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柳花의 죽음

고대사 2014. 7. 27. 14:25

 

 

 

성모 태황태후의 휘는 <유화柳花>이니 성은 옥(屋)씨라.

 

 

(屋)씨는 세세토록 곤연(鯤淵)장옥(長屋)을 지켜 와서 이로써 성(姓)을 얻었더니,

 

장옥(長屋)이란 것은 제사하는 못에 있는 집이라,

 

 

황조(皇祖){황상의 외조부}인 <옥문屋文>대왕의 모후 (屋)씨가 못가에서

 

박사(얇은 비단)를 빨래하였더니,

 

때는 한여름을 맞은지라 벗고 누워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큰 거위가 다가와서 교접하여 아들을 낳았더니.

 

잔등이에 푸른 혹이 있고 큰 거위의 문양이어서

 

이에 <옥문屋文>이라 이름을 지었더니,

 

성장하여서는 천제{德帝}를 효성으로 섬기어 <남려 南閭>의 난리를 평정하였고,

 

<애종愛鍾>의 난리를 당하여서는 <화상禾相>과 더불어 <애종愛鍾>을 주살하고

 

법제(法帝)를 맞이하여 세워서 그 공으로 청하백(靑河伯)을 하시고

 

명에 따라 구가(狗加)를 세습하니 선상(仙相)이었더라.

 

 

<옥문屋文>의 딸 <옥완屋玩>이 <양천羊川>의 妃가 되어 <양성羊聖>을 낳으시고

 

<옥인屋因>이 <오산奧山>의 妃가 되어 <호인好人>을 낳으셨더니,

 

모두 <수제漱帝>의 后와 妃가 되었더라.

 

 

<수제漱帝>는 초년에 환후가 많아서 단지 1后 1妃로 하셨고,

 

<옥인屋因>을 비로 하고 <양성羊聖>을 후로 하니,

 

<옥인屋因>은 제와 기갑을 같이 하였더라.

 

 

제는 열 넷부터 <옥인屋因>을 총애하여 30여년이 되사

 

궁중의 일들이 그 손에서 결정됨이 많았고,

 

누에 쳐서 천을 짜고 양털로 담요 만들기를 능히 잘 하여서

 

제의 곤룡포와 면류관이 그 손에서 나왔던 까닭에,

 

제께서 꽤내 중히 여기시어 누님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으며,

 

<옥인屋因>이 늘 어찬을 정결히 하고 약과 차를 맡아서

 

옥체를 보호한 공이 막대하였던 까닭에,

 

그의 아들 <오천奧川>이 맏이 공주 <해황解凰>과 혼인하여 봉함을 받고

 

순노후(順奴侯)가 되었더니.

 

순노(順奴)의 땅이 광대하여 옥저의 동해가 모두 이에 속했었더라.

 

 

<옥문屋文 BC147-BC78>은 <옥인屋因>의 아비로 공훈이 높고 중하여서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어 앉아서

 

천하를 지키다가 나이 70에 환후가 위독하매

 

자녀들에게 충성하라고 가르치고 죽었으니,

 

법제34년 계묘(BC78)해이었더라.

 

 

<수제漱帝>께서 즉위하사 봉작을 더하여 청하대왕(靑河大王)으로 삼으시고,

 

<옥인>의 어미 <우牛>씨로 태비를 삼으시고,

 

<두진斗辰>의 어미 <을乙>씨로 청하(靑河)왕비를 삼으시고

 

아들 <두진斗辰>을 구가(狗加) 청하백(靑河伯)을 봉하시며,

 

<두진斗辰>의 처 <호인好人>을 청하(靑河)부인으로 봉하시고

 

총애와 승은을 누차 더하여 주셨더니, <옥인屋因>의 딸이어라.

 

 

화양지춘(정미,BC74)에 성모를 탄생하시니,

 

하늘에 오르지 못한 큰 어미요 요(堯)의 어미에 순(舜)의 처라.

 

 

<서왕모西王母>의 미모와 <여왜女媧>의 덕을 겸비하셨더니,

 

아름답기 넉넉하며 늘씬하고 재주와 덕은 하늘이 이루어 놓았음이고

 

여인의 도리는 저절로 닦였음이라.

 

 

<양길羊吉>의 난리로 제께서 큰 배 한 척으로 청하(靑河)에 이르시고,

 

때에 성모가 이팔방령(꽃다운 16살)에 달하였더니,

 

제께서 천후를 봉하시고 애지중지 하사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원앙새 암・수와 같았더니,

 

구름이 무겁고 비가 깊어서 꽃이 피고 꽃이 지고,

 

5룡이 옹위하며 곡선(학)이 보좌하고 그 가운데 한 선제(仙帝)께서

 

기린 등에 봉황 안장을 얹어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셨더니,

 

성모께서 못가에 이르러 계시다가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가서 맞이하니

 

선제께서 다가와 껴안으시고 못가의 벌판에서 합환하니.

 

온몸에 하늘 향기 가득함에 황홀하여 신음하였더니,

 

선제께서 용으로 변하시어서 한 거대한 용이 성모를 휘감아 교접하고

 

뿌연 물줄기가 헌걸차게 뿌려졌더라.

 

 

성모께서 놀라시어 깨어나셨더니, 한 자락 남가일몽이오.

 

 

부황(夫皇)이 뱃속에 계심이라니 기쁘고 행복함을 이기지 못하고 꿈 얘기를 하셨더니,

 

수제께서 이르시길 “60평생이 일거에 여기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구나."라 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사 천지사방에 절하시고 또한 성모에게 절하시며 이르시길

 

 

“<부여> 천년대업이 내 처의 뱃속에 있음이니,

 

내 처는 삼가고 조심하여 뱃속의 성자를 기르시오."라 하셨고,

 

 

성모께서는 답하시길

 

 

“첩 또한 금번의 방사가 결코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있사오니

 

태교를 잘 지켜서 폐하의 성자를 탄생하겠나이다."라 하시고

 

 

잠자리 하나 먹는 것 하나에 지극정성을 다하셨더니.

 

 

<수제>께서 우연히 득병하사 저 흰 구름을 타시고 제의 본향으로 돌아가셨더니,

 

성모께서는 실성통곡・인사불성하시다가

 

복중의 성자를 위해 아픔을 참고 슬픔을 절제하시며

 

애처로이 조신하시는 나날을 소요 하셨더니.

 

이때에, 동부여 왕 <금와>가 자신의 처 <해영觧英>를 잃어서

 

천하절색을 구하여 처를 삼고자 하였더니,

 

 

양가(羊加) <오문烏文>이 상주하여 아뢰길

 

 

청하백 <옥두진>의 딸 <유화>가 침어낙안(沈魚落雁)할 미색이고,

 

<옥인>과 <양성>의 바탕을 두루 갖추었더니,

 

천고의 일색이고 만대의 훌륭한 여인입니다.

 

 

복이 다하였던 천제 수황(漱皇)이 거두어서 천후로 삼았다가

 

기혈이 다하여서 서거하였으니, 그녀의 미모와 왕성함은 알아줄만 합니다.

 

 

폐하께서 이 여인을 얻으시어 짝으로 삼으시면

 

나라가 흥성하고 가문이 번창하실 것이옵니다."라 하였더니,

 

 

<금와>가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기쁨에 들떠서 이르길

 

 

“하늘의 뜻이로다! 하늘의 뜻이야! 하늘이 이 후를 내게 내리심이니,

 

어찌 혼인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라 하였다.

 

 

이에 <두진>을  우발수로 찾아가니.

 

<금와>의 어미 <을원乙原>은 <두진>의 어미 <을란乙蘭>의 여동생이라.

 

 

<금와>가 어릴 적에 고운 마음으로 <두진>과 임금{과 신하}의 정분을 맺고

 

문경지우(서로의 목을 베어도 나무라지 않을 생사를 같이하는 벗)를 약속하여,

 

<두진>이 <금와>를 집으로 초치하여서 <호인好人>을 안겨주었더니.

 

 

<부루夫婁>가 <동부여>의 왕위에 오름에 <두진>이 <금와>를 천거하여

 

<부루>를 곁에서 모시는 신하로 늘어서더니,

 

<부루>의 딸 <해>씨{해영}와 좋아하여 부부가 되었고,

 

<부루>가 죽은 후에 <동부여>의 왕이 되었더라.

 

 

<해>씨가 정사를 주무르고 <금와>는 시위로 있어서

 

<두진>과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더니,

 

이제야 찾아와서 방문하니 그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더라.

 

 

때에, 성모는 봄기운에 노곤함이 엄습하여 서안에 엎드려서 잠이 들었는데,

 

부황(夫皇)이 곁으로 오셔서 어루만지며 위로하여 이르시길

 

 

“지금 내 처에게는 좋은 운세가 다가왔소. 아이를 잃지 말고 지켜내시오."

 

라 하고는 홀연히 보이지 않았더니, 깨어나 보니 꿈이었더라.

 

 

문간 밖에서 사람들과 말들의 소리가 났더니,

 

<금와>가 몸소 방문하였음을 듣고는 자애로운 어미 <호인궁>을 동반하여서

 

<금와>왕을 나가서 알현하였더니,

 

<금와>는 성모의 머리가 초승달 같은 눈썹과 백설 같은 살결에

 

옥 같은 얼굴임을 보더니만 멍하고도 황홀하여 다가와서 손으로 만져보면서 이르길

 

 

“천후의 미모가 <서시>보다 더하구려!"라 하고는 끌어안고 입술을 드리웠더니,

 

 

성모가 손님에게 빌면서

 

 

“첩이 불행하여 천제의 상중에 있고 뱃속에는 성자를 잉태하였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숙부께서는 이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어

 

절개 지킴을 용서하여 주세요."라 하시니,

 

 

<두진>이 말하길

 

 

“폐하께서 너를 위해 몸소 찾으신 것인데, 감히 정절 지킴을 일컫느냐?

 

말없이 잠자리를 모셔서

 

<북부여>의 천후인 네가 <동부여>의 천후가 되면 역시 좋지 않겠느냐?

 

 

<화>태후께서 2대의 후를 하셨음은 <수황>을 위하신 계책이었고,

 

너의 어미가 天妃가 된 것은 너를 위한 계책이었느니.

 

너는 성자를 임신하고서도 예쁘니 강한 이들의 도발을 면할 수 없음이다.

 

 

나의 폐하가 아니시면 그 누가 너를 지켜주고 성자를 보호하여줄 수 있겠느냐?"

 

라 하였고,

 

 

<호인>도 곁에서 찬동하고, 꿈속 조짐 또한 그러하였던 까닭에,

 

이 봄을 맞이하여 춘정을 그리워하는 혈기가 없지도 아니한지라,

 

멍하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하여서 헤아리기 힘들어하다가

 

끝내 <금와>에 품으로 쓰러졌더니,

 

<금와>가 품어 안고 침상으로 올라서 마음껏 운우를 다하였더니,

 

성모도 춘흥에 못 이겨 미친 듯 취한 듯이 하였더라.

 

 

이윽고 열 촛불을 밝히는 예의(혼례)를 거행하고

 

백 수레의 폐백을 바쳐서 3일 3야를 동침하였더니,

 

정(情)을 따지면 부황(夫皇)이요, 따져보면 숙부(이모부)이었다.

 

 

왕은 세른 세 살로 장년이오, 후는 열일곱 묘령이라,

 

산과 같은 사랑과 바다 같은 정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리오.

 

 

<금와>왕이 마침내 <책성>에다 새 궁을 쌓아서 성모의 궁전을 삼고,

 

<두진>을 상(相)으로 삼고 <호인>을 비로 삼았더니,

 

<청하>땅 사람들 모두가 <책성>으로 귀의하여,

 

일약에 <동부여>의 고관대작이 된 이들이 적지 않았더라.

 

 

4월, 성모가 봉황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추모>를 낳았더니,

 

햇빛이 다가와 비추어서 자리를 옮기면 따라와서 비추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더라.

 

 

<금와>왕이 <추모>의 사내다운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이르길

 

 

“처를 얻고 아들을 얻었으니 이것이 소위 꿩 먹고 알을 먹은 것이로다."라 하고는

 

명을 내려 <추모>를 태자로 삼아 <금와>왕의 여덟 째 아들 자리를 주었더니,

 

<해>씨의 일곱 아들 <대소> 등이 동생처럼 아끼더라.

 

 

후는 <추모>를 낳아놓더니만 일심으로 사랑하고 보호하면서,

 

<추모>때문에라도 <금와>왕에게 아양 떨 의향이 없던 적이 역시 많았더라.

 

 

<금와>왕은 후를 사랑하였지만 또한 <호인>을 사랑하기도 하여서,

 

<호인>이 먼저 수태하여 딸을 낳으니 이 이가 바로 <예>황후이고,

 

 

병인년(BC55)에 후 또한 <금와>왕의 아들 <해불>을 낳으시고

 

기사년(BC52)에 딸 <해화>를 낳으셨더니 후에 <대소>의 처가 되었으며,

 

임신년(BC49)에 <해주>를 낳으시고

 

을해년(BC46)에 <해백>과 무인년(BC43)에 <해소>를 또 낳으셨더니,

 

<해백>과 <해소>의 용모가 <추모>를 많이 닮았던 까닭에

 

<대소> 등이 참언하기를 <상해>가 그 어미를 치붙어서

 

<해백>과 <해소>를 낳은 것이니 자기들의 동생들이 아니라고 하였으나,

 

<금와>왕이 웃으면서 연유를 묻지 않으매 다툼은 없었던 것이 되었더라.

 

 

신사년(BC40)에 <소蘇>공주를 낳았더니

 

심히 아름다워서 후가 항상 공주를 훈계하시어 이르시길

 

 

“너는 자라서 필히 <상해>의 처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더니,

 

 

병신년(BC25)에 찾아와서 「경후」가 되었으며 총애를 믿고 방자하였어도,

 

상(추모)께서는 불문에 붙였더라.

 

 

갑신년(BC37)에 <해웅>과 정해년(BC34)에 <해필>과 경인년(BC31)에 <해중>과

 

계사년(BC28)에 <해빈> 등을 낳으셨더니,

 

거의 모두가 용모가 미려하고 놀기와 기예를 좋아하였으나,

 

오로지 <해소> 한 사람만이 <추모>의 기풍이 파다하였더라.

 

 

성모가 이에 <금와>왕의 아들 낳기를 바라지 않으시어,

 

설사 합방하여도 꽃을 피우지 않았더라.

 

 

정유년{BC24}, 5월에 <금와>왕의 병 수발을 들으면서

 

<대소>의 처 <해화{后所生金蛙女}>와 밤을 새우며 잠을 자지 않았을 새,

 

<금와>왕이 한밤중에 <해화>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침상으로 올랐더니.

 

후께서 피하여 장막 밖으로 나왔더니 <대소>가 핍박하고 치붙어서

 

불의에 욕을 당하셨으매 분하고 노여워서 병이 되었더니.

 

한 달 여에 임신하셨음을 알고 부끄러움으로 괴로워 하사

 

7월 7일{칠석날} 밤에 <견우녀{=직녀성}>를 바라보며 한탄하시더니

 

복어 알을 드시고 죽으셨으니, 춘추 쉰하나였다.

 

 

안색은 살아있는 듯하고 손에는 <수제>의 조각상을 쥐셨더라.

 

 

<금와>왕이 애통해하며 열흘을 먹지 않고

 

<해화>를 품에 안고 누워서 슬프게 눈물지으며 날을 지새웠더니.

 

<해주> 등이 <목>공을 부려서 뱃속의 아이를 끄집어내고

 

유골을 나눌 새 <해소>가 따르지 않았더니,

 

 

<금와왕>이 “거수 어미의 유골인데, 어찌 나누지 않을 수 있겠느냐?!

 

 

동부여에서는 수장을 많이 하지만,

 

성모는 오로지 살 거죽과 뼈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태워서 재로 하여서,

 

모든 자녀들에게 나눠주어라."라 하였다.

 

 

성모의 릉침은 하나는 서계산에 있고 하나는 용산의 남령에 있으며,

 

살갗은 사당의 신주로 되었더라, <추모>의 꿈에 성모께서 누차 나타나셔서

 

 

“나는 네 몸 속에 머물고 싶구나."라 하여,

 

 

상께서 살갗{또는, 옷}을 취하여 옷{또는, 상복}을 만들고,

 

<오방奧芳>부인을 사당지기로 삼았더니,

 

성모의 유골을 옥함에 넣어 두었다가 <추모>가 죽으매

 

유명을 따라서 성모의 유골을 꺼내서 <추모>의 재궁{시신, 관} 속에 넣었으며,

 

성모의 살갗{또는, 옷}으로 <추모>사당의 신주를 삼았더니,

 

지금 사람들은 어미를 위하여 살갗이 된 이가 이 사람이라 하였더라.

 

<추모경 후비열전>

 

 

 

동명14년 정유(BC24년) 7월7일 밤, 유화는 복어 알을 먹고 자살한다.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을 보내어 유화부인의 시신을 모셔가 졸본에 장사지냈다.

 

 

 

(고주몽은) 황태후에 준하는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도록 명하였고,

 

 

그에 따라 용산에 큰 능을 만들어 그 곳에 모시고, 그 곁에 사당을 세웠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