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明>六年己丑....<漢>以<五鹿充宗>為<玄菟>太守.<五鹿>以<石顯>之徒,

 

猖獗旣極,<驁>惡<顯>而黜之.<五鹿>亦被謫于<幽州>,而妄稱<玄菟>太守.

 

<玄菟>之地非<漢>之有也久矣.<五鹿>焉敢来乎,只是夢<玄菟>而已...<추모경>

 

동명6년 기축년(BC32년)(중략)

 

漢이 <오록충종五鹿充宗>을 玄菟태수로 삼았다.

 

<오록五鹿>은 <석현石顯>의 무리로 창궐함이 이미 극심하여

<유오劉驁{西漢 孝成帝}>가 <석현>을 미워하여 쫓아낸 것이고,

<오록> 또한 유주(幽州)로 유배되고서 玄菟태수를 제멋대로 칭한 것이었다.

 

玄菟 땅이 저들 땅이 아닌지 오래인데, 오록이 어찌 감히 올 수나 있었으랴.

 

다만 꿈에서나 그렸을 뿐 이었다.

 

 

東明九年壬辰 六月... <五鹿充宗>,好匈極惡, 與<石顯>輩弄絡<劉奭> 以致貨累鉅万,

 

為<王鳳>所逐而出<幽州>, 自稱「玄菟太守」 ,以金銀彩絹等每誘<涉臣>會獵,

 

而欲襲<鮮卑>. <涉臣>,将其計而反誘<鹿>出<渝關>至<石原>,

 

使其将<互獨>射殺之,馳入其居而取其財宝美女. <涉臣>之母<可喜>,<莫車>之大姑也,

 

與<狦>為從, 而且以妹妻<莫車>而交密, 相與専橫於<上谷>.<王鳳>惡<鹿>而不問其死.

 

 

동명9년 임진(BC29년) 6월 (중략)

 

 

<오록충종五鹿忠宗>이 흉사(匈事)를 즐기기가 극악하여

 

<석현石顯>무리들과 함께 <유석劉奭{西漢 高宗}>을 농락하면서

 

누거만금의 재화를 긁어 들이다가 <왕봉王鳳>에게 유주(幽州)로 쫓겨나가더니,

 

玄菟太守를 자칭하고서 금과 은 및 아름다운 비단 등으로

 

매번 <섭신涉臣{鮮卑王}>을 회유하여 함께 사냥하였으며,

 

선비(鮮卑)를 습격하려 하였다.

 

 

이에 <섭신>도 그 계략{재물 등을 주어서 회유하는 방법}을 써서

 

도리어 오록을 꾀어서 유관(渝關)밖으로 나와 석원(石原)땅에 다다르게 하더니,

 

그의 장수 <호독互獨>으로 하여 그를 쏘아죽이게 하고서,

 

그의 거처로 내달려 들어가서 그의 재보와 미녀들을 취하였다.

 

 

섭신은 어미 <가희可喜>가 <막거莫車{雕陶莫皋=復株絫선우}>의 대고모{왕고모}이고,

 

<산狦{稽侯,呼韓邪선우}>과는 4촌간이며,

 

게다가 여동생을 <막거莫車>에게 주고 몰래 교통하면서

 

서로가 함께 <상곡上谷>땅을 전횡하였고,

 

<왕봉王鳳>은 <오록>을 미워하였기에 그의 죽음을 불문에 붙였다. 

 

 

 

<東明>十三年 丙申..

.

四月,皇軍,進拔<盖馬囯><北河城>為據, 掠<北河>之東西.<盖馬>王<燕宜>,

 

悉力以禦<東城>,乃以船暗向<南口>,<南口>孤立被囲,城中食盡殺馬食草.

 

五月,乙卯,<南口>鎭将<胡登>以城降.上,以其善守賞之,使<乙音>鎭撫城民賑給豊厚,

 

厥民大喜恨不早降,乃以<乙音>為「玄菟太守」‧「南口鎭将」,屯兵一万二千,積二年之穀,

 

使<漢素>為造船之備.

 

 

동명13년 병신(BC25년) (중략)

 

 

4월, 황군(皇軍)이 전진하여 개마국의 북하성(北河城)을 빼앗아서 거점을 삼고

 

북하(北河)의 동쪽과 서쪽을 노략하였더니,

 

개마 왕 <연의燕宜>는 모든 힘을 쏟아서 동성(東城)을 지켜내다가

 

배를 타고 몰래 남구(南口)로 향하였으나 남구(南口)는 고립되고 포위되었으며

 

성 안에선 식량이 떨어져서 말을 잡아먹고 풀을 뜯어먹었다.

 

 

5월 을묘일, 남구(南口)를 지키던 <호등胡登>이 성을 들어서 항복하자,

 

상께서는 그가 훌륭히 지켜냈음에 상을 주셨고,

 

<을음乙音>으로 하여금 성민들을 진무하고

 

넉넉하고 풍성하게 후히 구휼하도록 하셨더니,

 

그곳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며 원통함 없이 일찍이 항복하였다.

 

 

이에 을음을 현도태수(玄菟太守)・ 남구진장(南口鎭將)으로 삼으시어

 

1만 2천의 군병을 주둔시키시고 2년 치의 곡식을 쌓아 놓으셨으며,

 

<한소漢素>로 하여금 배를 만들어서 대비하게 하셨다.

 

 

<오록충종五鹿忠宗>과 <석현石顯>은 方士로서 유주로 유배당한 인물이며

 

현도군은 개마국 인근에 있었던 것이다.

 

<漢의 幽州> 

 

 

유주의 치소가 산서성 오대산 부근의 계성이었다

(전국시대 燕都, 수 양제가 고구려 침공전에 제사 지낸 곳).

 

산서성의 계성은 지명을 없애버리고 동쪽으로 옮겨놓은 것이 광양군 계현인데

지금의 천진시 북단에 있다.

 

 

-  유주 (幽州)의 치소 계성(薊城)은 산서성에 있었다.

 

중국의 지도를 보면 유주 (幽州)를 고무줄처럼 길게 늘여 요령성까지,

심지어는 한반도 평안북도까지 늘여 놓고 대동강 낙랑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정사인 금사(金史)에는

유주 (幽州)의 치소 계성(薊城)이 산서성에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유(幽), 계(薊)의 한 지방은 초유해도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군대를 이끌고 가서

먼저 산서(山西) 각부를 안무시키고자 한다.

너희들은 이미 귀부하였으나 백성에게 더 자비롭게 대해야 한다.

아직 귀부하지 않은 이전 관민(官民)의 죄는 경중없이 무관하게 묻지 말고

또 관청 미납분은 모두 면제하도록 허용하며

제관(諸官)은 각각 지위를 바꾸어 임명한다...(중략)

<금사(金史)>

 

1115년 발해 대야발의 후손인 아골타가 금(金)을 건국하여 요(遙)를 정벌할 때

요(遙)의 황룡부와 상경, 중경을 토벌 한 후 그 백성들을 초유하고

마지막으로 요주(遙主)가 도망간 연경을 토벌하기 위하여

먼저 산서성의  유(幽), 계(薊)로 진격하여 백성들을 초유하도록 하였으나

산서성 유(幽), 계(薊) 지역은 

거란이 최초 발흥한 지역이므로 좀처럼 복종하지 않았다.

금 태조 아골타는 산서성 유(幽), 계(薊)의 관리를 바꾸어 임명하고

세금을 면제토록하고 관민(官民)의 죄는 경중없이 무관하게 묻지 말라고 조치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