-285)

 

玉帽

(238-311)

 

230-246

(17)

 

292-309

(18)


12. 첨해

(274-324)

내해

 

玉帽

(238-311)

 

247-260

(14)

 

310-324

(15)


13. 미추

(292-362)

 

仇道

(218-301)

 

述禮

(256-338)

 

261-283

(23)

 

325-349

(25)


14. 유례

(306-367)

조분

 

阿召禮

(262-327)

 

284-297

(14)

 

350-363

(14)


15. 기림

(330-372)

 

乞淑

(?-363)

 

阿爾兮

(286-362)

 

298-309

(12)

 

364-369

(6)


16. 흘해

(329-392)

 

于老

(277-331)

 

命元

(307-374)

 

310-355

(46)

 

370-376

(7)


17. 내물

(350-402)

 

末仇

(297-358)

 

休禮

(331-399)

 

356-401

(46)

 

377-401

(25)


18. 실성

(359-417)

 

大西知

(314-382)

 

禮生

(?-403)

 

402-416

(15)

 

402-416

(15)

 

실성 이후로는 기년이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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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