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十七年甲子,

冬十月,上崩於「西都」,遺命傳位於皇太弟<解邑朱>.春秋六十一,葬于<大獸林原>.

<고구려사초 대무신제기>

 

 

대무신제37년 갑자(64),

 

동10월, 상이 서도(西都)에서 죽고,

유명으로 황태제 <해읍주解邑朱 (7-68)>에게 보위를 넘겼다.

 

춘추 예순 하나였고, 대수림원(大獸林原)에 장사하였다

 

대무(大武)는 굳세고 용감하며 심히 사나웠으며, 능히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광명(光明)이 수성(守成)한 뒤를 이어 부여(扶余)를 정벌하고,

개마(盖馬)를 토벌하였으며, 멀리는 상곡(上谷)과 태원(太原)까지 미치어

한인(漢人)으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또한 효심과 우애가 있어, 자신 아들이 불초(不肖)함을 보고 동생에게 전위하였다.

 

가히 대체(大體)를 알았다 할 만하다.

 

그런데 오후(烏后)에게 빠져서 호동(好童)을 죽게 하였다.

 

동명(東明), 광명(光明), 대무(大武) 3대의 다스림을 설명하여

삼대경(三代鏡)이라 한다.

 

(고구)려인들은 삼대경을 정경(政經, 정치의 경전)으로 삼아서,

능히 7백년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광명과 대무는 동명의 자손으로서 부끄럽지 않았다.

 

 

왕(帝)의 휘(諱)는 해읍주(解邑朱)이며, 광명제(光明帝)의 막내아들이고,

어머니는 송태후(松太后)이다.

 

성품은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현명한 이를 좋아했다.

 

대무(선왕)가 부여(扶余)를 정벌할 때 도읍을 지켜내었으며

그 능력이 신임되었음이 마땅하다.

 

(대무신왕이) 죽음에 임하여 큰 일(大事)을 맡았다.

 

군신(群臣)들이 모본(慕本)이 불초(不肖)하다 하여 (민중을) 세웠다.

 

난대(鸞臺)에서 즉위하였다.

 

해우(解憂)를 태자로 세워, 선(善)으로 그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원년 갑자(A.D.64) 11월 크게 사면하였다.

 

군신들이 연호를 바꾸자 청하였으나, 덕이 없다하여 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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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