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78년, 흉노가 3천기로 오원(五原)을 침입해 수천 명을 살략(略殺)했다.

그 뒤 수만 기로 남쪽으로 와 새(塞) 곁에서 사냥하다

새(塞) 밖의 정(亭), 장(障)을 공격해 관리와 백성을 약취(略取)하고 떠났다.

이무렵 한나라 변군(邊郡)에서 봉화를 올려 새(塞)의 경계를 강화하니

흉노가 변경을 약탈하는 것에 이익이 적어 다시 새(塞)를 침범하는 일이 드물어졌다.

 

한나라가 다시 흉노로부터 항복한 자를 얻었는데 그가 말하길,

‘오환(烏桓)이 일찍이 옛 선우의 무덤을 파헤친 일이 있어 흉노가 이를 원망해

바야흐로 2만 기를 일으켜 오환을 공격하려 한다’고 했다.

 

대장군 곽광(霍光)은 군사를 일으켜 이를 요격하고자 하여

이 일을 호군도위(護軍都尉) 조충국(趙充國)에게 물었다.

조충국이 말했다,

“오환이 그간 여러 차례 새(塞)를 침범했는데

이제 흉노가 이들을 공격한다니 이는 한나라에 좋은 일입니다.

게다가 흉노는 침범해 약탈하는 일이 드물어 다행히 북변(北邊)이 무사(無事)합니다.

만이(蠻夷)가 저들끼리 서로 공격하는데

(한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요격하는 것은

침범을 불러들이고 일을 만드는 것이니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곽광이 다시 중랑장(中郞將) 범명우(范明友)에게 묻자

범명우는 가히 공격할 만하다고 했다.

이에 범명우를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삼고

2만 기를 이끌고 요동{산서성 요동}을 나가게 했다.

흉노는 한나라 군대가 당도했다는 말을 듣고 군을 이끌고 떠났다.

당초 곽광이 범명우에게 말했었다,

“병(兵)에는 헛되이 출전하는 일이 없는 법이니 흉노에 뒤쳐지면 오환을 공격하시오.”

 

오환은 이때 막 흉노병에게 패한 뒤였고 범명우는 흉노에 뒤처지니,

범명우는 오환(烏桓)이 피폐해진 것을 틈타 이를 공격해 6천 여 급을 참수하고

세 왕의 수급을 얻었고, 돌아와 평릉후(平陵侯)에 봉해졌다.

 

원봉(元鳳) 3년(BC 78년) 겨울,

요동(遼東) 오환(烏桓)이 반란을 일으키자

중랑장 범명우(范明友)를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삼아

[응소 왈, 요수(遼水) {今 황하 중류}를 건너(度) 공격하게 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도요(度遼)를 관호(官號)로 삼았다.]

북변(北邊) 7군(郡)의 2천기를 이끌고 이를 공격하게 했다.

 

玄兎之年,禾相失賴,鸞嫁羊福,吉為福子.

秋英生弗,鼋生英.

帝與禾相西巡而敀, 戇光倖秋爭權幻弄,

乃命槐里 綂率烏桓南伐西掠大獲而敀.

范賊度遼殺其二子, 充國坐笑, 桓胡爭功.

- 박창화 필사본 <추모경>

 

현토(癸卯,BCE78)년에 <화상禾相>이 <화뢰禾賴(鼋所生禾相子)>를 잃어(죽어),

<란鸞>이 <양복羊福(鼋所生羊山子)>에게 재가(再嫁)하매,

<양길羊吉(鸞所生賴子)>은 <양복羊福>의 아들로 되었다

 

<추영秋英>이 <왕불旺弗>을 낳고, <원鼋>이 <양영羊英(羊山女)>을 낳았다.

천제(慕漱帝)께서 <화상禾相>과 함께 서쪽(匈奴・鮮卑)을 순방하고 돌아오셨더니,

미련한 <곽광霍光(漢 大將軍・丞相)>과 간사한 <전천추田千秋(漢 丞相)>가

권력을 다투면서 교묘하고도 못된 꾀를 부렸다.

 

이에 <괴리槐里>에게 명하사,

오환烏桓(鮮卑一派)을 모조리 이끌고 남쪽과 서쪽(漢)을 토벌‧경략하여

크게 노획하여 돌아갔더니,

범范적(西漢 度遼將軍 中郞將 范明友)이 요수(遼水)를 건너서

그(槐里)의 둘째 아들을 죽이매,

<조충국趙充國(漢世宗・中宗兩代 將帥)>은 앉아서 웃고,

오환烏桓과 호胡(匈奴)는 공(잘잘못)을 다투었다.

 

이때의 요수는 산서성 요수이다.

 

BC78년 오환산을 근거지로 烏桓이 胡(흉노)의 침공을 받아 밀리고 있을 때를 틈타

漢의 도요장군(度遼將軍) 범명우(范明友)가 遼水를 넘어 烏桓을 공격하여

<괴리槐里>의 둘째 아들이 전사하였다.

 

오환烏桓과 호胡(匈奴)는 원래 뿌리가 같은 胡인데 서로 다투다 낭패를 당하였으니

조충국은 앉아서 웃고 오환烏桓과 호胡(匈奴)는 잘잘못을 다투었다는 말이다.

 

 

 

<흉노와 오환 및 BC 78년의 요수(황하류)와 융적지(선비정)>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