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四年乙卯, 正月, <都切>如<柵城>娶<帶素>女.  

七月, <溫祚>立柵于<漢山>, 以<再思>公主妻之.  

十月, <帶素>, 引五萬軍入寇<松江>, 大雪七日, 凍死者十九, 悔不聽<觧素>之諫.

<고구려사초 광명대제기>

 

 

광명대제14년{BC6}을묘, 정월,

 

<도절都切 BC19-1>이 책성(柵城)으로 가서 <대소帶素>의 딸과 혼인하였다.  

 

 

7월, <온조溫祚 BC44-28>가 한산(漢山)땅에 목책을 세웠다.

 

<재사再思 好禮生芻牟女 BC19-?>공주를 <온조>에게 처로 주었다.  

 

 

10월, <대소帶素>가 5만군을 끌고 들어와 송강(松江)에서 노략하다가

 

큰 눈이 7일간을 내려서 얼어 죽은 이가 열에 아홉이 되자,

 

<해소觧素 BC43-47>의 간언을 뿌리친 것을 후회하였다.

 

 

十四年乙卯 正月都㘦如柵城娶帶素女.

七月溫祚立柵漢山下盖有南進之意也,

上謂皇后曰朕與卿西進溫祚與再思南進先帝之靈應有喜也, 時再思爲溫祚妃故也.

十月帶素欲得松江而率五万兵來侵遇大雪七日進退不能凍死者十八九

不戰而退歸謂解素曰不聽汝言而致此.

<고구려사략 유류기>

 

 

유류왕 14년(BC. 6)을묘년 1월

 

<도절>이 책성에 가서 대소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7월 온조가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웠는데 아마도 남진의 뜻이 있었다.

 

왕이 황후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짐(유리)과 경(황후)은 서쪽으로 나아가고,

 

온조와 재사는 남진으로 나아가는 것은 선제(추모)의 영혼이 있으면 기뻐할 것이다.

 

이때는 재사가 온조의 妃가 되어있던 까닭이다.

 

 

10월 대소가 송강(松江)을 얻기를 바라여 병사 5만을 이끌고 와 침입했는데

 

우연히 7일 동안 큰 눈이 내려 나아가거나 물러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전쟁을 하지 않고 물러났는데 돌아와서 <해소解素>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너의 말을 듣지 않아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렀다.

 

 

 

十四年, 春正月, 扶餘 王 帶素 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 扶餘 强大, 欲以太子 都切 爲質,

都切 恐不行, 帶素  之.

冬十(-一) 月, 帶素 以兵五萬來侵, 大雪人多凍死, 乃去.

<삼국사 고구려본기>

 

 

유리왕 14년 봄 정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와 방문하고, 인질의 교환을 요청하였다.

 

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자 <대소>가 분개하였다.

 

겨울 11월, <대소>가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였으나,

 

큰 눈이 내려 동사자가 많이 생기자 곧 돌아갔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삼국사 백제본기>

 

 

온조왕 13년(BC 6년) 봄 2월,

 

서울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나이 61세였다.

 

 

 

BC6년 <대소>가 동부여 왕으로 즉위하여

봄 정월에 사신을 보내서 <도절都切>을 인질로 요구하였다.

 

<대소>의 <도절> 인질요구에는 宋后계의 모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송양>의 아들 <송의>는 유리가 동부여에 있을 때 탈출을 도왔었는데,

<송의>의 어머니가 책성사람이라는 배경이 작용했었고,

고구려의 창업공신 <오이>도 아버지가 책성태수였다.

 

왕이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태자 <도절都切>을 인질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소서노는 외손자 <都切(阿爾后所生類利子)>을 인질로 보내는 것을 반대한다.

 

졸본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절>은 책성으로 가 <대소>의 딸과 혼인하게 된다.

 

2월 <도절>의 인질에 분노한 <소서노>는 졸본세력과 함께 반란을 꾀하였으나

실패로 끝나고 <소서노>는 <유리>와 <송후> 일파에게 죽임을 당한다.

 

 

고구려사초와 고구려사략 및 추모경에서는

소서노를 BC55년생으로 추모보다 3살 연하로 기록하여

비류와 온조를 추모의 소생으로 기록하다보니

소서노를 AD28년 유리왕의 母  예태후가 죽은 해에 슬그머니 집어넣어

83세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소서노는 추모보다 8살 年上이었고

소서노와 비류, 온조가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는 기록은

史實과 일치하지 아니한 것이다.

 

온조의 남하는 BC6년에 한산에 목책을 세우고

13년 후인 AD7년에야 한산으로 옮기게 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