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黃鳥詞

고대사 2014. 8. 1. 09:59

 

 

 

鄭共妻張氏生女雉美如其母

 

上以雉名之曰 當如呂雉

 

張曰 呂雉無行而不吉何以此女擬之乎

 

上曰 雖然如雉者亦能幾人乎 恐不及矣 <추모경>

 

 

 

<정공鄭共>의 처 <장張>씨가 딸 <치雉>를 낳았는데 어머니를 닮아 아름다웠다.

 

 

상께서 <치雉>라고 이름을 지어주며 말하기를

 

 

“<여치呂雉>를 닮았음이라!”

 

 

장씨가 말하기를

 

“여치는 행실이 좋지 않았으니 불길하옵니다. 어찌 이 딸을 그녀에 비하십니까?”

 

 

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록 여치를 닮았다 하더라도 또한 몇이나 그러하겠는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느니라.”

 

 

 

유방이 胡에게 포위되었을 때 치마를 벗어 나라를 구한 <여치呂雉>도 

 

상당한 미인이 아니였을까? 

 

 

<정공鄭共>의 딸 <치雉>가 황조가에 나오는 <치희雉姬>라는 그 여인이다.

 

 

그녀의 아버지 <정공鄭共>은 <한소漢素>의 친구로  무기를 만드는 漢人이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漢人은 차별을 받았다.

 

 

<치희雉姬>는 BC32년에 태어나  BC16년 열 일곱의 나이에 입궁하였으며,

 

BC11년 먼저 입궁한 <화희禾姬>와 유리의 총애를 다투게 된다.

 

천한 漢人이라는 욕을 듣고는 고향인 한빈(汗濱)으로 돌아가 버린다.

 

 

 

황조사(黃鳥詞) 

 

翩翩黃鳥(편편황조)      훨훨 나는 꾀꼬리는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 서로 노니는데

念我之獨(염아지독)      나는 홀로 외로워라

誰其與歸(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가리 

 

 

유리가 지은 황조사(黃鳥詞)이다.

 

삼국사기는 BC 17년(유리왕 3년)에 지은 것이라 하나

 

BC17년은 화희(禾姬)가 입궁한 해이고

 

이듬해 BC16년에 치희가 입궁하게 되고 이 황조사를 지은 해는 BC11년이다.

 

 

정공(鄭共)의 딸 치희(雉姬)가 황룡국왕 보득(寶得)의 딸인 화희(禾姬)에게 욕을먹고 

 

한빈(汗濱)에 있는 친정으로 돌아가 버리자 

 

그녀를 쫒아가 같이 돌아오길 바라며 지었다는 시가이다.

 

 

 

 

三年 ......冬十月 王妃松氏薨

 

王更娶二女()以繼室 一曰禾姬 鶻川人之女也 一曰雉姬 漢人之女也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涼谷造東西二宮 各置之

 

後 王田於箕山 七日不返

 

二女(姬)爭鬪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 策馬追之雉姬怒不還

 

王嘗息樹下 見黃鳥飛集乃感而歌曰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삼국사기>

 

 

 

(유리왕) 3년(중략)

 

 

冬10월, 왕비 송씨가 돌아가셨다.

 

 

왕이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후실로 삼았는데,

 

한 사람은 화희라 하며 골천 사람의 딸이고,

 

또 한 사람은 치희라 하며 한 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는 총애를 다투어 화목하지 않아,

 

왕은 양곡에 동, 서 2궁을 짓고 각각 살게 하였다.

  

 

이후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나가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두 여인은 싸우다가 화희가 치희를 욕하며 말하기를

 

“너는 한가의 종년으로 어찌 무례함이 심한가?”

 

치희는 부끄럽고 한스러워 집으로 도망가 버렸다.

 

 

왕이 이를 듣고 급히 말을 몰아 쫓아갔으나, 치희는 화가 나서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나무 밑에서 숨을 돌리는데, 꾀꼬리가 날아드는 보고 감동하여 노래 부르기를

 

 

“훨훨 나는 꾀꼬리는, 암수 서로 노늬는데, 나는 홀로 외로워라, 뉘와 함께 돌아가리.”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우리의 古記가 거칠고 서투르고 史實이 빠지고 없어서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였다고 변명한다.

 

 

중요한 역사적 史實은 기록하지 않은 채

 

유리와 두 여인과의 치정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이렇게 상세히 기록하였는지?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