帝諱<再思>又曰<鹿臣>, <大武神帝>別子也. 母, 曰<曷思>太后, 其父<解素>,

<柳花>夫人所生<金蛙>子也. 性, 聰悟好仁, 讀仙書, 通醫藥, 又能用兵, 善辯,

而常黙然如不知. 哀其胞兄<好童>死於非命故也. <閔中帝>崩, 國人欲立之, 固辭曰;

“嫡子在, 比庶子之所勘當也.”, 遂奉母而走. <慕本>亦義其志, 封爲<仙王>. 平<扶余>亂

有功. <慕本>被弑, <麻藥(樂)>等迎之, 卽位於東都神宮. 大赦. 改元曰<神明>.

<고구려사초 신명선제기>

제의 휘는 <재사再思> 또는 <록신鹿臣>이며, <대무신제>의 별자이다.

 

친모는 <갈사>태후이고, 부친은 <유화>부인이 낳은 <금와>의 아들 <해소>이다.

 

성품은 총민하고 어짊을 좋아하며, 선서(仙書)를 읽고, 의약에 통달하였으며,

또한 용병에 능란하고 말솜씨가 좋았다.

 

항상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말이 적고 태연하였다.

 

동복형인 <호동>이 비명에 죽은 것을 슬퍼하였다.  

 

<민중제>가 죽으매, 나라사람들이 그를 보위에 세우려 하였으나, 고사하며 말하길;

 

“적자가 있는데, 서자가 감당할 만한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생모를 모시고 피하여 달아났다.

 

<모본>도 그 뜻을 옳게 여기고, <선왕>을 봉하였다.

 

<부여>를 평정함에 공이 있었다.  

 

<모본>이 시해되자 <마약(락)> 등이 그를 모시니, 동도의 신궁(神宮)에서 즉위하였다.

 

죄수들을 크게 풀어주고, 연호를 신명(神明)으로 고쳤다.

 

 

갈사태후의 부친은 <해소解素>가 아니고 해소의 손자인 <산해山解>이다.

 

신명선제 재사는 민중제 5년(68년)에 동부여 갈사국을 정벌할 때

이제 갓 스물살인 호화(芦花 49-132)를 사로잡아 아내로 삼게된다.

 

재사는 어머니가 동부여 출신 갈사태후였으니  

1살 아래인 호화(芦花)에게 각별한 애정을 느꼈을 것이다.

 

호화(芦花 49-132)의 아버지는 동부여 태사(東扶余太師) 왕문(王文)이고,

 

어머니 고야부인(高耶夫人)은 부여왕 대소(帶素)의 딸이다.

 

 

 

호화는 키가 8척(약184cm)에 몸무게가 130근(약90kg)으로  

창검도 잘 썼다하니 잘 잡힌 몸매의 문무를 겸비한 당대의 여걸이었다.

 

호화는 태조(太祖) 궁(宮)(68-165)과 수성(遂成71-165)을 낳게 된다.  

 

궁과 수성 역시 어머니를 닮아 건장한 체구를 가졌을 것이다. 

 

정치를 싫어하는 신명선제가 즉위하자 태조 <궁宮>을 동궁으로 세우고

갈사태후와 함께 호화태후가 섭정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96년 갈사태후가 죽고 112년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호화태후는 수상격인 태보의 직책을 스스로 맡아 모든 정치를 독단하였다.

 

AD132년 그녀가 84세로 죽을 때까지 고구려의 정권을 잡고 휘둘렀으니

비록 고구려가 동부여를 정벌하였지만 73년부터 132년까지의 60년은

오히려 동부여 여걸 갈사태후와 호화태후가 고구려를 통치한 여인천하 시대였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