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노는 <추모>의 외조부가 다스린 청하의 동맹국이자
<추모>의 누이인 <고황>이 순노국 <오천>의 비로 있었던 나라이기 때문에
추모에게는 지지기반이었다.
<금와>가 위기에 처한 순노의 구원을 외면하자
BC 40 신사년 여름 19살의 건장한 청년 추모는 <오이>, <부분노> 등과 함께
예족의 장을 의미하는 [예가한濊可汗]의 금인과
천제의 나라임을 상징하는 [대선우大單于]의 금인을 가지고
야밤에 동부여를 탈출하여 그의 누이 <고황>이 있는 순노(順奴)로 가서
쇠락한 나라를 재건하게 된다.
추모의 누이 <고황>은 모수제<고두막>의 황후 <양성羊聖>의 첫째 딸이다.
그녀의 어머니 황후 <양성>은 황룡후 <양천羊川>의 딸이였으며 3남 6녀를 두었다
딸은 <고황高凰>, <고란高鸞>, <고금高禽>, <고태高駾>, <고화高華>, <고골高骨>
이 있었고 아들은 <고존高存>, <고총高驄>, <고덕高德>이 있었는데,
셋째 딸 <고금高禽>은 호(胡)왕 허려권거(虛閭權渠)의 처가되어
漢 원제 <유석劉奭>이 그렇게 두려워했던 <호한야呼韓邪> 선우를 낳았다.
말갈이 주변국을 괴롭힐 때 묵묵히 때를 기다리던 <추모>는
적들이 방심하여 굴속에서 술을 마실 때 화공으로 기습하여 혼비백산하게 만든 후
뛰쳐나오는 적들을 인수(釼手)들이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베었다.
말갈추장 <적득(荻得)>이 대항하자 추모는 화살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니
<오이>가 머리를 베어버렸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말갈군들은 갈하 남안(南岸)으로 도망하여
강 언덕을 기어오르자 이미 매복해있던 <부분노扶芬奴>가 궁수(弓手)를 동원해
활과 노를 쏘아 물에 빠트린 후
<한소(漢素)>가 수군을 이끌고 잔병들을 몰살시킨다.
병 8천기가 일시에 괴멸되고 무리 만여 명과 여자 천여 명을 포로로 잡으니
살아남아 도주한 이는 불과 이삼백에 불과하였다.
아군은 궁수 100인, 수군 100인, 인수(釼手) 50인, 화수(火手) 50인이 전부였다.
이 전투가 추모가 이끈 300명의 군사가 만여 명의 말갈군을 깡그리 몰살시킨
[갈하전투](羯河之戰)이다.
이 전투로 인해 추모는 주변 소국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모둔곡이 있는 모산과 갈하>
BC 40년 5월 병술일 책성을 출발한 추모 일행이 고야에 도착한 것은
6월 기미일 34일째 되는 날이다.
1일 10km를 이동하였다고 추정할 때
10km x 33 = 330km (책성에서 고야까지의 거리)
순노에서 동북으로 갈사를 지나 고야에 이르므로
책성은 순노에서 대략 400km 즉 천리 내외의 동북방{좌림파기 인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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