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원년 갑신(BC 37)

 

 

춘정월 갑오일에 상께서 <소召>황후 및 후의 어미 <류旒>씨와 더불어

 

대전(大殿)으로 나가시어 군신들의 입조 축하를 받으셨으며,

 

<정공鄭共>과 <마려馬黎>를 좌・우 태사로 삼으시어

 

력법{曆法則冊曆}을 정하고 날마다 천상(天象)을 살펴서

 

바람이 불지 구름이 낄지를 점치게 하셨다. 

  

 

2월 정묘일에 <연타발延陀勃>이 죽자

 

<소>황후가 나라를 들어서 <추모>께 바쳤더니,

 

4호(四豪){烏伊‧摩離‧陜父・扶芬奴}와 3현(三賢){再思・武骨・黙居} 등이

 

백관들과 호족들을 이끌고 상께 황제위에 오르시길 청하매,

 

상께서는 덕이 없음을 들어 고사하셨으나 무리들의 청함이 더욱 거세어졌음에,

 

부득이 비류곡(沸流谷) 서성산(西城山)에서 즉위하셨다.

 

<추모경>

 

 

 

소서노 5년(BC 37) 갑신

 

1월 소서노가 주몽을 세워 왕으로, 비류를 태자로, 온조를 왕자로 하였다.

 

<우대>의 구신, 졸본의 모든 신하가 주몽의 신하와 혼인하여 친척이 되도록 하였다.

 

나라이름을 고쳐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다.

 

 

동명원년 갑신(B.C.37)

 

봄 2월 <연타발延陀勃>이 죽었다.

 

<소서노召西奴>가 <추모芻牟>에게 나라를 바쳤다.

 

 

사호(四豪)와 삼현(三賢)이 천자의 지위에 오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고사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비류곡 서성산 발리현 이룡산에서 즉위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勾麗)라 하고 연호를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백제본기>

 

 

 

 

이때 북부여에서는 서로 천제를 칭하였다.

 

 

행인이 <고존>을 받아들여 천제국을 칭하였고

 

동부여의 <금와> 또한 천제를 칭하였다,

 

 

이제 고구려의 <추모>가 천제를 칭하며 주변국의 굴복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추모는 주변국들의 정리를 위해 군사력을 정비하는데,

 

<한소漢素>에게는 배(船)를, <정공鄭共>에게는 무기를 만들게 하고,

 

<마리馬黎>에게는 말을 기르게 하여 수군, 육군 모두를 정비하기에 이른다.

 

 

 

고구려 2대 천제 광명대제(光明大帝)는

 

그의 아버지 <추모>를 존(尊)하여 동명성황(東明聖皇)으로 삼았다.

 

 

그리고 다시 장수대제(長壽大帝) 16년에

 

다시 존(尊)하여 추모대제(芻牟大帝)로 불리게 된다.

 

 

고구려의 국호의 의미에 대하여 남당유고는 몇 차례 언급하였는데

 

그 내용을 살펴본다.

 

勾麗者穴之義也 國也 麗者箔也

勾麗之義 捲簾取明之義也

契丹之契 靺鞨之羯 亦與勾麗同音 故其義則實相通也

高者高大遠照之義也  - 박창화 필사본 [고구려사략] 

 

          

구려(勾麗)는 굴이라는 뜻이고 나라이다.

 

려(麗)는 발(箔)이다.

 

구려(勾麗)의 뜻은 ‘발을 걷어 빛을 취한다’는 뜻이다.

 

거란의 거(契), 말갈의 갈(羯), 또한 구려와 같은 소리이니 그 뜻도 실상 통용된다.

 

고(高)는 ‘높고 커서 멀리 비춘다’는 뜻이다.

 

고구려라는 뜻이 ‘굴 앞에 드리워진 발을 걷어 올려 햇빛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구려(勾麗)는 ‘굴’ 혹은‘구~ㄹ’로 발음되었으며,

이에 대한 한자표기를 구려(勾麗)라 한 것이다. 

 

 

當取音于穴而取義於捲簾而納明 可也

高勾其麗者 納明之義也勾麗者穴之音也

當以高勾麗為號 况有黑驪紇升之瑞乎

上嘉之遂用其言   - 박창화 필사본 [추모경] 

 

              

마땅히 음은 굴을 취하고,

뜻은 '발을 걷어 빛을 받아들이다.'를 취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발을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은 빛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구려(勾麗)는 굴을 발음 한 것이니,

고구려라고 부르는 것이고, 게다가 검은 말이 교미하는 상서로움의 뜻도 있습니다.

 

상이 이를 기뻐하며 마침내 그 의견을 들어주었다.

 

 

高句麗者 高大之穴也穴者國也 穴居爲都故也

句麗之音 麗語穴也

溝婁亦同 取句麗字者

[句其麗而麗之]之義捲大隧之箔 而照明之也  - 박창화필사본 [高句麗史略] 

 

             

고구려는 높고 큰 굴이고 굴은 나라이다.

 

살던 굴이 도읍이 되었기 때문이다.

 

구려(句麗)라는 발음은 고구려말로 굴이다.

 

구루(溝婁)도 같으며, 구려(句麗)라고 문자로 쓴 것이다.

 

구기려(句其麗){그 발을 걷어}하고 려지(麗之){매다}한다는 뜻은

대수(大隧)의 발을 걷어 빛을 환하게 비추게 한다는 것이다.

  

 

고구려라는 말이 고(高)씨의 구려(句麗)라는 뜻이 아니라,

나라를 뜻하는 굴에 드리워진 발을 걷어 올려 밝은 빛을 널리 비추게한다는 뜻으로,

장차 고구려가 온 누리에 찬란하게 빛을 내는 나라임을 그들의 국호에 드러낸 것이다.

 

고구려사략은 고구려의 의미가 광명(光明)을 밝히는 밝국(桓國, 檀國)을 말하며

고구려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여도 날이 부옇게 밝아옴을 뜻하니 밝국을 계승하음을 말하고

또한 거란과 말갈도 광명을 지향하는 밝국의 후손임을 말하고 있다.

 

 

地闢於丑 人生於寅故艮爲方 而山爲居

日之将出 丑寅玄蒙 此顓頊之高陽也

句麗而麗之則朱蒙而東明也  - 박창화 필사본 [高句麗史略] 

 

             

땅은 축회(丑會)에 열렸고 사람은 인회(寅會)에 생겨났기에,

간(艮)은 방향이 되고, 산(山)은 사는 곳이 되었다.

 

해가 뜰 무렵에는 축인(丑寅)이 현몽(玄蒙)하니,

이것이 <전욱顓頊>의 고양(高陽)이고,

발을 매어(구려) 묶은(려지)것은 곧 주몽(朱蒙)이고 동명(東明)이었다.

 

고양(高陽), 주몽(朱蒙),동명(東明)은 새벽의 광명(光明)을 말하는 밝(桓)을 말하

고구려가 <전욱顓頊>을 이어받은 나라라는 것이다.

 

 

 

추모가 도읍힌 졸본은 양평 요동성이며 지금의 천진시 계현 인근이다. 

 

 

<추모가 도읍한 졸본의 성산(城山)>

 

 

 

 

- 추모는 고(高)씨인가?  해(解)씨인가?

 

 

우리는 환국(桓國)의 역사 3301년, 배달국(檀國)의 역사 1565년,

 

고조선의 역사 2096년, 그리고 부여의 역사 천 여년을 잃어버렸다.

 

 

단재 신채호가 한국 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부여사는 한민족사의 골간을 이룬다.

 

 

삼국사기는 부여사를 단 한줄도 기록하지 않고

느닷없이 부여왕 해부루가 아들이 없어 곤연의 연못에서

개구리를 닮은 아이를 주워 <금와>라고 하였는데

하백의 딸 <유화>가 북부여의 천제 <해모수>의 아이를 임신하여

알을 낳아서 <금와>가 키우니 활을 잘 쏘아 주몽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주몽은 성이 고씨인데 이름은 추모 또는 중해(衆解)라고 한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으로 억측이 난무한다.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니 <해주몽>이다.

 

아니다 고구려를 건국하여 고씨로 바꾸었으니 <고주몽>이다.

 

선비족 탁발(拓跋)씨가 중원에 진출하여 북위를 세우고 114년이 지난

8대 선무제 <탁발각>이 호한융합정책으로 <원각>으로 원(元)씨로 바꾼것 외에는

어렵게 나라를 세워 그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성을 바꾼 왕조는 없다.

 

 

그러면 과연 추모는 고씨인가? 해씨인가?

 

추모의 아명(兒名)은 <상해象解>이다.

 

<금와>가 추모가 태어나자 마자 '해와 같다'하여 지어준 이름이다.

 

<상해象解>라는 이름은 해와같이 밝음(광명)을 말한다.

 

환(桓)은 하늘의 밝음을, 단(檀)은 땅의 밝음을, 한(韓)은 사람 속의 밝음을 말한다.

 

그 뜻이 해와같다 하였으니 삼국사기의 <중해衆解>는 <상해象解>의 오기(誤記)이다.

 

<상해>가 6개월이 지나 스스로 일어나고 기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니

<금와>가 기이하게 여겨 <추모芻牟>라는 별호(別號)를 지어주며

추모전(芻牟殿)을 지어준다. 

 

추모(芻牟)는 신(神)과 같다는 뜻이다.

 

주몽(朱蒙)은 부여의 속어에 활을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 한다하였으니 보통명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구려의 시조를 <추모>로 부르는 것이 옳은 것이다.

 

<해모수解慕漱(BC262-BC195)>는 북부여를 건국하여

45년간 재위에 있은 실존 인물이다.

 

<추모芻牟(BC58-BC19)는 <해모수>의 아들이 아니다.

 

북부여 왕의 계보를

 

남당유고는 덕황→법황→모수제→추모라고 하고

 

<범장>의 북부여기는 해모수→모수리→고해사→고우루(해우루)→해부루→

고두막(두막루)→고무서→추모라고 한다.

 

<해부루>는 <고두막>에게 쫓겨 동부여로 가고

<추모>는 동부여에서 쫓겨 북부여로 와서

<고무서>의 사위로 북부여를 계승하였다고 한다.

 

북부여기를 검토해 보면 해씨인 <해모수>왕의 계보에

해씨와 고씨가 혼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북부여의 해씨는 해모수→모수리→고해사까지 3대를 이어오다

<고우루>가 정변을 일으켜 고씨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고우루>를 <해우루>라고도 한다라고 한 것이다.

 

<고우루>의 반정으로 북부여는 고씨 나라로 교체되 것이다.

 

해씨인 <해부루>는 동쪽으로 쫓겨 동부여를 세우고

북부여는 고우루→고두막→추모로 이어진다.

 

<추모>가 동부여를 탈출하여 <고무서 (재위 1년)>의 사위가 되었다는 것은

<고우루>의 반정을 은폐한 것이다.

 

고씨 나라는 <고우루>부터 시작한다.

 

남당유고는 <고우루>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덕황이 <고우루>이고 <고우루>는 재위 10년인 BC 111년에

선인 <애종>의 반정으로 30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애종>의 화는 고씨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해씨의 정변일 것이다.

 

이때 <고우루>의 아들 <고두막>은 8살이었다.

 

나이가 어려 숙부인 법황이 황위에 올라 재위 36년(BC76)에 붕어하니

<고두막>이 북부여의 황제로 등극한다.

 

<고두막>의 시호가 모수제이다.

 

고우루高于婁(BC140-BC111)→고두막高豆莫(BC118-BC59)→

추모芻牟(BC58-BC19)

 

추모는 <고두막>의 아들이니 해씨가 아니고 고씨인 <고추모高芻牟>이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17세손이라는 기록은 <고우루>로부터 17세손인 것이다.

 

17.담덕←16.구부←15.사유←14.을불←13.돌고←12.약우←11.연불←10.교체←

9.연우←8.백고←7.궁←6.재사←5.무휼←4.유리←3.추모←2.고두막←1.고우루

 

고(高)는 밝은 빛을 널리 비춘다는 뜻이고

해(解)는 태양을 뜻하니 둘 다 밝음(광명)을 뜻하는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