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四年辛丑, 冬十一月, 有雷無雪. 是歲<淹瓢>大漲, <彌鄒忽>盡被水害,

移其民於<西河>, 以<淹瓢王><虎力>爲<龍山公>. 初<芻牟帝>,以<沸流>,

爲<沸流>沛者,食其邑. <光明>初,進封王. 娶<曼>公主, 生<良人>,

<良人>娶<眞>公主, 生<虎力>. 三世六十七年, 而國除.

<고구려사초 대무신제기>

 

 

대무신제14년(AD41)신축,

 

겨울11월, 천둥은 치는데 눈은 내리지 않았다.

 

그 해에 엄표수(淹瓢水)가 크게 불어나, 미추홀(彌鄒忽)이 수해로 초토화 되어,

백성들을 서하(西河)로 옮겨야 되었기에,

엄표왕인 <호력虎力>을 용산공(龍山公)으로 삼았다.

 

초에 <추모>제 시절, 비류(沸流)는 <비류沸流>패자에게 식읍으로 주었었는데,

<광명光明>초에는 봉왕되었었다.

 

<만曼>공주와 혼인하여 <양인良人>을 낳았고,

<양인良人>은 <진眞>공주와 혼인하여 <호력虎力>을 낳았다.

 

비류의 엄표국은 3대 67년 만에 나라의 문이 닫혔다.

 

 

十五年壬寅,三月, 黜大加<仇都><逸苟><焚永>等爲庶人. 三人皆以<召>皇后舊臣,

奪人妻妾財貨,恣其□慾 人皆忿死以致洪水. 使<沸流國>除, 法當斬誅,

以其爲<東明>舊臣, 不忍極法,

放爲庶人. 以南部使者<鄒殼素>爲<沸流部>長(順奴沛者也)以化之.

九月,行<東明大祭>于<龍山>.

<多婁>獻<汗南>故地, 而南下, 遣兵伐<新羅>, 以助<多婁>.

<고구려사초 대무신제기>

 

 

대무신제15년(AD42)임인,

 

3월, 쫓겨난 대가 <구도仇都>, <일구逸苟>, <번영焚永> 등을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

 

세 사람은 모두 <소召>황후의 옛 신하이었는데,

타인들의 처첩, 재화 등을 강탈하여, 그 죄와 탐욕이 자심하고,

(이꼴을 당한) 사람들 모두는 울화통이 터져 죽는 것이 마치 홍수와 같아서,

<비류국>에게 이들을 다스리라 하였으나,

법에 따르면 목 베어 죽일 일인데 <동명東明>의 옛 신하는 극형을 면하게 되어있어,

서인으로 놓아주게 된 것이었다.

 

남부사자 <추각소鄒殼素>를 비류부(沸流部)> 우두머리(순노패자야)로 삼아

이들을 깨우치게 하였다.

 

9월, <용산>에서 <동명대제>를 지냈다.

 

<다루多婁>가 한남(汗南)의 옛땅을 (고구리에) 바치고 남쪽으로 내려간다고 하기에,

군사를 보내 신라(新羅)를 쳐서, <다루多婁>를 도왔다.

 

 

 

AD42년,

대무신제가 졸본세력과 비류세력을 제거하자

본격적으로 백제는 한남에서 남하하기 시작한다.

 

고구려사초를 보면. 백제는 고구려의 군사지원을 3년 동안 받았다고 나온다.

 

제왕 연대력에는 짧은 문장으로, AD44년에 마한을 정복하고

百濟는 비로서 왕을 칭할 수 있었다고 나온다.

 

甲辰 十五年 百濟來侵 王出戰 敗沒 國遂亡 唯圓山錦現二城不下 是歲百濟始稱王

<제왕연대력>

 

한성백제의 실질적인 건국년도가 AD44년임을 알려 주고 있다.

 

여기서의 한성은 지금의 서울 인근이 아니라 덕주시(德州市) 인근을 말한다.

 

百濟가 10명의 대신들을 이끌고 남하하여 건국된 사항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온조왕 머리기사에 붙어 버림으로써,

오간(烏干), 마려(馬藜),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우(紇于),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笵昌), 조성(趙成), 전섭(全攝)의 10명의 대신과

다루왕 이후 백제 초대 3명의 왕들 이름이 백제본기에서 완전 삭제가 되어 버렸다.

 

더구나 백제본기는 AD56년- AD118년 사이의 60여년의 기사들이 완전 삭제된 상태다.

 

삭제된 왕들의 이름은 고서를 발견하지 않는 한 찾을 수가 없다.

 

백제 십제 공신은 오간(烏干), 마려(馬藜),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우(紇于),

한세기(韓世奇), 곽충(郭忠), 범창(笵昌), 전씨 시조 전섭(全攝),

직산조씨 시조 조성(趙成) 공신 10명이 십제국 창국 공신이다. 

 

을음(乙音)은 소서노의 이종오빠로 재종숙부인 부여왕족으로 지식과 담력이 있으므로

우보(右輔:보좌관)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고,

해루(解婁)는 해소(解素 BC43-47)의 아들로 부여사람으로 식견(神識)이 깊으며,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등용하였다.

마려(馬藜, 馬氏시조)는 마한(馬韓) 개국공신 후예로 목천, 장흥을 본관으로 하며,

좌보(左輔)의 벼슬을 지냈다. 

그 후손 마육침(馬陸沈) 대장군이 백제 부흥을 위하여 성거산에서

당나라 오랑캐와 신라군이 침입할 때 계백장군 버금가는 항전을 한 백제 충신이다.

 

백제의 성씨(姓氏)는 왕실의 성을 처음엔 우(宇)씨에서 여(余)라 하였다가

뒤에 여씨(餘氏) 또는 부여씨(夫餘氏, 扶餘氏)로 썼다. 

 

현재에 남아있는 백제 계통의 성씨로는 온조(溫祚)를 따라 남하하여

백제 건국에 공을 세우고 십제공신(十濟功臣)이 된 정선 전씨 시조 전섭(全攝)과

마씨 시조 마려(馬藜), 직산조씨 시조 조성(趙成) 등이 있다. 

또 개루왕 때의 인물인 도미(都彌)를 선계로 하는 성주 도씨(星州都氏)가 있으며,

백제가 망하자 당나라로 망명하여

당 고종으로부터 서(徐)씨로 사성받고 웅진도독이 되어 귀국했다는

부여융(夫餘隆)을 시조로 하는 부여 서씨(夫餘徐氏)가 있다. 

 

 

<백제의 남하및 한성백제 건국>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