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明>十三年丙申,三月,...

 

<阿隃陀囯>使二人来朝, 貢物皆為<馬韓>人所奪, 云.

 

其囯在<西海>岸, 海路杜絶, 請從山路去.

 

上,命<夏信>‧<月當>等率輕騎送于<豊城>之南. <추모경>

 

 

 

동명13년 병신(BC25년) 3월(중략)

 

 

 

<아유타국阿隃陀囯> 사신 둘이 래조하였다.

 

 

 

공물(貢物)은 모두 마한(馬韓)사람들에게 빼앗겼다고 하였으며,

 

 

그들의 나라는 서해(西海)기슭에 있는데

 

 

뱃길이 끊겨서 산길로 돌아가겠노라고 청하였다.

 

 

 

상께서 <하신夏信>과 <월당月當> 등에게 명하여

 

 

경무장한 기병을 이끌어 풍성(豊城) 남쪽으로 호송하셨다.

 

 

 

 

 

※ 참고

 

 

 

아유타국(阿隃陀囯) : 하서회랑 인근에 있던 나라

 

 

마한(馬韓) : 산동성에 있던 辰國의 하나

 

 

서해(西海) : 靑海 인근의 지명

 

 

풍성(豊城) : 구다국에 있는 城

 

 

 

 

하서회랑 인근에 있던 아유타국 사신이 고구려에 래조하여

 

 

황하를 따라 뱃길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산동성에 있던 마한으로 인하여 뱃길이 끊겨

 

 

추모가 구다국의 풍성 남쪽까지 호송케하여 배를 타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김씨는 김일제의 후손이다>

 

 

 

아유타국은 許씨의 종주국으로 이들이 중원에 흘러들어

허광한(許廣漢)의 딸 허평균(許平君)이 前漢 宣帝 劉詢(BC92-BC49)의 황후가 된다.

 

 

미미한 집안출신인 그녀는 불행하게도 자신의 딸을 황후로 세우려던

 

당시 세력가인 곽광의 처에게 독살 당한다.

 

 

허평균의 아들이 다음 황제가 되는 元帝 <유석劉奭>(BC75-BC33)이다.

 

 

원제가 원통하게 죽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다시 허씨 일가의 여인을 태자비로 맞아들이니 허광한의 조카인 허가(許嘉)의 딸이

成帝 <유오劉鰲>(BC51-BC7)의 황후가 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식을 낳자마자 죽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고

이로 인하여 황제의 사랑이 멀어지자 이를 만회하고자

成帝의 아이를 가진 후궁 왕미인과 왕봉 등을 저주하는 일을 벌인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허황후는 폐위가 되어 소대궁(昭臺宮)으로 쫓겨난다.

 

 

 

이후 황후 복위를 노리다 실패하자 스스로 자결하게된다.

 

 

 

선제와 원제시절 허씨 일가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자식의 죽음과 황후 복위 실패 후 이들은 전한의 정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고

 

 

이들의 후손인 허황옥(146-189)이 흉노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의 후손인

청예(142-199)와 161년 김해에서 혼인을 하게된 것이다. 

 

 

허황옥이 낳은 10명의 아들 중 2명이 어머니의 성 허씨가 되고

허황옥은 김해허씨의 시조가 된다. 

 

 

지구 상 모든 김씨(金氏)는 투후(侯) 김일제(金日磾 BC134-BC86)의  후손이다.

 

 

일제(日)가 살았던 현 중국의 감숙성 무위시(中國 甘肅省 武威市)

한(漢)나라때에는 흉노(匈奴)의 땅이 이었으며,

당시 무위시(武威市)의 지명은 휴도(休屠)였다.

일제의 아버지는 이 휴도를 지배하는 흉노의 휴도왕(休屠王)이었다.

 

 

흉노의 전성시대는 모돈선우(冒頓單于)와 노상선우(老上單于)의 양대(兩代)였다.

 

 

두 선우의 황금시대에는 한(漢)나라를 압박하여 국위를 내외에 크게 떨쳤다.

 

그러나 한무제(漢武帝)가 즉위한 이후에는 차츰 양국 간의 형세가 역전되어 갔다.

 

 

BC 121년 곽거병은 혼야왕의 아들을 사로잡고  

그해 가을에는 혼야왕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하서(河西)로 진출하였다.

 

계속되는 패전에 흉노의 이치사(伊雉斜)선우가 격노하여

 

혼야왕과 휴도왕에게 그 책임을 물으려 하자 이들 두 왕은 문책이 두려웠다.

 

이에 혼야왕은 휴도왕에게 한나라에 투항하자고 제의를 하였으나

휴도왕은 그 결정을 빨리 내리지 못한다. 

 

혼야왕은 휴도왕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휴도왕을 죽이고

한무제에게 항복한다.

 

이때 살해당한 휴도왕의 태자인 일제(日)의 나이는 14살이었다. 

 

그는 모친 알씨(閼氏), 동생 륜(胤)과 함께 곽거병의 한나라에 포로가 되었다.

 

한나라 장안에 끌려온 일제는 양마노(養馬奴)로서 황문(黃門)에 배치되었다.

 

일제(日)의 키는 8척 2촌(漢代의 1尺은 22.3cm이므로 183cm이다.)이다. 

 

큰 키의 늠름한 풍체와  일제가 키운 말을 보며 한무제는 흡족해했다. 

 

일제의 인품과 재능을 간파한 무제는 즉각 그를 마감(馬監)으로 발탁했다.

 

대완국을 정벌하여 얻은 한혈마, 즉 한무제가 천마(天馬)라고 불렀던 말들을

보살펴 일제(日)는 마왕신(馬王神)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후 일제는 시중(侍中),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지위에 오른다.

 

이 부마도위란 이름은 漢武帝 때 처음 생긴 벼슬의 이름이다.

 

한무제는 匈奴의 왕자로 한나라에 항복해 온 김일제에게 이 벼슬을 처음으로 주었다.

 

그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빠르게 승진했다.

 

부마도위(駙馬都尉)는 천자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내린 벼슬이다.

 

그것이 魏晉(위진) 이후로 公主의 남편 되는 사람에 한해서 이 벼슬을 주게 됨으로써

임금의 사위를 부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마(駙馬)는 원래 천자가 타는 부거(副車)에 딸린 말로

그것을 맡은 벼슬이 부마도위다.

 

부마도위의 계급과 봉록은 比 二千石으로 태수와 같은 급이었다.

 

일제(日)는 망하라(莽何羅) 등의 무제 암살 시도를 막아

그 공으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고, 김(金)씨 성을 하사받았다.

 

김(金)이란 금(金) 즉, 황금(黃金)을 뜻하는데,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천주(天主: 하늘의 신)에 제사 지냈던 일에서 비롯하였다.

 

이로써 김(금)일제(金日磾)는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금씨(金氏)가 김씨로 발음이 바뀐 것은 조선 건국 때 이성계에 의해서 였다.

 

신라 때와 고려 때 까지는 금씨로 불려졌다.

 

현재 중국에서도 金을 금으로 읽지 김으로 읽지 않는다.

 

무제는 임종 전에 봉거도위(奉車都尉) 곽광과 부마도위(駙馬都尉) 김일제,

태업 상관걸(太僕 上官桀)에게 어린 소제를 보필하라고 유촉하고,

망하라를 토벌한 일제를 투경후(敬侯), 즉, 투후(秺侯)로 봉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BC 86년, 일제(日)는 4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무릉(茂陵 : 長安 서북부에 위치한 무제의 墓)에 배장(陪葬)되었다.

 

김일제의 자손들은 新나라왕망(王莽)의 외가(외사촌)로서 주요 관직에 올랐는데,

후한 광무제가 신나라 황제 왕망을 토벌할 때 역사에서 사라지고, 봉국도 몰수되었다.

 

김일제는 중국 금(金)씨의 시조이고, 왕망이 멸망할 때 그의 후손이 한반도로 유입되어

그 후손들인 김알지(94-155)와 김수로(142-199)는

한국 김(金)씨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