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19년 임인{BC19}

 

 

춘정월, <유리類利>태자를 정윤正胤{東宮}으로 삼았다.

 

 

상께서 <을음乙音>을 부르시어 은밀히 조칙(詔勅)하시길

 

 

“내 병이 나이 먹기를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네.

 

자네 여동생{召西奴}을 <유리類利>에게 처로 주어서

 

나라를 물려주고자하니 속히 불러오게나.”

 

라 하셨다.

 

 

 

<을음乙音>이 이에 <온溫(召西奴所生芻牟女)>공주와 함께

 

우양(牛壤)으로 찾아가서 그 뜻을 알렸더니,

 

 

<소召>후가 이르길

 

 

“내가 <왕장王嬙>이 아닌데, 어찌 <막거莫車>와 더불어 상통할 수 있겠소?”라 하기에,

 

 

<을음乙音>이 “天下의 일이란 마땅히 대세(大勢)를 따라야 하는 것이야.

 

지금 <유리>로 이미 정해졌으며,

 

명분이 분명하고 용맹하기도 성상(聖上)보다 못하지 않음이니,

 

불복(不服)하고 배척(排斥)하면 패(敗)할 것이며 순응(順應)하면 이룰 것이야.

 

 

상의 환후가 위급하여 아침에 밤일을 걱정할 수 없음이니,

 

자네가 그의 처가 되어서 보위를 물려받으면 잃는 것이 없을 것이네.

 

 

자네가 응하지 않으면 필시 <전旃>후나 <대방大房>후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고,

 

<대방大房>이 집정(執政)하면 우리 무리들은 어육(魚肉)이 될 것인데,

 

어찌 그 것은 생각지 아니하는가?‟라 하였더니,

 

 

<소>후가 마침내 깨닫고서 都城{西都}으로 돌아와서 상을 배알하였다.

 

 

상께서 “내 병이 심상치 않은 듯하니, 그대가 동궁에게로 가서 그와 잘 지냈으면 하오.

 

나는 이미 그대를 동궁에게 허락하였소.”라고 이르셨더니,

 

 

<소>후는 제를 껴안고 곡(哭)하며 아뢰길

 

 

“당신께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아야 할 것입니다.”라 하였으나,

 

 

상께서 명을 내려 동궁을 불러오게 하셔서 <소>후를 안아 가게 하셨더니,

 

 

<소>후가 동궁에게 말하길

 

 

“첩은 감히 명을 거스를 수 없겠습니다.

 

성상께옵서 안위(安危)가 이러하시니 어쩌겠습니까?”라 하였고,

 

 

동궁도 “삼가 하명하신 대로 할 뿐입니다.”라 하였다.

 

 

이때부터 나라의 큰 정사는 동궁과 <소>후가 처결하였다.

 

 

<소>후는, 동궁의 의중을 따르고 자신이 집정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예쁜 옷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하여 눈길을 보내서 정감(情感)을 돋웠더니,

 

동궁이 왕왕 참기 어려워서 <소>후의 허리를 껴안고 머리를 파묻으면,

 

 

<소>후는 그를 어루만지면서 나직이 말하길

 

 

“첩이 감히 모르는 것이 아니고 때가 아직 아니옵니다.

 

원컨대 동궁께서는 자중(自重)하세요.”라 하고는

 

<온溫>공주에게 명하여 동궁을 데려가게 하였다.

 

 

동궁이 <소>후를 찾아가서 넘어지려하면 <소>후 역시 황홀(恍惚)해 하였으며

 

스스로 넘어진 것도 여러 번이었더니,

 

이로부터 <소>후는 동궁을 그리는 마음에 넘어지는 일이 늘어났으며,

 

상께서는 <소>후가 동궁과 친밀한 모습을 보시면 기뻐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노하셨다.

 

 

하루 밤에는, 동궁이 <소>후와 더불어 상의 곁을 지키다가 피곤하여서

 

동궁이 모로 누워 잠이 들었고, <소>후가 동궁의 머리를 끌어다가

 

<소>후의 허벅다리를 베게하고서 지켰더니,

 

상께서 깨어나 그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며 읊조리시길

 

 

“이 허벅다리는 본시 내 허벅다리로 지금은 동궁의 허벅다리이니,

 

동궁이 내 몸이며 저 넓적다리 또한 내 넓적다리로고.”라 하셨고,

 

 

<소>후가 이에 고개를 숙여 상을 바라보고 다시 동궁을 바라보았더니,

 

동궁도 마침내 깨어났더라.

 

 

 

4월, 서하(西河)사람 <고성高星> 등 75인이 기린(猉獜)을 바쳤더니,

 

오색(五色)을 모두 갖추고 붉은 뿔과 푸른 발굽을 지녔었다.

 

 

상께서 <소召>후와 더불어 란정(鸞庭)으로 가시어 그 것을 보시고는 이르시길

 

 

거루(巨婁)가 가더니 기린(猉獜)이 왔구먼. 내가 아마도 죽으려나 보지?”라 하셨더니,

 

 

<소>후가 화를 내며 아뢰길

 

 

“당신께서는 아직 젊으시고, 천하를 아우르시는 일을 끝내지도 않으셨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 하였더니,

 

 

상께서 이르시길 “萬事가 뜬구름 같을 뿐이오.”라 하시고는,

 

자리에 누우시어 하루 낮과 하루 밤을 아무런 말이 없으시다가,

 

<소>후에게 명하시어 정윤(正胤)에게 신검(神劍)과 황금옥새를 전하게 하셨더니,

 

<소召>후가 신검과 옥새를 부여안고 울고만 있기에,

 

상께서 “새 임금을 잘 섬겨야 할 것이거늘, 어찌 울고만 있단 말이오.”라 하셨다.

 

 

이에 <소>후는 마침내 동궁으로 가서 보물(寶物)들을 전했더니,

 

동궁이 받지 않으면서

 

 

“부황(父皇)께서는 몸에 병도 없으신데 어찌 이런 일을 하신단 말이오?”라고 일렀고,

 

 

이에 <소>후는 “까닭을 몰라서 고치지 못하는 병이신지라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음이니,

 

헤아리시고서 받으심이 어떠시겠습니까?”라 일렀더라.

 

 

동궁이 <소>후와 더불어 상을 찾아뵈었더니,

 

상께서는 이미 말을 하실 수 없으신지라

 

다만 <소>후의 손을 쥐어다가 동궁의 손에 포개놓으시고 숨을 거두셨고,

 

상현(上弦)달도 곧 떨어지려 어른어른하여져 있었다.

 

 

<소>후가 이윽고 얼굴을 가려드리고 새 임금을 품에 안고서 아뢰길

 

 

“첩의 일생이 이리하여 폐하의 손에 남게 되었습니다.”라 하였더니,

 

 

새 임금{類利}이 “어머니인지? 처인지? 나라의 보배이시오.

 

그대는 나 없이 후가 될 수 없었음이고, 나는 그대 없이 어찌 임금이 되었겠소?”

 

라 말하고는 침상에 올라서 기뻐하며 정을 나누었다.

 

 

달빛(月色)이 황황(遑遑)하여 <소>후가 팔로 눈을 가리고서

 

“왜, 달이 황황하지요?”라 하였더니,

 

 

새 임금은 “<여왜女媧>의 밤일에는 흰 태양이 소소(昭昭)하였다지만,

 

지금 경의 밤일에는 붉은 달이 황황하오. 황황하건 소소하건 모두 하늘이 내린 것이니,

 

어찌 겁낼 일이겠소.”라 하였다.

 

 

<소>후가 이에 얼굴빛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상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더니,

 

<오이烏伊> 등이 부복(俯伏)하여 임금의 만수무강(萬壽無疆)하시길 외쳤으며,

 

이윽고 새로 지은 궁{西都}의 란대(鸞臺)에서 즉위하였다.

 

 

<전旃>후・<대방大房>후・<작鵲>씨・<평平>씨 등이 순사(殉死)하려 하였으나,

 

선제{芻牟}께서 조칙(詔勅)을 남기시어 순사를 금하셨다.

 

 

새 임금{類利}이 <오이烏伊> 등과 더불어 의론하고 이르길

 

 

“짐은 나이가 어려서 아는 것이 없고,

 

부황(父皇){芻牟}의 힘에 기대어 천제(天帝)의 소임(所任)인 이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큰일들을 어찌 이루어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지금 변방엔 일들이 많아서,

 

외국들이 대행{芻牟}께서 돌아가셨음을 알게 되면 필시 달리 움직임이 있을 것이니,

 

상(喪)이 났음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면서 섭정(攝政)을 두어서 다스렸으면 하는데,

 

어찌 생각들 하시오?”라고 하였더니,

 

 

<오이> 등이 부복(俯伏)하여 상주하길

 

 

“폐하의 훌륭하심과 밝으심이 이와 같으시니,

 

신 등은 기쁜 마음으로 하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군사(軍事)는 <오이烏伊>에게 위임하고 정사(政事)는 <소召>후에게 위임하였다.

 

 

상은 상중(喪中)인지라 후궁들의 밤일 감당을 멈추게 하고

 

오직 <소召>후와 <아이阿爾(召西奴生優台女>・<온溫> 두 공주들만을 곁에 두었더니,

 

 

<대방량大房良>이

 

 

“천자(天子)의 효도(孝道)로는 많은 후사(後嗣)를 두시는 것을 제일로 삼는 것이오니,

 

마땅히 <온>공주를 황후로 삼으시고,

 

다시금 공경들의 딸들을 골라서 비빈(妃嬪)들로 삼으시어 많은 후사를 두십시오.”

 

라고 간언하였다.

 

 

이에 상은 이를 욕스럽게 하는 것으로 보아 멀리하며 용납하지 않았다.

 

 

<대방량>이 또 간언하여서 3년을 복상(服喪)하시길 청하였더니,

 

상은 “그것은 모두 태평무사(太平無事)한 시절의 일들이오.

 

상(喪)을 당하였음을 숨기고 있는 터에, 어찌 상복을 입을 수 있겠소?”라 하였다.

 

 

상이 <소>후의 말에는 기를 기울이면서도

 

 매번 <대방량>의 주청에는 어깃장을 놓았더니,

 

<대방량>은 태보 자리를 사직하고 돌아갔다.

 

 

<대방>후 또한 아비의 일로 물러나길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지 않으며 이르길

 

 

“대행께서 경(卿)을 내게 남기셨으니, 경은 내 처인데,

 

어찌 감히 사사로이 아비의 일로 물러나겠다고 청하는 것이오?”라 하고,

 

 

명을 내려서 <을전>후와 <대방>후는 닷새에 하루씩 밤일을 감당하게 하였고,

 

또한 <관패>비를 궁으로 불러서 성총을 내렸다.

 

<소>후가 감히 투기하지 않았다.

 

 

 

5월, 대행{추모대제}의 릉을 룡산(龍山)에다가 지었다.

 

 

 

9월, 대행을 룡산(龍山)에 장사하였다. 춘추 40이었다.

 

 

거루(巨婁)와 기린(猉獜)의 유골은 릉 아래에다 장사하였다.

 

 

<평平>씨와 <작鵲>씨가 몸에 불을 질러서 순사(殉死)하려 하였더니,

 

상이 대노하여 림부(琳府)의 옥(獄)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상의 모친 <예禮>황후를 천궁태황후(天宮太皇后)로 삼고,

 

<소召>후・<전旃>후・<대방大房>후를 세 천후天后로 삼았으며,

 

<아이阿爾>와 <온溫>공주를 좌・우 소후小后로 삼았고

 

<양화羊花>・<삼화蔘花> 등을 경궁(瓊宮)태후로 삼아서

 

<예>태후의 명에 따라 날을 잡아서 밤일을 감당하게 하였다.

 

 

호胡{匈奴}>왕<저미서且麋胥>・ 오환(烏桓)왕<광廣>공・ 선비(鮮卑)왕<섭신涉臣> 등

 

이 사신을 보내와서 조상(弔喪)하고 부의(賻儀)를 바쳤다. 

 

 

안평(安平)왕 <종리鍾离>・자몽(紫蒙)왕<서천西川>・개마(盖馬)왕<연의燕宜>가

 

입조하였더니, 상이 그들에게 곤룡포(袞龍袍)・면류관(冕旒冠)・금인(金印)을 하사하고,

 

선제의 후궁들을 처로 삼아주어서 돌려보냈다.

 

 

10월 <온조溫祚>를 상의 아들로 삼아서 한남왕(汗南王)으로 봉하고

우양(牛壤)에 도읍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소>후가 기뻐하지 않으며 우양(牛壤)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더니,

<온조溫祚>가 간하여 말렸다. 

 

 

12월, 황룡왕 <우인于仁>이 나이 마흔셋에 죽어, <오이烏伊>를 황룡왕으로 삼았다. 

 

년호(年號)를 광명(光明)으로 바꿨다. 

 

개마왕 <연의燕宜>가 상께서 상(喪)을 당한 이래로

여러 번 비리(卑离)의 경계를 침범하였더니,

상이 <마리摩離>를 승차시켜 비리왕(卑离王)을 삼아서

행인(荇人)・ 개마(盖馬)・ 숙신(肅愼)・ 적동(磧東) 땅들을 지키게 하였다

 

동명대제(東明大祭)를 동도(東都)에서 치르고,

대행을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높였다.

 

장수제(長壽帝) 16년에는 추모대제(芻牟大帝)로 높여졌다. 

 

 

 

- 유리(類利) 즉위 과정

 

 

辛巳七月東夫餘公主禮氏生孺留于柵城名曰類利者肖月之意也.

 

 

신사(BC.40) 7월 동부여 공주 예씨가 책성에서 유류를 낳았다.

 

이름은 類利인데 달을 닮았다는 뜻이다.

 

예씨((BC57~28)는 金蛙(BC90~BC7)와 好人(BC94-BC24)사이에서 태어난

동부여의 공주이다.

 

 

壬辰彈雀而誤中汲婦, 婦罵曰無父之子無禮如此, 於是自警, 學禮于叔父解素太子,

學射于屋智, 書數於句鄒, 藥農於都祖, 而精熟然後請禮氏同往父處,

 

임진년(BC.29)년 참새를 쏘아 잘못하여 물 긷는 아낙을 맞추었는데,

아낙이 욕하여 말하기를

 

“아비 없는 자식이 무례(無禮)함이 이와 같을 수 있는가!”

 

(유리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숙부 <해소解素>태자에게서 예(禮)를 배우고, 옥지(屋智)에게서 활쏘기를 배우고,

구추(句鄒)에게서 글과 셈을 배우고,

도조(都祖)에게서 의약(醫藥)과 농사(農事)에 대해 배웠었다.

 

이런 학습(學習)이 정심(情深)하고 익숙해진 유리는

(어머니) 예씨(禮氏)에게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같이 가기를 청하였다.

 

 

 

위의 기사는 유리가 11살 때의 일이다.

 

 

여기서 유리의 소년 시절에 가르친 사람 가운데,

 

“숙부(叔父) <해소解素> 태자(太子)가 있었다.”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해소解素>는 <유화柳花>와 <금와金蛙>의 아들로써

 

갈사국(曷思國)의 왕이 되는 사람인데, 추모와는 동복(同腹)형제가 되는 사이다.  

 

 

유리는 숙부 해소로부터 그 당시 최고의 제왕(帝王) 수업(修業)을 받고

 

재정지원을 받게 된다.

 

 

 

禮氏知芻牟有召西奴而難容乃曰汝父去時藏物於七岺八谷石上松下曰

搜此而來者來吾子也. 類利乃行山野尋之不得成, 病將死, 忽有聲自柱礎間出.

就而見之有斷刃挾在其間乃喜而進其母.

 

 

예씨(禮氏)는 추모가 소서노(召西奴)와 함께 있어 용납되지 않을 것을 알고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갈 때 칠령팔곡(七岺八谷)의  소나무아래 돌 위에 물건을 감추었는데

(아버지 추모가) 말하기를 이것을 찾아서 오는 자가 나의 아들이다, 라고 하였다.

 

유리가 이내 산과 들을 (뒤지며) 찾았으나 얻지 못했다.

 

병이 들어 장차 죽을 것 같았다.

 

문득 스스로 기둥과 주춧돌사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찾아서 그것을 보니 부러진 칼이 그 사이에 끼여 있었다.

 

이내 기뻐하여 그 어머니에게 나아갔다.

 

 

 

禮氏無可止之術議於解素. 解素曰嫂勿慮時至矣.

阿兄欲行母后大祭密遣松義而作聖母像, 吾見此人可作大事且其母亦柵城人也.

禮氏大憙與類利隨義而來解素授黃金百斤曰以此悅其民衆然後謁父可也,

 

 

예씨(禮氏)는 막을 방법이 없음을 알고 해소(解素)에게 계책을 의논하였다.

 

해소가 말하기를

 

“형수는 걱정하지 마라. 때가 이르렀다.

 

나의 형이 모후(母后: 유화(柳花)를 뜻함)의 제사에 성모상(聖母像)을 만들려고

송의(松義)를 은밀히 보냈다,

 

나는 그 사람(:송의(松義)를 뜻함)을 만나서 큰일을 만들 것이다.

 

또한 그(송의) 어머니는 책성(柵城)사람이다.”

 

예씨(禮氏)가 크게 기뻐하여 유리와 함께 (송)의를 따랐는데

해소(解素)가 황금 백근(百斤)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그 민중을 기쁘게 한 연후에

아버지(추모)를 알현(謁見)하면 가(可)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리는 해소로부터 많은 자금을 지원받아 동궁자리를 얻기위하여 성모상을 만들고

백성들을 치료하여 민심을 얻는다.

 

 

 

乃與屋智句鄒都祖等問民疾苦治人疾病施以衣食洽得人心然後謁鄒牟而卽東宮位

沸流溫祚皆不敢爭而唯陜夫仇都烏干等以爲國本不可動與.

 

 

곧 옥지(屋智), 구추(句鄒), 도조(都祖) 등과 더불어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위문(慰問)하고 질병을 치료하고

옷과 음식을 흡족하게 베풀어 인심을 얻은 후에

추모(芻牟)를 만나 동궁(東宮)의 위(位 : 자리)에 나아갔는데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감히 싸우려 하지 않았으나,

오로지 협부(陜夫), 구도(仇都), 오간(烏干) 등은

“나라의 근본은 움직일수 없다.”고 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祖) 편을 들었다.

 

 

유리(類利)가 추모를 만난 후, 소서노와 추모의 딸인 아이(阿爾)를 부인(婦人)으로

짝지워 주어서 임신하기에 이르렀는데도

유리(類利)가 송양(宋讓)의 딸인 송화(宋花)와 준통(浚通)을 하자,

 

소서노(召西奴)가

 

“어찌 아내가 산고(産苦)를 겪는데 그럴수가 있는가?!”하고 격노(激怒)하고,

 

유리는 “송화(宋花)는 조당병모(糟糖餠母)이기 때문에 버릴수 없다.”고 하며

격렬히 대립한다.  

 

그런 뒤에 다음 고구리 황제 자리를 뜻하는 정윤(正胤)자리를

 “누가 차지해야 하는가?”하는 화백회의가 열린다.

 

그런데 온조(溫祖)와 비류(沸流)는 이미 소서노(召西奴)와 합의(合議) 본 대로

정윤의 자리에 출마(出馬)할 의향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고구리(高句麗)의 창업공신이라 할 수 있는

 ‘협부(陜夫), 구도(仇都), 오간(烏干) 등은

“나라의 근본은 움직일수 없다.”고 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祖) 편을 들었다.

 

이는 소서노(召西奴)의 영향이 계속 고구려 본궁(本宮)에

그만큼 남아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召西奴退于牛壤. 溫祚謂其母曰妻當從夫, 子當從父, 弟當從兄, 臣當從君,

有此四可從之義, 而不從而退將安往 吾不敢從母. 召西奴然之乃復入宮鄒母謂上曰

吾子雖多唯沸流溫祖最可. 汝其三分天下而治之可也. 上受命而卽位於鸞坮改元光名.

 

 

소서노(召西奴)가 우양(牛壤)으로 떠나갔다.

 

온조(溫祚)가 그 모(母: 소서노)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부인(婦人)은 남편을 따름이 마땅하고, 자식은 부모를 따름이 마땅하고,

아우는 형을 따름이 마땅하고, 신하는 임금을 따름이 마땅하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가종지의(可從之義)가 있다.  

 

이를 따르지 않고 물러남은 장차 어찌 편안히 갈수 있겠습니까?  

 

저는 감히 어머니를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소서노(召西奴)가 이를 옳게 여겨 다시 궁(宮)으로 들어와 추모(芻母)로써

상(上:유리명왕(瑠璃明王)을 뜻함)에게 말하기를,

 

“나의 자식들이 비록 많다고 할지라도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가장 뛰어나다.

 

당신은 그 땅을 삼분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게 옳다.

 

상(上: 유리명왕(瑠璃明王)을 뜻함)이 명(命)을 받아들여

난대(鸞坮)에서 즉위(卽位)하였고 연호(年號)를 광명(光明)으로 고쳤다.

 

 

소서노는 천하를 삼분하여 비류, 온조, 유리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한 후

유리의 즉위식을 거행하게 한다.

 

 

 

- 비류와 온조는 누구의 아들인가?

 

 

四月 召后生子沸流爲人多情而懦弱 

<高勾麗史略 卷之一>

                                                        

 

(동명2년 BC36) 4월, 소후가 아들 비류를 낳았다.

 

사람의 됨됨이가 정이 많고 유약하였다.

 

 

 

四月召皇后生沸流太子及溫公主於溫水宮 宮在西城山

上大喜曰 天以鳳凰賜我邪命置僚屬 

<추모경>

 

 

4월, 소황후가 비류태자와 온 공주를 서성산에 있는 온수궁에서 낳았다.

 

상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봉황을 나에게 내리셨도다.” 하시고는

명하여 관리들을 배치시켰다.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陁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三國史記 卷第二十三 百濟本紀第一>

 

 

얼마 되지 않아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자가 비류이고 차자가 온조이다.

......

 

혹은 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대라 하며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고

어머니는 소서노인데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라 한다.

 

처음 우대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자를 비류라 하고 차자를 온조라 하였다.

 

우대가 죽자 졸본에서 홀로 지냈다.

 

 

 

時 卒本太守延陀勃有女曰召西奴甚美

優台聞之 請往卒本王以優台母徵不許

優台乃私行至卒本與山(召)西奴相通

延陀勃以王不許欲禁之乃相逃避太伯山谷沸流川上 祀河神而生子曰沸流

延陀勃聞之 使人迎歸遂以卒本之地歸 之時 漢元年 初元二年甲戌歲也

<백제서기>

 

 

이때 졸본태수 연타발에게 소서노라는 딸이 있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우대>가 이를 듣고 졸본으로 가고자 청하였으나

왕이 우대 어머니의 조짐을 살펴 허락하지 않았다.

 

우대는 이에 사사로이 졸본으로 들어가 소서노와 상통하였다.

 

<연타발>은 왕이 허락하지않았다하여 이를 금하니

이들은 태백산 골짜기 비류천 상류로 도망하였고

하신에게 제사지내어 비류라는 아들을 낳았다.

 

<연타발>이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졸본 땅으로 맞아 돌아오니

이때가 한 원(제)년 초원 2년 갑술년(BC47)이다. 

 

 

二十九年 壬寅四月右輔烏伊等上言曰 自古帝王莫不立其子以爲太子

今大王辛苦創業而不立己子臣等不取千秋萬歲之後

沸流若立 冝以其父優台 配于吾后矣 大王安得血食于此國乎

若以類利爲太子而阿爾爲太子妃 則阿爾今已娠矣 他日大王聖后之孫 永久王于此土

大王聖后畏相配食若土是非 俱美之道哉

王曰 立子以賢者以重社稷宗廟也 今沸流仁而有德 吾何敢私其所生乎

<백제서기>

 

 

우대 29년(BC19) 임인 4월, 우보 <오이>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그 아들을 태자로 삼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지금 대왕은 어렵게 창업을 하시어 자식을 세우지 못하니

신등은 천추만세 뒤의 일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만약 비류가 서게 된다면 당연히 그 아비 우대를 우리 황후의 남편이라 할 것인 즉,

대왕은 이 나라에서 제사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유리가 태자가 된다면 아이가 태자비가 될 것입니다.

 

아이가 지금 이미 임신하였기 때문에

훗날 대왕과 성후의 손자가 이 땅에 영원히 왕이 될 것입니다.

 

대왕과 성후가 서로 두려워하는 것은

제사와 땅에 대한 시비이니 모두 좋은 방법이 아니겠는지요?

 

왕이 말하기를 현명한 자식을 세우는 것이 종묘사직에 중요하거늘

지금 비류는 어질고 덕이 있으니 내가 어찌 감히 내 자식만을 편애할 수 있겠는가?

 

 

 

於是 類利卽王位奉后爲太后 以阿爾爲后 以沸流溫祚爲左右兄王

<백제서기>

  

 

유리가 왕위에 오르자 후를 태후로, 아이를 후로,

비류와 온조를 좌우 형왕으로 봉하였다.

 

 

 

고구려사략과 추모경은 비류와 온조가 추모와 소서노의 아들이라하고

백제서기는 비류와 온조가 우대와 소서노의 아들이라고 한다.

 

 

어느것이 역사적 실체일까?

 

 

추론컨데 비류와 온조는 소서노와 우태의 아들이다.

 

고구려는 추모가 다음 왕위를 소서노의 아들에게 물려 주겠다고 속인 것을 

감추고 싶었기 때문에 추모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소서노가 죽은 해는 BC6년이다.

 

그런데 고구려사략은 예태후가 죽은 해 AD28년에

소서노가 죽었다고 슬쩍 집어넣어 소서노의 나이를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 지명 분포도>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