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七年戊辰,三月,賜<解明>死,是年二十一.

<黃龍>王<烏伊>以弓授<解明>,<解明>折之曰:"非我有力也,弓自不勁." <烏伊>大慙.

皇后奏曰:"<解明>不愛其妻,而侮辱國老. 陛下何不責之." 上乃召<解明>,責之曰:

"不愛<珍>女違父母也. 侮辱國老輕社稷也. 交通後宮淫亂之兆也. 寧其生不若死."

<解明>悲憤立槍於<礪津>而死. 國人愛其好勇而死. <新羅>以女妻<鵲>太子.

<溫祚>遷都<漢山>.

七月,<都助>太子薨,年二十四,<解明>之胞兄也. 性肖其外祖<松讓>,妄自誇張累被叱責,

見<解明>之死,慾爲東宮,使其妻<曼>公主請于上.

<曼>曰:"在自修,而不在請,煩悶自焦觸暑",

而吐歐不起. 時人曰:"勇亦死, 懦亦死."

<고구려사초 광명대제기>

 

 

광명대제27년(AD8)무진,

 

3월, <해명解明 BC13-8>에게 자진하라 했다. 이때 나이는 스물하나였다.

 

 

황룡왕<오이烏伊>가 보궁을 <해명解明>에게 건네자,

 

<해명解明>이 이를 부러뜨리고 나서는

 

"내가 힘이 세어서가 아니고 활이 튼튼하지 못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오이烏伊>는 크게 참담하였다.

 

 

황후가 "<해명>은 자기 처를 아끼지도 않고 나라의 노신을 모욕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왜 <해명>을 나무라지 않으십니까?" 하고 아뢰니,

 

 

상은 <해명>을 불러 책망하길

 

"<진珍>녀를 아끼지 않음은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고,

 

나라의 노신을 모욕함은 사직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며,

 

후궁과 서로 오감은 음란할 조짐이다.

 

사람들을 편안케 하려면 죽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다.

 

 

<해명>은 비참하고 억울하여 창을 려진(礪津)(땅)에 세워놓고는

 

(창 위로 몸을 던져) 자진하였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용감하게 자진함을 좋게 여겼다.

 

 

<신라>는 <작>태자에게 왕녀를 처로 삼아주었다.

 

 

<온조>가 한산(漢山)으로 천도하였다.

 

 

7월, <도조都助 阿爾生琉璃子 BC16-8>태자가 죽었다.

 

(<도조都助>는) <해명>의 동복 형이었는데, 성품은 외할아버지인 <송양>을 닮았다.

 

 

자신을 과장하여 여러 차례 질책을 받았었는데도,

 

<해명>이 죽는 것을 보고나서, 자신이 동궁이 되었으면 싶어,

 

자기 처인 <만曼 曼后生沸流女 BC19-?>공주에게 상께 청해보라고  하였다.

 

 

<만>공주는 "그대로 있으면서 행실이나 바로 할 것인가? 아니면 가서 청을 할 것인가?

 

번민이 스스로 불타올라 덥다." 말하더니, 토악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시절에 사람들은 "용감해도 죽고, 나약해도 죽음뿐이었다."고 말하였다.

 

 

二十七年戊辰 三月東宮解明太子立槍於礪津東原走馬飛躍觸死, 是年二十一.

初太子好勇烏伊獻强弓太子折之曰非我有力也弓不勁矣, 烏伊大慙, 上在北都聞之大怒曰黃龍王國之元勳也, 豈可如是, 命賜刃自裁旣而悔之葬于東原而立廟號曰槍原,

國人哀之曰勇子必死. 是年新羅以女妻陜夫云. 溫祚遷都于漢山. 都助太子薨.

<고구려사략 유류기>

 

 

유류왕 27년(AD8)무진년

 

3월 동궁 해명태자가 여진(礪津) 동원(東原)에서 창을 세워놓고

 

달리는 말에서 날아서 뛰어내려 죽었다. 이때 나이 21세였다.

 

 

처음에 태자는 힘쓰기를 좋아하여 <오이烏伊>가 강궁을 바치자

 

태자가 강궁을 부러뜨리며 말하기를

 

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활이 튼튼하기 못하다.

 

 

오이가 크게 수치스러워하였다.

 

 

왕이 북도에서 그 소식을 듣고 크게 화내며 말하기를 황룡왕은 나라의 으뜸 공신이다,

 

어찌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칼을 내려 명하기를 스스로 헤아리라고 했으나 (그러는 동안에 해명이 자살하여)

 

후회하여 동원(東原)에서 장사를 지냈고 묘를 세웠는데 창원(槍原)이라고 불렀다.

 

 

나라사람들이 슬퍼하여 용감한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다.

 

 

이해에 신라가 왕녀를 협부의 처로 삼았다고 한다.

 

 

온조가 한산으로 천도를 했다. 도조(都助)태자가 죽었다.

 

 

 

유류왕 27년(8) 봄 정월에 왕태자 해명 (解明)이 옛 도읍에 있었는데,

 

힘이 있고 매우 용감하였다.

 

 

황룡국 (黃龍國)의 왕이 이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한 활을 선물하였다.

 

 

해명이 그 사신을 마주하여 그것을 당겨 부러뜨리고 말하기를

 

“내가 힘 센 것이 아니라 활이 굳세지 못할 뿐이다.” 하였다.

 

황룡국 왕이 부끄럽게 여겼다.

 

 

왕이 이를 듣고 화를 내며 황룡국 왕에게 알려 말하기를

 

“ 해명이 자식으로서 효도를 하지 않았으니 과인을 위해서 그를 죽여주기를 청합니다.”

 

고 하였다.

 

 

3월에 황룡국 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청하였다.

 

태자가 가려고 하니 건의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지금 이웃나라가 이유도 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황룡국 왕이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마침내 갔다. 황룡국 왕이 처음에 모략을 꾸며 죽이려고 하였으나

 

만나서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를 갖추어 보냈다.

 

<삼국사 고구려본기>

 

 

 

<소서노>의 딸인< 阿爾(BC39~BC7)>后의 아들 <도절都切(BC19~1)>이 죽자

禾씨 소생 <解明 (BC13-8)>이 동궁이 된다.

 

<해명>은 그 용맹함과 비범함이 남달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왕재의 길을 닦고 있었다. 

 

유리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한 뒤에도 졸본의 민심을 얻지 못하자 

<해명>은 졸본에 계속 남아 <소서노>의 잔존세력들과

졸본 백성을 아우르며 지지기반을 키우고 있었다.

 

<해명>은 소서노의 딸인 <진珍>공주의 남편이다.

 

<해명>과 졸본세력부터 위험을 느끼자 

<유리>는 <오이>와 공모하여 해명을 자결케하고

<阿爾>后의 둘째아들 <도조都助 BC16-8>마저 제거하게 된다.

 

소서노 일파의 졸본세력이 제거되자 불안을 느낀 <온조>는

한산(漢山)으로 천도하게 되는 것이다.

 

<해명>의 죽음은 자신의 왕좌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한

유리왕의 잘못된 판단이 빚어낸 비극이다.

 

<도절>,<도조>,<해명>,<해술>로 이어지는 용감한 왕자들의 자결은

훗날 <유리>가 <온조>에게 10년간 왕좌를 내어놓아야하는 결과를 빚게되고

이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고구려 초기 기년이 뒤틀리게 된다.

 

이 해 <왕망>은 前漢 <유영劉嬰>을 몰아내어 漢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신(新)’이라 하여 황제가 됨으로써 선양혁명에 성공하고

혁거세가 사로국의 왕으로 추대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