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부루(BC128-BC62)의 동부여 건국

 

 

BC94년 해부루가 가섭원에서 동부여를 건국하였다.

 

가섭원(迦葉原)은 분릉(岔陵) 또는 차릉(岔陵)이라고도 한다. 

 

가섭원(迦葉原)은 '수풀이 우거져 사방이 막힌 삼림 지역'이라는 말이고, 

분릉(岔陵)은 '우뚝 솟은 언덕'이라는 뜻이며, 

차릉(岔陵)은 '산맥과 산맥으로 둘러싸인 구릉 지역'이라는 뜻이다. 

 

<북부여기> 4세 단군 고우루(덕황) 조(條)에 의하면 

국상 아란불이 고우루에게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通河之濱 迦葉之原有地 통하 강가에 가섭원이라는 땅이 있다."고 하였다.

즉, 가섭원(迦葉原)은 통하(通河)강가에 있다는 말이다. 

 

 

彊圉淵黙 禾母賔天 存公下降

存之存之 夫余之名 可以存之

帝叔夫婁 爰自故國 移于加葉

生木為柵 死貝為陵

五穀豊盛 魚鼈無盡

一年成邑 三年成都

貝為洛陽 柵為長安

桑海之濱 罽山之隅 

- 박창화 필사본 <추모경>

                       

강어연묵(丁亥 BC94년)에 화모(禾母)는 하늘로 오르시고 존공(存公)은 하강하시니,

보전하라! 보전하라! 부여의 이름이 지켜질 수 있으리니.

제숙 부루가 고국에서 가섭으로 옮기시니,

생나무가 울타리가 되고 죽은 조개가 능이되었구나.

 

오곡이 풍성하고 어별이 무진장하니,

일 년 만에 읍을 이루고 삼년 만에 도읍을 이루었구나.

조개는 낙양이요 울타리는 장안이라,

상해(桑海)의 가장자리이고 계산(罽山)의 모퉁이로다. 

 

 

* 참고

 

禾母 : 모수제의 모친

存公 : 모수제의 子 解存(BC94년생)

鼈 : 물고기와 자라

 

 

東扶餘

北扶餘王解夫婁之相阿蘭弗 夢天帝降而謂曰 將使吾子孫立國於此 汝其避之

(謂東明將興之兆也) 東海之濱 有地名迦葉原 土壤膏腴 宜立王都

阿蘭弗勸王移都於彼 國號東扶餘  - <三國遺史>

 

동부여

북부여 왕 해부루의 재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 일컬어 말하기를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자하니 너는 이곳을 떠나거라.

(동명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일컫는다).

동해 가에 가섭원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지니 왕도를 세우기 알맞은 곳이다.”

아란불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다.

 

해부루는 북부여 덕황 고우루의 동생으로 모수제의 숙부이다.

 

漢 武帝 劉澈(BC157-BC87, 재위 BC 140-BC87)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 군현을 설치하여, 부여와 다투고 있을 때,

부여의 제후국들은 약해진 천제의 힘을 틈타 서로 다투게 되고,

해부루는 고국원을 떠나 가섭원으로 이동하여

짧은 기간 안에 터전을 잡고 강국을 건설하게 된다.

 

가섭원은 훗날 발해의 상경 용천부이고, 거란의 황룡부인 임황(臨黃)이 되었다.

 

 

 

 

 

* 참고<漢 武帝 劉徹>

 

생몰년도 BC156 - BC87

재위기간 BC141 - BC87

 

<유방劉邦>을 시조로 하는 한제국(漢帝國).

그 7대째가 바로 무제(武帝)<유철劉徹>이다.

 

고조 <유방>의 증손에 해당하며 건국 때부터 60년에 걸쳐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판도를 넓혀 웅재대략(雄才大略)으로 평가되는 무제(武帝)는

부친 경제(景帝)의 죽음으로 16세에 즉위하였다.

 

즉위 당초 무제는 젊은이답게 당시 유행하던 유교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에 적용한다.

 

그러나 이를 싫어한 <두태후竇太后>에 의해 무제가 발탁한자들은 면직당하고

정치의 중추는 조모의 뜻대로 움직이는 자들로 채워지고 말았던 것이다.

 

청년 황제는 우울함을 떨치려는 듯이 궁전을 빠져나와 젊은 내시들이나

상류층 자제들과 함께 근교의 산야를 달리며 수렵으로 날을 지새웠다.

 

누이인 <평양공주平陽公主>가

무제에게 기녀인 <위자부衛子夫>를 소개한 것도 이때였다.

 

<위자부衛子夫>는 총애를 받아 훗날 <방태자房太子>를 낳고 황후가 된다.

 

또한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한 것은 무제가 18세일 때였다.

 

<장건>은 13년이 걸려 파미르 서쪽까지 갔다 귀국하여

무제에게 귀중한 서역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22세에 <두태후>가 죽자

무제는 간신히 스스로의 생각에 따라 정치를 행하기 시작한다.

 

널리 인재를 구하고 상인출신의 <상홍양桑弘羊>이나 <동방삭東方朔>,

도적 출신의 <사마상여司馬相如> 등을 등용하는 한편

고조 이래 한조의 우환이었던 기마민족 흉노(匈奴)를 몰아내고

개국 이래의 전과를 올린 것이 위자부의 동생인 <위청衛靑>이었다.

 

<위청>은 이후 총 일곱 번의 출병에서 패배를 모르고

훗날 더욱 천재적인 장군인 <곽거병藿去病>이 나타나

그들의 활약에 의하여 흉노와 한의 관계는 역전된다.

 

화려한 영광에 둘러싸인 <위청>ㆍ<곽거병>의 뒤에는

<이광李廣>, <이릉李陵> 등의 비극이 있었던 것을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마천司馬遷>은 사기에 기록하였다.

 

무제의 대 흉노전은 <곽거병>의 病死와 함께 종결된다.

 

무제는 요절한 거병을 안타깝게 여겨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자신이 묻힐 묘소 한구석에 총애했던 젊은 장군을 묻었다.

 

어쨌든 흉노의 불안을 제거한 무제는 남방이나 조선(朝鮮)에까지 판도를 넓히고,

또한 명마를 원하여 실크로드의 도시들까지도 지배하에 넣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상홍양 들의 경제정책에도 불구하고

한의 재정은 파탄에 이르고 있었다.

 

또한 무제는 젊은 시절부터 신성이나 불로불사를 좆아 방사(方士)들을 가까이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혹리(酷吏)로 불리는,

무제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법가(法家)적인 관료군이 출현하여

그중 하나인 <강충江充>이 무제 만년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원인은 무제 곁에서 권세를 휘두르던 강충이

황태자나 그 측근들의 원한을 산 일 이었다.

 

무제의 사후를 두려워한 강충은 늙어가며 더욱 강해진 무제의 의심을 이용하여

무고사건을 연출하고, 고관중신들과 그 일족을 차례로 고발하였다.

 

황태자를 노린 것이다.

 

이를 깨달은 황태자측은 무제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먼저 거병하여 강충들을 죽이고 장안長安을 장악하려 하였다.

 

그러나 태자 반란의 급보를 들은 무제에 의해 진압당하여 황태자는 자살 한다.

 

난에 가담한 자들은 차례로 처형당하고, 위황후도 자살하였다.

 

그러나 훗날 황태자의 무죄를 주장하는 자가 나타나 겨우 진상을 깨닫게 된 무제는

이번엔 태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처형하고

사자궁(思子宮)을 지어 황태자의 제사를 지냈다.

 

기쁨과 즐거움이 지극하건만 슬픈 마음 만 든다.

 

젊음은 몇 해이런가? 늙는 것을 어찌 하리

 

이는 무제가 44세일 때 읊은 『추풍사秋風辭』의 한 구절이다.

 

만년의 심정이 이보다 어울리는 시구는 없으리라.

 

죽음을 맞은 무제는 막내아들을 후사로 세우고 곽거병의 동생인 <곽광藿光>과

<김일제金日磾>, <상관걸上官傑> 세 명에게 맡긴 뒤 세상을 떠났다.

 

무제의 묘는 장안교외에 있다.

 

무릉(茂陵)이라 불리는 그곳에 총애 받았으나 요절한 <이부인李夫人>,

<위청>, <곽거병>들에게 둘러싸여 일대의 제왕은 잠들어 있다.

 

한나라 제7대 황제 무제는 위대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잦은 정벌로 인한 국가 경제의 피폐와

황태자와 재상들을 비롯한 숱한 죽음이 있었다.

 

漢代는 참위의 세상이었다. 그만큼 무고(巫蠱)의 사건이 많았다.

 

특히 무제 시절에는 더욱 심하였다.

 

진황후, 제읍공주, 양석공주, 장군 공손오, 승상 공손하, 승상 유굴리,

장군 위청의 아들 위항 등은 모두 무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다.

 

심지어는 황태자의 죽음도

趙나라 무고쟁이 강충(江充)의 거짓말에서 발단한 것이었다.

 

무제가 죽고 즉위한 것은 후궁 권부인의 아들 8살짜리 불릉(弗陵)이었다.

 

무제는 후사를 곽광(霍光), 김일제(金日磾),상관걸(上官桀)에게 맡겼다.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함인지 그의 어미는 이미 사사(死賜)되어 없었다.

 

그러니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燕왕 단(旦)이 거병하여 국내가 소란해졌다.

 

다행히 조기에 수습되었으나 김일제가 죽은 뒤 곽광과 상관걸의 암투가 벌어지면서

피비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곽광에 의해 상관걸의 집안은 풍지박산이 나고

곽광의 외손녀인 열한살의 상관(上官)황후만 겨우 살아 남았다,

 

또한 무제 시절부터 수속도위로 경제를 맡다가 어사대부로 있던

<상홍양>도 주살당했다.

 

뜻밖에도 소제가 21세의 나이로 죽었다.

 

<곽광>이 나서서 창읍왕 <유하(劉賀)>를 즉위시켰으나 곧 폐위시켰다.

 

이제 천하는 무제가 가장 신임했던 <곽거병>의 배다른 동생

<곽광>의 손에 들어온 셈이다.

 

 

한무제의 대흉노전을 살펴보면 한무제는 기개도 좋았고 전략도 나쁘지 않았으나, 

적절하게 멈추거나 현명하게 물러설 줄 몰랐다. 

 

결과론이긴 하지만, 흉노를 밀어내고 감숙성과 오르도스 지역을 장악하고,

한나라의 군현까지 설치했으면, 그것을 잘 보존할 전략을 세웠어야 하는데,

마치 전쟁광이 된듯이 끝없이 출병을 한 것이다.

 

결과는 40년간 계속되는 흉노와의 전쟁으로 한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다.

 

40년 전쟁을 거치는 동안 한나라의 인구가 4천만에서 2천만으로 줄어버린다.

 

전사한 것만으로 줄어버린 게 아니라 국경을 넘어 나라를 떠나버리기도 하고,

농토에서 떠나 유랑을 하기도 하는 등등

세금징수가 가능한 인구의 손실이 엄청났던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박원길 교수의 묘사가 참으로 눈물겹게 실감난다.

 

흉노와 한무제의 정면 충돌의 결말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

 

사랑하는 처의 환송을 받으며 떠나간 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3년이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기뻐했을 중원의 어머니들,

그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를 환송했던 자식도 징집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새옹지마라 했던가,

떠나가는 그들을 몰래 숨어 눈물 속에 바라봐야만 했던

다리 아픈 청년이 마을에 남은 유일한 남자가 되었다.

 

조상이 물려준 그 수많은 부의 유산을 일시에 상실한 한무제는

군비의 갹출에 혈안이 돼 있었다.

 

시대가 미치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소금과 쇠로 된 쟁기나 밥그릇까지 세금을 매기는

기막힌 코미디가 벌어졌다.

 

이 아이디어를 낸 자가 상홍양(桑弘洋)이라는 소년으로,

그는 일약 13세에 시중이라는 고위 재무관료에 특채되었다.

 

상홍량 일파가 밀어부친 극악한 재정수탈정책

이후 염철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국가전매 제도의 효시와 경전이 되었다.

 

사태가 이러할진대 웬만한 범법행위는 돈만 내면 해결됐다 ......

 

백이 있는 자들은 최전선까지 잠자리를 같이 할 여인을 데려왔다.

 

훈장과 특박을 받는 자들은 전부 백이 있는 자들로 한정되었다.

 

문서로 보면 전쟁에 이기고 있는데,

그곳에 가보면 권력자 출신의 사병들이 대장을 부려먹고 있는

한심한 현실만이 있을 뿐이었다.

 

제자백가들이 탄생시킨 중원의 이념(필자의 의미로는 군현제와 법가를 말하는 것)은

이제 철저히 붕괴되었다......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모두가 모르게 되었다.

 

또 전쟁을 계속하고 싶어도 돈과 사람이 없었다.

 

당시 중원의 인구는 4천만에서 어느덧 2천만이 되었다.

 

중원문명이 시작한 이 전쟁은 이제 부패한 전쟁이 되었다.

 

그러나 끝내고 싶어도 상대가 OK할 때까지는 끝낼 수 없었다.

 

이 상황을 극명하게 나타내 주는 것이

바로 마지막 명장 이릉(李陵) 장군의 흉노 투항이었다.

 

그리고 이 투항사건을 계기로 당대의 양심있는 지식인 사마천

한무제의 북방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짐승처럼 거세 당하면서도 왜 중원문명이 붕괴되어 가는가를

후세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 진실을 남기기를 원했다.

 

그 멸망의 전과정이 바로 사기(史記)의 한 장인 평준서(平準書)

핏물처럼 수록되어 있다 ..................................

 

한무제는 실패를 자인했다.

 

도대체 왜 싸웠는지를 몰랐다.

 

전쟁의 와중에서 황태자와 궁궐 내에서 혈전까지 벌여야 했던 그의 비극적인 운명,

 

그 모든 자책이 BC 89년 4월에 발표된 애통의 칙서

<윤대(輪臺)의 조서>애절하게 실려있다.

 

윤대의 조서는,

한무제가 내린 조서로서 더이상 흉노와의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게 핵심이다

 

그리고 2년 뒤 한무제는 파란만장한 이 세상을 버리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중원과 초원의 문명 간에 벌어졌던 제2차 진검승부는

양측 모두의 몰락을 낳으며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 참고 <사마천의 史紀>

 

 

- 한(漢)나라 무제(武帝, BC156~ BC87)의 사관(史官)

<사마천(BC 145~BC90)이 조작한 기자조선(箕子朝鮮)

 

 

한중 고대사를 날조한 기록상의 첫 인물은

2,100년 전 한나라 때의 사관(史官)인 사마천이다.

 

사마천은 한무제가 전쟁에 참패하고 돌아온 시기에, <사기史記>를 저술하였다. 

 

사마천은 [사기]<본기本紀>에서 조선이라는 호칭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제후국의 역사를 다룬 <세가世家>에서

'封箕子於朝鮮’ 이라 하여 갑자기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썼다.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중국 사가들은 조선 역사가

약 3,100년 전 중국의 제후국이었던 기자조선에서 시작된 것으로 정의한다.
 
상서대전(尙書大典)과 사기(史記) 등에서 전하는 기자조선의 내력은 이러하다.

 

주나라의 건국자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箕子>를 풀어 주었다.

 

이때 <기자>는 주나라에 의해 풀려난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조선으로 떠나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무왕이 그를 조선 왕으로 봉하였다.

 

그런데 제후로 봉해진 이후의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상서대전>은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후 신하의 예를 행하기 위해
주나라를 찾아가 무왕에게 홍범구주에 대해 설명하였다고 한다.

 

반면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았지만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而不臣也)’라고 기록하였다.

 

‘기자를 제후로 임명했다’는 말 바로 다음에 ‘신하로 삼지는 못했다’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후가 되면 당연히 신하가 되는 것인데도 그와 상반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기자箕子>라는 인물이 조선 왕으로 봉해진 역사적 사실은 전혀 없었다.

 
 
중국 산동성 조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Km 정도 가면

왕성두촌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 마을 들판 한가운데에 작고 초라한 모습의 <기자箕子>의 묘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떠나버렸다(走之朝鮮)’는 구절이다.

 

이것은 동방 땅에 그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천명하는 내용이다.

 

 

기자가 망해 버린 고국을 떠나 이웃나라 조선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이 기자조선을 내세워 단군조선을 숨기려 하였으나,

오히려 더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기자조선은 한민족사를 그 출발부터 중국사에 예속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중국이 날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기자箕子>는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더불어 당시 상나라의 삼현(三賢)이었다.

 

<비간>은 상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에게 정치를 간하다가 사형되었고,

<미자>는 <비간>의 죽음을 보고 멀리 도망쳤다.

 

<기자箕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사 감금되었다.

 

<기자箕子>는 고조선 서쪽 변두리를 맴돌았을 뿐

한반도 지역으로 넘어 온 적이 없건만,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그대 나라에 기자箕子의 묘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 후 고려 숙종 7년(1102) 예부상서 정문(鄭文)이

무주고총(無主古塚)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서경(평양)에 가짜 기자묘(箕子墓)와 기자 사당을 만들었다.
 
또한 서경의 반듯한 도로 흔적들을

기자(箕子)가 만들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기자 정전터와 평양 을밀대 북쪽에 있던 기자묘를 조사하면서

그 허구가 밝혀졌다.

 

기자 정전터는 고구려시대 도시 구획 흔적이었고,

기자묘에서는 사기 파편과 벽돌조각만 나왔다.

 

<기자箕子>에 대한 진실은 그는 무왕에 의해 풀려난 후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당시 번조선의 국경지역인 산서성 太原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BC 1112년에 번조선의 제후국인 수유국을 세운다.

 

 

 

- <사마천>이 궁형을 받은 이유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발전을 도모하고 있던 한 무제.  

 

그 전까지 열세였던 흉노와의 대외관계를 역전시키기 위해

대(對) 흉노 정책을 ‘공세(攻勢)’로 전환함.  

 

이에 따라 대대적인 흉노정벌 단행됨.

 

이 과정에서 무인 집안 출신의 이릉(李陵) 장군도 정벌에 나섬.


장수들 사이의 알력과 충돌 탓에

이릉 장군의 5,000결사대가 그만 적진 깊숙한 곳에서 고립됨.

 

당시 흉노의 군사는 3만 명이었음.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는 고사성어가 이 때 나옴,.

 

이릉 장군 군대는 몇 차례 승리를 거뒀지만

결국 5,000결사대 가운데 400명만 살아남음.

 

결국 흉노에 포로로 잡힌 이릉 장군도 항복하게 됨.

 

한나라 조정은 매국노 이릉을 성토하는 장으로 변함.

 

하지만 사마천은 ‘이릉은 중과부적으로 어쩔 수 없이 거짓항복한 것이며

그는 훌륭한 장수다’라고 변호함.

 

그런데 이 발언이 한무제를 분노케 함

 

사마천은 여느 관리처럼 잔머리를 쓰는 그런 양반이 아니었음. 

 

사마천은 이릉이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이릉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한나라 군의 작전 실패에 그 원인이 있었음을 지적함.

 

나아가 책임의 일부는 군 최고 사령관에게 있음을 지적.

 

문제는 군 최고 사령관이 한무제의 처남인 이광리(李廣利)라는 점

 

한무제의 애첩 이부인(李夫人)의 오빠인 이광리 장군에 대한 비판은

곧 한무제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짐.

 

결국 괘씸죄에 걸린 사마천은 한무제에 의해 ‘황제를 무고한 죄’로 옥에 갇히고 마는데,

이 때 사마천의 나이 48세.

 

이후 상황도 사마천에게 불리하게 돌아감.

 

이릉이 흉노에게 병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헛소문이 돌았음.(첩첩산중, 설상가상)

 

화가 난 한무제는 먼저 이릉의 가족을 몰살시킨 다음, 사마천에게는 사형을 명했음.,

 

당시 한나라 법에 따르면 사형을 면하는 방법은 두 가지 뿐임. 

 

첫번째 방법은 목숨값으로 50만전을 내는 방안. 일명 속전(贖錢)

 

두번째 방법은 궁형. 한마디로 남성을 잃고 내시가 되는 것.

 

궁형은 중국의 10대 혹독한 형벌 중의 하나.

 

궁형 외에 다른 9개의 혹독한 형벌은 육체적인 형벌에 그쳤지만,

궁형은 심리적, 정신적 고통까지 수반되는 치욕의 형벌이었음.


사마천은 속전을 감당할 돈이 없었다.

 

사나이로서 깨끗이 목숨을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마천은 궁형을 자처했다. 왜 그랬을까?

 

다름아닌 아직 완성하지 못한 <사기> 때문이었다.

 

궁형을 자청하던 때 사마천의 나이 49세(BC 96).

 

사마천이 51세 때 쓴 친구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그가 당시 얼마나 치욕감을 느꼈는지를 알게 해 준다.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 묘소를 참배할 수 있을지,

하루에도 아홉 번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가만히 집에 앉아 있으면

멍하니 무엇인가를 잊은 듯 어처구니가 없고

자꾸만 부끄러워져 언제나 등골에 땀이 흘러 옷을 적신다네”

 

하지만 사마천은 자신의 의지를 친구 임안에게 다음과 같은 명언으로 남김.


“사람의 죽음 가운데에는

아홉 마리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 것 같이 가벼운 죽음이 있는가 하면   

태산보다 훨씬 무거운 죽음도 있다네.”

 

아홉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를 뽑는다는 ‘구우일모’(九牛一毛)의 죽음이란

얼마나 보잘것 없는가.

 

사마천은 같은 죽음일지라도 태산처럼 무거운 죽음을 택했다.

 

궁형의 치욕으로 이미 죽은 육신이지만

정신만은 오롯이 살아 청사에 길이 빛날 사서를 쓰겠다는 결심이

‘대장부 사마천의 태산과 같은 선택‘이었다.

 

요즘이야 컴퓨터 자판으로 책을 쓰면 되지만,

당시 사마천은 52만 6,500자의 <사기>를 대나무를 얇게 오린 죽간이나

나무를 얇게 오린 목간에 일일이 붓으로 써야만 했음.

 

그것을 끈으로 연결하면 책(冊)이 되고, 이 책을 둘둘말면 권(券)이 되는 것임.

 

사마천은 42세이후 56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14년에 걸쳐 <사기>를 완성한 것으로 추정됨.


궁형을 계기로 <사기>의 세계관이 크게 바뀜.

 

궁형 전까지는 한제국과 한무제를 찬양하는 교향곡이었음.  

 

하지만 궁형 이후 <사기>에는 한제국과 한무제를 비판하는 시각이 들어가게 됨.


특히 사회의 곪아 터진 부분과

권력층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지적하며 세태를 풍자했음.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天刑)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 당하고
인생을 거세 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 박경리 <사마천>    
  

 

 

 

 

 - 중국인들의 역사 기록법

 

공자가 노나라 242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하여 <춘추春秋>로 이름 지었는데,

 

이 책은 주나라 왕실을 종주로 삼는

대일통(大一統) 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그 후 중국 사서들은 이 <춘추>를 역사 서술의 표준으로 삼게 되었는데,

중국 사서의 편찬 원칙은 다음 세 가지의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 요약된다.
 
첫째, 중국에 영광스런 일은 한껏 부풀려 쓰면서 수치스런 일은 감추고(爲國諱恥)
둘째,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리고(尊華攘夷)
셋째,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祥內略外)
 
춘추필법은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법이지만,

사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에 충실한 필법이다.

 

사마천 이하 역대 중국의 사가들의 잘못된 춘추필법을 지적한 것은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그는 [조선사연구초]<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에서

중국 역사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사마천을

“공자 춘추의 존화양이, 상내약외, 위국휘치 등의 주의를 굳게 지키던 완유(頑儒)”

라고 혹평하였다.

 

 

 

 

- 중국 역사학자들의 잘못된 시각을 지적한 중국 초대총리 주은래

 

 

1963년 6월28일 <주은래周恩來>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중국과 조선, 두 민족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으로 중지 될 때까지

3, 4천년 이상 매우 긴 시간이었다.

 

이러한 역사연대에 대한 두 나라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원인이다.

 

그리하여 많은 문제들이 불공정하게 쓰여졌다.

 

먼저 양국민족의 발전에 대한 과거 중국 일부 학자들의 관점은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었고 그다지 실제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족이 거기서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것은 모두 증명할 수가 있다.

 

경백호 부근은 발해(渤海)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한 발해의 수도였다.

 

여기서 출토된 문물이 증명하는 것은

거기도 역시 조선족의 한 지파(支派)였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족이 조선반도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요하, 송화강 유역에서도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

 

항상 봉건대국의 태도로 당신들을 무시'모욕하면서…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떤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고 조상들의 몫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런 현상은 인정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래서 반드시 역사의 진실성을 회복해야한다.

 

역사를 왜곡할 수는 없다.

 

도문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이래 중국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다.


중국의 이런 대국쇼비니즘이 봉건시대에는 상당히 강했었다.

 

다른 나라에서 선물을 보내면 그들은 조공이라 했고,

다른 나라에서 사절을 보내 서로 우호교류할 때도 그들은 알현하러 왔다고 불렀으며,

쌍방이 전쟁을 끝내고 강화할 때도 그들은 당신들이 신하로 복종한다고 말했으며,

그들은 스스로 천조(天朝), 상방(上邦)으로 칭했는데 이것은 바로 불평등한 것이다.

 

모두 역사학자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

 

우리를 이런 것들을 바로 시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중국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여러분들 과학원 분들이

중국,조선관계사 문제에 대해서 공동으로 연구하면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중략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