紅毛鷄春,禾相如胡,賈達東来,且鞮之女.

相爲之妻,帝爲之妃.壺衍新立,

其母不正,二王不朝,龍城孤危.

燕旦稱臣願爲白耳,帝以壺新留之不决.

盖長私客五歲入宮,桀光爭道,旦乘其間.

- 박창화 필사본 <추모경>

 

홍모(丁酉,BCE84)년 계춘에 <화상禾相(慕漱帝之姨從兄)>이 호胡(흉노)로 가서

<가달賈達>을 동쪽으로 데려왔더니 <저제후且鞮侯(匈奴선우,狐鹿姑之父)>의 딸이었다.

 

화상이 그녀를 처로 삼았다가, 제(慕漱帝,禾相之姑從弟)께서 그녀를 비로 삼으셨다.

 

<호연제壺衍鞮(狐鹿姑之子,左谷蠡王이었음)>가 새로이 보위에 올랐다.

 

그 어미가 옳게 하지 않아서(閼氏가 <호록고狐鹿姑>선우의 遺命을 따르지 않아서)

두 왕들(左賢王과 右谷蠡王)이 알현하지 않았더니,

용성(龍城)(匈奴들이 天祭를 지내는 터)이 고립되고 위태로워졌다.

 

연燕왕 <유단劉旦>이 신하를 칭하며 백이(白耳)가 되길 원하매,

천제(慕漱帝)께서 <호연제>가 새로 보위에 올랐음에

<유단>이를 눌러 앉혀서 곁을 떠나지 않게 하셨다.

 

개략 <장長>공주가 객客과 사통(私通)하길 5년 만에 입궁하매,

<상관걸上官桀>과 <곽광霍光>이 도리道理를 다투고,

<유단>이 그 틈을 노렸음이었다.

 

호(흉노)를 다스리던 차제후(且提侯, BC101~BC97 재위)선우에게

가달(賈達)이라는 딸이 있었다.

중원의 강력한 세력인 한(漢)을 상대하기 위하여 오빠인

호록고(狐鹿姑, BC97~BC85 재위)선우는 부여와의 동맹을 원하였고

이를 위하여 가달을 북부여의 차기 계승자인 모수제에게 시집 보내게 되는데

이 때가 북부여 법황 28년 정유년(BC84)이었다.

 

법황이 그녀를 맞이하라 보낸 신하가 화상(禾相)이란 자였는데

가달을 모시고 적동삼호(磧東之三湖)를 지나오다가 비를 만나

잠시 머무르는 사이에 그만 둘이 눈이 맞았다.

둘이 좋아 죽고 못사니 법황은 가달을 화상에게 처(妻)로 하사하였으나

애초 호록고의 목적이 그게 아닌지라 법황에게 강력히 항의하게 되고

법황은 어쩔 수없이 가달을 해모수의 비로 삼게 된다.

 

 

* 참고 <후비열전 가달(賈達)>

 

<가달>황후는 호(흉노)왕(單于) <저제후>의 딸로,

그의 오빠 <호록(호록고선우)>이 죽음에 앞서서

자기 아들 <호연(호연제선우)>에게 이르길

한(漢)인들은 속임수가 많으니 동쪽의 <부여>와 결연하는 것만 같지 않다 하였더니,

이에 <가달>을 <수제>에게 바치니, 때는 즉 <법황(법제)>28년 정유년(BCE84)이었다.

 

<화상>에게 명하여 가서 맞아오라 하셨더니,

<화상>이 <가달>과 함께 적동3호(磧東三湖)에 다다라서

비雨를 만나 체류하더니만,

<화상>이 춘심이 발동하여 <가달>과 상통하였고 돌아와서 이실직고하였다.

이에 <화상>에게 처로 삼아 하사하였더니,

<호록>이 사자를 보내와서 힐문하면서 <수제>에게 명하여

<가달>을 취하여 비를 삼으라하였어도, 도리어 <화상>과 계속하여서 좋아지내더라.

 

이 시절,

<법제(법황)>는 <구>공주를 아껴서 정사의 많은 것이 그녀의 손에서 나왔더니,

<가달>이 <구>공주에게 아부하며 달라붙어서 <화상>을 등용하여 정사를 보았더니,

<법제> 또한 <가달>에게 승은을 내려 딸 <화수>를 낳고,

이어서 <화영>을 낳으니 <수제>의 딸이었고,

이어서 <화악>을 낳으니 <화상>의 딸이었다.

 

을사년(BCE76)에 <법제>가 죽고 <모수제>가 즉위하시어

<양성>・<양방>・<호릉>을 3후로

<가달>・<호인>・<환숙>・<우희>・<추영>을 5비로 삼았다가,

이미 <호릉>은 제의 딸이 되었다 하여

<호릉>의 어미 <옥인>으로 <호릉>을 대신하는 셋째 천후로 삼고

<호릉>은 단지 공주로 봉하였어도

총애하기는 <양성>과 <양방>보다 더하였더라.

 

수제는 <구>공주가 <법제>가 총애하심을 믿고 성지를 거스름이 많았더니,

폐하여서 외딴 방에 가두었더니.

이때, <오환>왕 <정위>가 처를 잃고 배필을 구하기에,

<가달>이 제를 설득하여 말하길

“형제는 손과 발이니 비록 작은 결함이 있어도 어찌 폐하여 가두십니까?

<오환>은 서방의 강국이고,

<정해>는 제 어미의 남동생이오니 결연하여 형제로 되시면

한(漢)을 제압하기에도 좋을 것이옵니다."라 하였더니,

상께서 그렇겠다고 여겨서 마침내 <구>공주를 <정위>에게 처로 주었더니,

때에 <구>의 나이 서른다섯에, 아직 아들을 하나도 낳지 낳았던지라 스무 살 같았더니,

<정위>가 그녀를 사랑하여 아들 <정오>를 낳았으며

그의 딸을 <각>공에게 처로 주었더라.

 

딸 <화영>과 아들 <화만>은 <화상>의 자식이고, 아들 <해보>는 <수제>의 자식이라.

을묘년(BCE66) 봄에 <양성>이 죽고 <옥인>이 물러나니,

<미화>와 <가달>이 3후들에 끼어들고

제에게 권하여서 <타리>를 불이천왕(부여천왕)을 삼고

이어서 <타리>의 처가 되어 <불이국(부여국)>의 정사를 멋대로 주물렀으니,

개략 <화상>시절 이래로 주물렀음이었다.

 

<저제후>의 동생 <괴리槐里>가 <선비>의 딸 <왕부흥>의 지아비가 되어서

<타리>를 낳았더니, <타리>는 <가달>의 4촌이고,

가달의 어미 <부오>는 <화상>의 4촌 동생이며,

<부오>의 어미는 <화>태후의 여동생이 되었던 까닭에,

역시 <수제>의 4촌 여동생이라며 이런 까닭에 <타리>가 <화상>의 아들이 되어서

<화수>를 취하여 처를 삼았더니,

이때 <화수>는 나이가 아직 적어서 정사를 감당하지 못한다 하고

<가달>이 이어서 2세비의 일을 행하였더니,

천제의 3후로 그 나라의 정사를 봄은 <옥인>때로부터 비롯되었음이라.

 

<타리>가 천후를 처로 삼고 때를 저울질하며 천하를 뒤엎으려하매,

그리고 제를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성지를 거역함이 많았음에,

<가달>이 문득 의를 깨닫고서 비록 <타리>를 사랑하나

부제夫帝(漱帝)에게 충성하여 저녁에는 필히 잠자리를 시중하고

낮에는 <타리>와 더불어 놀아주었더니,

<타리>는 이에 족하지 아니하여 끝내 <가달>의 잠자리 시중을 빼앗았고,

천제께서는 말리지 못하셨더라.

 

3후들이 유명무실하였던 까닭에 <가달>이 번번이 대낮에 상께 즐거움을 드렸더니,

<타리>가 노하여 <가달>을 때리면서 말하길

“복이 다한 천제를 그대는 왜 사랑하는 것이오. 내 몸을 더럽히지 마시오."라 하였더니,

<가달>이 “천제는 천신이지 사람이 아니오.

그대가 만약 천제를 업신여기면 반드시 망할 것이오."라 하였더라.

 

<타리>가 <왕인>을 죽이고서 <추영>을 빼앗고 <왕불>을 아들로 삼더니,

<가달>이 애써서 말려도 듣지 아니하고 천제를 돼지나 기르는 벌판에다가 옮겨놓으매,

울부짖으며 싸우듯이 말렸더니,

<타리>가 대노하여 죽이려 하였으되 스스로는 할 수 없어서

<왕불>에게 명하여 참하게 하였더니,

<왕불>이 <가달>의 미모에 혹하여 죽이지 못하고서 끌고 가서 통정하니,

<가달>이 처음엔 반항하다가 종당엔 순응하며 <왕불>에게 이르길

“그대가 만약에 천제를 돕고 도적놈을 토벌하면,

나는 응당 그대의 처가 되어서 평생토록 즐거움을 함께 하리라."라 하였다.

이에 <왕불>이 크게 기뻐하며 <타리>를 멸하겠다고 서약하였다.

 

<타리>가 <가달>을 고쳐 생각하고 다시금 <가달>을 빼앗아서 총애하였더니,

이에 <왕불>이 더욱 노하여서 이윽고 불이(불이성, 부여성)를 함락하니,

<가달>의 신하 <고섭>이 몸에 수많은 부상을 당하면서

<가달>을 보호하여 <타리>에게 다다랐더니,

<타리>가 <고섭>을 세워 둔 채로 참하고서

“성을 빼앗기고 물러났으면서, 안전하게 돌보았다고 명분을 삼다니."라고 하였더니,

이에 <가달>이 가슴을 치고 울면서 이르길

“이 화는 그대가 천제를 공경하지 않아서 당한 것이오! <고섭>이 무슨 죄요?!

<고섭>은 어릴 적부터 내 신하가 되어서 내게 충성하여 오다가

그대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소?!

내가 <화상>에게 권하여서 그대를 보위에 세우고 아들로 삼게 하였더니,

그대가 지금 도적이 되어서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죽어서 <화상>을 어찌 뵐 수 있겠소?!"라 하였더니,

 

<타리>가 대노하여 <고섭>을 벤 칼로 <가달>을 후려쳤더니,

팔이 떨어지고 피가 솟았으며 입에서 욕하기가 떨어지지 않으면서 죽어 갔더니.

<왕불>이 와서 보고 끌어안고 통곡하며 말하길

“내가 그대를 위해서 이리하였는데, 그대는 왜 죽었단 말이오?!"라 하고는

<가달>의 살갗(또는, 옷)으로 잠자리를 삼고

유골은 황후의 예로 <화상>의 곁에 후히 묻어주었다.

 

<동명>11년(BCE27) 8월에 상께서 <화영>후와 더불어 <가>후의 릉에 친히 제사하며

이르시길

“<선우>의 딸이오, 천제의 처라. 만고의 영웅이오, 절대가인이셨다."

“지금은 편안하신지 내 마음이 아픕니다."라 하시고는

뜨거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시더라.

 

<화수>가 <가달>이 애용하던 옥 반지와 금팔찌를 바쳤더니,

상께서 사랑스레 만져보시며 <화수>를 돌아다보고 이르시길

“그대 어미가 살아계셨으면 내가 응당 후로 삼았을 것이오."라 하시고는

“내 처들 중엔 그대의 어미와 방불 할 이가 없다."라시며 한숨짓고 한탄하시더니

을묘년(BCE66)의 3후들을 평하시면서

“<가>후는 영웅이니 첫째요, <방>후는 열녀이니 둘째요,

내 처들은 흐물흐물한 여인들이니 나와 같아서 평범한 이의 처로는 최적이오."라 하여

<미화>를 놀리시더라.

 

<가달>후의 다섯째 딸인 <타선>은 <타리>의 딸이오.

셋째 아들 <왕산>은 <왕불>의 아들이라.

 

신사년(BCE100)에 태어나서 경신년(BCE61)에 죽었으니 춘추 사십이라.

<호>인들이 오가다가 릉 곁을 지나게 되면 필히 절하고 <사직릉>이라 하였더니.

아마도 후가 혼인하여 올 적에 자매들이 무슨 일로 먼 곳으로 시집가느냐 하니,

후가 사직을 위한 계책이라 하였음에 이 이름을 얻게 된 것이나,

후세 사람들은 릉이 있는 촌락을 <사직촌>이라 하면서도 그 연유는 모르더라.

 

 

* 참고 가달(賈達)의 가계도

 

且鞮侯(?-BC96)

胡 재위 BC101-BC97

 

부오(夫奧)          賈達(BC100-BC61)

                                BC84년 부여로 옴

                               법황(BC138-BC76) - 화수禾穗(BC83- )

                                                                   화영禾潁(BC80- )

                               禾相                          - 화악禾萼(BC77- )

                               모수제의 외사촌       화영禾英(BC74- )

                                                                   화만禾滿(BC70- )

                               慕漱(BC118-BC59) - 보簠(BC67- 

 槐里( ?-BC54) -   佗利(BC85-BC61)   - 타선

 且鞮侯 弟             旺弗(BC78- )           - 왕산

 

                           狐鹿姑(? -BC84) -    壺衍鞮( ?-BC68)

                           胡 재위BC96-BC85  胡 재위BC84-BC69

                           가달의 오빠

                                                             虗閭權渠(BC98-BC60)

                                                             胡 재위 BC68-BC61

                                                             금禽(BC96- ) - 呼韓邪(BC79- )

                                                             모수제 2녀       胡 재위 BC58-BC32

                                                             呼延渠

                                                             화영禾潁(BC80- )佗利의 戀人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