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의 낙랑은 한국사의 척추이다.

 

낙랑이 바로서면 한국사가 바로 서고 낙랑이 뒤틀리면 한국사 전체가 뒤틀린다.

 

그래서 중국의 중화중심주의자들은

조선의 낙랑은 중원의 낙랑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한국사의 대륙사와의 단절을 낙랑을 통해 시도했고

일제의 식민사학자들 또한 위조 가능설이 높은 낙랑유물을 내세워

대동강 낙랑설을 제기하며 이를 한국사 왜곡의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청나라 건륭(1736-1795) 연간에 학자 1000명을 동원해 10년에 걸쳐

청나라 이전 중국의 사료를 집대성한 사고전서를 통하여 낙랑의 실체를 알아보자.

 

 

 

 

1. 갈석 낙랑(碣石 樂浪)

 

....孝武皇帝 元狩六年 太倉之粟 紅腐而不可食 都內之錢 貫朽而不可校

迺探平城之事 錄冒頓以來 數爲邊害 籍兵厲馬 因富民以攘服之 西連諸國

至于安息 東過碣石以玄兎樂浪爲郡 北郤匈奴萬里更起營塞 制南海 以爲八郡

則天下斷獄萬數 民賦數百 造鹽鐵酒榷之利 以佐用度 猶不能足....

<前漢書 권64下 賈捐之傳>

 

孝武皇帝{漢 武帝} 元狩六年 (BC117)에 이르러

太倉의 곡식은 붉게 썩어서 먹을 수가 없었고

都內의 돈은 꾸러미를 꿴 끈이 노후하여 숫자를 계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平城의 일을 탐색하고 <冒頓>이래로 자주 변방에 피해를 입힌 일을 기록한 다음

병사를 징집하고 무기를 손질하여 富民들의 도움으로 인해서 저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서쪽으로는 여러나라와 연대하여 安息에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碣石을 지나 兎, 浪으로서 郡을 삼았습니다.

 

북쪽으로는 흉노를 만리를 퇴각시켜 다시 營塞를 일으켰고,

남쪽 바다에 있는 섬들은 제압하여 8郡으로 만들었으니

천하의 죄수는 수만명에 달했고 백성의 賦稅는 수백이 되었습니다.

 

鹽, 鐵, 酒榷의 이로움을 만들어서 用度를 보탰지만 오히려 부족했습니다....

 

 

 

중국 역사상에 보이는 갈석산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하북성 동쪽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이고,

다른 하나는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에 있던 갈석산이다.

 

晉太康地理志」에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라고 나온다.

 

이것은 西晉 시기에는 낙랑군에 수성현이 있고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전국시대 종횡가의 대표적인 인물인 <蘇秦>은 燕의 文侯를 만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 燕나라가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林胡. 樓煩이 있고

서쪽에는 雲中. 九原이 있고 남쪽에는 沱. 易水가 있는데, 지방이 2000리쯤 된다.

 

燕나라가 남쪽으로 碣石. 雁門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으로는 대추와 밤의 수익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비록 경작을 하지 않더라도 대추와 밤의 수익만 가지고도 충분할 것이니

이곳이야말로 소위 말하는 천혜의 땅이다."

<史記 권69 蘇秦列傳>

 

호타하는 하북성 保定市 남쪽에 있고 易水는 易縣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燕나라 남쪽의 호타하(滹沱河). 易水 유역 부근에 있던 산으로서

안문산과 함께 거명된 이 갈석은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는 갈석산과는 같은 갈석산이 될 수가 없다.

 

갈석산은 산해경 북산경과  尙書」禹貢에 그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상고시대부터 있어온 산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진황도시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그 산 이름이 본래는 게석산(揭石山)이었다.

 

그런데 東漢 말년에 <문영文穎>이라는 사람이

漢書 武帝紀에 나오는 갈석산에 대해 주석을 내면서 게석산을 갈석산으로 해석하였고,

그것이 시발이 되어 이후 중국의 많은 역대 사가들은

이를 근거로 게석산을 갈석산으로 간주함으로써

게석산이 갈석산으로 둔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수. 당 이후에 갈석산은 하북성 동쪽의 노룡 갈석,

현재의 창려 갈석으로 옮겨오고

하북성 남쪽 호타하 유역 부근에 있는 안문산과 함께 거명되었던

<소진>이 말한 갈석산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 한무제가 동쪽으로 갈석산을 지나서

현도.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그 갈석산은 과연 어떤 갈석산일까?

 

진황도시 창려현 갈석산은 서한 말엽 新왕조의 왕망시대에

처음에는 게석산이란 이름으로 출발했다가

수당 이후에 이르러 갈석산으로 이름이 변경된 산이므로

한무제 시대엔 이 갈석산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산이다.

 

따라서 한무제가 지나갔던 갈석산은

현재의 하북성 동쪽 창려현에 있는 갈석산이 아니라

하북성 남쪽 호타하 부근에 있던 전국시대 종횡가 <소진>이 말한 갈석산이 틀림없다. 

 

서기전 108년에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하여

한반도 북부인 대동강 유역에 한사군의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해온

사대. 식민사관적 논리들은 전혀 근거가 없는 역사왜곡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엉터리 논리가 시정되기는커녕

오늘 우리 역사학계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통설이 되어 있다는 것은

민족적 비극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遂城 四鄉有遂城山易水漕水鮑河

古跡 遂城山 本名龍山

括地志云 其上徃徃有仙人及龍跡

釜山 邢子勵高陽記云 漕水出釜山是也

班妃山 圖經云 隋煬帝東征於山上置班姬廟

易水 漕水 高陽記云 漕水出釜山 南流經羊角淀 北新城西 至伏龍泉與漕水流

長城 蒙恬所築

新城 高陽記云 本顓頊所造 又名伏龍城

- 원풍구역지(元豐九域志) 사고전서本 卷二

 

수성(遂城)(현) 네개의 마을에 수성산遂城山, 역수易水, 조수漕水, 포하鮑河가 있다.

고적 수성산遂城山 본래 이름은 용산龍山이다.

<괄지지>에 이르기를 "그 위에 이따금씩 선인과 용의 흔적이 있다."고 했다.

부산(釜山) <형자여고양기>에 이르기를

"조수(漕水)는 부산(釜山)에서 나온다."고 했다.

반비산(班妃山) <도경>에 이르기를

"수양제가 동쪽을 정벌하였다. 산위에 반희班姬의 사당을 세웠다."고 했다.

역수(易水) 조수(漕水) <고양기>에 이르기를

"조수漕水는 부산釜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양각정羊角淀과 북신성北新城의 서쪽을 지나 복룡천伏龍泉에 이르러 더불어 흐른다"고 했다.

장성(長城) 몽염蒙恬이 쌓았다.

신성(新城) <고양기>에 이르기를

"본래 전욱(고양씨)이 짓고 또한 복룡성伏龍城이라 이름 지었다"고 했다.

 

 

낙랑군 보정설의 주요 쟁점들 가운데 하나인

태강지리지의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기사의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가

과연 현 보정시 <수성진>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미 알려진 <무경총요>및 <태평환우기> 등에 이어

"그렇다"라고 직접 증언하는 또 하나의 사료이다.

 

<무경총요>와 <태평환우기>에

"진나라가 쌓은 장성"(秦築長城)으로 기록된 것과는 달리

<원풍구역지>에는 "몽염蒙恬이 쌓은"(蒙恬所築) 장성으로 되어 있다.

 

<원풍구역지>는 북송北宋의 왕존(王存, 1023 - 1101) 등에 의하여 집필된

행정지리지로서, 원풍元豐3년(1080년)에 전10권으로 간행되었다.

 

 

 

2. 고죽국 낙랑 (孤竹國 樂浪)

 

 

弔夷齊賦                                     - 王世貞

 

盧龍 故孤竹也 城西 有伯夷叔齊祀 吳人王世貞 

奉使過此 酌水酹焉 而爲辭

 

曰余奉輶以東逝兮 束馬放乎令支 山瓚岏而嵬礨兮

衆草贙雚而條緯 兪兒道余於卑耳兮 武夫磷其參差.....

溟波委輪於樂浪兮 箕蒙難而宗靈 庶偕以翺游兮 語侏離而不可通....

<畿輔通志 券115>

 

伯夷 叔齊의 魂靈을 위로하는 글        王世貞

 

노룡(盧龍)은 옛 고죽국 땅이다.

성 서쪽에 백이. 숙제의 사당이 있다.

吳人 왕세정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나가다가 이곳을 지나면서

물 한사발 떠놓고 제사를 올리며 이 글을 지었다.

 

내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동쪽에 사신으로 떠나게 되어

행장을 꾸려서 영지(令支)에 이르렀도다.

산들은 뾰족뾰족 높낮이가 고르지 않고, 갖가지 풀들은 여기저기 옹기종기 나 있도다.

兪兒비이(卑耳)에서 나를 인도하고, 무사는 울긋불긋 그 색갈이 다르도다.....

북방의 물줄기가 낙랑(樂浪)으로 모여드니,

箕子가 난을 당하여 여기서 종묘사직을 연장시켰도다.  

함께 노닐며 즐길 수도 있었건만 侏離의 언어라서 말이 통하지 않았도다.

 

 

※ 참고

 

兪兒 : 북방 神의 이름이다

 

卑耳 : 고죽국 인근의 지명

 

侏離 : 蠻夷의 말소리. 여기서는 伯夷는 東夷계통의 고죽국 사람으로 중원과 달라서

         중원에서 온 箕子와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畿輔通志는 淸代에 북경, 하북 및 천진 일대의 역사연혁과 사화 상황을 종합 기재한官撰의 지방지이다.

 

동북방의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몇 안되는 중요한 참고자료이다.

 

 

明나라 때의 유명한 역사학자요 문인이었던 왕세정은 동쪽으로 사신을 떠나다가

옛 고죽국 땅인 오늘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고성진에 이르러

백이. 숙제의 사당에 간소한 제사를 올린 다음

그의 혼령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弔夷齊賦를 지었다.

 

고죽국은 오늘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을 중심으로

상당히 광대한 지역에 걸쳐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왕세정은 이 글에서 令支, 卑耳, 樂浪 등의 지명을 거론하면서

고죽국에서 벌어졌던 옛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고구려가 본래는 고죽국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후한말 공손도의 거점인 평주(平州)를 조조가 차지하여 노룡군을 설치하였다

그후 북위때 북평군이 되고 수.당때에는 다시 평주로 개명하여 송. 명까지 이어오다가

청나라때 지금의 난하 유역으로 지명이 이동되었다. 

 

기주冀州(禹) - 영주營州(舜) - 고죽국(商) - 유주幽州(周) - 산융.비자(춘추시대)

- 요서, 우북평(秦, 燕이 일시 차지) - 낙랑군, 현토군(漢이 일시 차지) - 고구려 

- 평주(발기의 난으로 공손도 차지) - 노룡군(조위) - 평주군, 낙랑군(북연)

- 고구려(광개토대왕 요동 요서 회복) - 북평군, 요서군(북위) - 북평군 노룡현(수)

- 평주 노룡현, 평주 석성현(당) - 평주(송)

 

 

 

3. 영평부 낙랑 (永平府 樂浪)

 

영평부 

 

동쪽으로 산해관까지 180리이고 서쪽으로 順天府 豊潤縣 경계까지 120리이며

남쪽으로 해안까지 160리이고 북쪽으로 桃林口까지 60리이다.

府의 치소로부터 京師{북경}까지는 550리이고 남경까지는 3,995리이다.

糧은 45,000이다.

 

 

설치연혁 

 

「禹貢」의 冀州 지역이고 천문은 尾分野이다.

 

처음에 虞舜이 冀州의 동북을 분할하여 營州로 만들었으니 이곳이 바로 그 지역이다.

 

商나라 때는 고죽국이 되었고 周나라 때는 幽州에 속했고

춘추시대에는 山戎. 肥子 두 나라의 땅이 되었고

秦나라 때는 요서. 우북평 2郡의 땅이 되었다.

 

漢末에는 <공손도>의 차지한 바가 되었고 魏나라때 노룡군으로 개정되었으며

北燕 때 平州 및 낙랑군을 설치했고 後魏 때 낙랑을 고쳐서 북평군으로 삼았으며

隋나라 때 다시 平州로 고쳤고

天寶(당 현종 연호, 742-756)초기에 북평군으로 고쳤으며

乾元(당 숙종 연호, 758-760)초기에 다시 平州로 만들었다.

 

五代唐시대에 遼興軍이라 하였고, 金나라 때 승격시켜 南京삼았으며

天會(금 태종 연호, 1123-1135)초기에 다시 平州로 삼고 興平軍으로 승격시켰다.

 

元나라 때 興平府로 개정했고

中統(원 세조 연호, 1260-1263)초기에 平樂路로 승격시켰으며

大德(원 성종 연호, 1297-1307)중에 永平路로 개정했다.

 

本朝 洪武2년(1369)에 永平府로 개정하여 北平布政司에 소속되었다.

 

永樂( 명 성조 연호, 1403-1424) 중에 京師의 직할이 되었고

관하에 1개의 州와 5개의 縣을 관할했다. 

<明一統志 券5>

 

 

※ 참고

 

順天府 : 明, 淸 때 오늘날의 북경시 지역을 순천부라고 하였다. 

 

桃林口 : 진황도시 서북쪽에 있다.

 

北平布政司 : 명나라 초기에 京師(南京)를 제외하고 전국을 절강, 강서, 복건, 북평,

광서, 사천, 산동, 광동, 하남, 섬서, 호광, 산서 12개 구역으로 나누어 12布政使司를

설치했고 洪武 15년(1382)에 운남포정사사를 증설하여 13포정사사가 되었다.

永樂 원년(1403)에 明 成祖가 북평포정사사를 北京으로 바꾸었다.

 

 

明一統志의 원래 명칭은 大明一統志이다.明 英宗 5년(1461)에 완성된 官撰 地理總志이다.

 

全國總圖와 各布政使司分圖는 그림으로 그려서 실었다.

 

 

명나라 때 영평부는 관하에 노룡현, 천안현, 무령현, 창려현 등과 란주를 관할했고

순천부. 보정부. 하간부 등과 함께 북경 직할로 되어 있다.

 

이 지역이 오늘날은 북경시와 별도로 하북성에 포함되어 있지만

明나라 때는 수도 북경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虞舜시대 12州의 하나였던 營州가

바로 이 북평부 지역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秦나라 때 설치되었던 요서군, 우북평군이

바로 이 명나라 때의 영평부 지역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秦나라 때의 요동, 요서는 오늘날의 요하를 기준으로 설정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北燕시대에 明나라 때의 영평부 지역에

平州 및 낙랑이 설치되었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낙랑군이 처음 설치된 것은 한무제시기이다.

 

이 때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은 漢의 낙랑군과 무관한 것일 수가 없다.

 

秦나라 때 요서. 우북평이 설치 되었던 이 부근에 漢의 낙랑군이 있었고

북연이 한의 낙랑군 지역에 다시 옛 이름을 복원 설치했다고 본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한무제가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을 설치했는데

16국 시대에 북연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영평부 지역에

낙랑군을 설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漢末에 <공손도>가 차지했던 곳이

바로 이 명나라 때의 영평부 일대였다는 사실도 전해주고 있다.

 

<공손도>가 차지했던 요동은 오늘날의 요동이 아니라 북경시 남동쪽에 있었던 것이다.

 

 

 

 

4. 노룡 낙랑 (盧龍 樂浪)

 

朝鮮

箕子 後封遙之樂浪 今平之盧龍 有朝鮮城 故武德

以遙爲箕州 八年 而高麗 亦其地

<路史 券27 朝鮮>

 

 

조선

箕子를 뒤에 遼의 낙랑에 봉하였다.

지금 平州의 노룡에 조선성이 있다.

그러므로 武德연간(당 고조의 연호, 618-626)에 遼州로써 箕州로 삼았으며

武德 8년임.

고구려도 역시 그 지역이다.

 

路史는 남송의 학자 <라필>이 효종 乾道 연간(1165-1173)에 편찬하였다.

 

상고시대부터 兩漢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있어

동북아의 상고사를 연구하는데 크게 참고할 가치가 있다.

 

 

다른 자료에서는 일반적으로 箕子를 "朝鮮에 봉하였다"라고 말한 데 비해

이 자료는 "遙의 樂浪에 봉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상에서 한반도의 대동강이 遙水나 遼河로 지칭된 일은 없다.

 

또 여기에 일찍이 遙西. 遙東郡이나 遙州가 설치된 적도 없다.

 

그러면 저자가 여기서 말하는 遼의 樂浪은 어디를 두고 말한 것일까?

 

「路史」의 저자 <라필羅泌>은 南宋 孝宗시대 사람이다.

 

그 당시에 하북성 노룡현이 平州에 소속되어 있었고,

또 宋나라 때 <락사樂史>가 쓴 「太平寰宇記」에 따르면

"노룡현에 箕子가 봉함을 받은 朝鮮城이 있다"라고 하였다.

 

平州의 노룡,

즉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은 백이. 숙제의 고죽국이 있던 지역이다.

 

백이. 숙제는 殷나라 제후국의 왕자로서

周武王의 殷나라 정벌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인물이고

箕子는 殷나라 왕족으로서 殷나라가 쇠망하자

周나라의 신하노릇하기가 싫어서 떠나간 인물이다.

 

당시 고죽국은 山戎족으로서 중원지역이 아닌 東北方,

지금의 만리장성 부근에 있었다.

 

그리고 고죽국과 같은 동족인 조선이 거기 이웃하여 살고 있었다.

 

지금은 하북성 노룡현이 다 중국 땅이 되어 있지만

箕子 당시에는 오늘의 하북성 남부, 북부와 동부가 다 東夷들이 사는 지역이었고

거기에는 孤竹, 令支, 朝鮮 등 東夷 국가들이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하여 玄兎, 樂浪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다.

 

다시말해 요동에서 일어나 요동에서 멸망한 나라이다.

 

玄兎, 樂浪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

고구려가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이 옳겠지만,

그렇지 않고 易水, 漕河유역에 있었다면

고구려 또한 그 지역에 있었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이렇게 너무나도 명백한 역사사실을 거짓이라 생각하고

조작된 역사를 사실이라 믿는 우를 범해 왔다.

 

이제는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5. 요수 낙랑 (遙水 樂浪)

 

遙水

在漢樂浪玄兎之地 東西四百八十里 水經云 遙水源出靺鞨國西南山 南流會白滄水

至安市城 今號東京 小遙水 源出小遙山 西南流 與天梁水會 在國西也

<武經總要>

 

 

요수(遙水)

 

漢나라시대의 낙랑. 현토 땅에 있다.

동서로 480리이다.

水經에 말하기를 "遼水는 말갈국의 서남쪽 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白滄水와 만나서 안시성에 도달한다" 라고 하였다.

지금은 東京이라고 호칭한다.

小遼水는 小遼山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天梁水와 만난다.

나라의 서쪽에 있다.

 

 

무경총요는 요수와 소요수를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요수는 당연히 대요수를 지칭하는 것이다.

수경에서 "대요수는 새외의 衛白平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새로 진입하고 요동 襄平縣 서쪽을 경과한다" 라고 하였다.

 

요동 양평현은 오늘날의 보정시 서수구의 수성진 인근이다.

오늘날의 남역수가 大遙水이며 小遼水는 남역수의 지류이다.

대요수가 한나라때 요수(요하)이고 수.당때는 조하漕河가 요수(요하)이다.

 

 

 

6. 평주 낙랑 (平州 樂浪)

 

遼東

「地理志」에 "燕나라 땅은 동쪽에 遼東이 있다"라고 하였다.

「흉노전」에는 "燕나라가 요동군을 설치하여 胡를 방어했다"라고 하였다.

「通典」에는 "舜이 설치한 營州는 遙水의 동쪽이 이곳이다.

燕나라 때는 요동군이라 하였고 秦漢시대에도 그대로 요동군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낙랑과 통하였다.

晉나라 때 平州를 설치했고 後魏시대에 고구려국이 그 땅에 도읍했으며

唐나라 때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通鑑地理通譯 券10 遙東>

 

通鑑地理通譯은 남송 말년의 <王應麟(1223-1296)>이 通鑑의 지리에 관한 내용을  간추려 주석을 낸 책으로 총 14권이다.

 

인용한 자료의 폭이 넓고 고증이 대체로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後魏 즉 北魏시대에 고구려가 요동에 도읍을 했다고 한다.

 

북위시대에 고구려가 도읍을 정했다는 이 기록은 그간 우리의 고구려사에 대한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충격적인 내용아 아닐 수 없다.

 

고구려가 북위시대 즉 장수대제 14년(427년)에 천도한 곳이

오늘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고성진이었고 여수전쟁과 여당전쟁이 일어난 곳이고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唐이 설치한 안동도호부는 직 통치기구가 아닌

기미(糜)정책의 한 수단에 불과했고

그것마저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唐 숙종(756-758)이후로는 폐지되었던 것이다.

 

 

 

 

甲午 晉 世祖 武皇帝 泰始 10년(274년)

吳歸命侯 鳳凰 3년(274년) 봄 정월 乙未에 일식이 있었다.

「通鑑」을 기준으로 하여 정리함

윤월 丁亥에 조서를 내리기를

"지금으로부터는 첩잉(妾媵)으로써 正嫡을 삼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本紀」를 기준으로 하여 정리함

幽州를 분할하여 平州를 설치하였다.

「本紀」를 기준으로 하여 정리함

 

 

解題 

幽州는 7개의 郡과 國을 관할했다.

范陽郡 지금의 涿州, 雄州, 易州, 覇州 4州의 땅이다.

燕國 지금의 涿州, 薊州 2州의 땅이다

北平郡 지금의 經州, 薊州, 檀州, 營州 4州의 땅이다. 

上谷郡 지금의 媯州의 땅이다.

廣寧郡 지금의 媯州의 땅이다.

代郡  지금의 雲中路의 奉聖州, 蔚州, 儒州 3州의 땅이다.

遙西郡 지금의 平州, 景州 2州의 땅이다.

平州는 5개의 郡과 國을 관할했다.

遼東國. 昌黎郡. 樂浪郡. 玄兎郡. 帶方郡이다.

宋나라 때는 營州에 소속되었는데 安東都護府의 땅이다.

<大事記續編 券24>

 

 

大事記續編은 元末 明初의 학자 <왕위王褘(1322-1373)>가 편찬했으며 총 77권이다.

漢武帝 征和 4년(BC89년)으로부터 시작해서

宋 德祐 2년(1276년)까지 1,365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解題를 통해 역사 사실에 대한 異同을 고증하여 자못 학술적 가치가 높은 저서이다.

 

 

幽州를 분할하여 설치한 平州의 遼東國. 昌黎郡. 樂浪郡. 玄兎郡. 帶方郡이

宋나라 때의 營州 安東都護府에 소한 땅이라고 밝히고 있다.

 

274년은 고국천제 18년(196년)에 발기의 난으로 고구려가 요동을 상실하여

산상대제 13년(209년)에 환도성(今 朝陽)으로 천도하고 

동천대제 20년(246년)에 관구검의 난으로 환도성이이 함락되니

동천대제가 이듬 해에에 평양(今 遙陽)으로 천도 한 뒤

중천대제를 이어 즉위한 서천대제 5년이다.

 

서천대제5년{AD274}갑오, 추8월,

<유화>성모의 신묘에 제사하였다. 

<{서}진>이 <유주>의 다섯 군을 떼어내어 <평주>로 삼았다.

일설엔 <범양>・<상곡>・<북평>과 <요서>을 말하고,

또 다른 설에는 <창려>・<요동>・<대방>・<낙랑>・<현도> 등을 말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이미 <진>의 땅이 아니었었다.

교위・태수・참군을 허설(虗設)한 것이었으니, 또한 웃을 일 아니겠는가?

<남당유고 고구려사초>

 

魏 明帝 曺叡13년(238년) 사마의가 요동의 공손연을 정벌한 후

265년 司馬炎이 (서)진을 낙양에서 건국하여 274년 평주를 설치할 때까지

고구려가 발기의 난으로 공손도에게 내어준 요동과 요서지역은

부여왕 의려가 다스리고 있었다.

 

晉 武帝 司馬炎은 泰始 10년(274년)에 유주를 분할하여 평주를 설치하였으나

이 지역은 부여왕 의려가 다스리고 있어

수조권과 군권이 없는 실권없는 허명일 뿐이었다. 

 

286년 선비족 모용외가 의려를 내쫒고 이 지역을 차지한다.

 

 

宋나라 때의 안동도호부는 어디 인가?

 

송나라 때 <락사樂史>가 지은 태평환우기에

영주(營州){今 보정시 서북}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營州는 殷나라 때 고죽국이었고, 燕나라 때는 요서. 우북평군 지역이었으며

秦. 漢시대는 요서군 지역이었고, 16국시대는 선비 모용황의 도읍지였으며,

隋.唐시대에는 營州에서 柳城郡으로 다시 柳城郡에서 營州로 변천되었다."

라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태평환우기에서  영주와 이웃한 檀州를

지금 북경시 密雲縣 일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영주는 바로 옛 고죽국 지역인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서북쪽 일대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일대가 隋.唐.宋 시대에는 營州로, 秦.漢 시대에는 요서군으로

殷시대에는 고죽국으로 불렸던 것이다.

 

안동도호부는 당나라 고종 때 평양{今 노룡(永平)}에 처음 설치되었고

나중에 요동군 故城, 新城, 平州 등지로 옮겨 다녔으며

최후에 요서 고군성(故郡城)으로 옮겨 폐지되었다.

 

요서 故郡城은 어디를 말하는가?

 

요서군은 본래는 幽州 지역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北魏 시기에 幽州를 분할하여 만든 平州 지역에 요서군을 새로 설치하므로써 幽州에 있던 요서군의 城이 요서 故郡城이 된 것이다. 

 

그러면 당시 平州는 어디인가?

 

태평환우기에 의하면 이 지역은

"춘추시대에 山戎의 고죽국, 白狄의 肥子國 2國의 땅이었고

秦.漢시대엔 우북평 및 요서 2郡의 땅이었으며

唐나라 때는 북평군으로 고쳤다가 다시 平州로 되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7. 극성 낙랑 (棘城 樂浪)

 

鞠殷

鞠殷 樂浪太守 彭之子也 彭初守樂浪 趙石虎來伐 境內多叛應之

彭選壯士數百 固守棘城 城得不沒 趙兵旣退 大加賞賜 殷仕儁 爲尙書左丞

太原王恪 克廣固 遷殷爲東來太守 彭時爲大長秋 以書戒殷曰

王彌曺疑 必有子孫 汝善招撫 勿尋舊怨 以長亂源

殷推求彌從子立 疑孫嚴於中山 請與相見 深結意分

彭復遺使 遺以車馬衣服 君民大安

<十六國春秋 券30 鞠殷>

 

鞠殷

 

<국은鞠殷>은 낙랑태수 <국팽鞠彭>의 아들이다.

 

<국팽鞠彭>이 처음에 낙랑태수가 되었을 때

趙 <석호石虎>{後趙 재위 335-348}가 와서 공격하니

경내의 많은 사람들이 반기를 들고 趙 <석호石虎>에게 호응하였다.

 

<국팽鞠彭>이 장사 수백 명을 선발하여 棘城{今 廊坊市 인근}을 굳게 지키니

성이 함락되지 않게 되었다.

 

趙兵이 퇴각한 뒤에 포상이 내려졌다.

 

<국은鞠殷>이 <모용준>{前燕 재위 348-360)에게 벼슬하여 상서좌승이 되었는데

태원왕 <각恪>이 廣固城을 이기자 <국은>을 동래태수로 옮겼다.

 

<국팽>이 이때 大長秋로 있었는데 편지로써 <국은>을 경계하기를

 

"<왕미王彌> <조의曺疑>가 반드시 자손이 있을 것이니

너는 그들을 잘 불러서 무마하고 옛 원한을 찾아서 혼란의 근원을 키우지 말라"

라고 하였다.

 

<국은>이 수소문한 끝에 <왕미>의 조카 <왕립王立>과

<조의>의 손자 <조엄曺嚴>을 中山에서 찾아내어

그들과 서로 만나기를 요청하고 깊은 정분을 맺었다.

 

<국팽>은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車馬와 의복으로써 전해주니

東來군민이 크게 안정되었다.

 

後趙의 <석호>가 극성을 공격한 것은 348년의 일이다.

前燕의 <모용황>이 죽고 <모용준>이 즉위하자 <석호>가 극성을 공격한 것이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18년(345년)에 평양{今 요양}에서 환도성(今 조양)으로

천도한 지 3년이 지난 해이다.

백제는 근초고왕이 346년에 즉위하여

371년에 고구려 평양(今 요양)을 공격하고 고국원왕이 이 전쟁에서 전사한다. 

 

 

 

十六國春秋는 北魏의 저명한 사학자 <최홍崔鴻(478-525>이

東晉 16국시대(304-439)의 역사를 기록한 紀傳體 史書이다.

 

「史記」. 「漢書」.「後漢書」.「三國志」가

주로 漢族 본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과 달리

본서는 북방과 서북방 민족의 역사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극성은 낙랑군과 바로 이웃하여 있었거나

아니면 낙랑군과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 상곡군 낙랑 (上谷郡 樂浪)

 

上谷郡

開皇 元年(581년)에 易州를 설치했다.

관하에 6개 縣을 관할했다.

가구수는 38,700가구이다.

 

易縣

開皇 초기에 黎郡을 설치했다가 얼마 뒤에 폐지하였다.

開皇 16년(596년)에 縣을 설치하였고

大業(수 양제 연호, 605-616) 초기에 上谷郡을 설치하였다.

옛날에는 故安縣이 있었는데 後齊시기에 폐지하였다.

박우산(駮牛山). 오회령(五廽嶺)이 있고 易水. 除水가 있다.

 

래수현(淶水縣)

옛날에는 주현(逎縣)이라고 하였는데 後周시기에 폐지하였다.

開皇 원년에 范陽으로써 주현(逎縣)을 삼고 다시 이곳에다 范陽을 설치하였다.

6년에 固安이라고 고쳤다가 8년에 폐기하였다.

10년에 또 永陽을 설치하고 18년에 래수(淶水)로 개정했다.

 

주현(逎縣)

옛날에는 范陽이 이곳에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小范陽이라 불렀다.

開皇 초기에 주현(逎縣)으로 고쳤다.

 

遂城縣

옛날에는 武遂라고 하였다.

後魏 시기에 南營州. 淮營州를 설치하고 5郡 10都를 설치하여 建德郡에 소속시켰다.

襄平. 新昌을 요동군에 소속시키고, 永樂은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富平. 帶方. 永安은 營口郡에 소속시켰다.

後齊 시기에는 오직 黎 1郡만 남겨 永樂. 新昌 2縣을 거느리도록 하고

나머지는 감소시켰다.

開皇 원년에 州가 옮겨오고 3년에 郡을 폐지하였다.

18년에 遂城으로 고쳤다.

龍山이 있다.

 

永樂縣

옛날에는 北平이라 하였는데 後周시기에 이름을 고쳤다.

浪山이 있다.

 

飛狐縣

後周시기에 縣을 설치하여 廣昌이라고 하였는데

仁壽(수 문제 楊堅의 연호, 601-604)초기에 고쳤다.

栗山이 있고 巨馬河가 있다.

<隋書 券30 地理中>

 

隋나라 때의 상곡군 수성현은 漢나라 시기의 낙랑군 수성현이다. 

 

북위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가 북방을 통일하던 과정

(439년 북위의 북방통일)에서 연화(延和) 원년(432年), 장수대제 19년에 

조선의 백성들을 비여(肥如)로 옮겨 살게 하고 그곳에 조선현을 설치했다.

이후 한나라 시기의 낙랑군 수성현(今 보정시 인근} 자리에 

隋나라 때 상곡군 수성현을 설치하게 된다.

 

 

 

9. 요서 낙랑 (遙西 樂浪)

 

조선은 周나라가 箕子를 봉한 나라이다.

 

옛적에 武王이 箕子를 석방하니

箕子가 차마 周나라의 곡식을 먹지 못하고 달아나 조선으로 갔다.

 

武王이 그 소식을 듣고 조선으로써 봉하였다.

 

太傅 箕子가 예의와 田蠶으로써 가르치고 8조의 가르침을 베푸니

門戶를 걸어 잠그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그 뒤 40여대를 지나 전국시기에 이르러 조선후도 또한 참람되게 王이라 칭하였다.

 

燕나라의 전성가로부터 시작해서 燕에 소속되었으며

관리를 배치하기 위하여 鄣塞를 쌓았다.

 

그 뒤에 燕王 盧綰이 반기를 들고 흉노로 들어가니

燕人 衛滿이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蠻夷服을 입고

동쪽으로 도망쳐 長城을 나가 貝水를 건너

조선왕 準을 공격하고 秦의 옛 空地 上.下障에 거주하였다.

 

점차 眞番 朝鮮 諸夷 및 옛 燕과 齊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었으며

王儉 (注, 지명이다. 貝水의 동쪽에 있었다.)에 도읍하였다.

 

그때가 마침 孝惠 高后시기로서 천하가 안정된 터라

요동태수가 위만에게 外臣이 되어 塞外의 蠻夷들을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위만이 협력으로써 그 부근의 小邑들을 침략할 수 있었고

진번과 임둔이 다 와서 복속되어 지방이 수천리나 되었다.

 

아들에게 전하였고 손자 右渠에 이르러

漢에서 망명해온 사람들을 유입시킨 것이 꽤나 많았다.

 

武帝 元封 2년에 樓船 장군 楊僕을 보내 齊에서 출발하여 발해를 향해 가도록 했는데

병력은 5만 명 이었다.

 

좌장군 <순체荀彘>는 요동으로 출동하였다.

 

얼마 후에 조선인이 우거를 살해하고 와서 항복하니 드디어 그 땅을 평정하여

眞番. 臨屯. 樂浪. 玄兎 4郡을 설치했는데 지금은 모두 東夷의 땅이 되었다.

昭帝 시기에 임둔. 진번을 파하여 樂浪. 玄兎에 병합시키니 이로서 內屬되었다. 

<太平寰宇記 券172 下 朝鮮>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는 宋나라 때 <樂史(930-1007)>가 편찬한 지리총서로서

총 200권이다.

 

송 태종 태평흥국 연간(976-983)에 편찬된 본서는

현존하는 지리총서 가운데 비교적 시기가 빠르고 완전한 책으로 평가된다.

 

唐과 五代 十國史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樂史>가 태평환우기를 편찬할 때 한사군 지역이

"지금은 모두 東夷의 땅이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 한사군 땅을 차지한 東夷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 당시에 거란족이 세운 遙나라가 내몽고 남쪽 오늘의 적봉시 寧城에 수도를 두고

북경시를 위시한 하북성 중북부 일대, 산서성 일부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한사군 지역이 지금은 모두 東夷의 땅으로 되었다는 것은

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남방으로 밀려나 정부를 수립하고

동북지역은 모두 遙에게 빼앗겨 東夷 정권이 들어선 사실을 가라킨 것이다.

 

이 기록은 한사군의 낙랑이 대동강 일대에 설치되지 않고 요서에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10. 요동 낙랑 (遙東 樂浪)

 

初樂浪人王調 據郡不服 樂浪郡 故朝鮮國也 在遼東 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

郡吏殺調降 遣前將軍李通 率二將軍 與公孫述將 戰於西城破之

西城縣 屬漢中 今金州縣也

<後漢書 光武帝紀 第1 下>

 

...처음에 낙랑사람 <왕조王調>가 군에 의거하여 복종하지 않았다.

(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가을에 낙랑태수 <왕준王遵>을 파견하여 공격하니

군의 아전이 <왕조王調>를 죽이고 항복했다.

 

전장군 <이통李通>을 파견하여 두 장군을 인솔하고

<공손술公孫述>의 장수와 서성에서 싸워 격파하였다.

(서성현은 한중에 속한다. 지금의 금주현이다.)

 

後漢書는 劉宋 시기의 역사가 <范曄(398-445)>이

東漢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 역사서로 24사의 하나이다.

 

光武帝 <劉秀(BC6-57)>가 재위하던 기간은

漢武帝가 설치한 낙랑군이 그대로 존속한 시기이다.

 

그런데 이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요동에 있다."라고

후한서의 주석은 설명하고 있다.

 

더구나 이 때의 요동은 지금의 潮白河 以東을 말한다.

 

 

 

....及憲爲車騎將軍 辟駰爲椽 憲府貴重 椽屬三十人 皆故刺史二千石

唯駰以處士年少 擢在其間 憲擅權驕恣 駰數諫之 及出擊匈奴 道路愈多不法

駰爲主簿 前後秦記數十 指切長短 憲不能容 梢疏之 因察駰高第 出爲長岑長

長岑縣屬樂浪郡 其地在遼東 駰自以 逺去不得意 遂不之官而歸 永元四年 卒於家

<後漢書 券82 崔駰列傳>

 

<두헌竇憲(?-92)>이 거기장군이 됨에 이르러서

<최인崔駰>을 불러 연(椽)으로 삼았다.

 

<두헌>의 官府가 귀중하여 椽屬 30인이다.

 

옛 자사 2천석이었다.

 

오직 <최인>이 나이 젊은 처사로써 발탁되어 그 중간에 끼여 있었다.

 

<두헌>이 권력을 남용하고 교만 방자하니 <최인>이 자꾸 간언을 올렸다.

 

흉노를 출격함에 이르러 도로에서 더욱 불법을 저지르는 일이 많아지자

<최인>이 主簿가 되어 전후에 걸쳐 사건을 기록해 上奏하기를 수십 차례하여

장단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두헌>이 용납하지 못하고 조금 소원하게 대했다.

 

이윽고 <최인>이 높은 등급으로 급제한 출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장잠(長岑)의 縣令으로 내보냈다.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하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최인>이 스스로 멀리 떠나가 뜻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해서

드디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돌아갔다.

 

永元 4년(92년)에 집에서 서거했다.

 

 

 

11. 청주 낙랑 (靑州 樂浪)

 

 

古靑州

 

「禹貢」에 말하기를 "발해와 태산 사이가 靑州이다."

 

<孔安國(BC156-BC74)>은 말하기를

 

"동북쪽으로 바다를 의거하고 서남쪽으로는 태산에 이른다.

이것은 靑州의 경계가 동쪽으로 바다를 뛰어넘은 것이다.

 

그 경계는 대체적으로 태산으로부터 동쪽으로 密州를 지나고

동북쪽으로 海曲. 萊州를 경유하여 바다를 뛰어넘어

요동. 낙랑. 三韓의 땅을 분할하고 서쪽으로는 요수에 이른다.

 

嵎夷 지역의 물길이 잘 다스려진 이후에

유수(濰水)와 치수(淄水)의 물길도 잘 소통되었다.

 

嵎夷는 지명이니 곧 역곡(晹谷)이 있는 곳이다.

 

略은 공력을 들임이 적은 것을 말한 것이다.

 

濰와 는 두 물의 명칭이니 다 옛 물길을 회복한 것이다.

 

유수(濰水)는 지금의 高密群 거현(莒縣) 유산(濰山)에서 발원한다.

 

치수(淄水)는 지금의 치천현(淄川縣)이다.

 

그곳의 토지는 백색의 沃土이고 해변의 광활한 지역은 모두가 염지이다(海瀕廣瀉)

 

 

빈(瀕)은 물가이다.

 

사(瀉)는 치함(齒醎)의 땅이다.

 

瀕의 음은 頻이고 또 다른 음은 賓이다. 瀉의 음은 昔이다.

 

 

"萊夷는 放牧을 한다"라고 하였다.

 

萊山의 夷는 땅이 畜牧에 적합하다.

 

지금의 東萊郡이다.

 

舜이 靑州를 분할하여 營州를 만들고 다 牧을 배치하였다.

 

 

<鄭玄>은 말하기를

"舜이 靑州로써 바다를 뛰어넘어 營州를 분할 배치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요동의 땅, 安東府는 마땅히 「禹貢」靑州의 지역이다.

 

周나라에서는 徐州로써 靑州에 합쳐서 그 땅이 더 커졌다.

 

周나라의 靑主는 서주(徐州). 연주(兖州) 2주의 분야를 겸하여 소유했다.

 

周禮職方氏」에는 말하기를, "正東을 靑州"라 한다.

 

 

그곳의 鎭山은 기산(沂山)이고 大澤은 孟猪이며

沂山은 지금의 琅瑘郡 沂水縣에 있다. 바로 水의 발원지이다.

 

孟猪는 澤의 명칭이다.지금 수양군(睢陽郡) 宋城縣에 있는 바로 孟猪이다.

 

「禹貢」에서는 荊山과 황하의 사이에 있는 豫州에 속한다.

 

「職方」과 山. 澤이 동일하지 않다.

 

河流는 淮水. 泗水이고 관개할 수 있는 냇물은 기수(沂水).술수(沭水)이다.

 

술수(沭水)는 東海郡 술양현(陽縣)에서 발원한다. 의 음은 述이다.

 

그곳의 특산물은 蒲柳와 海魚이고 백성들의 남여 비율은 二男二女이다.

 

그곳의 가축은 닭과 개가 적합하고 곡식은 벼와 보리가 적합하다"라고 하였다.

 

대개 그 지역이 少陽에 위치하여 그 색이 靑色이다.

 

그러므로 靑州라고 하였다.

 

 

天象에 있어서는 虛星과 危星은 곧 齊의 分野이다.

 

漢의 淄州. 東萊. 瑯瑘. 高密. 膠東. 齊南이 다 그 분야이다.

 

 

秦이 천하를 평정한 다음 郡을 설치 했는데 이곳은 齊郡,

 

지금의 北海. 齊南. 淄川. 東萊. 東牟 등 郡의 지역이 이곳이다.

 

瑯瑘의 동쪽지역, 지금의 高密郡 땅이다. 

 

 

秦나라가 혼란에 처하자 <項羽>가 천하를 분할하여 그 땅으로써 나라를 삼으니

膠東 <田市>로써 왕을 삼고 卽墨을 치소로 하였다.지금의 東萊 郡縣이다.

 

齊 <田都>로써 왕을 삼고 臨를 치소로 하였다. 지금 北海 郡縣이다.齊北이다.

 

<田安>으로써 왕을 삼고 博陽을 치소로 하였다. 이를 일러 三齊라고 하였다.

 

 

 

漢武帝가 13州를 설치하니 이곳은 역시 靑州가 되었다.

 

군과 국 6개를 거느렸다.

 

後漢시대에는 그대로 따랐고

군과 국 5개를 거느리고 임치를 치소로 하니 지금의 북해 군현이 이곳이다.

 

魏晉시대에도 역시 그대로 따랐다.

군과 국 6개를 거느렸다.

 

晉나라에서는 또 平州를 설치했다.

군과 국 5개를 거느렸고 창려를 치소로 하였으니 지금의 안동부이다.

 

懷帝 말년에는 <石勒>에게 함락되었다.

 

<모용황>과 <모용각>이 <염민冉閔(?-352)>을 멸망시키고 청주를 차지했다.

 

符氏에 이르러 前燕을 평정시키고 다시 그 땅을 소유하였다가

符氏가 패망한 후엔 刺史 <符郞>이 州로써 晉에 항복하였다.

 

晉은 靑州로써 幽州를 삼았다.

<피려혼辟閭渾>으로써 刺使 삼고 廣固를 鎭으로 하였다.

 

晉 安帝시기에 平州는 또 <모용수>에게 함락되었고

靑州는 또 <모용덕>의 차지한 바 되어 다시 靑州로 고쳤다.

<모용초>는 靑州를 東萊로 옮겼다.

 

뒤에 <劉裕>에게 빼았겼고 다시 靑州를 설치했다.

당시에 <羊穆之>로써 刺史를 삼았고 廣固를 진으로 하였다.

 

平州는 <모용수> 이후로부터 또 <풍발>에게 함락되었다가

곧 바로 後魏의 소유가 되었고

靑州는 宋나라에서 분할하여 靑州. 冀州 2州로 삼았다가

靑州는 郡을 아홉 개를 거느리고 臨를 치소로 하였고

는 郡을 아홉개를 거느리고 歷城을 치소로 하였다. 지금의 齊南 郡縣이다.

 

뒤에는 後魏에 편입되었다.

 

그 이후에 분할된 것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다.

 

大唐에서는 15부를 설치하였는데 이 지역은 河南道 北海.齊南. 川. 東萊. 高密과

河北道 지금의 安東府가 되었다.

<通典 券180 州郡 古靑州>

 

 

 

通典은 唐나라 때 <杜佑(735-812)>가 편찬한 책으로 典章制度를 전문으로 다룬

중국 최초의 史籍이다.

 

通典에서는 靑州 안에 遼東. 樂浪. 三韓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서쪽 경계를 遼水라고 말하였다.

 

이는 遼東. 樂浪. 三韓이 모두 발해 유역에 존재했다는 사실과 아울러 고대의 遼水가

오늘의 요령성 요하가 아니라 하북성 동쪽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다시말해 오늘날의 산동성 북쪽에 遙東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通典은

秦의 요동과 晉의 창려, 唐의 안동도호부를 동일지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安東府

 

동쪽으로 越喜部落까지 2,500리이고 남쪽으로 柳城郡 경계까지 90리이고

서쪽으로 거란 경계까지 80리이고 북쪽으로 발해까지 1,950리이고

동남쪽으로...까지...리이고 서남쪽으로 ...까지...리이고

서북쪽으로 거란 衙帳까지 1,000리이고 동북쪽으로 거란 경계까지 80리이고

西京까지는 5,320리이고 東京까지는 4,440리이다.

 

戶는....이고 인구는....이다.

 

安東大都護府는 舜이 靑州를 분할하여 營州를 만들었고 牧을 배치하였으니

마땅히 遼水의 동쪽이 이곳이다.

 

序篇에서 이미 상세히 주석을 달았다.

 

춘추시대 및 전국시대에는 아울러 燕에 소속되었고

秦나라와 前漢. 後漢시대에는 요동군이라 하였다.

 

동쪽으로는 낙랑과 통하였다.

 

낙랑은 본래 조선국인데 한무제 원봉 3년에 조선인이 그 왕의 목을 베어 항복하였다.

 

그 땅으로써 낙랑. 현토 등 군을 삼았다. 뒤에 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요수의 동쪽에 있었다.

 

晉나라시기에는 그대로 따랐으며 겸하여 平州를 설치하였다.

 

郡과 國 5개를 거느렸고 여기에 치소를 두었다.

 

후한말로부터 <공손도>가 평주목이라 자칭했으며

그의 아들 康, 康의 아들 文懿에 이르기까지 아울러 요동을 제멋대로 점거하였다.

 

東夷九種이 다 이들에게 복종하여 섬겼다.

 

魏나라시대에는 동이교위를 배치하여 양평에 거주시켰고

요동. 창려. 현토. 대방. 낙랑 5군을 분할하여 平州로 삼았다.

 

뒤에 다시 幽州에 병합하였다.

 

文懿가 멸망한 뒤에는 護東夷校尉를 두어 양평에 거주하게 했다.

 

晉나라 咸寧(晉 武帝의 연호) 2년(276년)에는 창려. 요동. 현토. 대방. 낙랑. 등

郡 .國 5개로 분할하여 平州를 설치하였고 <모용외>로써 刺史를 삼았다.

 

마침 水嘉之亂이 일어나자 백성들에 의해 추대한 바가 되었다.

 

그 손자 <모용준>에 이르러 도읍을 薊로 옮겼고

그 뒤에 <모용수>의 아들 <모용보>가 다시 和龍으로 천도하였다.

 

後魏시대에 고구려가 그 지역에 도읍하였다.

 

大唐 總章(당 고종 연호) 원년(688년)에 <李勣>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176개 성을 얻어 그 지역을 都督府 9. 州 42. 縣 100개로 분할하였다.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통치하고

그 지역의 지도자들을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았다.

 

上元 2년(676년)에 遙東故城으로 옮겼고 儀鳳 2년(677년)에 또 新城으로 옮겼으며

聖歷(武后 연호)원년(698년)에 안동도호부로 이름을 고쳤고

神龍(무측천과 당 중종 연호) 원년(705년)에 平州로 옮겼고

天寶 2년(742년)에 또 遼西故郡城으로 옮겼다가 至德(756-758) 이후에 페지되었다.

 

屬縻州 14개를 거느렸다.

<通典 券180 州郡 古靑州>

 

 

 

秦.漢시대의 요동군, 晉니리 시기의 平州, 後魏 시기의 고구려 평양성,

唐나라 때 설치한 안동도호부는 동일한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다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그 명칭 상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동도호부와 낙랑. 대방등 郡이 遼水의 동쪽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남쪽으로 유성군 경계까지가 90리이고 서쪽으로 거란 경계까지가 80리이다"

라는 기록은 요수가 하북성에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12. 연동 낙랑 (燕東 樂浪)

 

燕나라 땅은 尾箕의 분야이다.

 

召公을 燕에 봉한 뒤 36世에 6國과 함께 王을 자칭하였다.

 

동쪽에는 漁陽. 우북평. 요서. 요동이 있고 서쪽에는 上谷. 代郡. 雁門이 있고

남쪽에는 涿郡의 易縣. 容城. 范陽이 있고

북쪽에는 新成. 故安. 涿縣. 良鄕. 新昌 및 발해의 安次가 있고

樂浪. 玄兎도 또한 마땅히 여기에 속한다.

<史記正義 論例諡法解列國分野>

 

 

史記正義는 당나라 때 역사학자 <張守節>이 736년에 지은 책으로 모두 30권이다.

 

淸나라 떼의 고증학자 <胡渭>는 「禹貢 장전(長笺)」에서

"어양의 고성은 지금의 밀운현에 있고 우북평의 고성은 지금의 계주에 있고

요서의 고성은 지금의 노룡현에 있다."라고 하였다.

 

<호위>가 말하는 밀운현은 지금 북경시내 동쪽에 있다.

계현은 북경시 외곽 동쪽에,노룡현은 하북성 동쪽에 있는데

만리장성을 벗어나지 않은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전국시대 燕나라의 동쪽이 지금의 만리장성을 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史記正義는 史記索隱, 史記集解와 함께 史記의 三大 注釋書 중의 하나이다.

 

<호위>는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다 청나라 당시의 해당 지역과 대비하여 설명하면서도

유독 요동에 대해서만은 설명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요동 동쪽에 조선이 있으므로 요동의 위치를 밝히는 일은

곧 조선의 위치를 밝히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에 설명하기를 꺼렸던 것이다.

 

「史記」券7에는 "燕王 <韓廣>을 옮겨 요동왕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나오고

「集解」에는 <徐康>의 말을 인용해 <한광>이 "無終에 도읍했다"라고 하였다.

 

 

당시 燕나라의 영토는 여기 거명된 지명들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오늘날 하북성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동서로는 길고 남북으로는 짧은

마치 누에와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며 전체 규모는 몹시 작았다.

 

오늘의 하북성을 삼등분하여 북부는 東胡가, 중부는 燕나라가

남부는 趙나라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史記正義를 지은 <張守節>

"낙랑. 현토도 또한 연나라 땅에 속했다."라고 끝에서 말하고 있다.

 

전국시대의 조선 땅도 燕나라에 소속되었다는 표현이다.

 

본래는 燕나라 땅이 아니지만 燕나라에 포함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낙랑. 현토가 위치한 곳은 어디인가?

 

춘추전국 시대 燕國의 동북방인 발해만 부근의

당산시. 천진시. 보정시 일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참고> 星宿의 分野 

 

춘추전국시대 天上의 星宿를 地上의 州國에 분배한 관념

 

    宿   列國    各州
   角亢
   氏方心
   尾箕
   斗牛
   女
   虛危
   室壁
   奎婁
   胃昻畢
   觜參
   井鬼
   柳星張
   翼軫
   
    宋
    燕
    越
    嗚
    齊
    衛
    魯
    魏
    趙
    秦
    周
    楚
   袞州
   豫州
   幽州
   江湖
   楊州
   靑州
   幷州
   徐州
   冀州
   益州
   雍州
   三河
   荊州

 

 

 

13. 귀주 낙랑 (貴州 樂浪)

 

 

東京 四面諸州

 

 

貴州

 

옛 城이 사방으로 20리인데 曺魏 시기에 <공손강>이 웅거하고 있던 城이다.

 

漢나라 때 樂浪 등의 땅이다.

 

동.남.북은 다 生女眞지역이고 서쪽으로 심주(瀋州)까지는 80리이다.

<武經總要 前集券16下 융적구지(戎狄舊地)>

 

 

 

淸나라 당시 승덕현의 치소가 요나라 때의 심주(瀋州)이다.

 

貴州는 지금의 승덕시 부근에서 동쪽으로 80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이 貴州를 魏晉 시대에는 <공손강>이 차지하고 있었고

漢나라 때는 낙랑군 지역이었다.

 

청나라때 편찬한 盛京疆域考에 '瀋州 今承德縣治'라 하여

귀주(貴州)와 심주(瀋州)가 지금의 승덕시 인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북성 승덕시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遙나라의 귀주(貴州)는

魏晋시대에는 공손강이 차지하고 漢나라때는 낙랑군등이라 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이 이 지역임을 말하고 있다.

 

 

<참고>

 

生女眞 : 중국 동북 지역에 거주하던 고대 민족의 명칭이다.

            926년 遙가 발해를 멸망시키자 발해인을 따라 남쪽으로 옮겨

            遙에 편입된 이들을 熟女眞이라 하고

            옛땅에 그대로 머물러 살던 이들을 生女眞이라 지칭했다

 

 

 

 

14. 단궁 낙랑 (檀弓 樂浪)

 

기자조선 사람들은 성격이 신중하고 기욕(嗜慾)이 적으며 염치가 있다.

 

남녀는 옷은 다 곡령(曲領){목부위가 둥근 옷}을 착용하고 남자는 銀花를 매다는데

넓이가 몇 치쯤 되며 이것으로 장식을 삼는다.

 

풍속이 산천(山川)을 중요시 한다.

 

산천은 각각 부분이 있어 서로 간섭할 수가 없다.

 

同姓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는다.

 

忌謂하는 것들이 많고 질병이 나거나 사망하게 되면 곧바로 예전에 살던 집을 버린다.

 

삼을 심고 누에를 키우며 금포(錦布)를 만들 줄 안다.

 

또 자못 기후와 星宿에 대한 이해가 있어 그 해의 풍년 들고 흉년들것을 안다.

 

珠玉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또 호랑이를 제사 지내 神으로 모신다.

 

그 읍락에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서로 처벌하여 소나 말 같은 짐승을 가지고

배상하도록 하는데 이를 責禍라고 한다. 그래서 도둑이 적다.

 

모(矛)의 길이가 3丈이나 되어 혹은 몇 사람이 함께 그것을 들기도 한다.

 

步戰에 능하고 樂浪檀弓이 그 지역에서 나온다.

 

또 문표(文豹)가 많고 과하마(果下馬)가 있는데 높이가 3尺쯤 된다.

 

그 바다에서는 반어피(班魚皮)가 나온다.

 

한나라 때는 두려워서 그것을 바쳤다.

<太平寰宇記 券172 下 朝鮮 >

 

 

이 자료는 기자조선 사람들의 성격에 대해

"신중하고 욕심이 적으며 염치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민족성은 어느 민족보다 위대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재물보다는 도덕과 진리를 귀하게 여겼고

그러한 정신이 주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 민족의 성격으로 나타난 것이다.

 

"호랑이를 제사지내 신으로 모셨다."는 것은

 

호랑이를 토템으로 신앙했던 濊國의 민족임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의 단궁은 낙랑지역에서만 생산되었다.

 

낙랑은 단궁의 생산지이기 때문에 낙랑이 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활을 만들었던 역사와 전통이 그 지역에 전승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동강 유역에서

박달나무가 활을 만들 만큼 많이 자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일이 없고

또 대동강 유역에서 단궁이 만들어졌다는 역사 기록을 본 일도 없다.

 

낙랑단궁에 관한 기록은 낙랑에 관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國祖 檀君은 太白山 檀木 아래에 내려왔다고 기록되어 있어

檀弓과 檀木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明一通志」에는 "白檀縣의 폐현이 密雲縣에 있는데 남쪽에는 白檀山이 있다."

(白檀廢縣 在密雲 南有白檀山)라는 기록이 나온다.

 

옛 白檀縣의 남쪽 지금의 북경시 密雲縣 남쪽에 백단산이 있다.

 

여기 보이는 白檀山의 白檀은 우리말 '밝달'의 한자표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 白檀山은 산의 남쪽에 온통 박달나무로 가득하다.

 

날씨가 맑아 햇볕이 좋은 날은 온 산의 밝달나무들이 햇볕을 받아 광채를 발산하여

독특한 경관을 형성한다.

 

이 풍경이 장관을 이루기 때문에 "白檀晴光"은 密雲八景

즉 밀운현의 여덟 곳 풍경명승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밀운현에는 백두산 천지와 같은 천지가 있고,

또 이 지역은 바로 옛 朝鮮河로 알려진 현재의 潮河의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이 하북성 白檀山이 바로 밝달나무로 만든 활이 생산되던 樂浪檀弓의 산지가 아닐까?

 

청나라 사람 <납란성덕纳蘭性德>의 詩訶全集 下에는 白檀山을 두고 지은

칠언절구가 실려 있다.

 

白檀山下水聲秋  地踞潮河最上流

日暮行人尋堠館  凉砧一片古檀州

 

이 시에는 白檀山이 潮河의 상류에 위치하고

또 이 지역은 옛적에는 檀州로 불리던 지역이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朝鮮河의 상류 옛 檀州에 위치한 白檀山 즉 우리말 밝달산은 단군조선,

그리고 그 조선의 명궁인 樂浪檀弓과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중국 사서에 나타난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심백강 역사학박사 / 민족문화연구원장 

 

 

1. 머리말  최근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서  우리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며 일찍이 유례가 없는 역사침략을 강행하고 있다.

 

고대 중국인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와 다른 한국사라고 史料로써 증명한 것을 현대 중국인이 고구려사는 중국사라고 억지를 부리며 역사침략을 시도하는 의도가 무엇일까?
 
우리는 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장황하게 설명하기 앞서 먼저 중국이 왜 오늘 이 시점에서 동북공정을 하게 되었는지 그 원인과 배경부터 규명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 원인과 배경이 정확히 규명될 때만이 거기에 대한 정확한 대안의 수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 강단사학계는 한국 고대사연구에서 고조선을 부정해 왔고 고구려사 연구도 대륙에 있던 고구려를 소홀히 한 채 한반도를 중심으로 진행해 왔다. 즉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사 침탈을 강행하기 전에 우리자신이 먼저 우리 역사의 단절과 축소를 자행 했던 것이다. 
 
우리 강단사학 일각의 자주성이 결여된 이런 연구결과가 오늘 중국의 동북공정을 초래하는데 직간접의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서둘러 단절된 고조선사를 복원하고 한반도 중심의 삼국사연구를 대륙 중심으로 탈바꿈 하는 역사인식, 역사연구 방법론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 강단사학은 이런 시대적 요구를 외면한채 여전히 타성에 젖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최근 고구려연구재단에서 출판된 『고조선,단군,부여』라는 저술을 통해서 볼 때 종래 고조선, 단군, 부여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서 한걸음도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를 올바로 정립하여 중국의 동북공정에 제대로 대응 하라는 국민적 열망을 안고 출범한 단체가 국민의 세금으로 이런 연구결과물을 내놓은데 대하여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솔직히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이등박문은 우리입장에서는 역적이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는 영웅이다.

 

그래서 그의 동상을 일본 중의원 대청마루에 세워두고 민족의 영웅으로서 기린다.

 

마찬가지로 동북공정은 우리 입장에서 보면 역사침략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중국 중심의 역사를 새로 쓰는 작업이다.
 
이제 우리도 중국 중심의 사대사관, 일본 중심의 식민사관을 버리고 한국 중심의 자주사관의 바탕 위에서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새로 써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동북공정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우리 강단사학, 실증사학에 내재된 단절사관이고 축소사관이다. 
 
역사학의 혁명 없이는 동북공정을 뛰어 넘을 묘안은 없다.

 

新史學, 新史觀으로 역사에 새 바람을 일으키는 것만이 역사 지키기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유일한 대안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일시적으로 사료를 왜곡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자기 조상들이 써놓은 수천년 전해 내려온 원사료를 말살할 수는 없을 것이며 원사료가 파괴 되지 않고 존재하는 한 왜곡된 역사는 언제든지 시정이 가능한 것이다.


본 연구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을 민족적,영토적, 문화적 각 방면에서

주로 중국의 사서들을 중심으로 고찰함으로써 고구려사가 중국사가 아니고

고조선을 계승한 한국사라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2. 종족상에서 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일반적으로 民族과 種族은 본질상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본래 하나의 종족이 나누어져서 여러개 종족으로 된다.

 

예컨대 부여족이 백제족과 고구려족으로 분파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또 하나의 민족이 그 안에 무수한 종족을 포함하기도 한다.

 

오늘날 중국민족 안에 56개 종족이 내포되어 있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종족이 혈통상의 관련성을 의미한다면 민족은 문화상의 동질성을 가리킨다고 말 할 수 있다.

 

즉 종족이라고 할 때는 생물상, 체질상의 명사인 것이고 민족이라고 하면 정치상, 문화상의 명사인 것이다.

 

그러면 고조선족과 고구려족은 종족상에서 상호 어떤 계승성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인들은 고조선족을 穢族, 고구려족을 貊族으로 인식하였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가.

 

『漢書』王莽傳에 보면 고구려를 다음과 같이 貊人으로 호칭하고 있다.

 

“先是莽發高句麗兵 當伐胡 不欲行 郡强迫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遼西 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句麗侯騶 嚴尤秦言 貊人犯法 不從騶起 正有?心 宜令州郡且尉安之……莽不尉安 穢貊遂反……於是貊人愈犯邊”
 
그리고 『後漢書』東夷列傳 고구려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句麗一名貊耳  有別種依小水爲居 因名小水貊 出好弓 所謂貊弓是也”.
 
우리는 이런 기록을 통해서 중국인들이 고구려인을 貊族으로 이해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陳壽의 『三國志』東夷傳 濊條에서는 箕子朝鮮과 衛滿朝鮮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고조선문제를 고조선조가 아닌 濊條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은 濊를 고조선과 동일시하고 濊族을 고조선족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면 穢族과 貊族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동일민족인가 다른 민족인가.

 

예족과 맥족은 기본적으로 東夷계열에 속하는 동일 민족이다.

 

예족이든 맥족이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東夷族에서 출발된 민족인 것이다.

 

그러면 굳이 예와 맥으로 구분하여 부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司馬遷 『史記』索隱과 『漢書』武帝紀에 모두 “東夷濊君”이라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濊族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가지 않고 주로 동방의 원거주지에 그대로 거주하던 夷族을 가리킨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貊族은 같은 東夷族이지만 나중에 동북방으로 이주해가서 살던 동이족으로서이들을 원래 동방에 거주하던 東夷와 구별하여 貊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본다.

 

엄격히 말하면 예와 맥은 명칭은 다르지만 뿌리가 같은 동일민족인 것이다.

 

따라서 史書상에서는 “예”와 “맥”을 분리해서 쓴 경우가 있지만 이 양자를 “濊貊”으로 합칭한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三國志』고구려조에는 東濊, 三韓條에는 韓濊가 보이고 광개토왕비문과 『北史』신라조에도 韓濊라는 기록이 있으며 『隋書』에는 遼濊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漢書』의 天文志에는 胡貊, 『後漢書』東夷列傳에는 大水貊, 小水貊 楊雄『百官箴』에는 東貊, 奚貊 『三國史記』에는 梁貊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穢는 東方夷의 통칭이고 貊은 東北夷의 통칭이며 그것을 다시 세분하면 거주지역에 따라서 그와 같이 구별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중국인들은 西周이래 자기들과 다른 異民族을 호칭할 때 통상 夷 또는 東夷라고 하였다. 
 
『서경』禹貢편에 鳥夷, 隅夷, 萊夷, 淮夷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夷族들은 西周 이전부터 토착민으로서 중국에 터전을 이루고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夷族들은 중국의 토착민족으로서 중국의 동방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중국의 전 지역에 걸쳐서 널리 분포되어 살았으며 여기서 四夷라는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고조선은 동이 계열에 속하는 여러 부족 들이 모여서 최초로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고조선민족은 중국의 동방, 동남방, 동북방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활동하던 동이계열의 부족들이 다양하게 포함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 고조선 국가 구성의 기본성분은 濊族이고 주요성분은 맥족이었다고 본다.

 

東北夷인 貊族은 결국 東夷인 濊族에서 분파된 것이라고 할 때 貊族은 혈통상에서 濊族을 계승한 것이 자명하다.

 

또 고구려는 고조선 멸망이후 고조선의 옛 터전에서 그 유민인 穢族과 貊族을 중심으로 건국했으므로 고구려는 민족상에서 고조선을 계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

 

 

3. 영토상에서 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고조선과 고구려가 영토상에서 어떤 계승성이 있는지 밝히기 위해서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가 과연 오늘의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우선 그것부터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山海經』18권 海內經에서는 고조선의 위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 名曰朝鮮”.

 

여기서 北海는 渤海를 가리킨다.

 

『산해경』해내경에서 고조선국의 위치로 설명된 “발해의 모통이”를 오늘 그 해당하는 지점을 찾아본다면 중국의 산동성, 하북성, 요녕성 그리고 한반도 일대가 여기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동해의 안쪽이라”고 말한 만큼 절강성, 강소성까지를 포함하는 보다 광범한 지역으로 비정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해의 안쪽 발해의 모통이에 고조선국이 있다”는 『山海經』海內經의 표현은 너무 추상적인 감이 없지 않다.
 
『산해경』12권 海內北經을 보면 거기에는 고조선의 위치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

 

 “조선은 列陽의 동쪽에 있다 바다의 북쪽이고 산의 남쪽이다. 列陽은 연나라에 속해 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산해경』해내북경에 말한 고조선의 위치는  오늘의 河北省 秦皇島市 盧龍縣 일대라고 필자는 추정한다. 
 
필자가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 “고조선이 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列陽은 燕에 속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宋代 四大史書 중의 하나인 『太平宇記』의 河北道 平州 盧龍縣條에 따르면 宋代의 平州가 禹貢 九州에서는 冀州, 周나라 때는 幽州지역이고

 

春秋시대에는 山戎孤竹, 白狄肥子國이며 전국 시대는 燕에 소속되었다가 秦始皇이 천하를 兼倂한 뒤 右北平 및 遼西 2郡 지역으로 되고 漢나라 때는 遼西郡의 肥如縣으로 唐나라 때 다시 平州로 변경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太平宇記』에 의하면 唐宋시대의 平州가 秦漢시대엔 右北平 遼西였고 전국시대에는 燕나라에 소속된 지역이었음을 의미한다.

 

즉 바꾸어 말하면 列陽은 전국시대 때 燕에 속해 있다가 秦漢시대에 右北平 遼西로 바귀고 唐宋시대엔 平州로 되었던 것인데 그 平州가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산해경』에 말한 “燕에 소속된 列陽의 동쪽에 있다”는 고조선이 바로 오늘의 하북성 동쪽 秦皇島市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단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고조선이 海北山南에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다가 발해를 가리킨다는 것은 긴말을 요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 말하는 山이 과연 어떤 산을 가리킨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발해를 중심으로 볼 때 산동성의 태산, 하북성의 갈석산, 요서의 의무려산, 요동의 개마대산 등 여러 명산 들이 발해부근에 포진 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여러 명산 들 중에서 고조선이 위치해 있었던 海北山南의 산은 과연 어떤 산일까.

 

필자는 그 산이 바로 碣石山이라고 비정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太平宇記』 河北道 盧龍縣條를 보면 “여기에 갈석산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갈석산은 盧龍縣 남쪽 23리에 있는데 발해 곁에 竭然히 우뚝 서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름을 갈석산이라 한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산해경』에 말하는 “海北山南”은 海北은 발해북쪽, 산남은 갈석산 남쪽을 의미하며 고조선은 발해 북쪽 갈석산 남쪽 즉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에 위치해 있었다고 보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오늘의 河北省 秦皇島市 盧龍縣 일대가 바로 고조선 지역임을 추단케 하는 보다 결정적인 근거는 『太平宇記』盧龍縣條의 다음 기록에서 찾아진다.

 

“朝鮮城 卽箕子受封之地 今有廢城”

 

箕子가 다스리던 고조선의 옛성이 宋나라 당시까지도 그 유적이 그대로 남아 보존되어 있었다는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산해경』해내북경에 말하는 고조선의 위치가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일대라는 확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箕子가 다스린 朝鮮城이 盧龍縣에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즉 발해와 갈석산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는 고조선의 수도가 위치해 있던 지역이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발해의 북쪽, 갈석산의 남쪽 연나라 열양의 동쪽 지역 즉 오늘의 하북성 요녕성 한반도의 광범한 지역에 걸쳐서 고조선의 영토가 위치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기자조선시대 발해, 갈석산을 중심으로 하북성 요녕성 등 중국 동북지방의 광대한 지역에 걸쳐 위치해 있었던 고조선은 후일 서방 2천여리의 땅을 연나라 장군 秦開에 의해 탈취 당함으로써 그 영역이 滿潘汗을 국경선으로 대폭 축소되게 된다.

 

고조선 영역의 중심지가 발해 갈석산에서 요동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위략』의 저자 어환(魚豢)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王 欲興兵逆擊燕 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不攻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爲界 朝鮮遂弱”.
 
그러면 고조선이 서쪽으로 2천여리의 땅을 연나라에게 빼앗기고

 

국경선이 滿潘汗으로 축소되게 된 시기가 구체적으로 언제쯤일까.

 

고조선을 침략한 연나라 장수 秦開는 燕昭王(기원전 311-279)때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원전 4세기 말 ~3세기 초에 고조선 영역의 대폭적인 축소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서쪽 영토가 축소된 이후의 국경선으로 된 滿潘汗을 압록강으로 보느냐 아니면 요하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오늘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滿潘汗 서쪽 즉 요동에서 북경 永平府까지 2천여리 땅이 본래는 고조선 땅이였다는 사실은 丁茶山도 『我邦疆域考』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였다.

 

“鏞按 今之永平府 古之北平郡也 且据魏略 潘汗以西二千餘里 在古爲箕氏之有 今自遼東而西行二千餘里 正得永平府境 一統志所言 眞有據也”.
 
고조선 영역이 기원전 3세기 이전까지는 오늘의 요녕성 및 하북성 동부를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였으나 기원전 3세기 초 서방 2천여리 땅을 연나라에게 빼앗기고 오늘의 요하 이동으로 영역이 축소 되면서 고조선은 국력이 크게 약화되게 되었는데그 후 연나라 사람 衛滿이 고조선에 망명해 왔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위만조선이다. 
 
그러면 위만조선은 오늘의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가 위만조선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소재를 밝히기 위해서는 『사기』조선열전에 보이는 다음 기사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衛滿?結蠻夷服 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 及故燕齊亡命者王之 都王險”.
 
사마천은 『사기』조선열전에서 위만이 동쪽으로 조선에 올 때 浿水를 건너 왔다고 썼다.

 

위만이 건너 온 이 패수가 어디 있었는지 그 소재가 파악되면 당시 고조선의 위치가 드러나게 된다.

 

이 패수에 대하여 여러 가지 異說이 있는데 대체로 1) 요동에 있었다. 2) 낙랑군에 있었다. 3) 한반도의 대동강이다. 4) 압록강이라는 네가지 설로 요약된다.
 
『사기』에 위만이 패수를 건너와서 “秦故空地上下障”에  거주했다고 했는데 진시황이 한반도의 압록강이나 대동강에 上下障을 설치한 일은 없다.

 

 

그리고 『사기』조선열전 索隱에 應劭가 “遼東有險瀆縣 朝鮮王舊都”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필자는 요동 패수설이 비교적 설득력이 있으며 따라서 위만조선은 요동에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위만조선은 결국 그 손자대에 이르러 망하고 만다.

 

漢武帝는 元封 2년에 천하의 사형수들을 끌어모아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그 이듬해 여름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樂浪, 臨屯, 玄兎, 眞番으로 쪼개어 漢4군으로 삼았다.
 
漢武帝가 고조선의 영토를 무력으로 침략한 뒤 그것을 넷으로 분할하여 漢四郡을 세웠지만 몇백년도 아니고 수천년을 두고 내려 온 고조선민족이 하루아침에 없어질리 만무했다. 일부 한족에 흡수 동화되기도 하는 것이 불가피한 현상 이었겠지만 대부분의 고조선 민족은 엄연히 그대로 잔존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穢貊을 비롯한 고조선 유민들은 곧바로 여러 나라를 세워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후한시대에 접어들자 끊임없이 상호 연대를 통해 漢族과 싸우며 고토회복운동을 전개해 나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가 바로 고구려였다는 사실이 다음의 사료에서 입증되고 있다.

 

『後漢書』권 5 安帝紀 “安帝元初 五年……夏六月 高句麗與穢貊寇玄?”, “建光元年 春正月 幽州刺使馮煥 率郡太守 討高句麗穢貊不克……夏四月 穢貊復與鮮卑寇遼東 遼東太守蔡諷追擊 戰歿 冬十二月 高句麗馬韓穢貊圍玄?”.
 
따라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단합한 고조선 유민들은 후한시대를 지나 위진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잃어버린 고조선영토를 거의 회복하다시피 하였다.

 

『周書』에 보이는 다음의 기록이 그것을 잘 뒷받침 한다고 하겠다.
 
『周書』49권 異域列傳 高麗 “高句麗者……治平壤城……其外有國內城及漢城 亦別都也 復有遼東玄?等數十城”.

 

 

고구려는 당시에 玄兎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漢의 四郡중 玄兎郡을 발판으로 삼은 고구려는 遼東지방에 있는 수십성을 차지하고 또 오늘의 한반도의 漢城과 平壤城까지를 확보함으로써 고조선시대의 영토를 거의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隋煬帝시대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아울러서 발해, 갈석산 일대까지도 그 영향권아래 둠으로서 고조선 전성기시대의 영토를 거의 다 차지했다는 사실을 다음의 기록은 역력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隋書』4권 煬帝紀 “八年春正月……下午下詔曰……高句麗小醜 昏迷不恭 崇聚渤碣之間 薦食遼穢之境”.
 

 

 周시대의 朝鮮 땅이 漢의 玄兎, 樂浪이고 隋의 고구려라는 다음의 두 기록은 고조선과 고구려가 시대의 차이를 두고 동일한 지역에 세워진 국가라는 즉 고조선 영토에서 고구려 영토로 계승된 영토상의 계승성을 요약해서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宋史』487권 外國傳

 

“高麗本曰高句麗 禹別九州 屬冀州之地 周爲箕子之國 漢之玄兎郡也 在遼東”.
 
『欽定盛京通志』권 23 歷代建置沿革表

 

 “蓋平, 復州, 寧海, 岫巖, 鳳凰城 則周之朝鮮 漢之玄?樂浪 隋之高句麗”. 
 

 

 

4. 문화상에서 본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성  고조선과 고구려의 문화상 동질성 내지는 계승성에 대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三國志』濊傳에서 “其耆老 自謂與句麗同種……言語法俗 大抵與句麗同”이라 한 것을 볼 때 고구려는 고조선과 동일한 민족으로서 언어와 풍속이 기본적으로 서로 같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구려의 문화가 고조선의 문화와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같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고조선은 犯禁8조를 통해서 볼 때 형법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백성들이 대문을 걸지 않고 생활하는 안정된 사회를 이룩했다.

 

다음의 기록에서 보면 고구려도 역시 국법을 매우 엄정하게 집행함으로서 도둑이 없는 사회를 이룩했음을 알 수 있다.

 

『隋書』東夷列傳 高麗條 “反逆者縛之於柱?而斬之 籍沒其家 盜則償十倍 用刑旣峻 罕有犯者” 『舊唐書』東夷列傳 高麗條“大體用法嚴峻 少有犯者 乃至路不拾遺”.
 
그리고 고조선에서는 남녀가 혼인하는데 있어 재물을 따지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도 혼인은 남녀의 서로 사랑 하는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혼인에 재물이 오가는 경우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혼인문화가 있었다.
 
그리고 『三國志』東夷傳 濊條에 따르면 濊族들은 항상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음주 가무하면서 즐겼는데 이를 舞天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에도 역시 이와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국중대회를 개최하는데 이름을 東盟이라 한다”는 기록이 그것을 잘 설명한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이러한 일련의 사료들을 통해서 검토해 볼 때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혼인문화, 제례문화, 놀이문화 등 문화 전반에 걸쳐서 동질성과 계승성이 농후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5. 맺는말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통상 세가지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 200년~300년 전도 아니고 4000년~5000년을 흘러온 과거 역사를 연구하자면그것을 뒷받침할 史料의 확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 손으로 기록한 고대사료가 많지 않고 주로 중국인의 손에 의해 기술된 사료에 의존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事大主義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근대 일제식민통치 35년을 거치면서 이때 식민통치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일제가 만들어 놓은 植民史觀의 잔재가아직도 불식되지 않고 남아 있어 그 장벽을 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지금 농경사회, 산업사회를 지나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다.

 

정보화 사회란 문화자본 지식기반 사회를 의미한다.

 

세계가 바야흐로 문화중심 역사전쟁시대로 접어든 지금 고대사 연구의 3대 난관을 극복하고 우리 역사의 眞相을 復元하는 것이야말로 국민적 국가적 시대적 당면과제가 아닐 수 없다. 
 
위에서 우리는 민족상으로나 영토상으로나 문화상으로나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가 명백하다는 사실을 중국의 여러 사료들을 통해서 확인하였다.

 

이 소 논문이 동북공정의 허상을 타파하고 우리역사의 진상을 복원하는데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낙랑사 왜곡

 

 

- 낙랑사 왜곡에 앞장선 <고조우顧祖禹(1631-1692)>

 

요서에 있던 기자조선과 낙랑군 조선현을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 오게 된 과장을 살펴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 애당초 그러한 터무니 없는 논리를 조작한 사람은 누구인가?

 

청나라 이전에는 중국인 중에 기자조선이나 낙랑군 조선현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못 박아서 말 한 사람이 없다.

 

그러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친 사람은

다름아닌 반청복명 운동에 앞장섰던 민족주의자 <고조우>이다.

 

<고조우>독사방여기라는 지리를 전문으로 다룬 저서를 펴냈는데

그는 이 책의 영평부 노룡현 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朝鮮城 在府北四十里 漢樂浪屬縣也 在今朝鮮境內

 

조선성은 영평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한나라의 낙랑군에 소속된 현이다.

지금의 조선국의 국경 안에 있다.

 

<고조우>는 하북성 영평부에서 북쪽으로 40리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선성을 설명하면서 "지금 조선국의 경내에 있다."라고 하였다.

 

<고조우>가 여기서 말한 '지금'이란 그가 살았던 청나라 시대를 가리키고

'조선'이란 이씨조선을 가리킨다.

 

태평환우기명일통지는 노룡현이 "가자가 봉함을 받은 땅이다"라고 하였다.

 

하북성 영평부와 이씨조선과는 수천 리나 떨어져 있다.

 

가위 논리의 비약을 넘어 모순의 극치를 보여준

<고조우>의 독사방여기요의 영평부 노룡현 條는 어불성설이요 언어도단이다.

 

<고조우>는 江蘇省 無錫 사람으로 명나라 崇禎 4년(1631)에 태어나

청나라 康熙 31년(1692)에 서거했는데 反淸復明의 의지가 매우 강한 학자였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지금 조선의 국경 안에 있다"라는 내용을

대청일통지독사방여기요덧붙여서

요서에 있던 기자조선과 낙랑군 조선현을

대동강 유역으로 못 박아 옮겨다 놓은 것이다.

 

 

- 낙랑사 왜곡의 원흉 <고염무顧炎武(1613-1682)>

 

고조선사. 낙랑사 왜곡에 앞장선 장본인이 <고조우>라면

그러한 단초를 만들어 준 원흉이 일지록의 저자 <고염무>이다.

 

<고염무>는 명말청초에 태어나 반청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는 일지록 32권을 저술했는데 논지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一通志 乃曰 朝鮮城 在永平府境內 箕子受封之地 則是箕子封於今地永平矣

當日儒臣 今梢知今古者爲之 何至於此 爲之太息

 

일통지에 말하기를

'조선성은 영평부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봉함을 받은 곳'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기자가 오늘날의 영평부에서 봉함을 받았다는 것이 된다.

 

그 당시 유신들 가운데 조금이나마 고금의 역사를 아는 이로 하여금

기록을 담당하도록 하였다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렀겠는가.

크게 한숨지을 따름이다.

 

 

<고염무>가 여기서 말한 일통지

명나라 때 국가에서 편찬한 명일통지를 가리킨다.

 

아마도 <고염무>가 이 글을 쓸 당시만 해도 그의 후배 <고조우>가

"영평부의 조선성은 지금 조선국의 국경 안에 있다"라고 말한 내용이 담긴

대청일통지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명일통지의 기록을 들어 그것은 잘 못 된 것이며

역사지식이 부족한 유신들로 하여금

명일통지 편찬 작업을 담당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그런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라고 개탄한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논지의 핵심을 요약해 보면 대략 이런 것이다.

 

옛적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은나라가 쇠망하자 기자가 은나라를 떠나 조선으로 갔다.

 

산해경에 조선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그 주석에서 지금의 낙랑군에 소속된 현이라고 하였다.

 

산해경의 주석에서 말한 낙랑군 조선현은 지금의 고려국 경내에 있었다.

 

모용씨가 營州의 경내에 조선현을 설치하고

북위가 또 平州의 경내에 조선현을 설치했는데

이는 단지 그 이름만 취한 것일 뿐 한나라의 낙랑군 조선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晉書와 魏書에서 조선현 관련 기록을 살펴 보면 <고염무>의 주장은

전혀 사실무근이며 터무니없는 엉터리 주장이라는 것이 금방 들통이 난다.

 

晉書 平州 낙랑군 조선현 조항에는 平州의 낙랑군 조선현이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땅"임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晉書는 唐나라의 <방현령>. <저수량>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중국 최초의 官撰 正史이다.

 

조선현은 서한. 후한 시대를 지나서 晉나라시대에 이르기까지

平州 낙랑군에 계속 소속되어 있었다.

 

다만 北齊시대에 이르러 잠시 동안 폐지되었던 平州의 조선현을

北魏 시기에 모용선비가 다시 되살려 북평군에 소속시켰던 것이다.

 

「晉書지리지, 「魏書 지형지 당나라 <杜佑>「通典에 따르면

옛 고죽국 지역, 오늘날의 하북성 진황도시, 천안시 일대에

秦漢 시기에 요서군을 설치했고

나라 때는 여기에 平州를 설치하여 창려군. 낙랑군. 대방군 등을 관할하다가

北魏 시대에 이르러 다시 平州를 분할하여 營州를 설치하고

거기서 낙랑군. 요동군 등을 관할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염무>와 같은 한 시대를 대표했던 대학자가

왜 이와같은 터무니 없는 엉터리 주장을 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압록강 이남으로 위축된 이씨조선국을 얕잡아보고 웅대한 고조선이

대륙에 남긴 발자취를 지워버리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염무>는 <황종희黃宗羲>. <왕부지王夫之> 등과 함께

명말 청초의 三大巨儒로 지칭되던 인물이다.

 

그는 「日知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려서부터 독서하면서 얻은 것이 있으면 곧바로 기록하였고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수시로 다시 개정하였으며

혹시라도 옛 사람이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던 것의 경우에는 이를 삭제하였다.

 

30년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이 한 책의 편찬을 완수하였다.

 

일지록은 <고염무> 본인이 말한 바와 같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면서

30년 동안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 완성된 역작이고

일지록 이외에도 「天下郡國利病書, 「京東考古錄, 21史年表와 같은

많은 역사관련 저술을 남겼다.

 

그는 특히 藏書家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平州 노룡현 조선성을 기록한태평환우기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명일통지 만을 들먹여 영평부 조선성 기록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역사지식이 부족한 유신의 무지한 소치로 돌렸다.

 

그것은 조선을 중원과는 무관한 변방의 오랑캐 무리로 격하시키려는

중화중심주의적 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낙랑군 조선현의 이동 및 노룡과 창려의 移置>

 

 

- 낙랑의 위치

 

 

 

 

낙랑군은 오늘날의 하북성 노룡현 일대에서 발해 유역을 따

서쪽으로 徐水에 이르기 까지 25개현 들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현재의 하북성 진황도시. 당산시. 천진시. 보정시 일대가 낙랑군의 영역이었다.

 

 

 

 

- 고대사학자 심백강 인터뷰

 

 

- 이번 책에서 소개된 학설도 앞서 펴낸 두 책의 경우처럼

《사고전서》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셨겠군요.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저의 학설은 제가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원래 있던 기록을 찾아내어 소개한 것일 뿐입니다.

 

만약 우리 역사가 왜곡되지 않고 제대로 전해져 내려왔다면

지금까지 제가 주장한 학설이 ‘새로운 학설’이 아니라,

당연히 ‘정설(定說)’이 되어 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가 남긴 기록은

고려시대에 쓰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 20여년 동안 중국 측의 역사 기록인 《사고전서》를 뒤져

우리 고대사를 복원해 온 것입니다.”

 

 

심백강 원장은

 

“후대에 의해 조작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1차 사료를 통해 우리 고대사를 들여다보니,

그동안 미로 속에서 헤매던 역사의 퍼즐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들어가기 시작했다”

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대하다’ 혹은 ‘훌륭하다’며

칭송하는 기록을 남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1000년 혹은 1500년 전에 우리와 대립했던 중국 한족(漢族)이나

북방의 선비족(鮮卑族) 같은 민족이 우리를 위대하다고 기록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 그들이 우리 민족이 중원대륙에서 자기들과 투쟁한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 기록이야말로 객관적인 기록이며, 믿을 수 있는 기록입니다.

 

그런 한족의 눈에 우리가 그렇게 광대한 영토를 다스린

위대한 민족으로 조명되었는데도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역사를 너무나 초라하게 인식해 왔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한족은 자기들의 역사를 쓰면서 부수적으로 우리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 원장님께서는 이번 책 첫 장에서 곧바로 ‘예맥족(濊貊族)’을 언급하셨습니다.

예맥족과 우리 민족은 어떤 관계인가요.

 

 

 

“예맥족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한민족’이라고 부르는 우리 민족입니다.

 

중국인은 한족(漢族)이라고 하면 끝이지만,

우리 민족은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가 매우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상고시대에 우리 민족이 예족, 맥족, 한족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한족과 예족은 맥족에서 분파되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맥족이라고 하면 예족과 한족을 모두 포괄하는 표현이 되지만,

‘한민족’이라고 하면 예족과 맥족을 분리한

한개의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민족을 지칭할 때 ‘한민족’ 보다는 

우리 민족의 원류와 분파된 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밝달민족’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산동성 곡부에 있는 소호릉 입구(좌)와 소호릉(우)> 




소호릉은 다른 한족 황제들의 무덤과 달리
동이족의 무덤 형태인 적석총 형태로 되어 있다.
 
중국의 시조 황제의 탄생지도 이곳 곡부에 조성돼 있다.
 
심백강 원장은 "산동성은 서주(西周) 이전에는 동이족(우이ㆍ내이)의 근거지였고,
오제(五帝) 시대에는 조이(鳥夷) 소호의 활동무대였다"며
"최근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도
'한족의 시조인 황제가 동이족에서 발원했다'고 주장하거나,
'원시 한족 형성에 동이족 집단이 우세한 주체가 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고 말했다.


 

 

- ‘밝달민족’이라면 언뜻 듣기에도

우리가 흔히 우리 겨레를 일컬을 때 쓰는 ‘배달민족’을 말하는 것 같은데요.

 

 

 

“물론 ‘배달민족’도 밝달민족과 같은 말이지만,

배달민족은 중국 한족이 한자로 ‘밝달’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고,

한자로 옮겨서 표현하는 과정에서 굳어진 중국식 용어입니다.

 

우리 민족을 왜 ‘밝달민족’ 혹은 ‘배달민족’이라고 했는지

이기백이나 이병도 같은 역사학자도 명확한 설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교과서를 보면 우리 민족에 대한 설명은

<언어학적으로 우랄 알타이 계통의 어족과 가깝고

오래전부터 하나의 민족단위를 형성해서 농경생활을 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는 한 문장이 전부입니다.

 

너무 개괄적이라 이 설명만으로는

우리 민족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 ‘밝달민족’이 왜 ‘한민족’보다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더 정확한 표현이 된다는 것인지

그 근거를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요.

 

 

 

“《삼국유사》에 우리 민족의 첫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사실을 전하면서

국조를 ‘단군(檀君)’이라고 했습니다.

 

단군은 ‘밝달 단(檀)’ ‘임금 군(君)’, 즉 그 자체로 ‘밝달임금’의 한자표기입니다.

 

그리고, 춘추시대 중국 고전인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발조선의 한자 ‘발’은 우리말 ‘밝’의 다른 표현이므로

‘발조선’은 곧 ‘밝달조선’과 같은 말입니다.

 

《한서(漢書)》<고제기(高帝紀)> 「북맥(北貊)」 조항에

<맥족은 동북방에 살고 있는데 삼한의 무리가 다 맥족의 종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기록으로 마한ㆍ진한ㆍ변한으로 일컬어지는 삼한의 원류가

바로 맥족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같은 밝달민족이 왜 예족ㆍ맥족ㆍ한족 등 다른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된 건지요.
 

 

 

“예(濊)는 우리말 ‘새’의 뜻이고, 맥(貊)은 우리말 ‘밝’의 뜻이며,

한(韓)은 우리말 환(桓)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먼 옛날 우리 민족은 아침 해가 선명한 동방에 터전을 이루고 살았으며

태양을 숭배하였습니다.

 

‘새’는 ‘새해’, ‘새 아침’, ‘새 봄’ 등 ‘새롭다’는 우리말의 줄임말이고

‘밝’과 ‘한’은 밝고 환한 태양을 상징하는 우리 고유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족ㆍ맥족ㆍ한족에 대한 용어들은

태양을 숭배하며 살았던 밝달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로서는 동일합니다.

 

다만, 이들 민족의 본류와 지류를 구분할 필요성이 있었을 테고,

거주지가 이동됨에 따라 새, 밝, 한 등으로 호칭 상의 구분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우리 고유 언어를 한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예(濊), 맥(貊), 한(韓ㆍ桓)으로 표기된 것입니다.”

 

 

 

- 어떻게 새ㆍ밝ㆍ한이 한자의 예ㆍ맥ㆍ한으로 발음이 변했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요.
 

 

“예는 원래 濊가 아니라 세(歲)였는데,

뒤에 중국인들이 옆에 물수(氵)나 벼화(禾)변을 덧붙여 예(濊)나 예(穢)가 되었고,

맥은 원래 백(百) 또는 백(白)이었는데

여기에 치(豸) 변을 첨가하여 맥(貊)이 되었으며,

맥(貊)에서 다시 맥(貉)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새롭다’는 음의 세(歲)가 더럽다는 뜻인 예(濊)가 되고,

‘밝다’라는 우리말 음을 표기한 백(百ㆍ白)은 오랑캐 맥(貊)이 된 것이죠.

 

이는 중국이 원수같이 여긴 훈족(薰族)을

흉노족(匈奴族)으로 바꾸어 부른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향기로울 훈(薰)자와 음이 비슷한 호(胡)자를 써서 호인(胡人)이라고 하다가,

다시 호자를 음이 비슷한 흉(匈: 오랑캐)으로 바꾸고

 

인(人)까지 노(奴)로 바꾸어 ‘흉노’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민족을 배척하고 한족 중심주의를 지향해온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민족적 관점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 맥의 원래 음이 ‘밝(박)’에서 유래했다는 근거가 있습니까.
 

 

“유교의 경전 중의 하나인 《주례(周禮)》에서 그 근거를 찾았습니다.

 

주례는 춘추시대 이전인 서주(西周) 시대 기록인데 당시 사냥과 군사훈련을 겸하는

대대적인 국가 행사가 일년에 4차례 정도 벌어졌습니다.

 

《주례》에 <사냥할 때 군신(軍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맥제(貊祭)라고 한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이후 후한(後漢)시대 대학자인 정현(鄭玄)이

《주례》에 나오는 이 맥제에 대한 주석을 내면서

<맥제의 제사지내는 대상은 군신 치우>라고 하였고,

맥자에 대해서는 <맥이 아니라, ‘십’ ‘백’의 숫자 백과 같은 발음으로 읽어야 한다>

고 지적했습니다.

 

즉, 정현의 주장을 따르면,

서주 시대에 사냥할 때 지냈던 맥제가

 밝달족의 승리의 화신으로 일컬어지는 치우에게 지냈던 제사인데,

그 제사의 명칭은 맥제가 아니라

‘박제’, 즉 ‘밝달제’로 발음해야 옳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 정현은 어떤 학자였습니까.
 

 

“역대 다른 중국 학자들은

맥을 해석할 때 맥자의 뜻을 풀어서 그 의미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정현만은 유독 발음에 주목하면서 맥이 아닌 백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동이문화(東夷文化)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정현이 살았던 산동성 청도 불기산(不箕山) 지역은

춘추시대까지 동이족의 하나인 내이(萊夷)가 활동하던 지역입니다.

 

불기산은 ‘불족’ 즉 ‘밝달족’과 ‘기족’ 즉 ‘기자족’이 활동한 데서 명칭이 유래했다고

<청도유적(靑島遺跡)>에 소개돼 있습니다.

 

불기산은 지금은 철기산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곳은 수천년간 동이족이 생활했던 곳으로

정현이 거기서 동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풍부한 식견을 쌓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맥’이 바로 ‘백’의 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며,

‘맥족’은 바로 ‘밝달족’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백강 원장은

“우리는 그동안 우리 민족이 예족ㆍ맥족ㆍ한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맥족이 밝달민족과 어떤 관계인지 정확한 내막을 알 수 없었는데,

《주례》와 정현의 주석을 통해 확실한 문헌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 것”이라며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리 민족사를 바로잡을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되찾은 것”

이라고 말했다.  

 

 

 

- 현대 중국 학자들은 예맥족에 대해서 어떻게 기술하고 있습니까.
 

 

“중국 강서성 출신으로 대만 중앙연구원 민족학연구소장을 역임한 문숭일(文崇一)은

<예맥민족과 그 문화>라는 책에서

<예맥족은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이며 동시에 강대한 민족이다.

 

한나라 초기에 중국의 북쪽지역(섬서ㆍ산서ㆍ하북성의 북쪽)과

황해ㆍ발해연안에 모두 그들의 족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즉, 광대한 지역에 걸쳐서 활동했던 강대한 민족으로 간주한 거죠.

 

문숭일은 또 예맥민족을

상고시대 소호씨(少昊氏)의 조이(鳥夷) 계통에 속하는 민족이라고 했는데,

소호씨는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와 함께

동이족 시조의 한 분으로 여겨지는 분으로 중국 역사의 출발점에 해당합니다.

 

또한 문숭일은 맥족은 순임금이나 은나라와는

정치적 문화적으로가 아닌 혈통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심 원장은

 

“문숭일의 말을 정리하면, ‘예맥민족은 중국 역사문화에서 아류가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고 개척한 주체요 주인이었다는 소리’”라며

“이런 예맥의 적통을 오늘에 계승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한국인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오늘날 우리의 민족사학자가 이런 소리를 하면

식민사학에 오염된 일부 강단사학자들은

국수주의에 빠진 재야사학자의 잠꼬대쯤으로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심 원장은

 

“하지만 문숭일은 ‘오랜 역사를 지닌 강대한 민족이었던 고대의 예맥민족이

오늘날의 누구인가를 가정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 하면서 말꼬리를 흐렸다”며

“이에 반해 중국 근현대 역사학계의 태두로 불리는 여사면(呂思勉ㆍ1884~1957)은

대놓고 ‘예맥족의 후예가 바로 고조선ㆍ부여ㆍ고구려ㆍ백제로 이어진

우리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밝혔다”고 말했다.

 

 

“여사면은 동양역사상에서 한족을 제외하고는

맥족이 가장 수준이 높은 민족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동양역사상에서 한족이 중국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진나라ㆍ한나라 이후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렇다면 진ㆍ한 이전 동양역사상 수준이 가장 높았던 위대한 민족이

맥족이었다는 논리가 됩니다.

 

여사면은 특히 <고대 조선은 결코 한반도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대체로 연나라의 개척에 의해서 동쪽으로 발전해 나간 것이라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입니다.

 

이는 전국시대 연나라 진개(秦開)의 간교한 계략에 의해

서쪽 강역을 상실하기 이전까지

고조선은 한반도 안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대동강 낙랑설’을 중심으로 하는 반도사관에 빠져 있는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낭아산과 백석산> 
 
위쪽 왼쪽 사진에서 시계방향으로 낭아산 정상, 낭아산 입구,
백석산 입구, 백석산 정상으로 가는 길의 모습.
 
심백강 원장은 백석산과 낭아산이
중국 《전한서》에 등장하는 갈석산이라는 것을 사료를 통해 고증했다.
 
낭아산은 백석산의 줄기산이다.
 
《전한서》에 '한무제가 갈석을 지나 현도ㆍ낙랑으로써 군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심 원장은
"이 기록은 곧 갈석산 동쪽 지역에 우리 고조선(낙랑군)의 영토가 있었다는 의미"
라고 말했다. 
 

 

 

지난번 인터뷰에서 고조선과 낙랑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고조선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이며,

서쪽 경계선이 오늘날 하북성 보정시 수성진 부근의 백석산(白石山)까지 이어진다’

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이 일대에 낙랑군이 설치되었고,

이후 고구려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중심 무대였다’는 것이

원장님이 주장하신 요지였습니다.

 

 

“저의 주장은 모두 수천년 전 사람들이 기록한 중국의 1차 사료에 근거한 내용입니다.

 

사료는 오래될수록 신뢰성이 있습니다.

 

《회남자(淮南子)》의 저자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BC 179~BC 122)이

조선을 설명하면서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경유한다>고 했습니다.

 

당시는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기 이전입니다.

 

갈석산은 제가 지난 인터뷰에서 고증했듯이 오늘날 보정시 수성진 부근에 있는 산으로

현재는 ‘백석산’ ‘낭아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유안의 말만 가지고도 (고)조선이 대동강 유역이 아닌,

갈석산 동쪽 어딘가에 있었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것이죠.”

 

 

 

 

 

- 고조선과 낙랑에 관해서는 지난번 인터뷰에 자세하게 다루었지만

다시 한 번 간략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고조선과 낙랑의 서쪽 변방이 갈석산 즉 현재의 백석산 지역이라면,

그 중심지라는 노룡현은 어디입니까.

 

 

“노룡현은 현재 휴양지로 유명한 발해만 부근의 하북성 진황도시에

그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이성계의 조선이 생기기 전 송나라 사람 낙사(樂史)가 쓴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조항에는

바로 <조선성: 기자가 봉함을 받은 곳이다. 지금 황폐화된 옛 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송나라 때까지 다 무너진 고조선의 조선성 유적이

이곳에 보존돼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중국인이 기록한 송대 4대사서 중의 하나로 꼽히는 《태평환우기》라는 책에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우리 교과서에서 한사군의 낙랑군 조선현을 대동강 유역에 있었고,

고조선도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가르치는 게

얼마나 엉터리라는 게 드러난 것입니다.”

   

 

 

- 지난번 인터뷰에서 은(殷)나라 왕자였던 기자(箕子)가

은의 쇠망 후 찾아간 지역이 바로 그곳이라고 하셨는데요.

 

 

“기자가 조선으로 간 사실은 《사기》를 비롯하여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서(晉書)》지리지 <평주 낙랑군 조선현> 조항에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지역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나라 때 두우(杜佑)가 편찬한 《통전(通典)》에서 평주에 관한 기록을 보면

<평주는 은나라 때는 고죽국, 춘추시대는 산융ㆍ비자, 진나라 때는 우북평, 요서2군,

양한(兩漢)에서 위진(魏秦)시대까지는 요서군 지역이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가 찾아갔던 조선은

바로 고죽국ㆍ산융국ㆍ비자국ㆍ우북평군ㆍ요서군으로,

이 지역은 시대에 따라 이름이 바뀌어 왔고, 진나라 때는 평주로 바뀐 곳입니다.

 

기자 당시로 말하면 단군조선이 차지하고 있던 영토가 되는 것입니다.”

 

 

심 원장은

 

“자신의 조국인 은나라가 망하자 주나라의 신하 되기를 거부한 기자가

동쪽으로 떠나 와 주나라의 통치권 밖에 있던 독립국가이자 형제의 나라인

요서조선(오늘날 요하를 기준으로 한 요서지역이 아님)에 찾아갔던 것은

중국 정사(正史)가 인정하는 사실”이라고 덧붙혔다.

 

 

<백석산과 낭아산> 


하북성 지도에서 백석산과 낭아산의 모습.
그 동쪽에 수성진이 보인다.
 
서진 시대 지리서인《진태강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거기서 장성(만리장성)이 시작되었다"고 되어 있다.
 
심백강 원장은
 
"사료에 기록된 낙랑군의 영토 설명에 부합하려면 수성현이라는 지명이 있고,
갈석산이 있고, 장성의 기점이 있어야 한다"며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지점이 바로 현재의 수정진"이라고 설명했다.

 

 

- 하북성 노룡현에 있던 기자조선과 낙랑군의 조선현이

무슨 연유로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졌습니까.

 

 

“이처럼 명백한 사료가 있는데도 조선현은 청나라 시대에 이르러

슬그머니 압록강 이남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에 관한 기록은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등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대청일통지》는 평주의 기자조선을 한반도의 이씨(李氏) 조선과 결부시키고,

평주의 낙랑군 조선현을 ‘압록강 이남의 낙랑군 조선현’으로 왜곡시켰습니다.”

 
심원장은 상념에 잠긴 듯 한참동안 천장을 응시하다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명말청초에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에 앞장섰던 민족주의자 고조우(顧祖禹)는

《독사방여기요》라는 지리를 전문으로 다룬 책을 저술했는데

〈영평부 노룡현〉 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조선성은 영평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한(漢) 나라의 낙랑군에 소속된 현(縣)이다. 지금 조선국의 국경 안에 있다.'

 

고조우는 하북성 영평부에 있는 조선성을 설명하면서

〈이는 한 나라의 낙랑군에 소속된 현인데 지금 조선국의 경내에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야말로 ‘비오는 달밤에 단 둘이 홀로 앉아’와 같은 어불성설입니다.

 

이씨조선을 얕잡아 본 명나라의 민족주의자들이

이처럼 엉터리로 조작한 논리를 일제가 수용한 다음

거기에 날개를 달아 ‘대동강 낙랑설’로 고착화 되어 반도사관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 때 펴낸 《독사방여기요》나《대청일통지》는

사료적 가치로 볼 때도 《진서》《위서》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이 나라가 광복된지 70년이 된 지금까지 이런 왜곡된 사관이

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으니 이걸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지...

한마디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 원장님께서는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곧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역이 되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낙랑군의 위치고증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우리 역사학계의 정설처럼 되어 있는 ‘낙랑군 대동강설’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라는 말씀이신데요.

 

 

“낙랑군이 어디 있었느냐에 따라 한사군의 위치가 결정되고,

한사군의 위치 여하에 따라 우리의 첫 국가인 고조선의 발상지와 강역 및

고구려의 평양성 등 상고사의 물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낙랑군에 ‘한국사가 대륙사인가 아니면 반도사인가’를 결정짓는

중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명청(明淸) 시기의 조선을 얕잡아 본 중국인 학자들과

일제 식민통치의 영구화를 노린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과 낙랑군을 한국사 왜곡의 타깃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 한국사에서 낙랑군의 위치 고증이 왜 중요한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사기》<진시황본기> 에 진나라의 강역을 설명하면서

<땅이 동쪽으로 바다와 조선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당나라의 장수절(張守節)이 《사기》를 설명하는 주석서에서

《괄지지(括地志)》라는 지리서를 인용하면서

위에 나오는 조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이는 본래 한나라의 낙랑군 왕험성이며 바로 고조선이다.>

 

이 말은 고조선에서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다시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시대에 따라서 그 지명 상의 변동이 있었을 뿐 고구려 평양성과 낙랑군 왕험성,

고조선 등은 사실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낙랑군이 발해 부근의 요서지역(오늘날 요서지역이 아님)에 있었다면

고조선과 고구려의 평양성도

대동강이 아닌 요서지방에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 이제부터는 고조선에 대해 본격적인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지금까지 원장님의 설명을 요약하면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혹은 압록강 부근이 아니라,

발해만 부근을 중심으로 노룡과 북경-천진을 아우르는 지역,

그리고 서남쪽으로는 오늘날의 보정시까지 이어진 하북성 일대라는 말씀이신데요.

 
“그 일대가 우리 민족, 즉 동이족(조선족)의 활동무대였습니다.

 

물론 동북쪽으로는 오늘날의 조양시를 포함하는 요서 지역과 압록강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 은(殷)나라가 망하면서 

기자가 유민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기자는 자기 선대(先代)가 살던 땅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하는 중국 학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은나라는 우리 민족이 세웠다는 말이 되지 않는지요.

 
“일본 사람들은 기자가 하남성(河南省: 은허)에서 한반도의 대동강까지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리상으로 너무 멀고 망명객 신분에

이(異)민족이 있는 지역을 지나서 한반도로 오는 것이 말이 되냐는 것이죠.

 

그렇다 보니 우리 사학계도 기자조선을 거의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자는 한반도로 건너온 것이 아니라,

자기 종족들이 터를 잡고 살던 요서조선(진한 시대의 요서군) 지역으로 가서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고조선의 중심 도시나 무대를 확정할 수 있습니까.
 
“발해만에서 동북쪽 일대가 활동 영역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북성 노룡현(盧龍縣) 부근이 고조선의 중심지입니다.

 

송나라 때 <태평환우기>의 기록에 여기에 ‘조선성(城)’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로는 증거가 부족한데,

<사고전서>에서 노룡의 서쪽 북경 부근에

조선하(朝鮮河)가 있었다는 것을 찾았습니다.

 

송나라 때 나라에서 펴낸 병서(兵書)인 <무경총요>(武經總要)인데,

여기에 바로 ‘조선하’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조선하는 북경시 북쪽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듭니다.

 

<무경총요>에 등장하는 ‘조선’은 어떤 조선을 말하는 것이며,

왜 북경 북쪽 지역에 이 강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경총요>가 편찬된 것은

이성계(李成桂)의 이씨(李氏) 조선 건국보다 348년이 앞섭니다.

 

따라서 압록강 이남에 건국되었던 ‘이성계의 조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고조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고대 조선의 주무대가

대륙 깊숙이 중원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기록입니다.”

 

 

 

- ‘조선하’가 북경 부근에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요.
 
“잠시 정리를 해보면,

중국 한족(漢族)의 전통적인 활동지는 주로 섬서성(陝西省)입니다.

 

조선하는 고대 요서조선 수도의 서쪽에 있던 강입니다.

 

이렇게 보면 고대의 모든 기록이 다 맞아떨어집니다.

 

<사기> 열전에 섭하(涉河)가 건너서 왔다는 강도 조선하일 것이고,

위만이 건너서 왔다는 강도 조선하일 겁니다.

 

당연히 수(隋)나라가 조선을 치기 위해 건너왔다는 패수(浿水)도

이병도의 주장처럼 청천강이 아니고 조선하일 가능성이 큰 것이죠.

 

‘청천강 패수설’과 ‘대동강 낙랑설’은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과 반도사관의 핵심 요소입니다.”

 

 

 

- <무경총요>는 어떤 책입니까.
 
“이 책의 저자 증공량(曾公亮)은 북송(北宋) 왕조의 중신(重臣)입니다.

 

그는 이 책 외에도 <신당서>와 <영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당시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군사가입니다.

 

<무경총요>는 북송 왕조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군사가가

황제의 명을 받아 4년 동안 정력을 기울여 펴낸 역작으로

정사(正史)에 뒤지지 않는 권위 있는 사료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하가 허위일 수 없고,

저들이 허위로 조작하여 조선하를 기재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 그 조선하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까.
 
“제가 고증을 해보니 오늘날 북경 부근의 ‘조하’(潮河)가 바로 조선하입니다.

 

저의 이번 책 《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에서

<사고전서>의 자료를 바탕으로 조하가 왜 조선하인지 자세하게 고증했습니다.

 

최소한 원(元)나라 말년까지는 조선하라는 명칭이 존속했습니다.

 

명청(明淸) 시대에 이르러 조선하가 조하로 변경된 것 같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조선은

약화될 대로 약화된 압록강 이남의 손바닥만한 땅을 소유한 나라에 불과했고,

중원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속국 신세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중원 수도 근처에 조선하가 있다는 것은

중국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역사적 분쟁을 야기시킬 수도 있는 불편한 명칭이었을 겁니다.”

 

 

 
 
청나라 오임신이 저술한 <회도산해경광주>.


<산해경>은  한나라 이전인 선진(先秦) 시대의 사료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다.
이 책 '해내경' 편에 고조선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심 원장은


"중국의 여러 학자들이 '해내경'은 조선기’(朝鮮記)라고 했는데,
고조선사와 관련된 직접사료를 확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 혹시 노룡현 쪽이 고조선의 주 활동 무대였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다른 기록도 있는지요.

 
“<산해경>(山海經)의 ‘해내경’(海內經)편을 보면

‘동해의 안쪽, 북해(北海)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한다’

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산해경광주>는 산해경에 나오는 ‘해내경’과 ‘대황경(大荒經)’을

‘조선기’(朝鮮記)라고 했습니다.

 

즉 ‘(고)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인데,

고조선사와 관련된 중요한 직접 사료를 확보한 셈이 됩니다.

 

<산해경광주>는 청(淸)나라 때 오임신(吳任臣)이란 학자가 쓴

<산해경> 주석서입니다.

 

<산해경>은 선진(先秦) 시대의 사료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입니다. 

 

서한(西漢) 시대의 유명한 학자인 유흠(劉歆)은

<산해경>이 하(夏)나라의 우(禹)왕과 백익(伯益)의 저작이라고 했습니다.

 

이분이 근거 없는 말을 했을 리는 만무합니다.

 

<사기>에도 <산해경>이 인용된 것을 보면 선진시대의 사료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동안 우리 고대사에서 사료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는데,

한대(漢代) 이전 고조선의 직접 사료인 <산해경> 중

 ‘해내경’과 ‘대황경’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 <산해경>에 말한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가 노룡현 부근입니까.
 
“풀이할 것도 없이 글자 그대로입니다.

 

지금의 황해를 예전에는 ‘동해’라고 했습니다.

 

한족의 근거지인 섬서성을 기준으로 보면 북해(北海)는 현재의 ‘발해만’밖에 없습니다.

 

발해의 다른 이름이 ‘북해’입니다.

 

<해내경>은 첫줄에서 조선의 위치를 언급하면서 ‘북해의 모퉁이’라고 했습니다.

 

삐죽 튀어나온 곳을 모퉁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북성 발해만 지역에 있는 진황도시 노룡현 부근이

바로 <산해경>이 말한 지역이 됩니다.

 

<태평환우기>에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다’고 하고

‘바로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라고 했습니다.

 

진나라나 한나라 때는 이 지역을 ‘요서’라고 했습니다.

 

즉 조하의 동쪽이 요동, 조하의 서쪽이 요서로,

지금의 요동ㆍ요서하고 다른 기준입니다.

 

이처럼 옛날의 모든 기록이 고조선과 낙랑의 중심적 위치를

일괄적으로 진황도시 노룡현 일대로 맞아떨어지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조선이 현재의 요동이나 반도에 위치할 수가 없는 이유입니다.”

 

 

 

- 예전에 조하(조선하)를 기준으로 요동ㆍ요서를 나눈 근거는 무엇인가요.
 
“〈산해경〉에 요수(遼水)는 동남쪽으로 흘러서 발해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요동ㆍ요서를 나누는 오늘날의 요수(요하)를 보세요.

 

서남쪽으로 흐르지 않습니까?

 

요녕성에서 지리 구조상 강이 동남쪽으로 흐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녕성의 요하는 옛날 <산해경>에서 말해온 그 요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요하로 바꾼 거죠.

 

거기에 반해 조하는 정확하게 동남쪽으로 흘러서 발해로 들어갑니다.

 

기록이 정확하잖아요.

 

이병도 같은 분들은 요동ㆍ요서에 대한 개념도 없었을 겁니다.

 

그냥 낙랑군이 요동군 동쪽이라고 하니까 대동강 유역이라고 본 것인데,

이는 <삼국사기>의 고구려가 요서군에 10성을 쌓았다는 기록과도

맞지 않는 주장입니다.

 

요동군에 한나라의 군이 설치되어 있는데

어떻게 압록강에 있다는 고구려가 요동군을 넘어서 성을 쌓을 수 있습니까.

 

강단 사학은 앞뒤가 안 맞으면 무조건 오류나 오기(誤記)라고 주장하고,

그것도 안되니까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부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 그냥 옛 기록에 있는 그대로만 따르면 다 맞는다는 말씀이시네요.
 
“<사고전서>에 기록된 대로 요하를 조하로 보고,

노룡현 지역을 ‘요서고조선’의 평양으로 보면 고대사 전체가 다 맞아 들어갑니다.

 

그동안 사료가 없다 보니까 우리가 소모적인 논쟁으로,

더듬이 길 찾듯이 고대사를 다루었는데

이제 사료를 통해 다 밝혀졌으니까 더는 논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강단 사학은 새로운 사료가 나와도 자기들 통설하고 안 맞으면

연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배척을 합니다.

 

왜냐하면, <사고전서>에서 밝혀진 사료는

강단 사학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공든탑을 허무는 것이 너무 아까우니까 아예 거들떠보려 하지 않고,

또 보려고 해도 원전을 읽을 만한 능력이 안되다 보니까

그동안 이런 내용이 보이지가 않았던 겁니다.”

 
 
 

 

- 바로 그 강단 사학의 뿌리가

일제가 만든 반도사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우려된다는 말씀이시죠.

 
“일본 사람들이 단군조선은 ‘신화(神話)’라고 해서 부정하고,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거리가 멀어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습니다.

 

이런 논리로 단군조선 1000년, 기자조선 1000년을 잘라내고,

위만(衛滿)조선부터 우리의 실제 역사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역사를 2300년으로 만들었는데,

일본의 2500년보다 역사가 짧아지게 됩니다.

 

이처럼 일본은 식민사관을 통해 우리 역사의 길이를 단절시켰고,

역사의 무대를 축소해 놓았습니다.”

 

 

 

- 재야사학에서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의 사료를 가지고

우리 역사를 설명하기도 하는데요.

 
“먼저 알아야할 것은 <환단고기> 등을 가지고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주로 ‘재야사학자’라하고, 신채호, 정인보 선생처럼 정사(正史) 사료를 가지고

연구를 한 사람들은 ‘민족사학자’로 구분한다는 겁니다.

 

문제는 <환단고기>는 우리나라 밖에 없는 사료이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에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면 <사고전서>는 한중일(韓中日) 삼국이 인정하는 정사 사료입니다.

 

사료는 연대가 오래될수록 가치가 있는데,

이런 원자료를 부정한다면 역사학자라고 할 수가 없죠.”

 

 

 

- 말씀대로 중국 중원(中原)에서 활동하던 우리 민족은

어떤 계기로 한반도 쪽으로 영역을 계속해서 축소해 왔는지요.

 
“동북아시아에는 수많은 민족이 흥망(興亡) 했습니다.

 

돌궐, 흉노, 말갈, 여진…. 그 모든 민족이 중국에 동화되어 버렸지만,

오직 우리만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토, 언어, 전통, 민족, 역사를 모두 유지하면서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로마가 아무리 강성한들 지금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단군이 세운 그 조선이라는 이름에,

그 민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겁니다.

 

세계사에서 이처럼 생명력이 긴 민족이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수천년의 역사적 뿌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순환 반복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니까

언젠가는 다시 옛날의 찬란했던 영광을 회복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 고구려의 처음 주 무대가 노룡현 일대라면,

지금의 북한 평양(平壤)은 어떻게 된 것인지요.

 
“제가 다음번에 <사고전서>의 자료를 모아서

책으로 펴낼 부분이 바로 삼국의 역사입니다. 

 

우리 역사는 고려 때까지만 해도 주 무대가 동북을 포함하는 역사였습니다.

 

반도(半島) 쪽으로 완전히 축소된 것은 고려 이후 조선조에 넘어오면서입니다.

 

고구려의 발상지가 바로 중국 노룡현 지방이고,

현재의 평양 천도는 그 한참 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고구려의 수도가 바로 노룡 지방입니다.

 

이때 당(唐)나라에 요서평양(노룡 지역)을 내주고, 현재의 평양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번 책에서 자세하게 다룹니다.”

 

 

 

- 북한은 “평양에서 단군의 시신이 발겼되었다”며 단군릉을 조성했습니다.
 
“고조선이 워낙 오래 존속되었기에 훗날 단군의 후손이나 왕족의 일부가

평양에 건너와 거주했을 개연성은 있지만,

그 무덤이 시조(始祖) 단군일 수는 없습니다. 

 

단군에게 제사를 철저하게 지냈던 조선 시대에도

평양 일대 민간에서 단군 무덤이라고 전해오는 묘를

시조 단군의 무덤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기록과 함께 유물ㆍ유적 같은 

고고학적 증거가 받쳐 주어야 더욱 힘을 얻는 것 아닙니까.

 
“우리 민족이 원래 중원의 주인입니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이 바로 우리 동이족이 세운 ‘고조선’입니다.

 

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가 발굴되면서 입증되었습니다.

 

기록뿐 아니라 유물과 유적까지 뒷받침하는 것이죠.

 

홍산문화가 꽃핀 곳이 바로 우리 민족의 주 무대였던 요서군 지역입니다.

홍산문화의 3대 특징은 여신을 모신 사당과 원형제단, 적석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문화의 ‘특징’이라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그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섬서성처럼 중국 한족 문화가 융성한 지역(황화문명권)에서는

이런 특징을 가진 유적이 발굴되지 않습니다.

 

이 가운데 적석총은 우리 동이족 매장 문화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중국 황제는 무덤 조성 시 평지에 흙을 끌어모아 토갱(土坑)을 만들었습니다.

 

능(陵)과 태묘(太廟), 제단(祭壇) 등은 부락단계에서는 볼 수 없는 국가의 상징인데,

대규모 제단이 황화문명에 앞선 홍산문화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홍산문화는 국가의 전야(前夜) 단계라고 합니다.

 

황화문명이 아직 국가 단계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때

벌써 국가의 전단계에 진입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거주하는 곳에서 먼저 문명이 시작되어

황화문명권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 홍산문화가 우리 민족이 창조한 문화라는 것이죠.
 
“그것은 중국 학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하루아침에 땅에서 솟아나올 수는 없잖아요.

 

이러한 문화의 전야(前夜) 위에서 고조선이 건국된 것입니다.

 

한반도 내에서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면

무슨 증거가 나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고인돌을 가지고 고대국가의 건국을 증명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바로 중원 대륙의 우리 민족이 살던 곳 요서지역에서

국가의 건국을 상징하는 유물이 최초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저명한 고고학자들이

‘중국 문명의 서광(曙光)이 홍산문화에서 열렸다’고 했습니다.

 

문명의 시작이 황화문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족의 무대는 섬서성이고,

동쪽은 동이족, 그 가운데 우리 ‘박달민족(배달민족)’의 주무대였습니다.

 

박달민족 국가를 한자로 쓰면 <관자>에 나오는 ‘발조선(發朝鮮)’이 되는 데,

현재 이 지역에 ‘아사달’이나 ‘박달’과 연관된 무수한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 중국은 홍산문화도 중화문명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동북공정을 하고 있지 않나요.
 
“홍산문화를 발굴해놓고 보니까

기존 중화문명보다 앞서는 문명의 출발점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건국도 홍산문화에서 먼저 이루어졌고요.

홍산문화에서 발굴된 용(龍)이 황화문명에서 발굴된 용보다 연대가 앞섭니다.

 

봉황(鳳凰)도 최초로 이쪽에서 나왔고요.

 

그러다 보니 ‘황화문명에서 문명이 시작되어 오랑캐에 문명을 전파했다’는

기존의 이론이 뒤집어 지게 된 것입니다.

 

중국문명의 출발점이 달라지다 보니까

아예 중국의 시조인 황제(黃帝)를 이쪽 지방으로 갖다놓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한족 입장에서 동북지방은 동쪽과 북쪽 사이의 하북성, 요녕성, 길림성입니다.

 

즉 동쪽과 북쪽 사이를 일컫는 말인데

그동안 이 지역의 역사는 공백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연나라가 이 지역을 차지했다고 주장은 해왔지만, 명백한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래서 이 지역의 역사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입니다.

 

동북공정은 중국 사람뿐 아니라 우리 강단 사학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강단 사학이 이룬 많은 연구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는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학회도 만들고, 정부의 움직임도 있지 않습니까.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겠다고 출범한 연구재단도 그간의 연구결과를 보면 기존의

일제나 이병도의 반도사관 학설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렇다 보니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에 보낸 자료가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을 뒷받침하는 자료에 불과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일일이 비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고전서>에 기록된 ‘요서고조선’ ‘요서낙랑’ ‘요서고구려’

(여기서 말하는 요서는 오늘날의 요서 지역이 아니라 진한시대의 요서군 지역임)만

바로 세우면 동북공정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사고전서>에 기록된 모든 사료는 중국의 조상이 만든 중국 측 자료이고,

그 내용도 역사적 사실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합리적이고 치열하게 연구한 자료를 가지고 반박하면

중국도 인정할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군요.

 
“당연합니다. 사료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부정하겠습니까.

 

예컨대 선비족(鮮卑族)은 고조선의 후예들입니다.

 

그런데 1500년 전에 세워진 선비족의 ‘두로공신도비문’이 지금 전해집니다.

 

어떤 이의 비문을 쓸 때는 당연히 그 사람의 조상(뿌리)부터 이야기하는데,

그 첫마디가 바로 ‘조선건국(朝鮮建國) 고죽위군(孤竹爲君)’이라고 했습니다.

 

즉 ‘조선을 건국하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고 한 겁니다.

 

선비 모용부(慕容部)가 나라를 세우고 활동한 지역이 요서와 요동 지구,

그리고 하북성 서북과 남부 지역을 포괄하는데,

이곳은 기자조선이 건국하고, 고죽국이 통치하고,

이후 한나라가 위만조선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사군을 설치한 곳입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었다고 했는데,

제가 사료분석을 하니 고죽국은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온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분명합니다.

 

고죽국은 백이ㆍ숙제의 고사로 유명합니다.

 

이 고죽국이 바로 요서에 있었던 겁니다.”

 

 

 

-갑자기 ‘고죽국’까지 나오니까 좀 어렵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해주시죠.
 
“그러니까 발해만에서 가까운 노룡 지역에 조선성이 있었는데

시대에 따라 ‘고죽성’, ‘요서성’으로 불렸습니다.

 

요서성은 진시황이 이쪽 지역을 요서군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춘추시대에는 고죽국이 있었으니 ‘고죽성’이 있었던 것이고,

고조선 때는 조선이 있어서 ‘조선성’이란 이름이 있었던 겁니다.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하면 중국 동북지방 전체가 우리 역사이고,

우리 조상의 무대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 원장님께서는 그동안 <조선왕조실록>이나 <사고전서>에서

우리 민족과 고대사 관련 자료를 많이 발췌하여 책으로 엮으셨는데,

이번에 특별히 <사고전서>에 있는 ‘고조선’과 ‘낙랑’에 대한 자료를 따로 묶어낸

이유가 있는지요.

 

“그동안 펴낸 책은 原典을 그대로 발췌해서 엮은 1차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하는 작업은 이런 사료를 해석하고 주석을 달고,

해설을 하는 2차 작업에 해당합니다.

 

국내에 사료의 원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제한적이고,

특히 요즘에는 역사학과 교수 중에도

사료의 원전을 제대로 해독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질 일이 만무합니다.

 

따라서 제가 후학들을 위해 단순히 1차 자료를 모아서 제공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 자료들을 직접 해석하고,

주석과 해설을 붙여 엮어 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고조선과 낙랑 부분에 관한 작업을 했으니

이어서 삼국시대에 관한 사료 정리 작업을 할 것입니다.”

 

 

 

-‘낙랑’은 한나라 사군(四郡)의 하나인데 어째서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지요.

 

“고조선이나 낙랑은 다 우리 상고사에 속합니다.

 

고조선은 우리나라 사료에 등장이라도 하지만,

중국 사료에는 거의 취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낙랑은 한무제(漢武帝: BC156 ~BC 87)가 고조선(위만 조선)을 침략해서

설치한 한사군(낙랑, 임둔, 진번, 현도) 중의 하나기 때문에

중국 문헌에 많이 등장을 합니다.

 

바로 이 낙랑과 현도(玄菟)가 고구려의 발상지이기 때문에

낙랑의 위치가 중요한 것입니다.

 

기존 강단 사학(이병도 학설을 계승한 현재의 통설)의 주장처럼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설치되었더라면,

고구려의 발상지도 이 부근이 되는 것이고,

낙랑이 대동강이 아닌 다른 지역에 있었다면

고구려의 발상지도 다른 곳이 되기 때문에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 <사고전서>에 낙랑이 평양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는 자료가 있는지요.

 

“매우 풍부하게 남아 있는 편입니다.

 

20여 종의 각기 다른 자료가 한사군의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동쪽, 내몽고 남쪽, 요녕성 서쪽,

즉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낙랑이 요서에 있었다면 고조선도 당연히 요서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동안 강단 사학이 상고사 연구에서 그토록 강조해 온

‘사료의 빈곤’ 주장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그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 낙랑 관련 사료가 여실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 현재 학계의 통설은 고구려의 발상지이자 첫 수도를

중국 요녕성(遼寧省) 오녀산성(홀본 혹은 졸본) 부근으로 보고 있는데요.

 

“그 문제는 낙랑의 위치가 어디인가만 밝혀지면 끝나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출발지가 바로 낙랑군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통설은 고구려의 발상지를 압록강이나 대동강 유역으로 해놓았는데

이는 한사군인 낙랑, 임둔, 진번, 현도가 압록강을 중심으로 그 부근에 있었다는

가정하에 고정된 학설입니다.

 

이병도씨는 그 가운데 낙랑군이

특히 현재 북한의 평양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학설에 반발한 사람들이

소위 민족사학자들인 신채호, 정인보, 윤내현 같은 분들로

이들은 낙랑을 요동(신채호)이나 요서(정인보 등) 지역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신채호ㆍ정인보 같은 민족사학자들도

당시 <사고전서> 같은 방대한 중국 측 1차 사료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역사의 강역을 요동이나 요서지역 이상 확대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분들이 <사고전서>를 보았다면

우리 고대사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었을 겁니다.”

 

 

 

 

 

- 동북아에서 우리 민족이 최초로 국가를 세웠고,

은나라도 우리 민족의 한 갈래가 세웠다면 은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는

우리 민족이 만든 글자로 봐도 됩니까.

 

“갑골문자는 한자(漢字)가 아니라 ‘은나라의 문자’ 즉 은문자(殷文字)입니다.

 

갑골문자에서 4000자(字) 가량이 해독되었는데, 미해독 문자도 상당합니다.

 

이 정도의 문자가 통용될 정도라면 이미 이에 앞서

갑골문을 탄생시킨 문자 체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 문자는 당연히 우리 민족이 만들었습니다.

(수년 전 산동성 창려현 지방에서 갑골문자보다 1000여년 앞선 골각문자가 발견됨)

 

한자(漢字)는 갑골문자를 한족이 더욱 발전시킨 문자입니다.

 

정리하면 한자는 당연히 갑골문을 토대로 한족이 발전시킨 글자이지만,

이 문자를 발생시키고 문명 자체를 연 서광은 우리 민족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 문명의 뿌리이자,

시초를 열어준 것이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혼자서 중국의 1차 사료를 수집ㆍ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현재 우리 역사는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반도사관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군은 신화이고, 기자는 허구이며,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니까

우리 민족은 타율적이며, 지배를 받아야 하는 열등한 민족’이라는 것이

식민사관의 핵심입니다.

 

문제는 이런 식민사관을 아직도 학교에서 그대로 배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왜곡된 역사를 바꾸려면 교과서를 개정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자료를 정리해 놓아야 교과서를 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을 바쳐서 작업합니다.

 

중국과 일본은 자기 민족에 대한 긍지를 살리는 역사를 가르치지만,

우리는 대륙으로 한 번도 진출해보지 못하고

한반도 안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는 민족으로,

도저히 민족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 역사를 가르칩니다.

 

로마나 한(漢) 왕조보다도 훨씬 위대했던 고조선만 바로 서면

동서화합, 남북통일도 문제가 없습니다.”

 

 

 

-동북공정에 맞서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사업은 범국가적으로 해야 하는 일 아닌가요.

 
“사학계의 주류가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데

아무리 학회나 재단이 만들어진들 연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일연 스님이 고조선에 대해 단 몇줄의 기사를 남김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을 살려내는 공헌을 했습니다.

 

만약 일연 스님이 그 기록조차 안 남겼다면

후대에 누가 고조선에 관심을 가졌겠습니까.

 

제가 하는 이 일도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고조선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사료가 있어야 하는데,

제가 바로 그 사료를 찾아내서 세상에 내놓고 있는 겁니다.”

 
 
 
 
-우리 사학계에 하실 말씀은.
 
“국사 학자라면 원전(原典)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영어 능력보다 한문 원전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교수로 임명해야 합니다.

 

사료를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대사학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내놓은 ‘요서낙랑’ ‘요서고조선’ 자료를 가지고도

박사학위 논문이 수십개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북경 북쪽의 ‘조하’가 ‘조선하’라는 것을 밝히는데 3개의 자료를 인용했지만,

후학들이 더 연구하면 더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사고전서>는 동양 삼국이 공히 인정하는 정사 사료입니다.

 

<사고전서>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사를 바로 세우면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던 여러 난제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고전서>를 통해 한국사의 근간을 바로잡고, 동북공정에 대응하며,

한중(韓中) 양국이 대립각을 세우는 여러 문제에 대해

상호 우의(友誼)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고전서> 학파의 탄생을 기대합니다.”

 
심백강 박사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광복 이후 모든 분야에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정권도 여(與)에서 야(野)로, 야에서 여로 여러 차례 교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70년 가까운 세월을 조금도 변화없이

식민사학을 계승한 이병도 학파가 줄기차게 주도하고 있는 것이 역사학계입니다.

 

이제 늦었지만,

역사학계도 하루빨리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야합니다.

 

정부 차원에서 그러한 흐름을 주도하기 어렵다면 국민이 나서야 합니다.

 

요사이 한국 사회에 인문학 바람이 부는데 인문학의 핵심은 역사입니다.

 

‘역사광복’을 위해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지혜와 힘을 모을 때입니다.”

 

 

 

 

 

- 금지된 장난(SBS 역사스페셜) : 일제의 낙랑 유물 조작

 

 

 

 

 

 

- 2016 상고사 토론회

 

 

강단사학자 조법종 교수는 BC 108년에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이 설치되고

1년 후인 BC 107년에 왕검성이 함락되고 현토군이 설치되었다고 하며

왕검성은 지금 북한의 평양이 아닌 현토성(환인지역) 인근에서

찾아야한다고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성용 교수는 군사작전상 왕험성 평양설의 모순을 열거하며

위만조선의 수도 왕험성은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강단사학자 정인성 교수는 일제강점기 발굴된 봉니와 낙랑예관을 중심으로

양심을 걸고 낙랑대동강설을 굳게 믿고있다고 강변하고 있다.

 

 

 

복기대 교수는 고고학 접근 방법론으로

문헌사료 검토와 이치될 수 없는 갈석산을 선행 검토하고 

이차적으로 교류와 조작이 가능 한 유물을 검토하여야 하며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지금의 북한의 평양이 아니라 요양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단사학자들의 뇌리에 한번 틀어박힌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김종서 교수는 후한서 지리지의 낙양에서 각 군까지의 거리를 설명하며

요서는 지금의 영정하 이서 지역, 요동은 지금의 창려지역이라고 주장하며

이후석 교수는 첨수도와 명도전이 하북성에서 대량 출토되고 있어

하북성이 연나라의 강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강단사학자 박준형 박사는 혼하 낙랑설을 주장하

민족사학자 심백강 박사는 요서{조백신하 서쪽}낙랑설을 주장하고 있다.

 

 

 

 

 

강단사학의 억지 주장과 그들의 벽이 얼마나 두터운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 조선시대 朴趾源의 熱河日記와 李恒億의 燕行日記로 보는 요동과 낙랑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청나라 건륭황제의 70세 생일 축하 사절 일행과 함께

정조 4년(1780년) 북경과 승덕(열하)을 다녀오면서 열하일기를 남겼다.

 

6월 26일(셋째 날)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도착한다.

 

 

봉황산은 이곳에서 6, 7 리쯤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전면을 보니 더욱 기이하고 뾰족해 보인다.

 

산 속에는 안시성(安市城)의 옛 터가 있어서 성첩(城堞)이 지금껏 남아 있다 하나

그건 그릇된 말이다.

 

삼면이 모두 깎아지른 듯하여 나는 새라도 오를 수 없을 성싶고,

오직 정남의 한쪽이 좀 편평하나 주위가 수백 보에 지나지 않음을 보아서

이런 탄알만한 작은 성에 그때의 큰 군사가 오랫동안 머물 곳이 아닐 테니,

이는 아마 고구려의 조그만 보루가 있었던가 싶다.

 

대체 당 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 하찮은 탄알만한 작은 성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창황히 군사를 돌이켰다 함은 그 사실에 의심되는 바 없지 않거늘

 

<김부식金富軾(1075~1151)>은 다만 옛 글에

그의 성명이 전하지 않았음을 애석히 여겼을 뿐이고 보니,

 

대체 <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을 때에

다만 중국의 사서에서 한번 골라 베껴 내서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또 <유공권柳公權(778∼865){唐의 학자}의 소설을 끌어 와서

당태종의 피위된 사실을 입증까지 했으나,

 

다만 당서와 사마광의 통감에 기록되지 않았은즉,

이는 아마 그들이 중국의 수치를 위하여 기피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 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더운 것이건 아니건 간에 다 빠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라고 한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이라 한다 하였다.

 

'지지(地誌)'에, 봉황성은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으로 이름함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地誌)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봉천부에 속하는 지명)의 동북 70 리에 있다 하였으니,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까지가 3 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부합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기자묘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다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 예, 맥 등

동이(東彛, 떳떳할 이,영구히 변하지 아니하는 道)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자, 영고탑, 후춘 등이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아니하고

함부로 한사군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하고

다시 패수(浿水,강이름 패)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을 패수라 하며, 혹을 대동강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 위치의 앞으로 나감과 뒤로 물리는 것을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女眞)에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아느냐 하면

한서(漢書) 지리지에 현토나 낙랑은 있으나 진번과 임둔은 보이지 않는다.

<朴趾源의 熱河日記 中 渡江錄>

 

 

 

12월 초3일 정묘일(丁卯日), 맑다.

 

이른 아침에 <익여>와 <경선>이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역(異域)에서 작별하자니 나도 모르게 구슬퍼 눈물이 나왔다.

 

집에 가는 편지도 부치고, 의복도 갈아 입었다.

 

일행과 함께 각기 태평거(太平車)를 타고 책문을 출발했다.

 

5리에 안시성(安市城), 예전의 성지(城池)가 남아 있었다.

 

당나라 태종(太宗) 때 설인귀(薛仁歸)가 점거해 있던 곳이다.

 

 

12월 초8일 임신일(壬申日), 맑다.

 

‘혼하(渾河)는 일명 하리강(河利江), 일명 소요수(小遼水)라 하는데,

근원이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와 사하(沙河)와 합쳐져서 성경(盛京)을 돌아 나와

동남쪽으로 태자하(太子河)와 만나서 또 서쪽으로 흘러 요하(遼河)와 만나

삼차하(三叉河)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서부터 서북쪽으로 향하여 9리를 가면

심양(瀋陽) 또는 성경(盛京) 또는 봉천부(奉天府)다.

 

한(漢)나라 때 낙랑군(樂浪郡)이자 읍루국(挹�樓國)이다.

<李恒億의 燕行日記>

 

 

 

<이항억>은 조선 철종 13년(1862년)에 조선 사절단의 일행으로 북경을 다녀와서

연행일기를 남겼다.

 

 

일제의 식민교육을 받기 전의 우리의 선조들은

적어도 한사군의 낙랑이 심양에 설치 되었으며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 우리의 통설은 대동강 평양에 한사군의 낙랑군이 있었다고 한다.

 

아직도 식민사학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도대체 우리의 강단사학자들은 수많은 연행기를 단 한번도 보지 않았단 말인가?

 

연암 박지원은 봉황성이 안시성이 아니라고 단호히 말하고 있다.

 

또한 봉황성은 관구검의 난으로 동천대제가 환도성(今 조양 인근)이 불타자

일시적으로 옮겨 평양으로 불렀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열하(熱河)는 승덕(承德)의 옛 이름으로

화북평원(華北平原)을 내몽골 고원과 갈라놓는 산지 가운데 있으며,

북경(北京)에서 북동쪽으로 약 180㎞ 떨어져 있다.

 

또 란하의 작은 지류인 열하(熱河)강에 면해 있다.

 

'뜨거운 강'이란 뜻의 열하강은 승덕(承德) 위쪽에서

이 강으로 흘러드는 여러 개의 온천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 열하(熱河)가 고구려의 비류국이 있던 곳이며, 고구려의 溫宮이 있었던 곳이며 

고구려 2대 천제인 광명대제가 천도한 국내성이 있었던 곳이다.

 

 

 

- 선비정으로 찾는 遼水

 

 

선비족은 원래 흉노의 후예 중 일파이고 유목을 주로 하는 기마민족으로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며 살았으므로

활동영역 자체가 뚜렷이 정해진 경계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이 주로 활동하는 영역을 일러 鮮卑庭(선비정)이라 불렀다 한다.

 

 

이런 선비정과 관련된 사서기록을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다.

 

「여러 좌방의 왕과 장들은 동방에 거하는데

상곡부터 동으로 조선과 예맥의 접경까지 해당하고,

우방의 왕과 장들은 서방에 거하며 상군부터 서로 월씨와 저강의 접경까지 해당하며,

선우의 정은 대와 운중에 해당하는데 각기 땅을 나누어 가지고

물과 풀을 쫓아 옮겨 다닌다.

 

그 장들이 매년 정월에 單於庭(선우정)에서 小會를 열어 제사를 지내고,

5월에는 ‘篭城(용성)’에서 대회를 열어 조상과 천지귀신에 제사를 지내며,

가을에 말이 살이 쪘을 때는 蹛林(대림)에서 대회를 갖고 사람과 가축의 수를 헤아린다

 

篭城은 龍城(용성)과 같고 左方은 東方이며 右方은 西方이다.」

<사기 흉노전>

 

 

 

 

정양(定襄), 운중(雲中), 오원(五原)은 본래 융적지(戎狄地)이다.

 

趙, 齊, 衛, 楚의 이주민들이 두루 있었다.

 

그 민은 비야하고 예문이 부족하며 사냥을 좋아하는데 안문(雁門) 역시 풍속이 같다.

 

천문별로는 燕에 속한다.

 

운중, 오원부터 동으로 요수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비정이 되었다」

<한서지리지 趙地條>

 

 

정양(定襄)은 지금의 산서성 서북부 大同(대동)과 朔州(삭주) 일대라고 하며,

운중(雲中)은 내몽고 呼和浩特(호화호특) 근방이고,

오원(五原)은 내몽고 서부로서 지금도 지명이 남아 있다.

 

융적지의 趙,齊,衛,楚인들은 강제이주를 당한 사람들이라는 안사고의 주도 있는데

흉노를 몰아내고 내지인들을 이주시킨 것이다.

 

융적지는 ‘선우정’으로도 불리는데 單於庭, 單於之庭, 單于庭 등으로 기술되어 있다.   

 

 

<융적지(선우정)>

 

 

 

 

 

왼편 아래쪽에 神木(신목)이 보이고 장성 표시가 있는데 이것이 진시황 때 몽념이 쌓은 장성이며 그 동단이 황하에서 끝났다(신목의 木자 바로 오른쪽 흐린 선).

 

결국 [한서] 지리지의 趙地라는 것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최대판도를 가리키므로 선비정이란 지역은 전국시대 조나라 최대판도의 강역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교묘한 기술기법을 볼 수 있다.

 

정양․운중․오원이 본래 융적지인데 그것이 후에 전부 선비정이 되었다 하면 될 것을, 가장 동쪽에 위치한 정양을 살짝 빼고 운중, 오원부터 동으로 요수에 이르기까지[自雲中五原以東抵遼水]라고 말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치명적인 트릭에 해당되는데 요수를 조백하에서 요하로 치환하기 위한 것이다.

 

정양이라고 바로 밝히면 요하가 요수(遼水)가 아니라고 바로 알려주게 되기 때문이다. 

 

 

 

「후에 선비대인 <가비능>이 다시 뭇 狄(적)들을 제어하고 흉노고지를 전부 거두었다.

 

운중, 오원부터 동으로 요수에 닿은 지역은 모두 선비정이 되었다.

 

수차 새를 침범하여 변경을 노략하므로 유주, 병주가 괴로웠다

 

注에 「其地東接遼水 〉 그 땅이 동으로 요수와 접한다」<삼국지 오환선비전>

 

 

기원후 오환과 선비족이 할거할 때 <가비능>이란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과거 융적지 전부를 거두어 세력을 떨쳤다는 것이다.

 

이 역시 선비정이 대단히 넓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는데 선비정의 동방인 정양을 숨기려는 앞서의 기술기법과 관련된 것이다.

 

<가비능>뿐만 아니라 후대에는 선비 <단석괴>가 엄청나게 영역을 넓혔다고도 하고 있다.

 

그 기록을 보면 거의 징기스칸처럼 판도를 넓힌 듯이 되어 있다.

 

역시 요수를 조백하에서 요하로 바꾸기 위해 쓴 트릭의 일부인 것이다.

 

 

 

<중국인 학자가 보는 융적지>
 《북경대학중국고대사연구중심, 논문제목 ‘陰山高闕與陽山高闕辨析’, 부제 ‘並論秦始皇萬里長城西段走向以及長城之起源諸問題’, 저자 辛德勇, ‘文史․2005년․제3집’에 게재된 논문 첨부도》 

 

이 지도에서 보면 선비정의 동방인 정양(定襄)이 산서성 서북부에 해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 융적지 내지는 선비정이란 산서성 북부와 그 以西의 今내몽고 중서부에 해당되는 것이다.   

 

[한서] 지리지 趙地條 설명 이후 정양이란 지명은 빠져버리고 「東抵(接)遼水」란 말만 나오고 있다.

 

원래 선비정의 가장 동부는 정양이고 이 지역이 「東抵遼水(東接遼水)  동으로 요수와 닿아 있다」고 해야 할 터인데 애매하게 바꾼 것이다.

 

<선비정>

 

 

 

선비정은 대체로 지금의 산서성과 하북성의 경계로 볼 수 있는 太行山脈의 서쪽으로산서성의 북부와, 섬서성의 북을 흐르는 황하[北河;북하] 넘어 北地(북지) 지금의 내몽고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삼국지] 오환선비전에 이들이 여러 차례 새를 침범하고 변경을 노략하여 하북성 중북부의 幽州(유주)와, 산서성 朔(삭)․代(대)의 남쪽 太原(태원)을 중심으로 하는 幷州(병주)가 괴로웠다는 것이다[數犯塞寇邊 幽幷苦之].

 

산서성 북부까지 뻗친 선비족들이 침입을 하게 되면 당연히 선비정과 접한 산서성 중부(병주)와 하북성 서북부(유주)로 침공하게 되어 있다.

 

위의 [삼국지] 오환선비전 인용문 중에 ‘馬城(마성)’이란 지명은 선비정 중에서 동부인 정양(대동․삭주)의 동남쪽에 인접했던 산서성 代郡(대군) 지명이고, ‘陘北(형북)’은 산서성 안문, 대 근방의 句注山(구주산,西陘山)과 관련된 지명이다.

 

앞에서 중국인학자가 분석하여 제시한 秦末漢初 흉노들이 자주 출몰, 침공한 지역이 곧 전국시대의 융적지이자 후대의 선비정에 해당하는 것이다.

 

 

「건무4년…(중략)…5년 <이흥李興>, <민감閔堪>이 군사를 이끌고 선우정으로 가서 <방芳>을 맞이하여 함께 새(塞)로 들어가 구원현(九原縣)에 도읍하고 오원(五原), 삭방(朔方), 운중(雲中), 정양(定襄), 안문(鴈門)의 5군을 빼앗아 수령을 두고 胡와 군사를 통하면서 북변을 침구하고 괴롭혔다」<후한서 光武紀>

 

정양은, 산서성의 代(대), 鴈門(안문) 등지와 섬서성 동북의 황하를 낀 上郡(상군) 및 내몽고의 운중과 함께 흉노 출몰기록에 자주 등장하고, 우북평도 함께 열거될 때가 있어 우북평이 하북성 서북부, 북경 서쪽이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