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年癸酉, 二月, <慕本>新宮成, 以為「東都」遊幸之所. 以<杜魯>為枕臣.

<魯>, <慕本>民也. 美容而能媎, 上自太子時爱之, 及卽位, 封為将軍, 有<扶餘>功,

爵大兄, 拜中畏大夫. 皇后<羽>氏・<烏>氏・<麻>氏皆被其汚. <麻>氏生<杜魯>女.

<烏>太后亦與<杜魯>通. 宮中呼<魯>以小帝.

 

五月, 戊午晦, 日食.

<杜魯>, 與<崔裀>母<尼滿>交好, 而歎, 曰;“吾命亦不久矣.” <尼滿>曰;

“小帝, 有何不洽而言如此乎.” <魯>曰;“上, 怒我動搖, 欲殺之. 奈何.” <尼滿>曰;

“撫我則后, 虐我則讐. 彼為無道, 殺人如草芥. 何不殺彼而自立耶.”

<魯>, 然之, 遂有弑逆之心. 上累怒其動罪, 而戒之. 至十一月, 又動之, 上, 欲射之.

<魯>, 以所藏宝刀刺帝, 出血如湧. <魯>, 見其狀而悔之, 欲自刎而不得, 乃如<麻>后

寢而告之. <麻>后, 與<魯>有私, 故秘其喪, 欲立<魯>為帝, 召<麻樂>議之, 曰;

“主上不道而被弑. 當立宗室. <魯>, 何敢立乎.”

<魯>, 知事敗, 而自刎. 乃召<麻勁>・<松宝>・<烏希>・<羽真>等議之, 皆曰;

“<大武>諸子中, 唯<再思大王>最賢.” 乃遣<麻樂>于<曷思宮>迎之. <再思>曰;

“寡人年少沒識, 不如立<翊>.” 固辭不出. <麻>后亦欲立<翊>而請於<勁>, <勁>曰;

“立皇以賢. 汝, 何敢言.” 遂與<松宝>亦至<曷思宮>, 叩頭請出. <再思>, 不得已, 卽位

「東都」神宮. <麻勁>以病固辞太輔, 于<松宝>, <宝>亦固辞. 上, 曰;

“國之二老如是棄我. 我, 何敢立.” <宝>, 乃受位, 曰;“臣, 有一言敢請.” 上, 曰;

“何言.” <宝>曰;“<勁>, 以柱石, 為國盡忠. 廢<麻>后而出<茅[山]>,

父女之情割矣. 願, 陛下, 抱容為后. 何如.” 上, 可之, 乃召庻人<烏>氏․<麻>氏于<茅山>,

尋以<麻>氏․<羽>氏為宮人. 葬大行于<慕本原>, 埋<杜魯>․<尼滿>于其側.

<尼滿>, 宝刀之主. <崔理>女也.

<고구려사초 모본제기>

 

6년{AD73}계유,

 

2월, 모본(慕本) 新이 완성되어, 동도(東都)의 유희장소로 삼았다.

 

<두로杜魯>를 침신(枕臣)으로 삼았다.

 

<두로杜魯>는 모본(慕本)사람으로, 예쁜 얼굴에 여자노릇을 잘하여,

상이 태자시절부터 그를 아끼더니, 즉위한 이후엔 장군을 봉하였다.

 

<부여>와의 전쟁에 공이 있어서 대형의 작위를 받고 중외대부에 제수되었다.

 

황후인 <우>씨・<오>씨・<마>씨는 모두 더럽힘을 당하였다.

 

<마>씨는 <두로杜魯>의 딸을 낳았으며, <오>태후까지도 <두로>와 통정하였다.

 

궁중에서는 <두로杜魯>를 작은 황제라고 불렀다.  

 

 

5월, 무오일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두로杜魯>가 <최인崔裀>의 모친 <니만尼滿>과 함께 놀아나면서 한탄하기를;

 

“내 목숨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오.”라 하였다.

 

이에 <니만尼滿>이

 

“작은 황제는 무엇이 모자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오?”라 하였고,

 

<두로杜魯>는

 

“상이, 내가 꼼지락거려 흔들리면, 화를 내고 죽이려 하는데, 어찌 할 수 있겠소!?”

라고 실토하니,

 

<니만尼滿>이 말하길;

 

“내게 잘하여 주면 나는 그의 후가 되겠지만{내가 그를 황제로 여기겠지만},

나를 박해하면 원수가 될 것입니다.

 

그 인간은 무도하여 사람 죽이기를 초개와 같이 하는데,

왜 그를 죽이고 스스로 보위에 오르려 하지 않습니까?”라 하였다.

 

<두로杜魯>는 그래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시역할 마음을 먹었다.

 

상이 누차 <두로杜魯>가 움직이는{밑에 깔렸을 때 움직이는 것} 죄를 지음에

화를 내며 훈계를 해오다가, 11월이 되어서는, 또 움직였더니,

상은 <두로杜魯>를 쏘아 죽이려 하였고,

<두杜魯>는 숨겨둔 보도로 제를 칼질하였다. 피가 솟구쳤다.

 

<두로杜魯>는 그 모습을 보더니만 후회하면서 자기 목을 칼로 베려 하다가,

그러지도 못하고 <마>후의 침소로 가서 사실을 알렸다.

 

<마>후는, <두로杜魯>와는 개인적인 사연이 있었기에,

상이 죽었음을 숨긴채 <두로杜魯>를 제위에 세우려고,

 

<마락麻樂>을 불러 상의하였더니,

 

“상이 부도하여 시해되긴 하였지만, 당연히 종실사람을 세워야지,

어찌 감히 <두로杜魯>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두杜魯>는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고는 스스로 목 베어 죽었다.

 

<마경麻勁>・<송보松宝>・<오희烏希>・<우진羽真> 등을 불러들여 상의하니,

 

모두가 “<대무大武>의 아들들 중에 <재사再思>대왕이 가장 현명하다.”고 하고는,

 

<마락麻樂>을 <갈사궁>으로 보내서 <재사>대왕을 맞아서 세우려 하였더니,

 

<재사>가 말하길;

 

 “과인은 나이도 적고 아는 것이 없어, <익>태자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오.”

라고 말하면서 고사하여 나서지 않았다.

 

<마>후 또한 <익>태자를 보위에 세우고 싶어 <마경>에게 부탁하였더니,

 

<마경>은 “현명한 이를 황위에 세워야 할 것인데, 어찌 감히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라 말하고는,

 

<송보>와 함께 <갈사궁>으로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보위에 오르길 청하매, <재사>가 부득이 「동도」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마경>이 칭병하며 태보자리를 고사하는지라,

<송보>에게 돌렸더니, <송보> 또한 고사하였다.

 

 이에 상이

 

“나라의 두 노신이 나를 이리도 피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보위에 설 수 있겠소?”

라 말하자,

 

<송보>가 태보 자리를 받아들이면서 아뢰길;

 

“신에게 감히 청할 말씀이 하나가 있습니다.”라 하였다.

 

상은 무엇이냐 물었고,

 

<송보>가 아뢰길;

 

“<마경>은 나라의 주춧돌이 되어서 충성을 다하였었습니다만,

<마>후를 폐하여 <모산>으로 내쫓았으니, 부녀의 정이 갈렸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마>후를} 맞아들여서 후로 삼아주시겠는지요?”하였다.

 

상은 이를 허락하여, 폐서인 <오>씨와 <마>씨를 <모산>에서 들어오라 불러들였고,

이어서 <마>씨와 <우>씨를 궁인으로 삼았다.

 

대행을 <모본원>에 장사하였으며, <두로>와 <니만>도 그 곁에 묻어주었다.

 

<니만>은 보도의 주인으로, <최리>의 딸이었다

 

 

 

 

 

<두로>의 <해우> 시해 사건은

 

 

적자인 <해우>를 제거하고 서자인 <재사>가 등극하는 사건이다.

 

또한 후비인 갈사후계의 동부여 세력이 비류계와 손잡고

정비인 황후 오씨계 세력을 제거하고 집권한 사건이었다.

 

부여의 반란진압에 공이 있던 두로(杜魯)는 여자처럼 고운 얼굴을 지닌 꽃미남이었다.

 

그런 까닭에 모본제는 그를 좋아하였고 또 침신(枕臣)으로 삼기에 이른다.

 

<두로>는 모본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권력을 남용하였으며 잘생긴 용모로

황후 우씨, 오씨. 마씨, 심지어 오태후(烏太后)까지 농락하였으

모본제를 제외하고는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는 작은 황제(小帝)였다.

 

두로는 그의 정부(情婦)인 <니만尼滿>에게 모본제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하자

그녀는 서경(書經) 주서(周書)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내게 잘하면 임금이지만 학대하면 원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두로>는 그녀가 준 보도(宝刀)를 품에 안고 모본제를 죽일 때를 노린다.

 

보도를 그에게 준 그녀는 모본제에게 죽임을 당한

<승인勝人><최인崔裀>의 어머니였고

<호동>에게 멸망한 낙랑왕 <최리崔理>의 딸이었다.

 

모본제를 시해 한 <두로>가 마후에게 달려가 사실을 말하니

마후가 마락을 불러 <두로>를 천제로 삼고자 의논한다.

 

마후는 이미 <두로>의 딸을 낳은 처지였다.

 

황제의 자리에 욕심을 냈던 <두로>는 일시적으로 황제의 권력을 대신 행사하였고,

조정의 혼미는 계속 되었다.

 

한편으로 연맹세력들은 <두로>를 제거하고, 자신들의 안정적인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황제를 내세워 대권을 주무리려는 야심을 보이게 된다.

 

 

아들 <호동>의 자결 후 민심을 얻고 암암리에 사병을 키워왔던 갈사후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선전포고를 하고 수천 명의 군사를 일으켰다.

 

서기 73년 11월... <두로>의 쿠데타에 이은 또다른 역쿠데타가 일어난다.

 

그 이후로 연맹세력들은 물론, 옛 모본제의 친위세력들이 다 제압당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갈사후가 직접 주도한 역 쿠데타 인 것이다.

 

 

일이 틀어진 것을 안 <두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고

두 아들의 복수를 끝낸 <니만> 역시 그의 뒤를 따른다.

 

이로서 마침내 모본제의 시대가 끝이 나고

동부여계 갈사후가 전면에 나서는 신명선제(神明仙帝)의 시대가 시작된다.

 

동부여는 51년 멸망하였지만 이제 갈사후가 모본제를 이어 고구려를 통치하게 되니

갈사후는 친 동부여 정책을 펼치게 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