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柵南之戰

고대사 2014. 8. 5. 11:09

 

 

대무신제4년 신묘(31년),

 

12월, 우보 <을두지乙豆智>를 행군대주부로 삼고 친히 동부여(東扶餘)를 정벌하였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밤을 지내는데 쇠붙이 소리가 들려서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하였더니 금인장과 보검 등 병물(兵物)을 얻게 되었다.

 

<고루高婁>가 “하늘이 내리신 것입니다.”라 하매, 상이 엎드려서 받았다.

 

다음날, 북명(北溟)사람 <괴유怪由>를 얻어 선봉을 삼고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를 얻어 유격을 삼았더니,

진격하여 괄가(括街)와 송강(松江)땅을 빼앗았다.

 

이 해에 상이 <추각소芻殼素>의 처를 거둬서 <대실大室>부인으로 삼았다.

 

 

대무신제5년 임진(32년)

 

2월, 책성(柵城){東夫餘都城} 남쪽으로 진군하여 높은 언덕에 진영을 차렸는데,

사방이 진창이라 군사들과 병마들이 모두 진창에 갇히게 되매,

<고루高婁 桂婁生芻牟子 BC35-32>태자 군대가 진창 속에서

<대불帶弗(東夫餘主)>과 맞붙어 싸웠고,

태자가 군진의 앞에서 싸움을 독려하다가 흐르는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으나

병사들이 어쩔 도리가 없어 구하지 못하매,

상이 <괴유怪由>를 불러서 태자를 구하라고 명하였다.

 

<괴유怪由>가 칼을 빼어들고 크게 고함지르며 진탕을 넘어 들어가서

<대불>의 군대를 무찌르자,

한 무리의 군사들이 이에 힘입어 적의 본진을 곧바로 들이쳐서,

<대불>을 잡아 목을 치고 나왔더니,

살아남은 <대불>본진의 군사들이 놀라서 무너졌다.

 

<대만帶万>군대 역시 아수라장에 휩쓸려 물러날 뿐이었다가,

자기 형이 죽은 것을 알고서 울부짖으며 죽기를 맹세하고 모든 군사를 진격시켜

그 높은 언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이에 상이 걱정스럽고 두려워서

“<온조溫祚>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라 하니,

 

<을두지乙豆智>가 “성모신령께서 반드시 하늘에서 도우실 것입니다.

폐하께선 걱정하지 마십시오.”라 아뢰었다.

 

과연, 7일간이나 큰 안개가 끼어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더니,

<대만帶万>도 변을 당할까 걱정하며 좀 물러나기에,

병사의 모습을 닮은 수많은 허수아비들을 진영에다 세워놓고 몰래 빠져나왔다.

 

하늘(날씨)이 잠시 진창을 얼어붙게 하여 그 포위망을 벗어나긴 하였지만,

캄캄한 밤중 창황 중에 신마와 큰솥을 잃어버린 채로 이물림(利勿林)에 다다랐고,

병사들도 굶주려 힘을 낼 수 없게 되어서, 들짐승을 잡아서 군사들을 먹였다.

 

이윽고 북도(北都){國內威那岩城}로 돌아오자,

 전장에 임했던 장졸들에게 여러 날을 먹고 마시게 하였고,

죽은 이들을 조문하고 상한 이를 살피면서 그 부모들을 위무하여 이르길

 

“짐이 부덕하여 <부여扶余>를 깔보아 치려하였다가,

<대불帶弗(동부여왕)>은 가까스로 죽였으나 그 나라는 멸하지도 못한 채로,

우리 군사들을 많이 잃었소이다. 짐의 과오이오.”라 하였더니,

 

나라사람들이 황제의 덕과 의에 감복하여

모두들 “나랏일엔 몸을 바치는 것이 <주유朱留>백성들의 뜻입니다.”라 하였고,

이것이 나라를 위하는 사람들의 본분이 되었다. 

 

<고루高婁>태자를 <계후릉桂后陵>에 장사하고서

 

상이 <진珍>황후에게 이르길

 

“<桂>후 母子는 나라를 위해 죽었소이다.

 

아들을 낳으려거든 마땅히 <桂>후 같아야 할 것이오.”라 일렀더니,

 

<진珍>후가 아뢰길

 

“당신 妻子들 모두 지아비를 위해 죽으려 하였건만,

폐하께서 저를 내버려두고 멀리 정벌을 나서셨으니,

제가 어찌 죽을 수나 있었겠습니까?”라 하매,

 

상이 웃으며 이르길

 

“그대는 다시 사는 사람이고, 그 또한 사랑스럽지 않겠소?”라 하였다.

 

<진珍>후는 <소召>후 소생으로 용모가 지극히 아름답고 성품도 애교가 있었으며

총애를 탐하였다.

 

애초엔 <해명解明>의 처였었는데, 따라죽거나 과부로 수절하지 아니하였다.

 

상이 10살 때에 엄명으로 그녀를 취한 것이었고,

 그녀가 낳은 자녀들은 겉으론 번듯해도 모두 불초에 가까웠던 까닭에

상이 이런 말을 했던 것이었다. 

 

 

3월, 잃었던 말 거루(巨婁)가 부여(扶余)말 백 마리를 이끌고 함께

학반령(鶴盤岺) 거회곡(車回谷)에 도착하니,

상이 교외로 나가서 이를 마중하고 갈기를 어루만지며 위안하여 이르길

 

“말이 돌아왔으니, 솥도 돌아오지 않겠는가?”라 하였다. 

 

하4월, <해소觧素>의 아들 <갈사曷思>국왕 <산해山觧>가

자기나라가 곧 망할 것임을 알고 따르는 이들 100여인과 함께

압록곡(鴨淥谷)에 다다랐다가 <해두海頭>왕{말갈추장}이 사냥 나왔음을 보았고,

함께 사냥하자고 청하였더니 <해두>가 오만무례하여,

그를 죽이고 그의 백성들도 빼앗았다.

 

갈수(曷水)변에 도읍하여 하북(河北) 포륜(布倫)땅을 다스리며 살겠노라 청하여,

허락하였다.

 

<해소解素>는 성모(柳花)께서 낳은 <금와金蛙>왕의 아들로,

늘 <대소帶素>의 무도함을 간하면서 우리를 두둔하였었다.

 

그가 죽으매, 둘째 아들 <해루解婁>가 우리에게 귀의하여 <온조溫祖>를 돕고,

<산해山觧> 또한 이때 귀의하여 딸을 후궁으로 바쳤다.

 

그 딸은 요염하기도 하였지만 덕망이 있어서 황후로 되었고,

몸에선 향내가 나고 살결도 물고기처럼 희고 깨끗하여, 상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7월, <갈사>왕의 종제 <락문絡文(해소의 동생 <해만> 역시 유화소생이고,

<락문>은 <해만>의 아들임)>이 또한 1만여 인을 이끌고 찾아와서 항복하고

“성인의 나라 백성으로 살게 하여달라.”고 청하매,

상이 교외로 나가서 맞이하여 손님으로 대우하고

안서대왕(安西大王)을 삼아 연나부(掾那部)에서 살게 하였다.

 

이때, <동부여>는 큰 난리가 일어서 서로를 잔인하게 죽였다. 

 

10월, 정여장군(征餘將軍) <괴유怪由>가 죽었다.

 

<괴유>는 엄청 근력이 센 사람이어 <책성柵城>남쪽 싸움에서 <고루>태자를 구하다가

창을 여러 개를 맞았으나 이제 와서야 죽은 것이다.

 

1품 대가(大加)의 예법으로 북명산(北溟山)남쪽에 장사하였다.

<고구려사초 대무신제기> 

 

 

<고야高耶>는 동부여왕 <대소帶素>의 딸이다.

 

AD14년 <대불帶弗>은 반란을 일으켜 금와왕의 둘째아들인 <대소帶素>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뒤 <왕문王文>의 처인 <고야高耶>를 후(后)로 삼는다.

 

<대불帶弗>은 금와왕의 맏아들인 <대백帶伯>의 아들이다.

 

책남지전(柵南之戰)에서 <대불帶弗>이 죽자 <고야高耶>가 동부여를 통치하게된다.

 

AD28년 광명대제를 이어 즉위한 대무신제는  

AD31년 <을두지乙豆智>를 선봉으로 삼아 광명대제 시절 항상 고구려를 괴롭히던

동부여를 정벌하기위해 친정(親征)을 나서게 된다.

 

<대불帶弗>의 반란은 동부여 제후국들의 반발을 야기하고

이로 인해 대무신제는 동부여로 향하는 중

<괴유怪由>와 <마로麻盧> 등 많은 우군을 얻게 된다.

 

AD31년 12월에 출진한 고구려군은 이듬해 3월이 되어서야 책성에 도달한다.

 

이 시기 고구려는 온조반정으로 인하여 국력이 상당히 위축된 상태였고

동부여 점령을 국운을 살리는 기회로 삼았기 때문에 대무신제는 전력을 다해 싸웠고

그래서 마침내 동부여왕 <대불帶弗>의 목을 베게 된다.

 

하지만 잠깐의 방심은 대무신제의 목숨을 위험에 빠지게 한다.

 

대무(大武)가 동부여를 쳐서 대불(帶弗)를 베었을 때

<왕문王文>의 처인 <고야>도 또한 이 전쟁에 참가 하였다.

 

<대무>가 <고야>를 사로잡아 그 미모에 반하여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고 돌려 보낸다. 

 

하지만 이 여인을 놓아준 대가는 엄청났다.

 

아군의 내부를 다 보아온 <고야>는 동부여 군사에게 고구려군의 허실을 말하고

그리하여 동부여는 대대적인 공격을 하게되고 이 전장에서 <고루>태자가 전사하고

대무신제는 진흙탕 속에서 꼼짝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에 빠지게 된다.

 

온조가 살았을 때 동부여 점령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던 것 같다.

 

대무신제는 그때 온조가 섣불리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한 말을 듣지않고

동부여를 공격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대무신제를 도운 것은 7일간이나 계속된 안개와 추운 날씨였다.

 

진흙탕이 얼어붙는 바람에 대무신제는 간신히 동부여의 포위망을 탈출하게 된다.

 

고구려는 수많은 군사와 병장기를 잃고 동부여 역시 대불이 전사하니

이후 <고야>가 동부여를 통치하였으나

주위 제후국들은 떨어져나가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고

대무신제 24년(51년)에 왕문이 죽자 고야를 차지하려고 동부여에 난이 일어나고

마침내 고구려가 이를 평정하니 동부여가 멸망하게 된다.

 

책남지전(柵南之戰)은 그렇게 서로 간에 엄청난 피해만 남긴 채 끝났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