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年丁酉,七月,<漢>兵又猝至<丘利城>,

上親至<南口>督戰. <屋句>曰被今盜賊蜂起,

何暇,無名之戰哉. 此皆邊將之窺利,擅侵也.待其師老,而出寄破之必矣,

乃入<蔚岩>,而斷其來路,賊拔<盖馬(開魯)>而馳至圍<蔚岩>數里.

日加,而兵益多盖,以爲城中無水,

而攻之愈急也. 乃用<豆智>計,以魚酒饋之,賊知有水而退. 時,上,自<南口>來援,

夾擊大破之.  是謂<蔚岩大戰>. 賊慮其中斷, 而不直至<南口>與小城, 虛勞而致敗,

<盖馬>諸城悉平.

<고구려사초 대무신제기>

 

 

 

대무신제10년(AD37)정유,

 

7월, 漢의 병사들이 구리성(丘利城)에 갑자기 밀려들었다.

 

상이 친히 남구(南口)에 나아가 독전하였다.

 

 

<옥구屋句>가 말하길

 

“저들은 지금 도적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고 있는데,

 

어찌 한가로이 명분 없는 싸움을 걸어오겠습니까?

 

이것은 아마도 변방장수가 이익을 엿보며 제멋대로 침입한 것이니,

 

군사들의 사기가 쇠하여지기를 기다렸다가,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나가야 깨뜨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울암(蔚岩)으로 들어가 그들의 침입로를 끊었다.

 

 

적은 개마(盖馬)를 깨뜨리고 달려와서 울암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날이 갈수록 병사가 늘어나니,

대개 성 안에 물이 없음으로 인하여 공격함이 점점 급해졌다.

 

이에 을두지(BC34-40)의 계략을 써서,

적에게 물고기와 술을 먹였더니, 적들은 성 안에 물이 있는 줄 알고 물러났다.

 

이때, 왕이 남구로부터 구원하러 왔기에, 협격하여 (적들을) 크게 쳐부쉈다.

 

이 싸움을 울암대전(蔚岩大戰)이라 한다.

 

적들은 침입로가 끊김을 걱정하여 남구로 곧장 쳐들어오지 못하고,

작은 성에서 헛고생만하다가 패하게 된 것이다.

 

개마의 여러 성들 모두가 편안하게 되었다.

 

 

 

 

대무신왕11년(28) 가을 7월에 한의 요동 태수가 병력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싸우고 지키는 계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이 흉년이 들어서 도적이 봉기하였는데

병력을 출동시킨 것은 명분이 없습니다.

 

이는 임금과 신하들이 결정한 책략이 아니라

필시 변방 장수가 이익을 노려 멋대로 우리 나라를 침략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거역하고 인심에 어긋나니 군대는 반드시 성공할 수 없습니다.

 

험한 곳에 의지하여 기발한 계책을 내면 반드시 깰 수 있습니다.” 하였다.

 

좌보 을두지 가 말하기를

 

“작은 적(敵)이 강해도, 큰 적에게 잡히는 법입니다.

 

신은 대왕의 병력과 한 나라의 병력을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많을지 헤아려 보건대

계책으로는 정벌할 수 있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왕이 “계책으로 정벌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지금 한 의 병력이 멀리 와서 싸우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성을 닫고 굳게 지키다가

저들의 군대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려서 나가 공격하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그렇게 여기고 위나암성으로 들어가 수십일 동안 굳게 지켰는데

한의 병력이 포위하여 풀어주지 않았다.

 

왕은 힘이 다하고 병사들이 피로하므로 을두지에게 일러 말하기를

 

“형편이 지킬 수 없게 되어가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였다.

 

두지가 말하기를

 

“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돌로 된 땅이어서 물이 나는 샘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오래 포위하여 우리가 어려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맛있는 술 약간과 함께

한의 군대에 보내어 군사를 위로하십시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글을 주어 말하기를

 

“과인이 우매하여서 상국(上國)에 죄를 얻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에 갑자기 나타나게 하였습니다.

두터운 뜻이 없이 문득 가벼운 물건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한의 장수가 성 안에 물이 있어 갑자기 쳐서 빼앗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답하기를

 

“우리 황제가 나를 둔하다고 여기지 않고 영을 내려 군대를 출동시켜 대왕의 죄를

묻게 하였는데 국경에 다다른 지 열흘이 지나도록 요령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보내온 글을 보니 말이 도리를 따르고 또 공순하니 감히 핑계를 되지 않고

황제에게 보고하겠다.”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삼국사기는 대무신왕 11년(28년)에 위나암성에서

남당유고는 대무신제 10년(37년)에 울암성에서 벌어진 전투라고 한다.

 

온조의 10년간 고구려 지배를 은폐코자

삼국사기는 대무신왕 즉위년도를 10년 끌어 올려 18년에 즉위한 것으로 하다보니

10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울암대전은 서기 37년 후한 광무제 13년에 일어난 전쟁이다.

 

서기 36년에 고구려가 개마국의 내란을 틈타 개마국을 정벌하여

개마국을 개마군{蓋州郡}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과 고구려의 국경지대에 있던 개마국이 고구려에 넘어가니

유주의 한나라 군대가 개마를 치고 자몽에 있는 구려성을 공격하자

고구려는 울암성에서 한의 퇴로를 막는다.

 

 

삼국사기는 한이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도인 위나성을 공격한 것으로 기록하였지만

울암대전은 한과 고구려에 부용하던 개마국이 멸망하자

개마국이 한 유주의 군사와 함께 벌린 개마국의 부흥 전쟁이었다.

 

고구려는 개마국과 구다국을 정벌함으로서 고구려와 한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던

부용국들을 정벌하고 한과 백제와 직접 국경을 맛닿게 된다.

 

 

 

<울암(蔚岩)과 개마 및 구려성(구리성)>

 

 

<울암(蔚岩)>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