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三年冬 句驪 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

<後漢書 卷八十五> 

 

(건무) 23년(서기 47년) 겨울,

구려(句驪) 잠지락(蠶支落)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 만여 명이

낙랑(樂浪)으로 와서 복속하였다.

 

 

 

四年..........

冬十月 蠶友落部大家戴升等一萬餘家 詣樂浪投漢

(後漢書云 大加戴升等萬餘口)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민중왕) 4년(47년) 겨울 10월,

잠우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 가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후한서에는 ‘대가 대승 등 만여 명’이라 한다.)

 

 

二十年 丁未三月 樂浪反

上親征其都沃沮 拔之 崔理北走

南沃沮蚕支落部戴升 反屬于漢

本盖馬臣也 奸譑無比

往来赤城蠶支落河間 而蠶食盖馬者也 

<박창화 필사본 [대무신제기]> 

 

 

20년(AD 47) 정미 3월, 낙랑이 배반하였다.

 

상이 직접 그 도읍 옥저(성)을 정벌하여 뿌리 뽑으니,

<최리崔理>는 북으로 달아났다.

 

남옥저의 잠지락부 <대승戴升>이 배반하여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본래 개마(盖馬)의 신하였는데, 간교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적성(赤城)과 잠지락하(蠶支落河) 사이를 오가면서 개마국을 잠식하였다.

 

 

二十二年 己酉 正月 遣将軍于刀,烏義等 伐戴升于蚕支洛河柵

斬于柵南 進拔赤城蠶支

遂率紫蒙王,滿離,斯古,涉得等 分四道 進功右北平,漁陽,上谷,太原等地

奪其宝玩美色絹織珍味等多数 歲以爲常

蔡彤大惧約修年貢而乞和 

<박창화 필사본 [대무신제기]> 

 

22년(AD 49) 기유 정월,

장군 <우도于刀>와 <오의烏義> 등을 보내

잠지락하 책(柵)에서 <대승戴升>을 정벌하여,

책남(柵南)에서 참하고 나아가 적성(赤城)과 잠지(蠶支)를 뿌리 뽑았다.

 

마침내 자몽왕(紫蒙王), <만리滿離>, <사고斯古>, <섭득涉得> 등을 이끌고

4도로 나누어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의 땅으로 진공하였다.

 

보물과 골동품, 미인, 견직물, 진미 등 다수를 빼앗았으며

해마다의 상례로 삼겠다하니,

<채동蔡彤>이 크게 두려워하여

연공(年貢)을 바치겠다고 약속하고 화친을 구걸하였다.

 

 

二十五春正月 遼東徼外貊人 貊人 穢貊國人也 貊音陌

寇右北平 漁陽 上谷 太原 遼東太守祭肜招降之

烏桓大人來朝 大人謂渠帥也 

<후한서 권1 광무제>

 

건무25년(49) 춘 정월,

요동요외의 맥인(맥인은 예맥국 사람이고 맥은 맥이라 발음한다.)이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노략질하여, 요동태수 제융이 투항을 권유하였다.

오환 대인이 내조하였다. 대인은 거수를 일컫는다.

 

 

春 正月 遼東徼外貊人寇邊 太守祭肜招降之

肜又以財利撫納鮮卑大都護偏何 使招致異種 駱驛款塞

肜曰 審欲立功 當歸擊匈奴 斬送頭首 乃信耳 

 

偏何等即擊匈奴 斬首二千餘級 持頭詣郡

其後歲歲相攻 輒送首級 受賞賜

自是匈奴衰弱 邊無寇警 鮮卑 烏桓並入朝貢

肜為人質厚重毅 撫夷狄以恩信 故皆畏而愛之 得其死力 

<자치통감>

 

춘 정월, 요동요외의 맥인들이 변경을 노략질하자

태수 <제융祭肜>이 항복을 권하였다.

 

<제융祭肜>은 또 재물과 이익을 내세워 선비대도호 <편하偏何>를 받아들였다.

 

사신을 보내 다른 종족들을 초치하니 연이어 새(塞)를 두드렸다.

 

<제융祭肜>이 말하기를 “만약 공을 세우고자하면 마땅히 돌아가서 흉노를 격퇴하고

우두머리의 머리를 참하여 보내거라 그리하면 믿겠노라. 

 

<편하偏何> 등이 즉시 흉노를 공격하여

2천여 급을 참수하고 머리를 갖고 군에 도달하였다.

 

이후 매년 서로 싸우고 번번이 수급을 보내와서 상을 받아갔다.

 

이로부터 흉노가 쇠약해지고 변경에는 도적들을 방비할 필요가 없어지고

선비와 오환이 나란히 들어와 조공을 하였다.

 

제융은 사람됨이 중후하고 강직하여 이적을 은혜와 신의로서 달래었기에,

모두 그를 존경하여 사랑하니, 그를 위해 죽을힘을 다하고자 하였다.

 

 

 

삼국사기 민중왕 4년(47년)의 기사는 대무신제 20년(47년)의 기사이다.

 

온조 반정에 의한 유리의 죽음(18년)을 감추기 위하여

유리가 죽은 후 온조가 통치한 9년을 고구려사초는 유리가 통치한 것으로 기록하고

삼국사기는 유리가 죽은 후 대무신제가 18년에 즉위한 것으로 9년을 끌어 올리다보니

고구려 초기 기년이 뒤틀린 까닭이다.

 

낙랑군 태수가 남옥저 잠지락부로 도망오자

고구려와 漢의 눈치를 보고 있던 남옥저 잠지락부 대가(大加) 대승이 漢에 붙는다.

 

이것을 후한서는 잠지락(蠶支落)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 만여 명이

낙랑(樂浪)으로 와서 복속하였다고 기록하였고

김부식은 중국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는 것도 모자라

만 여 명이 아니라 만 여가(家)가 투항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도데체 김부식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는 많은 古記가 있어

대무신제의 태원 공격 루트를 정확히 알 수 있었을 터인데,

중국의 자치통감에도 버젓이 실려있는 대무신제의 산서 공격을

통채로 빼 버린 채 잠지락부가 漢에 투항한 사실 만 기록하였다.

 

위 사실만 제대로 기록하였다면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을 만주의 환인 인근에서 찾으며 헤매지는 않았을 것이며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식민사학과 그리하여 만리장성의 동단을 한반도까지

그려놓게 만들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빌미를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낙랑의 반란을 틈 타 잠지락부 대승이 한나라에 붙어버리자

고구려는 자몽과 선비들과 연합하여 잠지락부 <대승>을 응징하고  

잠지락부를 받아들인 漢마저 응징하였다.

 

漢은 고구려에게 굴복하고 대대로 조공을 바치겠노라고 약속하게 된다.

 

 

후한서와 자치통감은

적이 공격하여 들어왔는데,요동 태수 <제융>이 싸워 이겼다는 기록도 없이

투항하라고 잘 구슬리니 항복하고 선비와 오환이 해마다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그리고는 <제융>은 사람됨이 중후하고 강직하여 적을 은혜와 신의로서 달래었기에,

모두 그를 존경하여 사랑하니, 그를 위해 죽을힘을 다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요동태수가 <제융>인지 <채동>인지는 모르지만 목숨을 내놓고 싸워도 모자랄 판에

고구려에게 살려 달라 구걸하였던 자인데

오환과 선비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해서 해마다 조공을 바쳤다고?

 

수치스러운 그들의 역사를 왜곡을 해도 분수는 지켜야지...

 

 

우북평, 어양, 상곡은 BC 281년 연(燕) 진개의 침략으로

고조선의 영토인 하북성에 설치하였다가 BC 222년 연(燕)이 멸망하자

호(胡)와 북부여의 연합세력에의하여 산서성으로 이치(移置)되었다가

AD 105년에 요동군과 함께 하북성에 복군(復郡)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우북평, 어양, 상곡은 요서, 요동과 함께 산서성에 있었다.

 

 

 

<낙랑의 잠지락부와 산서성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