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二年癸亥, .....  十二月, 田于<質山>陰, 五日不返.

<陜父>諫曰;“天子之畋在於鍊兵. 今, 風雪如此, 暴露獵騎而行樂, 可乎”.

上, 以<陜父>初附於<沸流>, 有蘊意, 至是, 罷之. <陜父>以瓢浮海入<新羅>

<고구려사초 광명대제기>

 

 

광명대제22년(AD3년) 계해

 

12월 질산(質山)북쪽에서 사냥하며 닷새가 되어도 돌아가지 않았다.

 

 

<협보陜父>가 “천자가 사냥을 함은 병사를 훈련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풍설에 사냥마를 심하게 내돌려서 행락하심이 가당하신지요?”라 아뢰었다.

 

 

상은, 비류에서 <협보陜父>를 처음 만나고서부터 마음속에 쌓여 온 것이 있었는데,

 

이렇게 되자, 그를 파면하였다.

 

 

<협보陜父>가 표주박을 타고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로 들어갔다.

 

 

 

二十二年癸亥 十二月 田于質山陰五日不返 太輔陜父諫之不聽罷爲司園小兄,

陜夫以瓢浮海入新羅.

<고구려사략 유류기>

 

 

유류왕22년 계해(AD3년)

 

12월, 질산음(質山陰)에서 사냥을 했는데 5일동안 돌아오지 않아

 

태보 <협보陜父 BC50-?>가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그 직책을 파면하여

 

정원을 관리하는 소형(小兄)으로 삼았다.

 

협부가 표주박을 타고 바다를 건너 신라로 들어갔다.

 

 

二十二年, 十二月, 王田于 質山 陰, 五日不返.

大輔 陜父 諫曰 "王新移都邑, 民不安堵. 宜孜孜焉, 刑政之是恤, 而不念此, 馳騁田獵,

久而不返, 若不改過自新, 臣恐政荒民散, 先王之業, 墜地." 王聞之, 震怒, 罷 陜父 職,  

司官園. 陜父 憤去之 南韓.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22년(AD3년) 12월,

 

왕이 질산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닷새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 협보가 말했다.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응당 열심히 사회의 안정과 정치와 백성의 구휼 사업을 돌보아야 할 것인데,

 

이러한 일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을 떠나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왕께서 만일 이러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선왕의 업적이 사라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고,

 

관가의 장원을 관리하게 하였다.

 

협보가 분개하여 그 나라를 떠나 남한(南韓)으로 갔다.

 

 

 

고구려사초(략)는 <협보>가 신라로 삼국사기는 남한으로 갔다고한다.

 

<오이>와 송후세력이 졸본세력을 제거하자

직언을 서슴치 않던 <협보>가 <유리>에게 부당함을 간한다.

 

<유리>가 노하게 되고 이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협보>는

낙랑국왕 <시길>의 딸 작씨가 낳은 <작태자(BC19-?)>와 함께

낙랑국의 병사를 이끌고 바다{발해}를 건너 산동성의 신라로 간 것을 말한다.

 

이 <협보>의 후손이 <탈해(51-130)>이며 탈해는 경주 昔씨의 시조가 된다.

 

<협보>와 <탈해>는 흰피부에 노랑머리(黃頭)니 아마도 지금의 러시아계 일것이다.

 

 

<고구려의 태보 <협보>가 신라로 들어 감>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