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사로 알고있는 삼국사기에는 고조선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 없다.

 

김부식은 ' 중국사서에는 통달해서 자세히 말하는 이가 많지만 우리나라의 일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망연해져서 그 시말을 알지 못해서 매우 한탄할 일이다...

 

중국사서는 소략하고,

古記는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여 삼국의 사실을 다 갖추어 싣지 못하였다....

 

이 책을 명산에 간직하지 못하다라도 간장 병마개로 쓰지는 마옵소서'

라고 삼국사표를 올렸다.

 

 

김부식이 삼국사를 편찬할 당시에는 고조선에 관한 기록이 상당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다는 핑계로 고조선과 부여 및 발해의 역사는

중국의 사서만을 오로지 믿을 수 있는것으로 생각하고 단 한줄도 싣지 않았다.

 

우리는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설화의 형식을 빌은

고조선의 단편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암의 단군세기는 47세 단군 고열가까지의 역대 단군에 대한 치세가 기록되어 있지만

아직도 위서 논쟁에 휩싸여 있다.

 

 

그러면 중국측 기록은 어떤가?

 

그 기록을 살펴보자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산해경 海內經>

 

동해(東海)의 안쪽과 북해(北海)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이라 한다.

조선은 천독(天毒)이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며 사랑한다.

 

조선에 대한 중국 최초의 기록으로 조선의 개략적 위치 및

조선의 정체성을 엿 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중국의 동해 안쪽과 북해(발해)의 모퉁이에 있었다는 것이다.

 

『산해경』 윗 구절과 관련하여 진(晉)나라 곽박(郭璞, 276~324)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

또 “천독(天毒)은 천축국이다.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글자가 있으며, 금은과 돈이 있다.

부도(浮屠)가 이 나라에서 나왔다.

진(晉)나라 대흥4년(大興, 318~321) 천축국의 오랑캐 왕이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

고 하였다

 

321년은 동진(東晋) 元帝 <사마예司馬睿(276-322) 재위 317-322>가

전조(前趙) <유총劉聰>에게 낙양을 빼앗기고 건업으로 천도한 지 5년이 되는 해이다.

고구려 미천대제 22년, 백제 비류왕 18년, 신라 첨해왕 12년이고

<사마예>가 <모용외(269-333)>를 평주자사 요동군공으로 봉한 이듬해이다.

<곽박>이 말하는 천축국의 오랑캐 왕이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는 것은

<모용외>가 동진(東晋)의 인정을 받기위하여 <사마예>에게 보물을 바친것을 말한다.

 

‘毒’은 예로부터‘竺’과 통용자이며 ‘竺’은 후에 '篤'으로도 쓰였고, ‘厚’의 의미가 있다.

 

‘厚’는 ‘두텁다’는 형용사적 의미와 함께 ‘두터이 하다/삼가 정성스레 대하다’의 뜻이다.

 

조선은 진실로 하늘을 섬기는 천자의 나라 천축국이었으며,

하나님이 보살피시는 나라였으며

부도(浮屠)의 나라였으며, 신시(神市)의 나라였고. 해시(海市)의 나라였다. 

 

부도(浮屠)는 좁은 의미로는 석가모니불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깨달은 사람’으로 성인이나 군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조선이 천축국이며, 성인군자가 다스린 이상향의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이라는 명칭에는 수렵한 양(羊)과 고기(魚)로 조제(朝祭)를 지내며

인류가 도달하려는 이상향을 실천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唯東夷从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孔子曰, 道不行, 欲之九夷.

乘桴浮於海有以也.                                                                             

<說文解字 第四>

 

오직 동이만이 대의를 따르는 대인들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므로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가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중국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니 구이로 가고 싶다.” 하시고,

뗏목을 타고 바다에 띄웠으니 참으로 까닭이 있는 일이다.

 

설문해자는 후한 때 학자인 허신(許愼)이 편찬한 중국 최초의 문자학 서적이다.

고문자에 대한 자료가 많이 보존되어 있어서,

사료가치가 매우 높은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어진 사람은 장수하므로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가 있으니 고조선이라고 하였다.

 

 

王制云:「東方曰夷.」夷者, 柢也, 言仁而好生, 萬物柢地而出. 故天性柔順, 易爾御,

至有君子、不死之國焉. 夷有九種,

曰畎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故孔子欲居九夷也.                                        

<後漢書 卷八十五 東夷列傳第七十五>

 

<왕제>가 이르기를 ‘동방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근본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살리기를 좋아하므로

만물이 땅에 근본하여 출산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성이 유순하여 도리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과 불사국이 있기까지 하다.

이(夷)에는 아홉 종류가 있으니,

견이(畎夷)‧우이(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

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도 구이(九夷)에 살고 싶어 하였다.

 

후한서는 후한시대(AD 25~220)를 기록한 중국 정사이다.

동이는 천성이 유순하여 도리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과 불사국이 있다고 하였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산해경 海內北經>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으로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列陽)은 연(燕)나라에 속한다.

 

열양은 열수(호타하)의 북쪽을 바다는 황하를 산은 백석산(낭아산,갈석산)을 말한다.

 

곽박이 해설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으로 기자를 봉한 땅이다.

열(列)은 또한 물 이름이다.

지금 대방(帶方)에 있는데 대방에는 열구현(列口縣)이 있다."고 하였다.

 

열수(列水)는 지금의 호타하를 말한다

 

 

(제나라의) <환공 재위 BC 685-BC 644>이 <관자(管子)管仲 BC725-BC 645)에게

 

"내가 듣건 데 海內에 귀중한 예물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에 대해 들을 수 있소?"라고 하니

 

관자가 "음산(陰山)의 유민이 그 한 가지요, 燕의 자산 백금이 그 한 가지요,

발조선(發朝鮮)의 문피가 그 한 가지요, …

 

환공이 말하기를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잘못된 정치가 천하에 퍼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걱정인데 … 발조선이 조근(朝瑾)을 오지 않는 것은

문피와 태복을 예물로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

 

한 장의 표범가죽이라도 여유 있는 값으로 계산해 준다면

8천리 떨어진 발조선도 조근을 오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관자>

 

제나라 <환공>과 <관중>은 BC 7세기의 사람이다.

발조선(發朝鮮)은 밝달조선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紫府仙人 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門下 代炎帝而爲帝,
小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年憂 吾先夫子稱之,
夏禹塗山會 夫婁親臨 而定國界,
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
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
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
是故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
吾先夫子 欲居東夷 而不以爲陋,
吾友魯仲連亦有欲踏東海之志
余亦欲居東夷之意
往年賦觀東夷使節之入國其儀容有大國人之衿度也,
東夷蓋自千有餘年以來 與吾中華 相有友邦之義 人民互相來居往住者接踵不絶,

吾先夫子 印夷不以爲陋者 其意亦在乎此也, 故余亦有感而記實情以示後人焉

魏 安釐王 十年 曲阜 孔斌 記 (字 子順)

<東夷 列傳 (註 檀奇古史 附錄)>


 

동방에 오랜 나라가 있으니 이름하여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별자리 분류로는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의 방향{동북방}이며,

땅은 선백(鮮白){선비}에 접해 있었다.


처음에 신인(神人) 단군(檀君)있었는데 마침내 구이(九夷)의 추대에 응하여

임금이 되었으며 요(堯)임금과 더불어 병립하였다.

 

순임금(虞舜)이 동이(東夷)에서 태어나서 중국에 들어와 천자가 되어

다스리기에 이르니 많은 왕들 중에서 탁월하게 뛰어난 분이셨다.

 

자부선인(紫府仙人)이 학문에 통달하고 다른 사람보다 지혜가 있으니

황제 헌원이 그에게서 공부하고 내황문을 받아와서 염제 신농씨 대신 임금이 되었다

 

소련과 대련이 부모의 상을 잘 치뤄 3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3년을 근심하니

나의 할아버지께서 칭찬하셨다.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도산(塗山)에서 회맹(會盟)할 때에

부루(扶婁)께서 몸소 임하시어 나라의 경계를 정하였다.

 

유위자(有爲子)가 하늘이 낳은 성인으로 훌륭한 이름이 중국에도 넘쳐 흐르니

이윤(伊尹)이 그 제자로 공부해서 은나라 탕임금의 어진 재상이 되었다.

 

그 나라는 비록 크나 스스로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 병력은 비록 강하나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으며,

풍속이 순후(淳厚)하여 길을 가는 사람이 양보하고

먹는 사람은 밥을 상대에게 권했었고 남녀가 처하는 곳을 달리하여

앉은자리를 함께 하지 않으니 동방예의의 군자국이라고 할 만 하다.

 

이런 연유로 은나라 태사(太史)였던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조정에서 신하 노릇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어서

동이(東夷)의 땅에 피해 가서 거처하였고

우리 선대 어른(공자)께서 동이에 거처하고자 하셨으며 누추하지 않다고 여기셨다.

 

내 친구 노중련(魯仲連) 역시 동쪽 해안 지방을 답사할 뜻을 가지고 있고

나도 역시 동이에 거처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왕년(往年)에 동이의 사절이 입국하는 것을 살펴보니

그 몸가짐이 대국인(大國人)의 금도(衿度)가 있었다.

 

동이는 대개 천 여년 이래로부터 우리 중화(中華)와 서로 우방의 의리가 있어서

나라 사람들이 서로 와서 거처하고 가서 사는 경우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우리 선대 어른께서 동이가 누추하지 않다고 여기신 것은

그 뜻 역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깊이 느낀 바가 있어

이 진상을 기록함으로써 후인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위(魏)나라 안리왕(安釐王) 10년 곡부(曲阜) 공빈(孔斌)이 기록하다.

(자(字), 자순(子順))

< 홍사(鴻史)서문 >

홍사(鴻史)서문은 공자(孔子)의 7대손인

<공빈斌, 順>이 BC268년에 쓴 글이다.

 

조선 영조때 <지광한池光翰(1695-1756)>이

1731년에 함안(咸安)의 안인촌(安仁材)에서 홍사(鴻史)를 지었는데

반고(盤古)에서부터 명나라까지 제왕통기(帝王統紀) 16편, 열전 32편 등이다.

 

이 홍사(鴻史) 서문에 <공빈>이 동국열전의 서문을 썼다는 내용을 인용하였다.

  

 

 

소진(蘇秦)이 (중략) 연문후(燕文侯: 재위 BC361~BC 333)에게 말하기를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林胡)누번(樓煩)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雲中){今 大同市 인근}구원(九原){今 包頭市 인근} 이 있고

남쪽에는 호타(滹沱)수(易水)있으며 .... "

<전국책 燕策>

 

전국책은 BC50년에 <유향>이 편찬하였다.

 

 

<진개의 침략전 진번과 조선 및 연나라의 걍역> 

 

 

연(燕)이 동호(東胡)를 습격하여 바깥으로 천리를 물러가게 했으며

요동(遙東)을 지나 동쪽으로 조선을 공격했다

<염철론(鹽鐵論) 권8, 벌공(伐公)편>

 

염철론은 BC52년에 <환관>이 편찬한 것이다.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에 나타난 조선

 

한국과 중국에 널리 알려진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공후인)도

조선에 대한 비밀을 찾아가는 단서가 된다.

 

공무도하가는 후한(後漢)때

채옹(蔡邕,132~192)의 『금조(琴操)』에 처음 채록되어 전해지며,

삼국시대 진(晋) 나라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는

관련 설화도 함께 전해진다.

 

송(宋) 나라 때에 곽무청(郭茂淸)이 역대의 악부를 정리한『악부시집(樂府詩集)』에도

수록되어 있다.

 

한치윤은 『해동역사』의 ‘악지(樂志)’에 『고금주(古今注)』의 설화를 소개하면서

“공후인(箜篌引)은 조선(朝鮮)의 진졸(津卒)인 곽리자고(藿里子高)의 처 여옥(麗玉)이

지은 것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은 한반도를 가리키는 지명이 명백히 아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조선이 하북의 직예성(直隸省)의 조선현을 가리키고 있어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이 작품을 중국노래로 보고 있다.

 

공무도하가는 중국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며

이백(李白)의 시 가운데도 공무도하가가 있기도 하다.

 

고조선 시대에 민간에서 불리던 노래가 한사군(漢四郡)의 성립 이후

중국으로 유입되어 한자로 채록된 작품 것이다.

 

 

 

청주(靑州)는 바다에 닿아 있으며 요동과 우이(嵎夷)의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순(舜) 임금이 청주를 고쳐서 영주(營州)라고 하였는데,

요동과 조선이 모두 영주의 영역 내에 있었다.

조선은 바로 우이의 지역으로, 기자가 봉해진 조선이 바로 이 지역이다.

<우공추지(禹貢錐指)>

 

 

우공추지(禹貢錐指)는 청나라 강희 연간에 <호위(胡渭)>가 쓴 지리서이다

 

 

 

 

중국의 수많은 사서는 조선이 하북에 있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신창(新昌), 비여(肥如), 조선현(朝鮮縣), 북평(北平), 양평(襄平),

노룡(盧龍), 영주(營州), 청주(靑州)가 다 그 인근에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고조선의 건국을 하나의 신화로 생각하는가?

 

김부식과 이병도의 덫에서 깨어나지 못하고는 결코 우리의 고대사를 복원할 수 없다.

 

 

 

- 부도지(符都誌)로 보는 고조선의 비밀

 

 

역사란 무엇인가?

 

근대 역사학의 선구자라 일컬어지는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 첫머리에서

 

‘역사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공간적, 시간적으로 확대 발전하는 심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대부분 역사서들의 서술이 이 범주를 넘지 못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인가?

 

신성한 영혼을 지닌 인간의 역사에 어찌 투쟁의 역사만 있으랴!

 

투쟁의 역사 저 너머로 가슴 뭉클한 사랑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오고 있음을 나는 본다.

 

그것은 수 천 년 동안 베일 속에 가려졌던 한민족의 참 역사였다.

 

그 역사는 ‘잃어버린 참 나를 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숭고한 삶의 기록들’이었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참 역사는 종교가 되고, 철학이 되고, 과학이 되고,

 

한편의 거대한 사랑의 서사시가 되고, 봄바람처럼 감미로운 교향곡이 된다.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 신화일까? 역사일까?

  

이제 아사달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우선 중국의 역사서들을 통하여 정확한 아사달의 위치를 찾는 일부터 시작하려 한다.

 

여러 역사서들의 교차검증을 거쳐야 하므로 조금은 지루하고 딱딱한 과정이다.

 

또한 고정관념의 두터운 껍질을 깨야만 하는 아픔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고의 시간이 지나면 위대한 역사의 숨결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사달을 찾아가는 길목에는 저 유명한 갈석산이 우뚝 솟아 있고,

 

습수ㆍ산수ㆍ열수라는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산해경』에서 ‘동해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있다고 말한

 

조선천독(朝鮮天毒)의 낙원이 위치한 곳이다.

 

 

1. 갈석산으로 보는 낙랑조선

 

 

갈석산(碣石山)은 나침반도 없이 상고사라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우리들에게

북극성과 같은 존재이다.

 

그 갈석산의 넉넉하고 아늑한 품속과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발해만을 배경으로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고조선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이다.

 

 

 

<1136년作 禹跡圖의 구수(滱水){唐河의 옛 이름}와 常山(恒山)및 狼山>

 

 

 

<1665년 네델란드인 Bleau Joan 作 고지도의 恒山, 대무산(백석산) 및 랑아산>  

 

 

 

『갈석산碣石山은 중국의 북경 서남쪽 200여 키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으로 해발 2,096M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백석산 동쪽의 한 봉우리인 낭아산(狼牙山), 해발1,105M이다.

 

이 낭아산은 옛날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위치하여

 

수성산(遂城山) 또는 용산(龍山)으로도 불렸다.

 

진시황의 진나라 장성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1) 황하의 하류에 위치한 갈석산

 

 

갈석산은 우리 상고사를 공부하는데 아주 중요한 산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주해한 『사기색은』에서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기색은』의 뒤를 이어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역사서들이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갈석산의 위치를 알면

 

우리 상고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낙랑군의 위치를 알 수 있고,

 

고조선의 중심 강역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갈석산의 위치가

 

수많은 학설만 난무할 뿐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갈석산은 황하하류의 해변가에 있는 산인데 황하의 흐름이 자주 바뀌고,

 

또 발해만의 해안선이 계속 변했기 때문이다.

 

 

지난 2,000여 년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이 황하의 흐름과 해안선의 변화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시대의 상황을 가지고 갈석산을 설명하였으므로

 

지금까지 혼란만 가중되어 왔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적 방법으로

 

시대별 황하의 흐름 및 해안선의 변화를 모두 알고 있다.

 

 

그러므로 갈석산의 위치를 찾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다.

 

 

이제 진정한 갈석산을 찾아 수천 년 전 과거로 여행해 보자.

 

 

중국의 사서삼경 가운데 하나인『서경』의 ‘우공편禹貢篇’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도이(島夷)는 가죽옷을 가지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

(島夷皮服 夾右碣石入于河)”

 

 

역사에 등장하는 갈석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도이(島夷)는 발해만 북부지역에 살던 동이족의 한 갈래인데,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 도이가 배를 타고 발해만 연안을 돌아,

 

황하로 들어설 무렵 오른쪽 해변에 우뚝 솟은 갈석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보자.

 

 

 

 

황하의 흐름 및 해안선 지도는 시대별 황하의 흐름과 해안선을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도이가 배를 타고 황하로 들어가던 4,000여 년 전의 상황을

현대 지도에 표시해 보았다

 

(고대황하의 흐름은 ①번 B.C 602년 이전,

고대해안선은 진秦나라 시대 해안선을 표시).

 

 

발해만에서 황하로 들어설 무렵 오른쪽 해변에는 자그마한 야산들이 줄지어 선 가운데

 

해발1,105M의 낭아산(狼牙山, 지도에서 갈석으로 표기)이

 

홀로 우뚝 솟아 있음을 볼 수 있다. 험난한 항해의 이정표로 삼기에 넉넉한 규모이다.

 

 

이 갈석산(낭아산)의 주산이 왼쪽의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으로

 

지도에서 붉은 선사각형의 정중앙 교차점에 위치한 산이다.

 

 

 

(2)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 등의 고지도로 보는 갈석산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 (남송1209년작)>

 

 

<우공구주산천지도(남송 1185년작)>

 

 

 <기주협우갈석도 1177년작>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로 손꼽히는

 

남송시대『우공구주산천지도』,『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 『기주협우갈석도』등에

 

갈석산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고대 중국인들이 생각한 갈석산은

 

구하(九河, 황하가 하류에서 아홉 갈래로 갈라지므로 구하라고 함)의 위쪽에 위치했다.

 

 

특히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는 항산(恒山)항수(恒水)위수(衛水)를 통하여

 

갈석산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서경』 ‘우공84장’에 나오는 구절을 보자.

 

견산(岍山)을 인도하여 기산(岐山)에 미치고 형산(荊山)에 이르며,

 

황하를 넘어서 호구(壺口)뇌수(雷首)로부터 태악(太岳)에 이르며,

 

저주(底柱)석성(析城)으로부터 왕옥(王屋)에 이르며,

 

태행산(太行山)과 항산(恒山)으로부터 갈석(碣石)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導岍及岐至于荊山逾于河 壺口雷首至于太岳 底柱析城至于王屋

太行恒山至于碣石 入于海)”

 

 

우임금이 황하를 다스리는 내용인데,

 

황하가 태행산과 항산으로부터 갈석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1785년作 대청광여도의 恒山과 唐水,拒馬河 및 曲陽>

 

 

위 구절의 항산(恒山)에 관하여 『서경』의 편찬자인 채침은 해설하기를

 

‘항산은 『지리지』에 상산군(常山郡) 상곡양현(上曲陽縣) 서북쪽에 있다하니

지금의 정주(定州) 곡양(曲陽)이다.

(恒山 地志 在常山郡上曲陽縣西北 今定州曲陽也)’고 하였다.

 

또 중국고지도인 『당토명승도회』등을 참조하면

항수(恒水)는 현재의 당하(唐河)이고,

위수(衛水)는 현재의 대사하(大沙河)의 지류이다.

 

그러므로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 나타난 항산(恒山)은

지금 중국지도에 나타나는 태백산(太白山)이다.

 

이 태백산은 예로부터 항산恒山, 상산常山, 기산箕山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그렇다면 지도에서처럼 황하의 바로 위쪽이고,

 

항산(태백산) 오른쪽에 위치한 갈석산은 어떤 산인가?

 

오직 백석산(白石山)이 있을 뿐이다.

 

 

<기주협우갈석도를 현대지도에 나타낸 지도>

 

또 다른 남송시대의 고지도인 『기주협우갈석도』를 보자.

 

갈석산 주변의 위치를 자세하게 나타내고 있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기주협우갈석도』를 현대지도에 옮겨놓은 것이 위의 지도이다.

(노란색은 장성이며 빨강색은 연장성이다)

 

우리가 상고사를 공부할 때 항상 어려움을 겪는 것이 연나라가 설치하였다는 연5군,

상곡(上谷),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요서(遙西),요동(遼東)의 위치 문제이다.

 

『기주협우갈석도』는 이에 대하여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당시만 하여도 요수遼水의 위치가 지금의 조백신하(朝白新河)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지도의 발해 가운데 다음과 같이 갈석을 자세하게 설명한 글이 있다.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운반하려면,

 

고수(沽水)역수(易水)탁수(涿水)요수(遙水)로부터 바다로 들어온 후

 

서쪽으로 대하상류를 향하여 멀리 기주(冀州)의 도읍지로 도달한다.

 

 

이때에는 구하(황하)가 바다와 구분되지 않으므로 갈석이 똑바로 하구에 있다.

 

 

그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

 

(冀之北貢 自沽易涿遼水入海而後 西向以上大河永達冀都

此時九河未熟於海而碣石正在河口 於其遡河西上則 碣石在右故 曰夾右碣石)

 

 

마치 내가 배를 타고 항해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자세한 설명이다.

 

 

요수등으로부터 발해로 들어와서 서쪽으로 해변을 따라 항해하면

 

저 멀리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황하 하구와 우뚝 솟은 갈석산이 정면에서 다가오고,

 

마침내 갈석산을 오른쪽에서 끼고 돌아

 

황하로 들어서는 모습이 눈에 보이듯이 너무나 선명하다.

 

 

『기주협우갈석도』의 그림이 참으로 절묘하다.

 

 

 

(3)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

 

지금까지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공 갈석을 살펴보았고,

그 갈석산이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임을 살펴보았다.

 

이제 좀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갈석산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사기』‘하본기夏本紀’에 나오는 구절이다.

 

“도이島夷는 가죽옷을 가지고,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

(鳥夷皮服 夾右碣石入于海)”

 

위에서 『서경』‘우공편禹貢篇’에서 살펴 본 구절과 같은 내용이다.

마지막 글자인 해(海)가 『서경』‘우공편禹貢篇’에서는 하(河)로 되어 있으나,

고대에는 황하 하류가 넓어서 바다와 구분이 되지 않아

황하를 바다라고 부르기도 했으므로 같은 뜻이다.

 

우리 역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한 평범한 이 구절이

『사기색은』의 다음과 같은 해설로 우리 역사의 최대 이슈로 등장하게 된다.

 

 

“『지리지』에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군 려성현 서남에 있다.’고 하였다.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고 하였다.

 

또 『수경』은 ‘요서 임유현 남쪽 물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갈석산은 두 개인 듯하다.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 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 아니다."

(地理志云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又水經云 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 此云 夾右碣石入于海 當非北平之碣石)

 

 

갈석산에 대하여 수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구절이다.

 

지금 여기서는 그 수많은 논란들을 잠시 접어두고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는 구절에만 집중하려고 한다.

 

진정한 갈석산을 알게 되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논란들이

아침 안개가 걷히듯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갈석산이 있다는 낙랑군 수성현은 어떤 곳인지

몇 가지 사료를 살펴보고 그 위치를 알아보자.

 

 

① 『사기색은史記索隱』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고하였다.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② 『진晉서 지리지』 낙랑군조

 

낙랑군은 한나라가 설치했다. 6개현을 다스리고 3,700호이다.

조선현(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땅이다), 둔유현, 혼미현,

수성현(진나라 만리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루방현, 사망현

(樂浪郡 漢置。統縣六,戶三千七百。朝鮮 :周封箕子地。屯有。渾彌。

遂城 : 秦築長城之所起。鏤方。駟望)

 

 

③ 『무경총요武經總要』

 

광신군(廣信軍) 치소는 수성현이다. 戰國시기 무수현(武遂縣)의 땅이다.

진(秦)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에는 안숙군(安肅軍)이 있고,

軍에서 20리 서쪽에 장성이 있다.

(廣信軍治遂城縣戰國時武遂縣地 秦築長城所起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 二十里西至長城)

 

 

④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수성현은 옛날 23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4개 마을이다. 戰國시기 무수(武遂)현이다.

 

『사기』에 조나라 도양왕(悼襄王) 1년(BC244) 이목장군이

연나라를 공격해 무수를 빼앗았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본래 한나라 북신성현(北新城縣)이었다.

 

『한서지리지』는 말하기를 ‘연나라 남쪽 탁군(涿郡)의 북쪽에 신성이 있다.’고 했다.

 

후한 때는 중산국(中山國)에 속했다.

 

『13주지』에는 ‘하간에 신성이 있으므로 북(北)자를 더한 것이다.’고했다.

 

후위의 무제 영희2년(533년) 이곳에 남영주(南營州)를 설치했다가

신창현(新昌縣)으로 고쳤다.

 

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수성현으로 고쳤다. 지금치소는 부산촌(釜山村)이다.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의 시작점이 이 읍의 경계에 있다.

 

수성산의 옛 이름은 용산(龍山)인데 현의 서쪽25리에있다.

(遂城縣舊二十三鄕今四鄕 戰國時武遂縣也 史記趙悼襄王一年 李牧將功燕拔武遂是也

本漢北新城縣 漢書地理志云 燕南得涿郡之北新城 後漢屬中山國土地

十三州志云 河間有新城故加北字 後魏武帝永熙二年於此置南營州 改爲新昌縣

隋開皇十六年改爲遂城縣 今治釜山村 秦築長城起首故

此邑之界遂城山舊名龍山在縣西二十五里)

 

 

위에서 『태강지리지』와『진晉서 지리지』는

모두 진晉나라 시절의 낙랑군을 말하고있다.

 

낙랑군에 기자를 봉한 조선현이 있고, 만리장성이 일어난 수성현이 있다는 것이다.

 

『무경총요』는 북송 때 전쟁에 관한 사항을 기술한 책(1044년 작)이며,

『태평환우기』는 979년 송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편찬한 지리지이다.

  

『무경총요』와 『태평환우기』는 수성현의 내력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수성현이  戰國시기 연나라 무수(武遂)현이며,

진(秦)나라의 장성이 일어난 곳이므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성현의 동쪽에는 안숙(安肅)이 있고,

수성현 서쪽 20리에 장성이 있다고 하였다.

 

또 수성현에 부산(釜山)촌이 있으며,

현의 서쪽 25리에 수성산이 있는데 수성산의 옛 이름은 용산(龍山)이라 했다.

 

 

 

 

 

 

이제 지도들을 보자.

 

위의 지도들은 모두 자형관(紫型關)과 수성현(무수현 또는 부산)을 중심으로

표현하였으며, 파랑색 선은 진나라 장성이 축조될 당시의 해안선을 나타낸 것이며

노란색 선은 세 번째 지도의 장성을 각 지도에 표시하였다.

 

우선 청나라 때 당나라 시기 지명을 고증하여 작성한

『당토명승도회唐土名勝圖會』를 보자.

 

부산촌(釜山村, 수성현의 치소) 동쪽에 안숙(安肅)이 있고,

그 서쪽에 용산(龍山, 수성산)이 있어서

『무경총요』와 『태평환우기』의 기술이 정확함을 알 수 있다.

 

또 위 4개의 지도를 통하여 수성현이 무수현이며 부산촌임을 알 수 있고,

갈석산이 낭아산狼牙山이며 수성산이며 용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차츰 알게 되겠지만 위의 지도에서 만성(滿城)으로 표시된 곳이

낙랑군 조선현으로 위만조선의 도읍지이며, 기자조선의 왕검성이 있던 곳이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눈 여겨 보아야 할 사항은

수성현이 왜 진(秦)나라 시기 장성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해안선의 변화에 그 답이 있다.

 

진(秦)나라 시기 해안선이 수성현까지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이제 수성현의 지리적 중요성을 살펴보자.

 

중국 산서성과 하북성은 험준한 태행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가로막아 교통을 차단하고 있다.

 

그리하여 산서성 북부에서 하북성 북부로 많은 군사를 움직일 만한 곳은

백석산(갈석산)에 위치한 자형관(紫型關)과

북경 서북쪽의 거용관(居庸關) 밖에 없다.

 

이 중 거용관은 너무 북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고대에는 위의 지도에서 표시한 백석산(갈석산)의 자형관(紫型關)이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북부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 할 만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하북성 중남부에서 하북성 북부로 통하는 길목에는

험준한 백석산(갈석산)과 발해만이 가로막아

호리병 입구처럼 좁다란 통로를 형성하고 있던 곳이 바로 수성현이다.

(『아세아동부여지도』참조)

 

그러므로 백석산(갈석산)에 위치한 자형관(紫型關)과 수성현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산서성과 하북성 중ㆍ북부의 주인이 결정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갈석산은 중국의 아홉 황제가 올랐다고 하여 구등황제산九登皇帝山으로도 불린다.

갈석산에 오른다는 것은 곧 대륙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국의 수많은 황제들이 오르기를 간절히 꿈꾸었던 유명한 산이었다.

 

 

위 지도에서 3번째 지도는 ‘연(燕) 소공(召公)의 장성’이라 소개된 장성이다.

 

저 장성이 燕나라 장성인지 秦나라 장성인지

또는 다른 나라 장성인지는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진(秦)나라 또는 그 이전의 장성이라면

당시의 해안선이 수성(무수)현 근처까지 올라왔으므로

수성(무수)에서 왼쪽의 장성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리장성이 수성(무수)현에서 출발하여 왼쪽으로 백석산(갈석산)을 휘감고

자형관과 당하를 넘어 태백산을 지나고 안문과 황하를 넘고

섬서성을 지나 감숙성 임조(臨洮)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모든 사서들이 낙랑군 수성현에서 장성이 일어났다고 한 까닭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수성(무수)현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진 장성은 진(秦)나라 이후의 장성이며,

해안선이 동쪽으로 점점 물러남에 따라 조금씩 연장되어서

 

지도와 같은 장성이 완성되기까지 수백 년의 장구한 세월을 필요로 하는 장성이다.

 

그러므로 저 장성은 어느 한 왕조의 장성이 될 수 없으며,

수많은 왕조의 합작품일 가능성이 높은 흥미진진한 장성이다.

 

해안선이 동쪽으로 물러남에 따라 각종 지명들도 계속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4) 갈석산의 필요충분조건 

 

 

갈석산의 위치에 대하여 왜 그토록 수많은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황하의 흐름과 해안선이 시대에 따라 변했기 때문이다.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은 장성이 시작되었고,

구등황제산(九登皇帝山)이라 부를 만큼 너무나도 유명한 산이라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시대별로 황하의 흐름이 바뀌자

사람들은 자기시대의 황하 하류 바닷가에서 새로운 우공갈석을 찾게 되었고,

갈석산이 두 개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역사서의 갈석산 기록들을 읽으면

모두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것이며,

아주 유용한 정보가 가득함을 알 수 있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서의 두 구절을 살펴보자.

 

 

① 『사기색은史記索隱』

 

『지리지』에 말하기를 ‘갈석산은 북평군 려성현 서남에 있다.’고 하였다.

 

『태강지리지』는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고 하였다.

 

또 『수경』은 ‘요서 임유현(臨渝縣) 남쪽 물 가운데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갈석산은 두 개인 듯하다.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 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北平)의 갈석이 아니다.

 

(地理志云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又水經云 在遼西臨渝縣南水中 蓋碣石山有二 此云 夾右碣石入于海

當非北平之碣石)

 

  

『사기색은』의 저자 사마정은 8세기 초반의 당나라 시대 사람이다.

 

이때는 황하가 본래의 우공갈석인 백석산으로부터 수 백리 떨어진 곳으로 흘렀다.

 

사마정이 갈석산을 두 개로 인식하는 순간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는 우공갈석을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아닌 새로운 갈석산(사마정 당시 황하 하류에 존재)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른쪽으로 갈석을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 는 구절의 갈석은

당연히 북평의 갈석이 아니다.’고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비단 사마정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황하 흐름의 시대별 변화를 몰랐던 고대 사람들은

누구나 사마정과 똑같은 착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사마정이 착각하여 쓴 내용을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역사의 미아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북평군 려성현 서남쪽이며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 갈석산이 본래 우공갈석이며,

요서 임유현 남쪽 물 가운데 있는 갈석산은

『수경』의 저자와 사마정이 착각한 새로운 갈석산임을 알 수 있다.

 

 

② 『통전通典』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에서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황하로 들어온다.’는 문구를 살펴보면

우갈석은 황하가 바다 근처에 다다르는 곳에 있다.

 

지금 북평군 남쪽 이십 여리의 고구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按尚書云

夾右碣石入於河 右碣石即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為左碣石)”

 

『통전』의 저자인 두우(서기 735~812)도 당나라 시대의 사람이다.

 

두우도 사마정과 같은 착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우의 글을 읽어보면 두우가 왜 착각에 이르게 되는지 잘 알 수 있다.

 

『상서』에서 말하는 우공갈석은 황하 하류의 바다 근처에 있어야 하는데,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은 이미 1,000여 년 전부터 황하가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좌갈석으로 생각하였다.

 

지형 상 황하가 본래의 갈석산(백석산)보다 더 왼쪽으로 흐를 수는 없으므로

새로운 갈석산은 반드시 본래 갈석산 오른쪽에 생길 수밖에 없다.

(중국측에서 바라본 방향)

 

그러므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은 마침내 좌갈석으로 자리잡고

새로운 갈석산은 우갈석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통전』의 위 기록은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

갈석산에 대하여 착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위 구절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두우는 직접 갈석산(백석산)을 방문하여 장성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이 있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지금 갈석산(백석산)에서 장성이 동쪽으로 강물을 끊는 곳은

복마관(伏馬關)자형관(紫型關) 부근 밖에 없다.

 

그러므로 두우 당시 복마관을 흐르는 당하(唐河)

또는 자형관을 흐르는 거마하(拒馬河)가 요수(遼水)였다.

 

당나라와 고구려가 갈석산(백석산)과 요수를 경계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신명선제 재위 시(AD105~AD109)에 요동과 우북평을 정벌하였다가

AD196년 발기의 난으로 요동을 공손도에게 내어주고

광개토대왕 재위 시에 요수(今 조백하)를 넘어 지금의 거마하까지 진출하였다.

 

따라서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면서 조서에서

‘고구려의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 미욱스럽고 불경하여,

발해(渤海)와 갈석(喝石) 사이에 모이고,

요수(遼水)와 예수(濊水)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고 말한 의미를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서경』의 우공갈석은 오직 백석산 하나뿐이며,

나머지 황하 하류의 해변에 위치한 다른 갈석산들은 모두 착각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주 생뚱맞은 갈석산이 하나 있다.

지금 난하 부근에 위치한 갈석산이다.

 

다른 갈석산들은 비록 『서경』에서 말하는 진짜 우공갈석은 아닐지라도

황하 하류의 흐름이 변한 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의 착각이 빚어낸 것으로

애교로 봐 줄 수 있다.

 

리고 나름 우리에게 아주 유용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황하의 흐름과는 전혀 무관한

현재 난하 부근의 갈석산은 생뚱맞다 못해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어느 시기엔가 진짜 갈석산(백석산) 주변의

창려, 험독, 노룡, 당산,북평, 낙랑, 평주 등의 지명들이

갈석산과 더불어 풀 세트로 현재의 난하 방면으로 옮겨졌다.

 

고대판 동북공정이 벌어진 현장이다.

 

이 가짜 갈석산에 현혹되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그 정체를 밝힌다.

 

 

 

① 『서경』의 우공(禹貢)갈석은 반드시 황하 하류의 해변가에 있어야 한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갈석산은 모두 불순한 의도를 가진 가짜 갈석산이다.

 

진짜 갈석산(백석산) : 하나라 우임금 당시 황하 하류 해변가에 있었다.

가짜 갈석산(난하부근) : 황하의 흐름과 전혀 관련이 없다.

 

 

② 갈석산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진짜 갈석산(백석산) : 지금도 백석산에는 만리장성이 유유히 지나가고 있다.

가짜 갈석산(난하부근) : 장성이 없다.

다만 100여리 북쪽으로 장성의 흔적이 있을 뿐이다.

 

 

③ 갈석산은 중국과 고조선 또는 고구려의 경계가 되는 산이었다.

 

진짜 갈석산(백석산) : 산서성과 하북성의 경계를 이루는 웅장한 산으로

나라 간의 경계가 되기에 넉넉한 규모이다.

 

가짜 갈석산(난하부근) : 경계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규모이다.

더구나 서쪽에 난하가 있어 나라간의 경계가 되려면 난하가 되었을 것이다.

 

 

갈석산은 『서경』에서 기록된 것처럼

하나라 우임금 당시 황하 하류의 해변가에 위치해야 하며,

『태강지리지』를 비롯한 여러 역사서들이 언급한 것처럼

장성이 시작된 곳이어야 하며,

중국과 고구려의 경계가 되었던 산이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을 모두 구비한 갈석산은

오직 중국의 북경 서남쪽 200여 키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하나뿐이다.

 

나머지 각 시대별 황하 하류의 해변가에 위치했던 갈석산은

착오에 의한 우갈석들이다.

 

그리고 황하의 흐름과 무관한 갈석산들은

역사왜곡을 위한 가짜 갈석산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갈석산(백석산)은 우리의 상고사를 공부하는데 너무나 중요하다.

 

다른 수많은 지명들이나 유물들은 인위적인 변경이 가능한 것으로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기 어렵다.

 

반면 갈석산은 유사 이래로 그 지명이 옮겨진 적이 없는 황하를 배경으로 하므로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기에 넉넉하다.

 

 

식민사학자와 어용사가들이 황해도 수안을 낙랑군 수성으로 비정하여도,

중국이 그들의 지도에 만리장성을 한반도까지 그려 놓아도 

황해도에 황하를 옮겨 놓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2. 『사기』로 보는 낙랑조선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서 조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석이 나온다.

 

“장안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가 있는데

세 물이 합쳐서 열수(洌水)가 되었다.

낙랑과 조선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따온 이름인듯하다.

(張晏曰 朝鮮有濕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장안張晏>은 3세기 魏나라 사람이며,

조선은 朝漢전쟁이 일어났던 위만조선(BC195 ~ BC108) 시대를 말한다.

 

위만조선의 영토 내에 물길이 서로 합류하는

습수, 열수, 산수의 세 강물이 있었다는것이다.

그러므로 습수, 열수, 산수를 찾으면 위만조선의 핵심 강역을 알 수 있다.

세 강물의 이름을 현재는 찾을 수 없으나 과거 기록들을 통하여 고증이 가능하다.

 

먼저 습수(濕水)를 찾아보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남송(1136년 작) 시대 작성된

우적도(禹迹圖)에 습수가 잘 나타나 있다.

 

아래 지도에서 우적도(禹迹圖)와 현대지도를 비교해보면,

습수는 현재의 남양하(또는 상간하)와 영정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수경주 등의 지리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다음에는 열수(洌水)를 찾아보자.

 

중국 최초의 지리서인 『산해경』의 ‘해내북경’에

열수(洌水)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으로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

(朝鮮在列陽東海北山南 列陽屬燕)

 

 

<우적도>

 

<우적도를 현대지도에 나타낸 지도>

 

위 구절에 대하여 곽박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으로 기자를 봉한땅이다.

열(列)은 또한 물 이름이다. 지금 대방에 있는데 대방에는 열구현이 있다.

(郭璞云 朝鮮今樂浪縣 箕子所封地 列亦水名也 今在帶方帶方有列口縣)”고 하였다.

 

열양(列陽)은 열수의 북쪽을 의미한다. 연나라가 열양에 있고,

그 동쪽에 조선이 있으므로 열수는 연나라와 조선의 남쪽을 흐르는 강이다.

 

그러면 연나라의 남쪽을 흐르는 강은 어떤 강일까?

 

『전국책戰國策』에 전국시대 연나라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文公, 재위 BC362-BC333)에게 한 말이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여 리 이다...중략...

남쪽에는 갈석과 안문(鴈門)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天府)이다.

(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中略...

南有碣石﹑鴈門之饒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

 

연나라의 남쪽에 녹타(菉沱)와 역수가 흐르며, 또 안문과 갈석이 있다고 하였다.

위구절의 주석에서 녹타(菉沱)는 호타하(滹沱河)라 했다.

 

또 지도를 보면 안문과 갈석은 모두 호타하의 북쪽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연나라의 남쪽을 흐르는 열수는 호타하임을 알 수 있다.

 

또 위에서 곽박이 ‘열수가 대방에 있고 대방에는 열구현이 있다.’고 하였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대방고지는 백제가 일어난 곳이다.

 

후일 백제가 호타하를 중심으로 건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한무제의 수군이 열구列口를 통하여 위만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을 공격한다.

 

왕검성이 호타하 하류 가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위 지도의 호타하의 하류 흐름이

고대에는 지금보다 훨씬 왼쪽으로 흘렀을 가능성이 있다.

 

또 위 우적도에서 상산(常山)은 현재의 백석산(갈석산)이며,

낭산(狼山)은 백석산의 한봉우리인 낭아산(狼牙山)이다.

 

이상에서 위만조선의 중심 강역을 흐르던 습수, 열수, 산수의 세 강물 중에서

습수는 오늘날의 영정하이며, 열수는 오늘날의 호타하임을 알았다.

 

산수는 영정하와 호타하 사이의 거마하, 역수, 당하 가운데 하나로 비정된다.

 

그러므로 위만조선의 중심 강역은 동서로는 백석산(갈석산)과 발해만,

남북으로는 영정하와 호타하로 둘러싸인 곳이다.

 

그 중심부에 하북성 보정시의 만성(滿城)이 자리잡고 있다.

 

이 만성 부근이 왕검성이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지이며,

 

한나라 낙랑군의 치소였다.

 

 

 

 

3. 『산해경』으로 보는 조선천독(朝鮮天毒)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로 『산해경』이 있다.

그 『산해경』의 해내경(海內經) 첫머리에 조선에 관한 글이 나온다.

 

“동해의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이라 한다.

조선은 천독(天毒)이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며 사랑한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위 구절은 조선에 대한 중국 최초의 기록으로

조선의 개략적 위치 및 조선의 정체성을 엿 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중국의 동해 안쪽과

북해(발해만 북쪽)의 모퉁이에 있었다는 것이다.

 

‘갈석산의 위치 및 황하와 해안선의 시대별 변화’를 나타낸

지도의 고대해안선을 보자.

 

고조선 수도 아사달이 위치한 갈석산(백석산) 주변이 정확하게

‘동해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위치를 어떻게 이보다 더 간단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산해경』위 구절과 관련하여 진나라 곽박(郭璞, 276~324)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고 하였다.

 

또 “천독(天毒)은 천축국이다.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글자가 있으며, 금은과 돈이 있다.

 

부도(浮屠)가 이 나라에서 나왔다.

 

진나라 대흥4년(大興, 318~321) 천축국의 오랑캐 왕이 진귀한 보물을 바쳤다."

(天毒即天竺國貴道德 有文書 金銀 錢貨 浮屠出此國中也 晉大興四年 天竺胡王獻珍寶)

 

 

곽박의 해설은 참으로 고조선에 대한 정곡을 찌른 말이다.

 

천축국(天竺局)이라는 말은 하늘을 섬기며 하늘이 돕는 나라라는 것이며,

부도(浮屠)가 나왔다는 것은 부처와 같은 성인이 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앞으로 『부도지』를 통하여 그 해설이 지니는 엄청난 비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은 진실로 천축국이었으며, 부도(符都)의 나라였으며, 신시(神市)의 나라였고

또한 해시(海市)의 나라로 바다와 강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해양제국이었다. 

 

 

 

4. 『부도지』로 보는 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

 

 

『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은 중국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에 위치하였다.

 

남양하(또는 상건하)와 영정하,

 

호타하와 자아하(또는 저룡하)의 강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그 중심부에 백석산(갈석산)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 백석산이 바로 한민족의 영산 태백산이다.

 

그 태백산 아래 푸른 물결 넘실대는 발해만을 굽어보며 왕검성이 위치하였다.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만성현(滿城縣) 일대이다.』

 

 

(1) 머릿글

 

 

우리나라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부도지』를 통하여

 

단군조선의수도 아사달의 위치를 고증한다.

 

『부도지』는 방위ㆍ강물ㆍ산맥ㆍ바다ㆍ태백산 등을 통하여

 

아사달의 위치를 노래하고 있는데,

 

앞에서 중국의 각종 사서를 통해 살펴본 곳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2) 『부도지』제13장 해설

 

 

제13장. 부도(符都)의 건설

 

임검씨가 돌아와 부도(符都)¹ 건설할 땅을 고르니

바로 동북쪽의 자석이 가리키는 방향이었다.

 

이는 2와 6이 교감하는 핵을 품은 지역이며

4와 8이 상생하여 열매 맺는 땅이었다.

 

밝은 산 맑은 물이 만 리에 연이어 펼쳐있고

바다와 육지는 두루 잇닿아 물갈래가 열 방향으로 흘러드니

바로 9와 1이 끝나고 시작되는 하느님의 터전²이었다.

 

인삼과 잣과 일곱 색깔의 옥돌이

금강의 심장부에 뿌리내려 전 지역에 가득하였다.

 

이는 1과 3과 5와 7의 자삭(磁朔)의 정기가 모여들어

물질을 이루며 길함을 쫒는 까닭이었다.

 

이에 태백산 밝은 땅의 정상에 천부단(天符壇)³을 쌓고

사방에는 보단(堡壇)⁴을 세웠다.

 

보단과 보단 사이에는 각각 세 겹의 물길을 통하니

그 사이가 천리요, 물길의 좌우에는 각각 수관(守關)을 설치하였다.

 

이는 모두 마고본성(麻姑本城)을 본 뜬 것이었다.

 

또 그 아래에는 도시를 구획하여 만들고

삼해(三海)의 주변에는 빙 둘러 못이 들어섰다.

 

네 나루와 네 포구는 천리 간격으로 잇달아

동(東)과 서(西)로 빙 둘러 늘어섰다.

 

또한 나루와 포구 사이에는 6부(六部)를 설치하여

모든 족속들이 거처하며 살게 하였다.

 

부도가 완성되니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밝게 빛났다.

족히 사해를 아우르고 모든 족속들을 살리는 혈맥이 되었다.

 

[원문]

 

壬儉氏 歸而擇符都建設之地 卽東北之磁方也 此二六交感懷核之域 四八相生結果之地

明山麗水 連亘萬里 海陸通涉 派達十方 卽九一終始 不咸之基也 三根靈草 五葉瑞實

七色寶玉 托根於金剛之臟 遍滿於全域 此一三五七磁朔之精 會方成物而 順吉者也

乃築天符壇於 太白明地之頭 設堡壇於四方 堡壇之間 各通三條道溝 其間千里也

道溝左右 各設守關 此取法於麻姑之本城 劃都坊於下部之体 圜涵澤於三海之周

四津四浦 連隔千里 環列於東西津浦之間 又設六部 此爲諸族之率居也

符都旣成 雄麗光明 足爲四海之總和 諸族之生脉

  

 

[해설]

 

1. 부도(符都)

  

천부도(天符都)의 줄임말이다.

 

즉 부도는 ‘천부(天符)를 받들어 모신 도읍지’ 또는

‘하늘의 뜻에 맞는 도읍지’라는 뜻으로 단군임검의 수도 아사달을 말한다.

 

부도 건설의 목적은 땅은 멀고 왕래가 끊어져

모든 족속들의 언어 풍속이 차츰 달라지므로 함께 모여 화합하는 자리에서

천부(天符)의 이치를 가르치고 배워서 지혜를 밝히고자 함이었다. 

 

단군임검은 100여 년 동안 사해를 순행하면서 각 족속들에게 천부의 이치를 전하고,

마고성의 회복을 위하여 이상향인 부도 건설을 약속하였다.(『부도지』 제12장)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부도 건설에 착수하였는데 그 부도의 위치가 어디일까?

 

지금까지 단군임검이 수도로 삼은 아사달에 대하여

백두산 또는 평양이나 만주벌판 어디쯤으로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우리의 상고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아사달의 위치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사달의 위치를 제대로 전하는 기록이 없었으며

우리의 상고사는 지금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부도지』는 참으로 명쾌하면서도 아름답게

부도의 위치와 규모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아사달의 위치가 밝혀지면 짙은 안개가 걷히고

한민족의 장엄했던 상고사가 그 모습을 드러내리라.

 

본문의 내용에 따라 부도(아사달)의 위치를 찾아보자.

 

1) 동북 자방(磁方)의 땅

  

임검씨가 돌아와 부도 건설할 땅을 고르니,

바로 동북쪽의 자석이 가리키는 방향이었다.

 

방향은 어디를 기준으로 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중국 대륙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동북방향은 산서성ㆍ하북성과

요령성ㆍ길림성ㆍ흑룡강성 등의 만주벌판 및 한반도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2) 명산려수(明山麗水) 연환만리(連亘萬里)

  

“밝은 산 맑은 물이 만 리에 연이어 펼쳐있다.”는 뜻이다.

 

동북 방향에서 “밝은 산 맑은 물이 만 리에 연이어 펼쳐져 있는 곳”은

흑룡강성 북쪽에서 드넓은 만주벌판을 감싸 안고 힘차게 뻗어 내리는

대흥안령산맥과 소흥안령산맥을들 수 있다.

 

 

<단군조선의 중심인 신시 조시 해시의 위치>

 

대흥안령산맥은 흑룡강성 북쪽에서 만주벌판을 왼쪽에서 감싸 안으면서

남서쪽으로 북경까지 뻗어내려 잠시 멈춰 선 후,

다시 태행산맥으로 이어져 하북성과 산서성의 경계를 이루며

황하강까지 이어지는 산맥이다.

 

그 아름다움은 가히 밝은 산 맑은 물이 만리에 뻗어 있다고 표현 할 수밖에 없다.

 

소흥안령산맥은 흑룡강성 북쪽에서 대흥안령산맥과 이별한 후 드넓은 만주벌판을

오른쪽에서 감싸 안으면서, 흑룡강을 뛰어넘어 백두산맥과 연결되고

한반도를 관통하는 태백산맥으로 이어진다.

가히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대흥안령산맥과 상벽을 이룬다.

  

두 산맥에서 각각 부도(아사달)의 중심인 태백산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 대흥안령산맥과 태행산맥이 만나는 중국 북경 서남쪽의 태백산과

둘째, 소흥안령을 거쳐 백두산맥에 우뚝 솟은 민족의 영산 태백산(백두산의 옛이름)과

태백산맥의 주봉인 강원도 태백산이다.

 

3) 해륙통섭(海陸通涉) 파달십방(派達十方)

  

이어서 부도의 위치가

“바다와 육지는 두루 잇닿아 물갈래가 열 방향으로 흘러드는 곳”이라고 하였다.

 

동북방향에서 이러한 곳은 발해만과 황해 밖에 없다.

 

지도에서 발해만과 황해 일대를 보면 바다와 육지가 두루 잇닿아 있고,

양자강ㆍ회수ㆍ황하ㆍ영정하ㆍ난하ㆍ요하ㆍ압록강ㆍ대동강ㆍ한강ㆍ금강ㆍ영산강 등

수많은 강물들이 사방팔방에서 흘러들고 있다.

 

수많은 강물들이 드넓은 대륙의 자양분을 실어 나르는 발해만은

흡사 새 생명을 키우는 자궁을 닮았다.

  

발해만과 황해 중에서도 특히 물갈래가 사방팔방에서 흘러드는 곳이 있다.

 

위지도에서 신시(神市)라 표시한 지역으로 백석산(갈석산)이 자리한 곳이다.

남쪽에서는 고대 황하가 아홉 갈래로 흘러들고, 북쪽에서는 영정하ㆍ조하ㆍ백하,

서쪽에서는 대사하ㆍ당하ㆍ역하ㆍ거마하 등의 강물들이 흘러들고,

동쪽에서는 발해만의 해류가 대양의 기운을 끊임없이 실어 나르는 곳이다.

(아래 ‘아사달의 위치’ 지도 참조)

 

그러므로 부도가 위치한

“바다와 육지는 두루 잇닿아 물갈래가 열 방향으로 흘러드는 곳”은

넓게 보면 발해만과 황해 일대이고, 좁게 보면 백석산(갈석산) 일대로 특정할 수 있다.

 

발해만과 황해 일대가 대륙의 자궁이라면 백석산(갈석산)일대는

자궁 깊숙한 곳에서 엄마와 태아를 이어주는 탯줄이 자리한 핵심지역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이는 2와 6이 교감하는 핵을 품은 지역이며,

4와 8이 상생하여 열매 맺는 땅이었다.”고 하였다.

  

“명산려수 연환만리 해륙통섭 파달십방”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게 부도의 위치를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북방향에서 “밝은 산 맑은 물이 만리에 연이어 펼쳐있고,

바다와 육지가 두루 잇닿아 물갈래가 열 방향으로 흘러드는 곳”의

조건에 부합되는 태백산은

발해만에 인접한 중국 북경 서남쪽의 태백산이 가장 유력하다.

 

 

<아사달(부도)의 위치(붉은사각형 내부)>

 

 

 

4) 보단지간(堡壇之間) 각통삼조도구(各通三條道溝) 기간천리야(其間千里也)

  

태백산 정상에 천부단을 쌓고 사방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보단과 보단 사이를 세 겹의 물길로 서로 통하게 하였는데,

보단과 보단 사이의 거리가 천리라고 하였다.

부도(아사달)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내용이다.

 

동서남북의 보단이 각각 1,000여리의 물길로 서로 통하게 하려면

그러한 특수한 지형이 되어야 가능하며,

그 물길은 수 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비슷하게 유지될 수밖에 없다.

위에서 살펴본 세 곳의 태백산 중

북경 서남쪽의 태행산맥에 위치한 태백산이 유일하게 이 조건을 충족한다.

 

위의 지도를 살펴보면

남양하(또는 상건하)ㆍ영정하ㆍ호타하ㆍ자아하(또는 저룡하)등이

천리의 길이로 다이아몬드 형을 이루며 태백산을 둘러싸고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반도의 백두산이나 태백산은 도저히 이런 조건을 충족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도지』에서 전하는 부도(아사달)의 위치는

위의 지도에서 붉은색 다이아몬드로 표시한 내부가 확실하다.

즉 동쪽은 천진(天津), 서쪽은 영무(寧武),

남쪽은 석가장(石家庄), 북쪽은 장가구(張家口)를 잇는 지역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현재 중국지도에는 부도(아사달)의 중심에 있는 산이 백석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그 서쪽에 있는 산이 태백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의 각종 고지도나 문헌 등을 살펴보면 위 지도에 표시한

항산(해발 2,052M), 태백산(해발 2,298M), 백석산(해발 2,096M)은

모두 항산(恒山)이나 상산(常山) 또는 중산(中山) 등

같은 이름으로 혼용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위의 세 산들이 모두 태백산으로도 불렸을 것이다.

  

『부도지』에 의하면 부도의 중심에 있는 산이 태백산이므로 현재 중국지도에서

백석산(갈석산)으로 표시된 산이 진정한 한민족의 태백산이다.

 

태백산은 환산(桓山, 丸山), 아사달산, 불함산, 천산, 백두산, 개마대산, 도태산,

백악산, 궁골산, 구월산, 삼신산 등등 50여개가 넘는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한민족의 영산이다.

 

 

그 태백산 아래 푸른 물결 넘실대는 발해만을 굽어보며 왕검성이 위치하였다.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만성현(滿城縣) 일대이다.

 

 

 

2. 9와 1이 끝나고 시작되는 하느님의 터전

  

원문의 불함(不咸)은 몽골어 부르한의 한자표기이며,

부르한은 몽골어로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위클리경향 특별기획 ‘불함-홍류 하느님과 유화 성모신앙’)

 

또 동북방은 주역에서 간방(艮方)으로 

'만물이 끝나고 만물이 시작되는 곳(終萬物始萬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발해만 유역은 ‘9가 끝나고 1이 시작되는

하느님의 터전(九一終始不咸之基)’이라는 뜻이다.

   

발해만을 보면 수많은 강줄기들이 사방팔방에서 흘러들어 끝나니

9(수가 많음을 의미함)가 끝나는 것이요.

그 9가 끝나면서 발해라는 큰 바다인 1이 시작된다.

 

드넓은 바다에서 바닷물이 수증기로 구름이 되어

자유자재로 세상을 떠다니다가 단비로 내리고,

빗물들이 모여모여 수많은 강물을 이루어 수 천리 수 만리 대지를 굽이굽이 적시며

또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발해만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진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단군임검이 발해만 일대를

이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홍익인간ㆍ이화세계의 터전으로 정한 뜻을 알 수 있다.

 

3. 천부단(天符壇)

   

제1장에서 ‘마고성이 천부를 받들어 모시고 선천하늘을 계승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천부는 하늘의 권능을 계승하는 신물(神物)이며,

천부단은 천부를 받들어 모신 단으로 천문을 관측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이다.

 

4. 보단(堡壇)

 

천부를 모신 천부단을 중심으로 사방에 보단을 설치하여

천부단을 방어하는 역할과 천문을 관측하고 동서남북 사방의 교화를 담당하였다.

 

5. 세 겹의 물길

   

부도의 중심인 왕검성을 감싸고 흐르는 세 겹의 강물(해자 또는 도랑)이다.

영정하와 호타하가 부도의 제일 바깥을 둘러싸고,

대사하와 거마하가 그 안쪽을 둘러싸고,

마지막으로 당하와 역수가 부도의 중심을 감싸고 흐르면서 왕검성을 보호하고 있다.

 

6. 수관(守關)

  

부도를 지키는 관문이다.

부도를 감싸는 강물이 지나는 양쪽에는 험준한 산들이 버티고 있어

관문을 설치하면 부도를 아주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

 

7. 도시를 구획하여 만들고

  

부도의 중심인 천부단을 중심으로 사방에 보단을 만들어

그 주위를 4,000여리의 물길로 감싸고, 그 물길의 바깥에 도시를 구획하여 만들었다.

 

지도를 살펴보면 물길의 밖으로 동북쪽에 북경시, 동남쪽에 발해시,

서북쪽에 대동시, 서남쪽에 태원시 등 예로부터 이름난 도시들이 자리하고 있다.

 

획도방劃都坊은 도시를 정방형의 바둑판 모양으로 반듯하게 구획하여 만드는 것이다.

고조선의 도시들이 구획된 계획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8. 삼해(三海)

  

발해만과 황해 일대다.

발해만과 황해 일대는 중국에서 보면 동해이고,

몽고 등에서 보면 남해이며, 한반도에서 보면 서해다.

하나의 바다이면서도 보는 시각에 따라 삼해가 된다.

 

9. 네 나루와 네 포구

  

발해만과 황해 주위로 네 개의 나루와 네 개의 포구를 천리 간격으로 설치하여

수상교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여덟 개의 나루와 포구가 8,000여리에 걸쳐 이어졌다.

 

8,000여리는 대략 양자강에서 발해만을 빙 돌아서 한반도 남단에 이르는 거리이다.

 

위의 지도에서 사진사포(해시)의 위치는

천진을 기준으로 대략 천리간격의 거리와 큰 강물이 흐르며,

고대로부터 큰 못이 있던 곳을 배열하였다.

  

단군임검 시대에는 신시(神市)와 조시(朝市)와 해시(海市)라는 모임을 통하여

세상을 교화하고 다스렸다.

 

신시(神市)는 수도 아사달에서 10년마다 한 번씩 열렸으며,

조시(朝市)는 섬서성 장안에서 매년 10월에 열렸으며,

해시(海市)는 사진사포(四津四浦)에서 매년 10월 조시(朝市)와 동시에 열렸다.

 

신시와 조시와 해시는 단군조선의 핵심지역이다.

우리의 상고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신시ㆍ조시ㆍ해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제14장과 제15장에서 자세하게 나온다.

 

10. 6부(六部)

  

나루와 포구 사이에는 각각 6부를 설치하여

모든 족속들이 자치부락을 만들어 살게하였다.

 

각 족속들이 자치부락을 통하여 부도 및 족속들 간 교류를 원활하게 함으로써

홍익인간ㆍ이화세계의 큰 이상을 실현할 기틀을 다졌다.

 

단군조선은 마고성의 이상을 이어받아 황궁씨, 백소씨, 청궁씨, 흑소씨 등

모든 족속을 망라한 인류공동체를 건설하였다.

 

각 족속들을 6부로 나눈 것은

『천부경』에서 천지인(天地人)이 각각 음양으로 나뉘면 6이 되고

이 6에서 만물이 만들어지는 것을 형상화 한 것이다.

 

 

5. 『부도지』로 보는 아사달의 노래

 

 

『단군조선은 신시(神市)ㆍ조시(朝市)ㆍ해시(海市)라는

전 인류적 차원의 모임을 통하여 세상을 교화하고 다스렸다.

 

신시(神市)는 수도 아사달에서 10년마다 1번씩 열렸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문을 살펴서 역법을 제정하고,

마고의 계보를 연구하여 각 족속들의 연원을 밝히고,

각 족속들의 말과 글을 정리하는 일들을 하였다.

 

조시(朝市)는 섬서성 장안에서 매년10월에 열렸다.

사해의 모든 족속들이 지방 토산물을 가져와서 바치고,

오미(五味)의 잘못을 반성하고

하늘 사람으로 되돌아가려는 새해맞이 의식을 행하였다.

이것을 조선제(朝鮮祭)라 하였다.

 

해시(海市)는 발해만과 황해 주변에 설치한 8개의 나루와 포구에서

조시(朝市)와 동시에 열렸다.

물질의 풍요를 바라는 의식을 행하며, 지리를 살피고, 교역의 법을 정하고,

물건의 쓰임새를 밝히는 일들을 행하였다.』

 

 

(1) 머릿글

 

『부도지』는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이 엮은 책으로

우리나라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무려 700여 년이 앞서는 귀한 기록이다.

 

그 속에는 우주와 인류 탄생의 신화시대로부터 마고ㆍ궁희ㆍ황궁씨ㆍ유인씨

ㆍ환인씨ㆍ환웅씨ㆍ임검씨 등을 거쳐 신라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일만여 년 역사가

한편의 장엄한 서사시처럼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인간세상의 두 가지 큰 재앙인

‘오미(五味)의 화(禍)’ 와 ‘오행(五行)의 화(禍)’로 인하여 인류가 타락하고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과정, 한민족과 지나족이 갈라지고

대륙이 여러 나라로 나누어지는 과정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부도지』에 의하면 단군조선은 신시(神市)ㆍ조시(朝市)ㆍ해시(海市)라는

전 인류적 차원의 모임을 통하여 세상을 교화하고 다스렸다.

이때는 아직 세상이 여러 나라로 갈라지기 전의 일이다.

 

조시는 육상교통의 요지인 중국 섬서성 장안에서 열렸으며,

해시는 발해만과 황해 일대의 8곳의 해상교통 요지에서 열렸다.

그리고 신시는 세상의 중심으로서

조시와 해시를 가장 잘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였다.

 

『부도지』 제14장과 제15장을 통하여

신시(神市)ㆍ조시(朝市)ㆍ해시(海市)에 대하여 알아본다.

 

 

(2) 『부도지』제14장 해설

 

제14장. 신시(神市)의 모임

 

그리하여 황궁씨 후예¹ 6만이 이주하여 지키고

나무를 베어 8만개의 뗏목을 만들어 신부(信符)²를 새긴 후

천지(天池)³의 물에 흘려보내 사해의 모든 족속들을 초청하였다.

 

모든 족속들이 신부(信符)가 새겨진 뗏목을 보고

차례로 모여 들어 박달나무 숲에서 신시(神市)⁴를 크게 열었다.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하늘의 상을 살피고

마고의 계보를 연구하여 그 족속을 밝히며

천부의 음(音)에 준하여 그 말과 글을 정리하였다.

 

또 북극성과 칠요(七耀)의 위치를 정하고

희생물을 구워 반석위에 놓고 제사를 지내며

천웅의 음악을 연주하며 모여서 노래를 불렀다.

 

모든 족속들이 방장산 방곤(方壼)의 굴에서

칠색보옥을 캐서 천부를 새겨 방장해인(方丈海印)⁵이라 이르고

칠난(七難)⁶을 다스려 없애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10년마다 반드시 신시(神市)를 여니

말과 글이 같아지고 천하의 법도가 하나 되고

인간세상이 크게 평화로웠다.

 

이에 따라 바닷가에 성을 쌓고 천부를 받들어 모시며

머무르는 모든 족속들을 묵거나 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천년사이에 성황(城隍)⁷이 전역으로 퍼졌다.

 

[원문]

 

於是 移黃穹氏之裔六萬 守之 乃割木作桴八萬 刻信符 流放於天池之水

招四海諸族 諸族得見信桴 次第來集 大開神市於朴達之林 修禊淨心  

察于天象 修麻姑之譜 明其族屬 準天符之音 整其語文 又奠 定北辰七耀之位

燔贖於盤石之上 會歌而奏天雄之樂 諸族採七寶之玉於 方丈方壼之堀 刻天符而 

謂之方丈海印 辟除七難而歸 自此每十歲必開神市 於是 語文同軌 一準天下  

人世太和  仍而築城於海隅 奉尊天符 使駐留諸族 館而居之

爾來千年之間 城隍 遍滿於全域

 

 

[해설]

 

1. 황궁씨 후예

  

『부도지』에서 전하는 황궁씨의 후예인 한민족의 계보는

마고ㆍ궁희ㆍ황궁씨ㆍ유인씨ㆍ환인씨ㆍ환웅씨ㆍ임검씨로 이어졌으며,

 

‘오미(五味)의 책임을 속죄하는 것과

대성(大城)의 일을 회복하는 일(『부도지』제20장)’을 주관해왔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과 세상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고

인간 본성을 회복하여 잃어버린 마고성의 낙원을 되찾는 성스러운 일들을

황궁씨의 후예들이 주관하였다.

   

부도(아사달)를 완성하고 나서 황궁씨의 후예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다.

부도를 지키는 인원수가 6만 명으로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상당히 많은 숫자이다.

 

황궁씨 후예들의 본류가 이동한 경로는

파미르 고원 - 신강성 천산 - 청해성 기련산(일명 천산) - 섬서성 태백산

- 산동성 태산 - 하북성 태백산 - 한반도로 추정된다.

 

2. 신부(信符)

  

천부(天符)의 다른 이름이다.

 

인류가 ‘오미(五味)의 화(禍)’로 인하여

마고성의 낙원을 떠나서 동서남북으로 이별할 때,

황궁씨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천부(天符)를 신표로 나누어주었다.

(『부도지』제8장)

 

3. 천지(天池)

  

중국 산서성의 상건하 상류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천지라고 하면 백두산 천지를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제13장에서 보았듯이 부도의 위치는 한반도의 백두산이 될 수 없으므로

천지는 부도(아사달) 내에서 찾아야 한다.

 

부도의 제일 바깥쪽을 흐르는 강물이 호타하와 상건하인데

호타하의 상류에 호지(滹池)가 있고 상건하 상류에 신지(神池)가 있다.

이 신지(神池)가 천지(天池)였다.

  

신지는 부도의 서쪽 보단이 있는 산서성 영무(寧武)지역에

관잠산(管涔山2,530M), 운중산(云中山 2,654M), 노아산(芦芽山 2,744M) 등의

태산준령이 감싸고 있는 지역에 있다.

 

「대청광여도」에는 이곳이 천지(天池)로 표기되어 있다.

 

특히 천지가 발원하는 노아산은 신기하게도 해발 2,744M로 백두산과 높이가 같다.

 

 

4. 신시(神市)

  

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부도)에서 10년마다 사해의 모든 족속들이 모여

천부의 진리를 익히며, 천문관측, 족보정리, 말과 글의 정리, 역(曆)의 정리,

하늘에 제사 등을 행하는 인류 대화합의 축제였다.

 

신시는 오늘날의 유엔 및 교황청의 기능을 합한 것과 같은

정치ㆍ종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신시의 모임을 통하여 사해의 모든 족속들의 말과 글이 같아지고

천하의 법도가 하나 되게 함으로써 홍익인간ㆍ이화세계의 대 이상을 추구하였다.

  

『부도지』에 의하면 환웅씨 시대 이전까지 인류는 주로 산악지역과 섬서성 태백산등

대륙의 중앙에 세상의 중심인 부도(신시, 아사달)를 세웠다.

 

그러나 환웅씨 이후 임검씨 시대에 이르면서 배를 이용한 교통이 원활해지자

세상의 중심인 부도가 발해만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단군임검이 부도를 북경 서남쪽의 태백산 부근으로 정한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중심은 태백산 부근의 왕검성에서

북경을 잇는 지역으로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공부하면서

대륙의 중심을 장안이나 낙양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소설 삼국지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소설 삼국지는 50년여 년의 짧은 세월 동안

지나인들이 장안과 낙양을 중심으로

자기들 끼리 골육상쟁을 벌인 역사를 미화한 것에 불과하다.

 

지난 수 천년 동안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장안이나 낙양에 도읍을 정한 왕조는

대략 그 세력범위가 섬서성과 하남성을 넘지 못하였다.

 

지금의 하북성 북경 등 단군조선의 부도(신시, 아사달) 부근에 수도를 정한 왕조만이

대륙전체를 호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대륙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부도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본문의 내용에 따라 신시에서 행한 일들을 살펴보자.

 

 

1) 수계정심(修禊淨心) 찰우천상(察于天象)

  

수계정심은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찰우천상은 하늘의 상을 살피는 것이다.

 

신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천문을 관측하고 역(曆)을 제정하는 일이었다.

 

 

2) 수마고지보(修麻姑之譜) 명기족속(明其族屬)

  

마고의 계보를 연구하여 그 족속을 밝히는 것은 족속 간 유대를 강화하는 지름길이다.

 

모든 인류는 마고의 자손들이다.

 

마고의 계보를 연구하여 각 족속들이 서로 한 핏줄임을 확인하는 것이

인류 평화의 첫걸음이었다.

 

 

3) 준천부지음(準天符之音) 정기어문(整其語文)

  

천부의 음에 준하여 그 말과 글을 정리하였다.

 

천부의 음은 한글 말이다.

 

파미르고원의 마고성으로부터 사방으로 흩어진 각 족속들은

수천 년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천부의 음을 잃어버리고

각각 처한 생활환경에 따라 언어와문자가 모두 달라졌다.

 

언어와 문자가 달라지므로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다툼이 되풀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황궁씨ㆍ유인씨ㆍ환인씨ㆍ환웅씨ㆍ임검씨로 이어지는 한민족은

끊임없이 천부의 음을 계승해왔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꾸준히 사해의 모든 족속들을 방문하여

천부의 음을 전하고 말과 글을 통일하려고 애썼다.

 

단군임검 시대에 이르러 부도를 건설하고

신시를 통해 각 족속들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서 천부의 음을 익히고

각 족속들에게 전함으로써 말과 글이 같아지게 된 것이다.

 

단군임검 시대에는 한글 말이 세계 공용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전(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북극성과 칠요(七耀, 북두칠성 또는 일월화수목금토)의 위치를 정하고,

희생물을 구워 반석위에 놓고 제사를 지내며,

천웅의 음악을 연주하며 모여서 노래를 부르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북극성과 칠요의 위치를 정했다.’는 것은 희생물을 올리는 반석에

북극성과 북두칠성 등의 별자리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북극성과 북두칠성은 방위와 시간 및 계절을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별이다.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시계 반대방향으로 1시간에 15도씩 돌아가며,

계절마다 북두칠성의 위치가 달라지므로 철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한민족은 북두칠성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생사를 주관하는 별로 인식하고 신앙하였다.

  

최근 한반도에서 별자리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는 고인돌이

여럿 발굴되고 있어서 부도지의 증언을 뒷받침하고 있다.

 

 

북한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함경남도 용석리 고인돌에

기원전 2300년경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또 기원전 1500년경의 함남 함주군 지석리 고인돌의 구멍 및

기원전 500년경의 충북 청원군 아득이 고인돌의 돌판에 난 구멍들이

북극성과 북두칠성 등의 별자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아울러 조선 초기에 제작ㆍ보급된 전천천문도(全天天文圖)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국보228호)’가

중앙부는 조선 초기의 별자리를 나타내고

주변부는 고구려 초기의 별자리를 나타내는 것임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한민족의 정밀한 천문관측이 삼국시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감을 밝혔다.

(박창범 저『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5. 방장해인(方丈海印)

  

칠색보옥에 천부를 새긴 것이다.

 

옥은 예로부터 무병장수와 행운을 가져다 주는신석神石 또는 영석靈石으로 여겨

왕권과 왕가를 상징했다.

 

옥을 왕만이 지닐 수 있는 품격 높고 귀한 보석이라고 본 까닭이다.

 

그래서 임금과 관계된 낱말에 옥玉자를 썼다.

왕이 앉는 자리를 옥좌, 왕의 손을 옥수, 도장을 옥새,

걸음걸이를 옥보라고 부른 것이 좋은 예이다.

 

또한 도교 등에서 최고신을 옥황상제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옥이 이런 상징을 가지게 된 것은 부도의 신시에서

칠색보옥에 천부를 새겨서 각 족속의지도자들이 나누어 가진데서 비롯되었다.

 

6. 칠난(七難)

  

칠난은 칠정(七政)이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칠정은 해와 달과 다섯 개의별(水火木金土)의 운행을 의미한다.

(우서 제2편 순전 5장|작성자 법고창신)

  

불교의 인왕반야경에는 해와 달의 운행이 도를 잃고 빛을 잃는 일월 실도난,

금성과 혜성이 변하는 성수 실도난, 큰 불이 이는 재화난, 홍수가 지는 우수 변이난,

태풍이 부는 악풍난, 가뭄이 드는 항양난,

사방으로부터 적병과 도적이 일어나는 악적난을 칠난이라 한다.(『다음 백과사전』)

 

 

7. 성황(城隍)

  

성황은 바닷가에 성을 쌓고 천부를 받들어 모시며,

여러 족속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으로 부도로부터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황문화에 대한 소중한 증언이다.

 

 

(3) 『부도지』제15장 해설

 

 

제15장. 조시朝市와 해시海市의 모임

 

또 예(澧)와 양(陽)이 교차하는 중심지에 조시(朝市)¹를 열고

팔택(八澤)²에서 해시(海市)³를 열었다.

 

매년 10월에 조제(朝祭)⁴를 지내니

사해의 모든 족속들이 지방 토산물을 가져와 바쳤다.

 

산악족들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족들은 생선과 조개를 바치며 빌었다.

 

“조제에 나아가 생선과 양을 희생으로 바치오니

오미의 피를 맑게 하여 창생의 허물을 그치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조선제(朝鮮祭)였다.

 

이때 산악과 해양의 족속들이 생선과 고기를 많이 먹으므로

교역하는 물품들이 거의 포와 조개류와 가죽류였다.

 

그리하여 희생제를 지냄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반성하고 공에 보답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손가락을 피에 꽂아 생명을 되돌아보고

땅에 피를 부어 기른 공에 보답하였다.

 

이는 희생물로 오미의 잘못을 갚고 허물 그치기를 바람이니

바로 육신을 지닌 괴로운 심경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매년 제를 지낼 때 물화가 폭주하므로

나루와 포구에서 해시(海市)를 크게 열었다.

 

부정을 없애고 몸을 깨끗이 하여 지리를 살피며

교역의 법을 시행하여 그 가치와 양을 정하고

물건의 성질을 따져서 그 쓰임새를 밝혔다.

 

또 부도 팔택(八澤)의 모양으로 못을 파고

굽이쳐 흐르는 물 사이에서 굿하고 점을 치며

물질의 풍요를 바라는 의식을 행하면서 모여 잔치를 열었다.

 

모든 족속들이 봉래산 원교봉(圓嶠峰)에서 오엽서실인 잣을 얻어

봉래해송(蓬萊海松)이라 이르고 오행(五幸)을 은혜롭게 얻어서 돌아갔다.

이로부터 사해에 산업이 일어나 교역이 왕성해지므로 천하가 넉넉하였다.

 

[원문]

 

又設朝市於 澧陽交地之腹 設海市於八澤 每歲十月 行朝祭  四海諸族 皆以方物供進

山岳諸族 供之以鹿羊 海洋諸族 供之以魚蚧 乃頌曰 朝祭供進  魚羊犧牲 五味血鮮 

休咎蒼生 此謂之朝鮮祭 是時 山海諸族 多食魚肉 交易之物  擧皆包貝皮革之類故

乃行犧牲之祭 使人反省報功也 揷指于血 省察生命 注血于地 環報育功 此代物而

償五味之過 願其休咎 卽肉身苦衷之告白也 每歲祭時物貨輻湊 廣開海市於津浦

除祓潔身 鑑于地理  行交易之法 定其値量 辨物性之本 明其利用 又象 鑿符都八澤之形

 

報賽於曲水之間 會燕而行濟物之儀諸族 取五瑞之實於 蓬萊圓嶠之峰 卽栢子也 

謂之蓬萊海松 惠得五幸而歸 自此四海興産 交易殷盛 天下裕足

 

[해설]

 

1. 조시(朝市)

  

매년 10월에 사해의 모든 족속들의 조제(朝祭)를 지내기 위한 모임이었다.

조시가 열린 곳은 예와 양이 교차하는 중심지로 중국 섬서성 장안부근이다.

  

예(澧)는 물 이름이다.

 

중국에서가장 오래된 지도중의 하나로 꼽히는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禹貢所載隨山浚川之圖 1209년작,)에는

예수(澧水)가 두곳에 있다.

 

하나는 중국 섬서성의 태백산 쪽에서 발원하여

장안을 감싸고돌아 황하로 흘러들어간다.

 

다른 하나는 호남성에 있는 숭산을 끼고 돌아 양자강가의 동정호로 흘러가는 물이다.

 

양(陽)은 한수(漢水)의 북쪽을 가리킨다.

 

한수는 섬서성 태백산 쪽에서 발원하여 호북성을 관통하여 흐르는 양자강의 지류다.

 

그러므로 한수의 북쪽을 흐르는 예수는 장안을 감싸고 돌아 황하로 흘러가는 물이다.

  

조시가 열린 섬서성 장안은 중국대륙의 중심이며 육상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또한 환웅천왕이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려와서

신시를 열었던 섬서성 태백산과도 가까운 위치에 있다.

 

 

2. 팔택(八澤)

  

단군임검이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홍익인간ㆍ이화세계의 터전으로 삼은 발해만과

황해 일대의 수상교통 요지에 만든 8개의 못이다.

 

본문의 “팔택에서 해시를 열었다.”는 구절과

“매년 제를 지낼 때 물화가 폭주하므로 나루와포구에서 해시를 크게 열었다.”는

구절을 통하여

팔택에 사진사포를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제13장에서

“네 나루와 네 포구는 천리간격으로 잇달아 동과 서로 빙 둘러 늘어섰다.”

고 하였다.

 

위의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서 중국 동해안에

대륙택(大陸澤), 뇌택(雷澤), 대야택(大野澤), 진택(震澤) 등 4개의 못이 있다.

 

이들 4개의 못은 황하 등의 물길이 자주 바뀌면서

위치도 시대별로 많은 변동을 보이는데,

 

천진에서 양자강까지 대략 천리 간격으로 배치하면 발해만 서쪽 4개의 못은

위의 지도「단군조선의 중심인 신시, 조시, 해시의 위치」에 표시한

해시의 위치와 같다.

 

발해만의 동쪽인 한반도에는 고대지도가 없어서 고증하지는 못했지만,

난하 하류 및 만주벌판과 통하는 요하 하류, 압록강과 한강 하류 등이

수상교통의 요지로 단군임검이 사진사포와 8택을 만든 목적과 부합된다.

  

또 위의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서 도이島夷, 래이萊夷, 우이隅夷, 회이淮夷 등

우리 겨레인 구이(九夷)가 천진에서부터 양자강 아래지역까지

중국 동해안에 광범위하게 살았음이 표시되어 있다.

 

제13장에서 “나루와 포구 사이에는 6부(六部)를 설치하여

모든 족속들이 거처하며 살게 하였다.”는 증언과 일치한다.

 

이는 발해만과 황해 일대가 단군임검의 터전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3. 해시(海市)

  

팔택에서 열렸던 시장이다.

 

해시에서는 교역의 법을 정하여 시행하고, 굿하고 점을 치며,

물질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면서 잔치를 열고

모든 족속들이 함께 어우러져 마시며 즐겼다.

 

매년 10월에 조제를 지낼 때 물화가 폭주하므로,

발해만과 황해 주변의 네 나루와 네 포구에 해시를 크게 열어

사해제족들이 서로 특산물을 교환하였다.

 

4. 조제(朝祭)

  

인류가 낙원인 마고성을 상실하게 된 ‘오미의 화’를 반성하고

마고성을 회복하기위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간절한 의식이었다.

 

매년 10월 중국 섬서성 장안 부근에서 조시를 열고 조제를 지냈는데,

사해의 모든 족속들이지방토산물을 가져와 바쳤다.

이것이 후일 조공(朝貢)으로 변한 듯하다.

 

1) 매세십월(每歲十月) 행조제(行朝祭)

  

매년 10월에 조제를 지냈다.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10월을 상달이라고 부르며 1년 농사를 마감하고

수확한 곡식으로 감사하는 제천의식을 거행해왔다.

 

이는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등으로 이어졌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예(濊)를 보면

“항상 시월에 절기행사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밤낮으로 음주가무를 즐기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고 하였다.

 

10월에 거행하는 제천행사가 아주 성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은 10월 3일을 개천절로 기념하고 있다.

개천절은 ‘하늘이 열린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개천이란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홍익인간ㆍ이화세계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 사건을 가리킨다.

 

조제를 환웅천왕의 도읍지인 섬서성 장안부근에서 연 것도

환웅천왕의 개천과 관련이 있다.

 

부도지』로부터 10월에 성대한 제천의식을 거행하는 풍속의 기원이

단군조선의 조제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2005년 6월,

기원 직후 부족국가 시대 동예(東濊)의 제천풍속으로 알던 무천(舞天)행사가

이보다 앞서 고조선에서 열렸다는 고문서 기록이 발견되어

『부도지』의 기록을 뒷받침하였다.

 

인천시립박물관 윤용구 박사는

“1907년 영국의 A. 스타인이 중국 감숙성 돈황현에서 반출해 간

돈황문서의 토원책부(兎園策府)에 지금은 전하지 않는 사서인 『위략』을 인용해

고조선에서10월에 무천이 열렸고,

출정에 앞서 소를 잡아 그 발굽 형상으로 길흉을 점치던 우제점(牛蹄占) 기록이 있다.”

고 말했다.(2005/06/10일자한국일보)

 

2) 조제공진(朝祭供進) 어양희생(魚羊犧牲)

  

조제에 나아가 생선과 양을 희생물로 바쳤다.

 

산악 족들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 족들은 생선과 조개를 바쳤다.

 

조선의 ‘선(鮮)’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조제에 올리는 대표적인 희생물이 생선(魚)과 양(羊)이었으며

동시에 조선이 산악족과 해양족을 아우르는 거대한 나라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 한자에서 제후들이 천자에게 공물을 바치던 것을 조공(朝貢),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는 것을 조빙(朝聘), 조선의 들을 나타내는 조야(朝野)가

천하를 의미하는 것 등을 보더라도 단군임검 당시에

조선이 대륙전체를 아우르는 천자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오미혈선(五味血鮮) 휴구창생(休咎蒼生)

  

조제에 나아가 생선과 양을 희생물로 바치오니

“오미의 피를 맑게 하여 창생의 허물을 그치게 하소서!” 하는 간절한 기도다.

 

처음에 인류는 지상낙원인 마고성에 살면서 품성이 순정하여 능히 조화를 알며,

지유를 마시므로 혈기가 맑고 밝았으며 그 수명이 한량이 없었다.

 

그러나 포도를 맛보고 강제로 다른 생명을 먹는 습관을 가짐으로서

사람들의 혈육이 거르지 않은 술처럼 탁해지고,

심기가 혹독하게 변하여 하늘 성품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수명은 짧아지고 죽을 때 천화(遷化)하지 못하여 썩게 되었다.

이것이‘오미의 화’다.

  

오미를 먹음으로 인하여 거르지 않은 술처럼 탁해진 ‘오미의 피’를

생선과 양등의 희생물로 대속함으로써

다시 지상낙원인 마고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가 조제였다.

 

 

 

 

 

6. 기자조선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중심지는

모두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의 왕검성이었다.

 

그리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고조선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단군조선의 법통을 계승하지는 못하였다.

 

이시기는 삼조선과 삼한이 양립하는 시기였으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삼조선의 일부인 변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파악된다.

 

(1) 머릿글

    

기자조선은 한민족 상고사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기자가 조선에 왔는지 또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다.

 

먼저 『다음백과』를 통하여 기존의 기자조선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고,

기존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부도지』에 나타난 기자조선의 실체를 살펴보기로 한다.

 

(2) 기존의 기자조선설

  

『다음백과』에는 기자조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자조선이란 기자동래(箕子東來) 전설에서 나온 것이다.

 

그 내용은 중국의 은(殷)·주(周) 교체기에

주나라의 무왕이 은나라를 빼앗자 현인(賢人) 기자(箕子)가

BC 1112년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건국하고 범금8조(犯禁八條)를 가르쳤으며,

무왕에 의해 조선왕에 봉해져 단군조선을 교체했다는 것이다.

 

선진(先秦) 시대의 문헌인 『죽서기년』·『상서』·『논어』 등에

처음으로 기자에 관한 기사가 나타난다.

 

여기서는 기자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의 폭정을 간하다가 감옥에 갇혔으며

주나라의 무왕에 의해 풀려났다는 점,

기자의 학식과 덕이 뛰어나다는 점만이 전해질 뿐,

동쪽으로 이주해서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내용은 한대 이후의 자료인 복생의 『상서대전』에

무왕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난 기자가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을 차마 섬기지 못하고

동쪽의 조선 땅으로 망명했으며

이를 전해들은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사가 처음이다.

 

이러한 서술은 『사기』·『한서』·『위략』·『삼국지』 등으로 이어지면서

내용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특히 『삼국지』에서는 이른바 기자조선의 골격이 형성되었다.

 

기자의 자손이 40대에 이르도록 조선을 다스렸으며

그 후손인 준왕(準王)은 위만(衛滿)에게 찬탈 당하자

한(韓)으로 건너가서 살며 한왕(韓王)이라 칭했다는 것이다.

  

기자에 대한 인식은 고구려시대에도 존재했다.

 

『구당서』에 의하면 고구려의 습속에는 음사(淫祀)가 많은데

영성신(靈星神)· 일신(日神)· 가한신(可汗神)과 함께 기자신(箕子神)을 섬긴다고 했다.

 

따라서 고구려 사회에서도 어떠한 형태이든 간에

기자에 대한 숭배의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면 정치이념인 유교의 비중이 커지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중국문화를 유입시키고 유교를 전래시킨 담당자로서

기자에 대한 숭앙심이 증폭되었다.

 

이러한 의식은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으며 특히 조선이 중국에 못지않게

이른 시기부터 예(禮)로서 교화되었다는 소중화의식과 결부되어 발전해 나갔다.

 

마침내 『동국사략』부터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상고사체계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기자동래설에 대해서는

현재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입장과 부정하는 입장이 양립하고 있다.

 

긍정론자들은 기자를 한 개인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족의 동래로 보고 있다.

 

이러한 입장의 기저에는 이동론적 관점이 깔려 있으며

기(箕)란 글자가 새겨진 은·주 시대의 청동기를 주요논거로 삼고 있다.

 

부정론은 당시의 정치적 판도를 고려할 때

주나라의 무왕이 멀리 떨어진 조선 땅에 기자를 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고고학적으로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가

중국의 은·주의 청동기문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입장이다.

 

현재의 지식으로 볼 때 기자동래설은 기자에 대한 전승과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결합되어 나타난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삼국시대에도 기자에 대한 숭배가 존재하였던 역사적 배경은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3) 『부도지』에 나타난 기자조선

   

『부도지』는 기자조선의 위치와 그 실체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전하고 있다.

 

기자는 은나라가 망하자 패잔병과 난민을 이끌고 부도(아사달, 조선)로 망명하였다.

 

 

기자는 그곳에서 강제로 은나라의 법을 시행하려다가

고조선 민중들과 많은 마찰을 일으키고,

끝내 고조선 민중들은 기자를 피하여 동해지빈(東海之濱)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리고 동해지빈東(海之濱)을 중심으로 삼한이 건설되고,

후일 신라ㆍ고구려ㆍ백제가 일어나는 터전이 된다.

 

『부도지』제27장을 보자.

 

 

제27장. 기자조선과 삼한의 성립

 

은(殷)의 망명인 기자(箕子)¹가 패잔병과 난민을 이끌고

부도의 서쪽에서 도망 왔다.

 

명분을 위하여 당우(唐虞)의 법²을 시행하며

오행과 삼정(三正)³을 사용하고, 홍범무함(洪範巫咸)⁴을 실시하니

천웅의 도⁵와 절대로 서로 용납될 수 없었다.

 

은의 군사와 무리들이 부도의 남은 민중들을

무력으로 억누르니 남은 무리들이 마침내는 밝은 땅의 단을 봉쇄한 후

동해지빈(東海之濱)⁶으로 피하여 살았다.

 

바로 옛날 사례벌(斯禮筏)⁷의 빈 땅이었다.

사례벌은 긴 깃발로 광야에 유배된 사람이 아침에 걸고 저녁에 내려서

멀리서 지키는 사람이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도록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6촌을 건설하고 인접한 여러 족속들과 더불어

분담하여 지키면서 각자 한(韓)이라 칭하고 지키니

한(韓)은 보위의 뜻으로 북의 마, 남의 변, 동의 진 등 삼한⁸이었다.

 

부족들이 자치를 행하며 선세(先世)의 도를 굳게 지키므로

이래 천년동안 은나라 기자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보존하고 막는 일에 전념하느라 거의 여력이 없었다.

 

이때에 하토(夏土)의 싸우고 빼앗는 풍조가

점점 심해져서 동요와 혼란이 삼한으로 파급되었다.

이에 6촌의 사람들이 의논하였다.

 

“서쪽의 화가 점점 밀려와 보수(保守)가 장차 위태하므로

불가불 통합하여 방비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경계를 정하며 요새를 설치하고

혁거세를 추대하여 통합방비 하는 일을 맡겼다.

 

모든 족속들이 또한 수령을 세워 방비하니

남은 백제요 북은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곧 북보(北堡)의 땅을 회복⁹하고

서쪽에서 침범하는 사람들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완전히 지켰다.

 

[원문]

殷之亡人箕子 率敗軍難民 逃來於符都之西 爲名行唐虞之法 用五行三正 

施洪範巫咸 與天雄之道 固不相容 殷之軍民 武壓符都之遺衆 遺衆 遂封禁明地之壇

避住於東海之濱 卽昔世斯禮筏之空地也 斯禮筏者 長旗 曠野之謫人  朝揭暮藏

使遠居之守者 知其不逃也 乃設六村 與隣接諸族 分擔共守 各稱韓而保之

韓者保衛之意 北馬南弁東辰之三韓 自行部族之治 固守先世之道 邇來千年之間  

不納殷箕之法 專以保防爲事 殆無餘力 於是  夏土爭奪之風  漸次激甚 動搖混亂

波及於三韓 是時 六村之人 相謀以爲西禍漸迫 保守將危 不可不統合防備

遂限境設塞 推擧赫居世 委任統御之事 諸族 亦擧首領而防備 南曰百濟 北曰高句麗

高句麗 仍卽恢復北堡之地 軀遂西侵之人 完保其域

 

 

[해설]

 

1. 기자(箕子)

   

이름은 수유이고 자는 서여이다. 기(箕)는 나라이름이며 자(子)는 작위이다.

 

기자가 다스리던 곳은 산서성 태원시 남쪽의 기국(箕國)이다.

 

기자는 은나라의 왕족으로 은나라가 주 무왕에 의해 멸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하여 왕이 된 후조선의 백성들에게 문명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정전제를 실시하고 농사짓는 법과 누에치는 법을 가르쳐

백성들이 기뻐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부도지』는 기자에 대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상식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기자는 단군조선으로 망명한 후 부도의 법과 다른 당우(唐虞)의 법을 시행하며,

오행과 삼정을 사용하고, 홍범무함을 실시하여

고조선의 민중들과 많은 마찰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력으로 억누르므로 고조선의 민중들이 동해의 바닷가로 피하였다고 한다.

 

기자가 단군조선에 망명하여 은나라의 제도를 시행하려 하였으나

부도의 백성들은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일개 망명객에 불과한 기자가

어떻게 부도(아사달, 조선)지역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부도지』제26장에 의하면 기자가 부도로 망명하기 일백여 년 전부터

부도(아사달, 조선)는 이미 통치체계가 와해된 상태에 있었다.

   

기자가 침범한 후 부도(아사달, 조선)의 땅은

춘추시대에 선우국(鮮于國)으로 이어졌다.

 

『회남자』에 의하면

 

“기자는 조선(朝鮮)에 봉해지고,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 하북성 平山으로추정)에 봉해졌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씨(鮮于氏)라 했다.”고 한다.

 

또 중국 고대사학자인 <하광악何光岳>이 쓴『염황원류사炎黃源流史』‘역림易林’편에

“기자가 하북성 북쪽으로 이동하여 선우국을 세웠다.

(箕子北遷河北 建立鮮于國)”고 하였다.

 

중국고지도인『청국지지淸國地誌』에 수록된 「춘추전국도」를 보면

선우국(鮮于國)의 위치가 하북성 백석산 일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사기』·『한서』·『위략』·『삼국지』등

중국의 각종 사서에서 기자가 갔다는 조선은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로,

이곳에 고조선의 중심지인 왕검성이 있었다.

   

선우국은 춘추시대 강대국인 진(晉)과 60여 년간(BC 507~BC449년)

12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춘추말 전국초인 기원전 414년에는 중산국(中山國)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

 

중산국은 태행산맥 아래에 위치하였고,

위나라, 조나라, 제나라, 연나라에 둘러싸여 있었다.

 

중산국도 주변국들과 수많은 전쟁을 치렀는데,

기원전 408년에 위나라에 병합되었다가

기원전 380년 환공(桓公) 때 재건된 후

조나라와 연나라를 거의 멸망시킬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그러다가 BC 296년 조나라 무령왕에게 멸망하였다.

 

중국고지도인『청국지지淸國地誌』에 수록된 「전국칠웅도」를 보면

중산국의 위치도 선우국(鮮于國)과 마찬가지로 하북성 백석산일대로 나타나고 있다.

 

중산국은 전국칠웅 중의 하나로 중국의 여러 역사서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1973년과 1974년 두 차례의 발굴로그 실체가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되었다.

 

“춘추전국시대 신비의 나라였던 중산국의 실체가

1973년과 1974년두 차례의 발굴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1973년 5월 톈진시(天津市) 우칭셴(武淸縣)에서

827자가 새겨진 동한시대의 비석이 확인되었다.

 

비석상단에는 고풍스러운 전서(篆書)로

‘한나라의 안문태수 고 선우황비(漢故雁門太守鮮于璜碑)’라는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

 

비문에는 동한시대 환제 때인 AD 165년임을 뜻하는 연호가 새겨져 있었고,

다음과 같이 선우의 조상이 은나라 기자임을 밝히고 있었다.

 

 ‘(선우)의 이름은 황이며, 자는 백겸인데,

그 조상은 은나라 기자(箕子)의 후예에서 나왔다.

(君諱璜 字伯謙 其先祖出于殷箕子之苗裔~)’(장주본 탁본 첫머리)

 

또 1974년 11월,

허베이성(河北省) 핑산(平山) 싼지셴(三汲縣). 수리공사가 한창이던 이곳에서

놀라운 발굴이 이뤄진다.

 

춘추전국시대 신비의 나라였던 중산국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이곳에서 중산국의 전성기에 해당되는 중산왕 착(錯)의 무덤을 비롯,

3기의 왕릉이 확인됐다.

 

정(鼎·예기로 쓰인 솥)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중산국이 조나라와 연나라 등 강대국들을 물리쳤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결국 중산국 심장부에서 확인된 중산왕릉 묘의 발굴 성과와

베이징~톈진 사이 우칭셴에서 발견된 선우황비는

은(상)과 선우ㆍ중산국, 기자조선의 삼각함수를 풀 결정적인 열쇠가 된 것이다.

 

즉 ‘선우=은(상)의 후예=기자箕子의 후예’라는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역사를 복원할 때 문헌은 움직일 수 없는 귀한 자료다.

하지만 명문이라고 하는 금석학 자료와는 결코 견줄 수 없다.

 

문헌은 전해 내려오면서 조작이나 왜곡, 오류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지만

명문(금석문)은 당대에 당대인들이 직접 쓴 기록이기 때문이다.

(『코리안 루트를 찾아서』 이형구ㆍ이기환 저)”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자가 도망간 조선은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로

이곳에 고조선의 중심지인 왕검성이 있었다.

 

기자조선은 춘추시대에 선우국(鮮于國)으로 존재하였으며,

춘추말 전국시대에는 중산국(中山國)(기원전414년 ~ 기원전296년)으로 이어지다가

기원전 296년 조나라에게 멸망하였다.

   

한편 『삼국지』에서 인용한 『위략』에 의하면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

<몽염蒙恬>을 시켜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조선왕 <비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秦)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략 상 秦나라에 복속은 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비否>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중산국 멸망 후 어느 시기엔가 기자조선이 다시 부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일 <위만衛滿>이 기자조선에 망명하여 정권을 탈취함으로써

기자조선은 막을 내렸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중심지는

모두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의 왕검성이었다.

 

그리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고조선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단군조선의 법통을 계승하지는 못하였다.

이시기는 삼조선과 삼한이 양립하는 시기였으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삼조선의 일부인 변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파악된다.

 

2. 당우(唐虞)의 법

   

요임금과 순임금의 법으로 제왕지도(帝王之道)의 패권주의이다.

 

3. 오행과 삼정(三正)

   

오행은 오행설을 말하며, 삼정은 자(子)․축(丑)․인(寅)을 정월로 삼는 역법을 말한다.

 

(『부도지』 제22장) 부도(아사달, 조선)에서는 10월을 상달이라 하여 정월로 삼고

조제를 올리며 하늘의 백성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10월 3일을 개천절로 삼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반면 중화 족들은 왕조가 바뀔 때마다

정월을 자월ㆍ축월ㆍ인월로 역을 바꾸면서 왕조의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하였다.

   

부도의 역이 천수지리天數之理와 해혹복본解惑復本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짐으로써

수천 년을 변함없이 이어진 반면,

중화 족들의 역은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이용됨으로써

왕조가 바뀔 때마다 역이 바뀌는 일이 반복되었다.

   

고대에는 역법이 정치ㆍ종교ㆍ철학ㆍ문화 등 모든 인간생활의 중심에 있었으며,

10월을 정월로 삼는 한민족의 역법과

자월․축월․인월 중 하나를 정월로 삼는 지나족의 역법이 서로 대립하였다.

 

역법은 천자국만이 제정할 수 있었으므로

어떤 민족이 어떤 역을 사용하였는지 알면 그 소속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기자가 부도(아사달, 조선)로 망명와서 지나족의 역법을 쓰려고 하였으므로

고조선 민중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초기에는

10월을 정월로 하는 고조선의 역법을 사용하였다.

 

진나라와 한나라도 고조선의 통치이념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는 훗날 한무제가 고조선을 평정한 후

비로소 자子월을 정월로 하는 지나족의 역법으로 변경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은나라 정월이자

한무제가 변경한 정월이기도 한 음력1월을 설날로 쓰고 있으며,

1만년을 이어온 한민족의 으뜸 명절인 10월 상달의 개천절 행사는 빛을 바래고 있다.

 

한반도에 갇힌 우리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10월 상달의 개천절 행사를 거국적인 축제로 승화시키는 날,

한민족 웅비의 날이 다시 오리라!

 

4. 홍범무함(洪範巫咸)

   

홍범구주라고도 한다.

 

중국 하나라 우(禹)왕이 남겼다는 정치이념으로, 즉 9개 조항의 큰 법이라는 뜻이다.

 

우왕이 홍수를 다스릴 때 얻은 낙서를 보고 만들었으며,

주나라 무왕이 기자에게 정치를 물었을 때 기자가 홍범구주를 가르쳤다고 한다.

 

『서경』 주서(周書) 홍범편에 수록되어 있다.

9조목은 오행ㆍ오사ㆍ팔정ㆍ오기ㆍ황극ㆍ삼덕ㆍ계의ㆍ서징 및 오복과 육극이다.

 

5. 천웅의 도

   

『부도지』는 제11장에서 “천웅의 도를 세워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미암은 바를 알게 하였다.”고 짧게 언급하였을 뿐

천웅의 도’에 대하여 구체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환웅천왕이 ‘천웅의 도’를 세운 이래로

기자의 망명이 있기까지 우리 한민족이 수천 년의 세월을 지켜왔음을 알게 한다.

 

천웅의 도’는 해혹복본(解惑復本)을 바탕으로 하는

‘마고의 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해혹복본은 “의혹을 풀고 근본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의혹을 풀기 위하여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데,

부도의 진리는 기화수토설(氣火水土說), 하도(河圖),

『천부경天符經』, 부도역(符都易) 등이다.

 

이는 기자가 시행한 당우의 법과 오행과 삼정 및 홍범무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은

부도의 조선을 가리켜 천독(天毒)이라 하였다.

 

이 글에 대하여 중국 진나라 시대의 학자인 <곽박(郭璞, 276~324)>은

 

“천독(天毒)이라는말은 천축국(天竺國)이다.” 고 하였으며,

“부도(浮屠)가 이 나라(조선)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부도(浮屠)란 원래 부다(붓다=부처), 불교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환웅천왕이 단군임검의 부도에서 부처로 받들어 졌음을 알 수 있다.

 

또 오늘날 불교에서 부처를 모신 곳을 대웅전(大雄殿)이라 부르는 것을 보더라도

‘천웅의 도’는 불교의 모태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부도지』 제13장)

 

6. 동해지빈(東海之濱)

   

기자의 법을 따르기 싫어서 부도의 민중들이 피난한 곳이다.

 

기자는 산서성 태원시 남쪽의 기국(箕國)을 다스렸으며,

은나라가 망한 후 태원시 북쪽으로 피하여 살다가

부도의 서쪽에서 부도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부도의 민중들은 기자를 피하여 동해 쪽으로 이동하였다.

 

부도의 민중들이 피난한 동해지빈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부도지』는 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 지역을 중심으로 신라가 일어나서 부도를 재건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역사를 이해하려면

동해지빈이 어디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

 

과연 부도의 민중들이 피난한 동해지빈(東海之濱)은 어디일까?

 

(1) 동해의 ‘빈(濱)’ 지역

   

중국의 동쪽 해변에 위치한 빈(濱) 지역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하북성 천진시의 남쪽 해변이다.

 

「춘추열국도」등 중국의 여러 고지도에 지명이 빈(濱)으로 나타난다.

(향고도/중국고지도/청국지지/춘추열국도)

 

부도의 민중들이 기자와 전쟁을 하다가 쫓겨 가는 것이 아니라

기자의 법이 따르기 싫어서 피하는 상황이므로

부도에서 멀리 갈 필요는 없었을것 이다.

 

그런 점에서 『부도지』에서 말하는 동해지빈은

부도에서 가까운 ‘동해의 빈(濱) 지역’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빈濱지역은 황하에 의하여 섬처럼 구분되어

적을 방어하기에 아주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 빈濱지역은 후일 한무제 시대에 창해군(蒼海郡)이 된 곳이다.

 

『사기』와『한서』에 의하면

“원삭 원년(BC 128) 동이의 예군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을 하여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며,

 

『후한서』에 “예군 남려 등이 우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내속하니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다.”

고하였다.

 

그러나 창해군은 원삭 3년 봄 폐지되었고, 도로 위만조선에 속하게 된 곳이다.

 

 

(2) ‘동해(東海)’라는 지역의 물가

   

중국 산동성의 남쪽 바닷가에 ‘동해(東海)’라는 지명이 있었다.

 

부도의 민중들이 피신한 곳은 ‘사례벌(斯禮筏)의 빈 땅’으로

죄인의 귀양지라고 하였다.

 

‘동해’ 근처의 우산(羽山)

순임금 당시에 우임금의 아버지인 곤이 귀양가서 죽은 귀양지이므로

‘동해’도 『부도지』의 동해지빈에 부합되는 지역이다.

 

그리고 부도의 민중들이 나중에 신라를 세우는데,

신라의 처음이름이 서라국(徐羅國)이고 ‘동해’ 부근이 서주(徐州)인 점도 비슷하다.

(『부도지』 제32장)

 

 

(3) ‘동해의 바닷가’라는 일반적인 의미

   

단군임검의 부도는 중국 양자강에서 발해만을 빙 돌아서 한반도 남단에 이르기까지

바닷가의 요소요소에 8곳의 해시(海市)를 열어 서로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따라서 동해 바닷가 어디라도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환경이었다.

따라서 위의 장소 이외의 지역도 가능성을 가지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7. 사례벌(斯禮筏)

   

사례벌은 긴 깃발로 광야에 유배된 사람이 아침에 걸고 저녁에 내려서

멀리서 지키는 사람이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도록 하는 것이었다.

 

신라의 수도를 사례벌 혹은 서라벌이라고 부른 이유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증언이다.

 

아울러 초기 신라의 위치가 거칠은 광야로 죄인들의 귀양지였음을 알 수 있다.

 

8. 삼한

   

마한ㆍ진한ㆍ변한이다.

부도(아사달)의 민중들이 기자를 피하여 동해지빈으로 이동한 후

인접한 여러 족속들과 삼한을 건설하였다.

 

삼한의 위치는 중국 하북성의 호타하 남쪽 지역이다.

 

고조선은 삼한 또는 삼조선의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단군조선이 분열되면서 호타하 북쪽의 삼조선과

호타하 남쪽의 삼한이 병립하게 되었다.

 

훗날 한반도에도 삼한이 건설되어, 2개의 삼한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삼한을 배경으로 삼국이 일어나므로

신라ㆍ고구려ㆍ백제 또한 중국 대륙과 한반도에 각각 존재했을 개연성이 크다.

 

중국의 각종 역사서에 나오는 삼한 또는 삼국의 기록은

대부분 중국 대륙의 삼한 또는 삼국에 대한 기록이다.

 

9. 고구려는 곧 북보(北堡)의 땅을 회복

   

부도의 민중들이 고구려ㆍ신라ㆍ백제를 세우고,

고구려는 곧바로 북보(北堡)의 땅을 회복하였다는 놀라운 소식이다.

 

부도의 북보는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이다.(『부도지』 제13장)

 

고구려가 세워지고 곧바로 북보의 땅을 회복하고 그 지역을 완전히 지켰다는 것은

고구려가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에서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북보의 관할지역인 대륙의 북쪽지역을 모두 회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구려가 요령성 집안이나

길림성 장춘부근 등 만주에서 일어난 것으로 배워왔다.

 

부도지』에서 말하는 지역과는 동쪽으로 수 천리나 떨어진 곳이다.

 

 

『부도지』의 이 증언은 우리의 삼국시대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써야 할지도 모르는

폭발력이 있는 충격적인 내용이다.

 

 

 

<삼국의 초기 중심지>

 

 

본문의 내용에 따라 삼국의 초기 중심지를 살펴보면

 

고구려는부도(아사달)의 북쪽 보단(保壇)이 위치한 하북성 장가구시와 탁록 일대이다.

 

신라는 기자를 피하여 동해지빈(東海之濱)으로 이동하였는데,

하북성 천진시 남쪽으로 한나라 시대의 창해군(滄海郡) 지역이며,

오늘날의 창주시(滄州市) 일대이다.

 

백제는 고구려의 남쪽이며, 신라의 서쪽으로 대방(帶邦) 지역이다.

 

곽박이 『산해경』의 주석에서 열수(列水)가 대방에 있다 하였고,

열수는 호타하이므로 대방은 호타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오늘날의 석가장시 일대이다.

 

 

 

7. 보정군지(保定郡志)가 전하는 항산(恒山) 과 갈석산(碣石山)의 위치

 

명나라 弘治 甲寅年(1494년)에 발간된 보정군지의 항산 및 갈석산의 기록이다.

 

大茂山去郡西南二百二十里石門村属唐縣 太平御覽云本恒山也

又連曲陽縣北一百四十里本属中山府 禹貢太行恒山至于竭石入于海

二山盖連延至扵竭石也.

<保定郡志>卷十二「山川」

 

대무산은 군(郡) 서남쪽 220리의 당현 석문촌(石門村)에 있다.

태평어람에 이르기를 본래 항산(恒山)이라 하였다. 

산은 또 곡양현(曲陽縣)으로부터 북쪽으로 140리 떨어진

본래의 중산부에 속한 태행(산맥)의 항산으로 이어졌다.

임금이 이 항산을 거쳐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에 다다랐다고 하였다.

생각컨대 그 두개의 산이 잇대어져 길게 뻗어 갈석산에 이르렀을 것이다.

 

 

보정군지가 편찬될 당시에 보정군에는 항산으로 알려진 두개의 산이 있었다.

 

하나는 당현 석문촌의 신선산(神仙山)이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진 대무산이고

다른 하나는 곡양현 북쪽 140리에 있다고 하는 산이다. 

 

그런데 '곡양현 북쪽 140리'는

2,096미터 높이의 백석산(白石山)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와 일치한다.

 

보정군지의 기록이 가리키는 그 두번째 항산은

현 보정시 래원현(淶源縣)의 백석산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다시 말해서 보정군지는 놀랍게도 백석산이

바로 <서경> '하서 우공 제84장'의 '항산'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보정군지는 그 두개의 항산,

곧 현 대무산과 백석산이 잇대어져 줄기를 길게 뻗어서 갈석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볼때 진황도시의 '갈석산'은 진짜 갈석산이 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직선거리로 400킬로미터나 떨어져있는 진황도시의 '갈석산'까지

대무산이나 백석산의 줄기가 뻗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대무산줄기가 백석산으로 이어지고 그 산줄기가 다시

동쪽의 하북평원지대로 40여 킬로미터를 뻗어 이어진 곳에 우뚝 솟은 산,

즉 보정시 낭아산(狼牙山)이 바로 갈석산임이 명확하다.


참고로 보정군지에는 '갈석'에 비석 '갈(碣)'자 대신 다할 '갈(竭)'자가 쓰였지만,

<서경> '하서 우공 제84장'의 기록에서 '碣石'만 '竭石'으로 바꿔 그대로 인용 하였으므로

'竭石'과 '碣石'의 동일함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대무산과 백석산 및 낭아산>

 

 

 

- 사고전서로 살펴본 고조선

 

 

 

 

 

 

- 사고전서로 살펴본 부여와 고구려

 

 

 

 

- 사고전서로 살펴본 요서백제와 신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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