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十九年庚辰, 三月, 立<東明>神廟于<龍山岺(勃利廟岺)>. <再思>公主與<多婁>來朝,

以<鮮><苩>兩公主妻<多婁>, 而賜'正胤冠刃', 以爲<汗南>'傳國之璽'.

九月,田于<骨句川(□河)>,東宮得神馬狀如<巨婁>.

上曰:"<東明>復興之兆. 十月,<扶余>獻赤烏一頭二神.

<고구려사초 광명대제기>

 

 

광명대제 39년 경진(AD20)

 

3월 용산령(龍山岺)에 동명신묘(東明神廟)를 세웠다.

 

 

재사(再思)공주와 다루(多婁)가 문안 와서,

 

<선蘚>공주와 <백苩>공주 둘을 <다루>에게 시집보내고

 

<다루>에게 정윤관인(正胤冠刃){왕위계승자임을 표시하는 관모와 보검}을 내려,

 

한남(汗南)국 전국옥새(傳國玉璽)로 삼게 했다.

 

 

9월, 골구천에서 사냥했는데, 동궁이 거루를 닮은 신마를 얻으니,

 

상이 "동명(東明)이 다시 일어날 징조로다."라 하였다.

 

 

10월, 부여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 달린 붉은 가마귀를 보내왔다.

 

 

 

대무신왕 3년(20)

 

봄 3월에 동명왕 (東明王)사당을 세웠다.

 

 

가을 9월에 왕이 골구천 (骨句川)에서 사냥하다가

 

신마(神馬)를 얻어 이름을 거루(駏䮫)라 하였다.

 

 

겨울 10월에 부여 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파견하여 붉은 까마귀를 보내 왔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까마귀는 검은 것입니다.

 

지금 변하여 붉은 색이 되고,

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두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

 

왕께서 고구려를 합칠 것입니다.” 하였다.

 

<대소>가 기뻐서 그것을 보내고 아울러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알려 주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답하기를

 

“검은 것은 북방의 색입니다.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이 되었습니다.

 

또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왕이 얻어서는 갖지 아니하고 나에게 보내었으니

두 나라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대소>가 그 말을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

<삼국사 고구려본기>

 

 

 

광명대제39년 기사와 대무신왕 3년의 기사는

온조가 고구려왕위에 오른 후 2년째 되는 해 AD20년의 기사이다.

 

용산에 동명신묘를 세운 것은

온조가 금와왕과 우태, 소서노를 모시는 사당을 세운 것을 말한다.

 

까마귀는 본래 검은 색의 새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이 새는 흔히 흉조를 알리는 새로 여겨졌다.

 

그러나 ‘붉은 까마귀’는 이와는 반대로 상서를 나타내는 새로 여겨졌다.

 

이 설의 연원은 중국 주 武王이 은의 <紂>임금을 칠 때

붉은 까마귀가 나타났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일두이신(一頭二身)의 기사는 백제본기에도 등장한다.

 

고구려본기에는 두개의 나라가 고구려와 동부여라고 하였으나,

백제와 고구려를 말한다.

 

머리가 붙은 쌍둥이의 까마귀가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살아남기도 매우 어려우며,

더더구나 붉은 빛을 띤 까마귀가 나타날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그리고 머리가 하나에 몸통이 두개인 짐승이 나타나면

그러한 동물을 획득한 나라에서는

주변의 국가를 병합할 징조라 생각하여 상서롭다하였다.

 

동부여가 그러한 동물 혹은 상징물을 제작하여 고구려에 주었다면

그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하나가 되었음을 축하하는 선물이었을 것이다.

 

즉, 고구려에 온조가 즉위하였음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또 이해에 갈사태후(20-96)(국조왕 태조의 할머니)가 태어났으며.

백제의 우보 <해루>의 오누이인 갈사태후(BC16-36)를 동부여에서 보내와

백제와 동부여의 우호를 다졌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