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건무 6년(AD 30년)에 지방군의 도위를 철파할 때 동부도위를 파하고

그 현의 거수를 모두 현후로 삼았다.

 

불내, 화려, 옥저 등은 모두 후국이 되었다.

 

후한(後漢)은 고구려를 정벌하여

단단대령(單單大嶺)동쪽지방을 수복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그 2년 뒤인 A.D 30년에 이미 고구려에 점령되어 소멸되어 버린

낙랑군(樂浪郡) 동부도위(東部都尉)를 파(破)하고

현(縣)의 우두머리를 후(侯)로 봉하였다.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전>

 

 

<왕경王景>의 자는 중통으로 낙랑군 남(염)감현 사람이다.

 

8대조 <중仲>은 본래 낭야군 불기현 사람으로 도술을 좋아하고 천문에 밝았다.

 

여씨들이 난을 일으키매,

제애왕 <양襄>이 거병하려고 하여 여러 차례 <중仲>에게 자문을 구했다.

 

또 제북왕 <흥興>이 반란을 일으키자 <중仲>에게 병사를 맡기고자 하였다.

 

<중仲>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이에 바다 건너 낙랑의 산중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살았다.

 

부(父) <굉閎>은 郡의 삼로가 되었다.

 

更始帝{왕망}가 패하자,

토착인 <왕조王調>가 군수 <유헌>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하였다.

 

건무 6년(30년), 광무제가 태수 <왕준王>을 보내어 진압케 하였다.

 

(왕준이) 요동에 이르자, <굉閎>과 군의 결조사 <양읍楊邑>등이

<왕조王調>를 죽이고 <왕준王遵>을 맞이하였다.

 

모두 열후에 봉해졌으나 <굉閎> 홀로 사양하였다.

 

제가 기특하게 여겨 그를 불렀으나 도중에 병으로 죽었다.

<後漢書 循吏列傳 王景>

 

 

서기 30년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새로 파견한 낙랑태수 <왕준王遵>은

<왕조王調>를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요동에 이르렀다.

 

이 때 <왕준王遵>에게 협력하는 토착 한인(漢人)인 군삼로(郡三老) <굉閎>과

군결조리(郡決曹吏) <양읍楊邑> 등에게

<왕조王調>가 살해 당하면서 반란은 진압 되었다.

 

그러나 광무제(光武帝)는 낙랑동부도위(東部都尉)를 폐지한다.

(기원전 82년)에 현도(玄菟)군 옥저(沃沮)지역은

 

구려(句麗)족과 연계한 낙랑(樂浪)인들에 의해 혁파 되었고,

결국 한(漢)나라는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두게 된다.

 

한(漢)나라는 진(秦)나라 군현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는데,

군의 장관을 군수(郡守) 혹은 태수(太守)라고 하고,

군수는 군내에서 스스로 속리를 데려다 쓸 수 있는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군내의 병권(兵權)은 구체적으로 군사를 거느리는 것은 도위(都尉)에게 있되

그 통솔권한은 태수에게 있었다.

 

다시 말하면 도위(都尉)는 군현의 병권을 가진 직제인 것이다.

 

따라서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폐지하였다는 것은

영동7현(동이, 불이, 잠태, 화려, 사두매, 전막, 부조)을 포기한 것이다.

 

 

<영동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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