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十一年壬申,七月, 漢人<田譚>與<索頭>相爭,請救於<勾鄒>,
<勾鄒>使<延丕(召后孫子)>擊<田譚>殺之. <嚴尤>來寇, 虜其將卒二千餘,
馬仗無數,印顆十二,拓地七百餘里. 十月,以<陽>公主妻<乙豆智>.
<고구려사초 광명대제기>
광명대제31년(AD12)임신,
7월, 漢人 <전담田譚>이 색두(索頭)와 싸웠는데
(玄兎태수)<구추勾鄒>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구추勾鄒>는 <연비延丕(召后孫子)>를 보내어 <전담田譚>을 치고 그를 죽였다.
<엄우嚴尤>가 쳐들어와서 노략질 하므로 이천 여명의 장졸을 사로잡고
병마와 병장기는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할 만큼 되었고
(획득한) 인과도 12개나 되고, 땅도 칠백여리를 얻었다.
10월, <양陽>공주를 <을두지乙豆智>의 처로 삼았다.
三十一年壬申 七月 漢人田譚與索頭相爭, 請救於勾鄒,
勾鄒使延丕(召西奴之侄子)擊譚殺之譚
不遜故也. 又有嚴尤者來寇, 紫蒙勾鄒自將擊之虜其將卒二千余,
馬伏無數印顆十二拓地七百余里. 十月乙豆智妃皐頭薨以陽公主乙豆智妃.
<고구려사략 유류기>
31년(A.D.12)임신년
7월 한인 <전담>이 색두와 싸웠는데, 구추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구추는 연비(소서노의 조카)를 보내어 전담을 죽였는데 불손했던 까닭이다.
또 <엄우>라는 자가 있어 쳐들어와서 노략질 하므로,
자몽(紫蒙)(국)과 구추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엄우를) 쳐서 그 장졸 2천여 명을 포로로 잡고
숨겨진 말이 수없이 많았고 인과(印顆)가 12개, 땅도 칠백여리를 넓혔다.
10월 <을두지>의 妃 <고두皐頭>가 죽었다.
이 때문에 <양>공주를 <을두지>의 비로 삼았다.
한의 <왕망 王莽>이 우리의 병력을 징발하여 오랑캐(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강제로 보내니
모두 도망하여 새외(塞外)로 나갔다.
이 때문에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 (遼西) 대윤(大尹) <전담 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죽임을 당하니
주군(州郡)이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 嚴尤>가 아뢰어 말하기를
“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으로 하여금 저들을 위로하여 안심하게 하여야 합니다.
지금 큰 죄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부여의 족속이 반드시 합칠 것이니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와 예맥 (獩貊)이 다시 일어나면 이는 큰 근심거리입니다.” 하였다.
왕망이 이를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목을 베어 머리를 수도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와 남북사(南北史)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왕망이 이를 기뻐하고 우리 왕 이름을 고쳐 하구려후(下句麗侯)라 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에 한 (漢)의 변방 지역을 침범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莽又發高句驪兵擊匈奴 高句驪不欲行,郡強迫之,皆亡出塞,因犯法為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為所殺。州郡歸咎於高句驪侯騶,
嚴尤奏言 貉人犯法,不從騶起 正有它心,宜令州郡且尉安之。今猥被以大罪,
恐其遂畔,夫餘之屬必有和者。匈奴未克,夫餘、濊貉復起,此大憂也。 莽不尉安,
濊貉遂反 詔尤擊之。尤誘高句驪侯騶至而斬焉,傳首長安。莽大說,
下書更名高句驪為下句驪。
<자치통감>
서기12년, 요서 대윤 <전담>이 색두(탁발선비)를 공격하면서 고구려 병사를 징발했다.
玄兎태수 <구추>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나
오히려 <연비>를 보내 <전담田譚>을 죽여 버린다.
이를 보복하고자 <엄우嚴尤>가 다시 공격해왔으며,
이때 <엄우>가 목을 벤 장수는 <구추勾鄒>가 아니라 소서노의 조카<연비延丕>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한서> 왕망전을 읽어본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한서와 남북사를 언급하였다.
하지만 김부식은 이 사건으로 사망한 고구려 인물을'연비(延丕)'라고 밝히고 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연비'가 사망했다고 적었던 것은
그가 고구려측 기록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기록들은 원전이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고구려 자체 기록이고 또다른 하나는 중국측의 기록을 옮겨온 것이다.
<엄우>는 <구추>를 공격하다가 오히려 장졸 이천 여명이 포로가 되고
땅도 칠백여리를 뺏기는 수모를 당한다.
패전의 책임이 두려워 고구려후 <추騶>의 목을 베었다고 거짓보고를 하고
그걸 분별할 능력도 없는 자가 황좌에 앉아 하구려(下句麗) 운운하였으니
신(新)이 <왕망> 당대에 망한것도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들이 목을 베었다는 <구추勾鄒>는 그 후 목이 여전이 달린 채로 현도태수로 있었고
서기36년 개마와 한(漢)이 일으킨 반란으로 구려성(句麗城)이 위험에 빠지자
이를 구원하던 중 병사(病死)하게 된다.
<요서와 색두 및 구려성, 현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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