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明五年 戊子...(중략)

 

狦欲為寧胡 而移居磧東林木之地 頻送使者 以探上意

 

上笑曰 狦誠癡人也 自居自处 吾何言之

 

漢都若東則 必有許多王昭君 老於吾懷中矣

 

不若早制坤方 而有之   - 박창화 필사본  <추모경>    

 

 

 

동명 5년 무자(BC 33)......(중략)

 

 

(계후)<산狦>이 <영호寧胡>를 위해 적동림목(磧東林木)의 땅으로 옮기고자

 

자주 사신을 보내서 상의 눈치를 살폈다.

 

 

상이 웃으며 말하길

 

 

“(계후)<산狦>은 참으로 어리석고 못난 사람이로다.

 

스스로 거처를 정하면 될 일이지 내가 어찌 말을 하겠는가?

 

 

만약 漢의 도성이 동쪽으로 있었더라면

 

수많은 <왕소군>들이 내 품에서 늙어 갈 것인데,

 

차라리 일찌감치 곤방(남서)땅을 제압하여 가지는 게 나을 듯도 하다."

 

 

 

竟寧元年春正月 匈奴乎韓邪單于來朝

 

詔曰 匈奴郅支單于背叛禮義 既伏其辜 乎韓邪單于不忘恩德 鄉慕禮義 復修朝賀之禮

 

願保塞傳之無窮 邊垂長無兵革之事

 

其改元為竟寧 賜單于待詔掖庭王檣為閼氏 <한서 원제기>

 

                                  

경녕 원년(BC 33) 춘정월, 흉노 <호한야> 선우가 내조했다.

 

 

조서로 말하기를

 

 

“흉노 <질지>선우가 예의를 배반하여 이미 그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았는데,

 

<호한야> 선우는 은덕을 잊지 않고 예의를 받들어 다시 조하의 예를 닦았으며,

 

변경을 지켜 무궁토록 이어가길 원하였기에

 

오랫동안 변경에 무기를 다루는 일이 없어졌도다.

 

 

이에 연호를 경녕(竟寧)으로 고치고

 

선우에게 대조액정(待詔掖庭) <왕장王檣>을 하사하여 연지로 삼게 하노라.” 

 

 

 

※ 참고

 

 

대조액정(待詔掖庭): 왕의 잠자리를 항상 대비하는 궁인

 

 

조하(朝賀): 조정(朝廷)에 나와 왕에게 하례(賀禮)하는 것 

 

 

새(塞): 국경

 

 

연지(閼氏): 선비족의 왕후

 

 

 

 

初 元帝時 以良家子選入掖庭

 

時 呼韓邪来朝 帝敕以宫女五人賜之

 

昭君入宫數歲 不得見御 積悲怨 乃請掖庭令求行

 

呼韓邪臨辭大会 帝召五女以示之

 

昭君豊容靚飾 光明漢宮 顧景裴回 竦動左右

 

帝見大驚 意欲留之 而難于失信 遂與匈奴 <후한서 흉노전>

 

 

이전 원제 때, 평민의 자식으로 (소군이)선발되어 액정에 들어왔다.

 

 

당시 <호한야>가 내조하자 황제가 조서로 궁녀 5인을 그에게 하사하였다.

 

 

<왕소군>은 입궁한지 몇 해가 지나도록 황제를 보지 못한 슬픔과 원망이 쌓여

 

액정령에게 (흉노로) 가기를 청하였다.

 

 

<호한야>가 큰 연회를 떠날 즈음에 황제는 다섯 여인들을 불러 그에게 보여주었다. 

 

 

<왕소군>의 풍만한 용모에 아름답게 꾸민 모습은 한궁을 밝고 환하게 하였다.

 

 

몸을 돌이키면 옷이 휘돌아가는 광경이 좌우를 술렁거리게 하였다.

 

 

제가 보고 크게 놀라 그녀를 남겨두고자 하였지만

 

신뢰를 잃을까 하여 마침내 흉노에게 주었다.

 

 

 

時 卑离王簠公遣使 告于呼韓邪禽主曰

 

末弟朱蒙 自東海来 已㝎順奴沸流卒本黃竜等囯 父帝封域 多已復矣

 

弟與朱蒙 欲遊於東池 以慰父帝母后之靈

 

姊亦與侄 偕来而參此佳筵 則吾兄弟之喜當何如哉

 

侄若東携末弟 西連羌戎而南下 則吾當率鮮卑烏桓

 

而亦助一臂 冒頓之業 庶可圖也 

 

禽主謂呼韓邪曰 汝之外交皆如是 其英雄何忠而事漢邪 當養兵以南下可也

 

呼韓邪然之 以備伐漢之兵

 

漢奭聞而大驚 請為兄弟之盟 而世以公主納之 <추모경>

 

 

 

이때, 비리왕 <보공簠公>이 사신을 보내 <호한야>와 <금禽>主{解禽}에게 말하기를

 

 

“막내 동생 주몽이 동해에서 온 이래로 이미 순노, 비류, 졸본, 황룡 등의 나라들을

 

평정하여 부제(해모수)의 봉역들을 대부분 회복하였습니다.

 

 

동생{해보}이 주몽과 함께 동지(東池)에서 유람하면서

 

부제와 모후의 혼백을 위로하고자 하니,

 

누님 또한 조카와 만나서 함께 오셔서 이 아름다운 자리에 참석하신다면,

 

이는 당연히 우리 형제들의 기쁨이지 않겠습니까?

 

 

조카가 만약 동으로 막내 동생과 손을 잡고 서쪽의 강융과 연대하여 남하한다면,

 

저는 당연히 선비, 오환을 이끌 것이며,

 

그래서 또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 거의 모돈의 업을 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禽>主가 <호한야>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너의 외가 식구들이 모두 이와 같은데,

 

그 영웅이라는 자가 어찌 한을 충성으로 섬길 수 있겠느냐?

 

마땅히 군사를 길러 남하하는 것이 옳으니라.”

 

 

<호한야>가 이를 옳다고 여기고 漢을 칠 군사를 준비하였다.

 

한의 <유석劉奭>이 이를 듣고 크게 놀라 청하기를

 

형제의 맹세를 하고 대를 이어 공주를 바치겠다고 하였다. 

 

 

 

初 劉季困於平城 使呂雉觧袴於冒頓 而奪已嫁之女 為冒頓之妾以来 徒以女色求媚

 

至是 漢廷又以此策 送美人之画於呼韓邪

 

呼韓邪選其一人 豐美而有小点者 乃王嬙也 <추모경>

 

 

 

옛날 <유계劉季>{고조 유방}가 평성(平城)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

 

<여치呂雉>로 하여금 모돈에게 몸을 바치게 하고

 

이미 출가한 딸을 빼앗아 <모돈>의 첩이 되게 한 이래

 

단지 여색으로 환심을 사려하더니,

 

지금에 이르러 한나라 조정은 또 이 계책으로 미녀들의 그림을 <호한야>에게 보냈고,

 

<호한야>가 풍만하고 아름다우며 작은 점이 있는 한 사람을 골랐는데

 

바로 <왕장王嬙>이었다.

  

  

 

 

狦見其美而喜 遂停伐漢之計 而反保上谷燉煌

 

漢以大囯 賣妻求媚者 不一二矣 皆可謂大囯乎 未免巾幗之嘲也

 

狦亦迷於女色 而忘其祖宗 可謂沒骨漢也<추모경> 

 

 

 

<계후산>{호한야}이 그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하여

 

마침내 漢을 치려는 계획을 중지하고 물러나 상곡(上谷)과 돈황(燉煌)을 지켰다.

 

 

漢은 큰 나라로서 처를 팔아 아첨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어찌 큰 나라라 할 수 있으며, 아녀자들의 조롱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계후산> 역시 여색에 빠져 자신의 조상들을 잊었으니 정신 나간 놈이라 부를 만하다. 

 

 

 

참고

 

 

巾幗(건괵): 부인들의 머리 장식용 쓰개의 한 종류

 

 

沒骨漢(몰골한): 정신 나간 자

 

    

 

 

 

위의 기록들은 서기전 33년, 동명 5년의 기록이다.

 

 

<질지郅支>와 <호한야呼韓邪(BC79- )>는 대선우의 자리를  서로 다투던 인물이며

 

<호한야>는 모수제의 셋째 딸 <금禽(BC96- )>의 아들로 추모의 조카이다.  

 

 

BC 57년 흉노는 서흉노와 동흉노로 분열되고 권력다툼이 일어나는데

 

처음에는 서흉노의 <질지>가 승세를 잡았다.

 

 

<호한야>는 漢과 연합하여 <질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질지>를 우랄산맥 넘어

 

탈라스강 유역으로 쫒아버렸다.

 

이때가 서기전 48년이었다.

 

 

하지만 <질지>는 여전히 서쪽에서 동쪽의 <호한야>를 견제하고 있었고

 

<호한야>는 漢에게 여전히 도움을 청하여야 할 입장이었고,

 

漢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이용하여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서기전 36년 <진탕陳湯>이라는 한 한인(漢人)이 한나라의 사신을 가장하여

 

<질지>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여 서흉노는 멸망하게 된다.

 

 

멸망한 서흉노의 무리집단들은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랄지역에 도착하는데


이들이 서유럽 지역에서 흉노의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서흉노의 멸망으로 <호한야>는 마침내 고구려와 손잡고 漢을 공격하려는 것이다.

 

 

漢에서는 <호한야>가 친한(親漢)정책으로 돌아섰다고 하는데,

 

경쟁자인 <질지>가 죽고 전 흉노를 장악한 <호한야>가 무엇이 아쉬워서

 

그리 했겠는가? 단지 그들의 기록일 뿐이다.

 

 

그들이 비록 그들의 역사에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서기전 33년 흉노와 고구려의 연합세력이 한나라를 침공하려하자 

 

漢의 조정은 공포에 떨었으며 황제 <유석>은 <소군>을 <호한야>에게 바치며

 

사랑하는 처와 생이별을 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이 소군출새(昭君出塞)이다.

 

 

당나라때 시인 <동방규東方虯>가 지은 소군원(昭君怨)이다.

 

 

1

漢道初全盛       한이 이제 큰나라가 되어서

朝廷足武臣       조정에는 무신들이 가득한데

何須薄命妾       어찌 이리 박복한 여인네인고

辛苦遠和親       화친의 길은 괴롭고도 멀기만하구나

 

2

昭君拂玉鞍       소군이 옥 안장을 닦아내고

上馬涕紅頰       말을 타니 붉은 뺨에 눈물이 흐르는구나

今日漢宮人       오늘은 한나라 궁인이나

明朝胡地妾       내일 아침엔 호 땅의 첩이리라

 

3

掩涕辭丹鳳       눈물 감추고 궁궐을 나서

銜悲向白龍       슬픔을 머금고 백룡퇴로 향하네

單于浪驚喜       선우는 즐거움에 들떠있지만

無復舊時容       내 다시 옛 모습으로 돌아갈 순 없으리

 

4

萬里邊城遠       변성은 만리밖 멀리있어

千山行路難       천산 가는 길 험하기도 하구나

擧頭惟見日       머리 드니 오직 해만 보일뿐

何處是長安       장안은 어느쪽에 있으려나

 

5

胡地無花草       호의 땅에는 꽃도 풀이 없으니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       옷과 띠가 그냥 헐렁해져버리니

非是爲腰身       허리와 몸을 위한 것이 아니라오

 

 

 

 

 

<왕소군王昭君>은 <서시西施>, <초선貂嬋>,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계후산 <호한야>선우는 <왕소군>이 흉노의 척박한 땅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과 한나라 황제만을 그리워하며 몸이 여위어가자

 

숲이 있는 적동림목으로 옮기면 좀 나을까하고 생각하였다.

 

 

<호한야>는 적동이 추모 조상의 땅인 비리와 인접한 곳에 있어

 

고구려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추모에게 사신을 보내며

 

추모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것이다.

 

 

추모대제가 순노, 비류, 졸본, 황룡 등의 지역을 차례로 통합하여 나가자

 

BC33년 비리왕 <보簠>公(賈達生慕漱帝子 BC67- )이

 

<호한야>선우와 <호한야>의 어머니 <금禽>에게

 

모수제와 모후 <가달>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동지(東池)로 갈터이니

 

그곳에서 막내인 추모를 비롯한 가족들을 만나자고한다.

 

 

그는 자신이 선비(鮮卑)와 오환(烏桓)을 이끌터이니

 

호한야는 동쪽의 고구려, 서쪽의 강(羌), 융(戎)과 연합하여

 

한(漢)을 치는 것이 좋겠다하니

 

<해금>과 <호한야>는 이에 적극 동조하고 군병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이 소식을 들은 한의 원제(元帝) <유석劉奭>이 놀라서

 

<호한야>에게 형제의 맹세를 하고 절세미녀 <왕소군>을 바치는 것이다.

 

 

<호한야>는 漢이 쉽게 굴복하자 고구려와 비리와의 협약은 팽개치고

 

자신의 이익만을 취해 정벌을 포기해버린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하겠지만 피 흘리지 않고 굴복시켰으니

 

<호한야>는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한나라는 그 특유의 미인계를 써 이 위기를 탈출했으니,

 

추모의 실망감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몰골한(沒骨漢), 즉 정신 나간 놈이라고 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漢書는

 

<호한야> 선우가 은덕을 잊지 않고 예의를 받들어 조하의 예를 갖추니

 

<왕소군>을 하사하여 연지로 삼게 하였다고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