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十七年戊寅, 四月,<解術>溺死<礪津>,祭須尋其尸,葬于<王骨岺(八虎畔向陽山)>.

七月,<烏伊>薨,< 得>子<毛 >立,<伊>之參也.

<고구려사초 광명대제기>

 

 

광명대제37년(AD18)무인,

 

4월, <해술(BC10-18)>이 려진(礪津)에서 익사하여

 

(수신에게) 제사하고 깊은 곳에서 그 시신을 찾아 왕골령(王骨岺)에 장사했다.

 

 

7월,<오이烏伊(BC64-18)>가 죽어,

 

<보득>의 아들 <모린>이 섰는데, <오이>의 사위이다.

 

 

三十七年戊寅 四月 解術溺死礪津不得其尸

沸流人祭須得之葬于王骨岺(八虎力下畔向陽山),

賜須金十斤田十頃, 解術禾氏出也性如婦女, 慕解明及珍公主而死.

七月黃龍王烏伊薨, 宝得子毛獜代之 烏伊之女婿也. 烏伊柵城褥薩烏文之子也.

慷慨有大志事東明爲元勳,

以解明事傷心至是又見解術事得疾, 累夢解明羊吉而驚劇而終年八十三.

<고구려사략 유류기>

 

 

유류왕 37년(AD.18)무인년

 

4월 해술이 려진에서 익사하여 그 시체를 찾지 못했다.

 

비류사람 <제수祭須>가 시체를 찾아서 왕골령에 장사 지내고,

(제)수에게는 금 열 근과 밭 십 경을 주었다.

 

해술은 <화禾>씨의 자로 성품이 부녀자 같았으며,

해명을 사모했던 <진珍>공주(해명의 처)도 따라 죽었다.

 

7월 황룡왕 오이가 죽어, 보득의 아들 모린이 섰는데, 오이의 딸의 남편이다.

 

오이는 책성욕살(태수) <오문烏文>의 아들이다.

 

동명의 으뜸 공신으로 큰 뜻이 있어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슬퍼하고 한탄하였는데,

해명의 일로 마음에 상처를 받았고 이에 또 해술의 일을 보고 병을 얻었다.

 

해명과 양길의 꿈이 누적되어 심하게 놀라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유리왕 37년(18년) 여름 4월에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애통해 하여 사람을 시켜 시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후에 비류 사람 제수 (祭須)가 찾아서 알리니,

마침내 예(禮)로서 왕골령 (王骨嶺)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경(頃)을 주었다.

 

가을 7월에 왕이 두곡에 행차하였다.

 

겨울 10월에 두곡(豆谷)의 이궁에서 죽으니,

두곡의 동쪽 들판에 장사지내고 이름을 유리명왕 (瑠璃明王)이라 하였다.

 

대무신왕 (大武神王)이 즉위하였다.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무휼 (無恤)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다.

 

성장하여서는 영웅호걸로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에 태자로 삼았는데 그때 나이가 11세였다.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어머니는 송(松)씨로서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

<삼국사 고구려본기>

 

 

 

解術太子(해술태자)는 禾太后(화태후)의 소생이다.

 

성격은 온화하고 인자하고 지극히 효성스러우니 마치 婦女(부녀)와 같았다.

 

解明(해명)이 죽자, 明王(명왕, 유리왕) 역시 解術(해술)을 太子(태자)로 삼아서,

禾太后(화태후)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군신들은 그가 人君(인군)의 모습이 없다며, 이를 그만두라 간하니,

禾氏(화씨)의 무리들은 不快(불쾌)하여,

解術(해술)에게 사졸들을 길러서 병권을 장악하라고 설득하였다.

 

解術(해술)이 말하길,

 

"비록 解明(해명)의 용감함과 都切(도절)의 인자함으로도

父王(부왕)에게 수용되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저희 어머님은 미천하여 핍박을 당할테니,

어찌 감히 太子(태자)를 바라겠소이까?"

라고 하며, 결국 듣지 않았다.

 

곧 無恤(무휼)이 太子(태자)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니,

手下(수하)의 사람들이 나날이 無恤(무휼)에게 돌아갔다.

 

解術(해술)은 처음에 解明(해명)과 서로 좋아하여, 夫婦(부부)와 같아서,

그들이 男女(남녀)가 되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였다.

 

이때 이르러 無恤(무휼)은 解術(해술)을 尊大(존대)하였으나,

나이가 많아서 그의 밑에 들어가기를 수치스러워하였다.

 

그리하여 礪津(려진)에 가서, 解明(해명)에게 제사지내고, 물에 뛰어들어 죽으니,

 

그 노래가

 

"解明(해명)아! 解明(해명)아! 어디로 갔느냐?

 

 解術(해술)이 解術(해술)이 여기에 왔다!

 

나도 너를 따라 물속으로 가련다.

 

天上(천상)에서 만나거든, 夫婦(부부)가 되자꾸나."

 

라고 하였다.

 

明王(명왕)이 이를 듣고 애통해 하며 말하길

 

"짐이 자애롭지 못해 세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어찌 사람들을 볼 수 있을꼬"

라고 하였다.

 

곧 그 시체를 찾았으나, 7일동안 찾지 못하다가,

沸流人(비류인) 祭須(제수)가 물의 성질을 알 수 있어서, 下流(하류)에서 찾으니,

이를 듣고, 왕은 곧 太子(태자)의 禮(례)로서 解明(해명)의 곁에 장사지냈다.

 

祭須(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하사하였다.

<본기신편열전>

 

 

 

유리왕은 고구려사초(략)에서는 28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해술과 오이와 함께 18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

 

14년 송태후의 비류세력에 의하여 무휼태자가 정윤이 되자

해술태자는 자살하여 그의 형 해명태자의 뒤를 따른다.

 

화태후계와 오이는 정변을 꾀하게 되고

정변이 실패하자 한산에서 세력을 키워왔던 온조가 정변을 일으켜

유리왕을 두곡의 행궁에서 제거하고 마침내 도성(北都)을 점령하게 되고

이후 온조가 죽을때(28년)까지 고구려를 통치하게 된다.

 

고구려사초(략)의 이후 10년간의 유리왕 기록은 온조의 치세 기록이다. 

 

고구려사략 유류기는 소서노와 유리의 딸인 <珍>공주(해명의처 BC18년생)가

<해술>을 따라 죽었다고 하였으나 온조의 同腹異父 동생인 <珍>공주는 살아남아

훗날 <무휼>이 즉위하자 황후로 책봉된다.

 

고구려사초(략)은 유리왕이 죽은 해를 유리왕의 母 <예>씨가 죽은 해인 28년에

<소서노>와 함께 슬그머니 집어넣어 온조의 정변을 은폐하려 한 것이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유리왕이 죽은 후 <무휼>이 즉위한 것으로 기록하다보니

고구려 초기 기년이 뒤틀리게 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