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平三年庚申[一云 中元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已]

八月四日 瓠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櫃 掛於樹枝 光自櫃出 亦有白鷄鳴於樹下
以狀聞於王 駕幸其林 開櫃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故事故 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 抱載還闕 鳥獸相隨 喜躍蹌蹌
王擇吉日 冊位立太子 後讓故於婆娑 不卽王位 因金櫃而出 乃姓金氏 閼智生熱漢

漢生阿都 都生首留 留生郁部 部生俱道[一作仇刀] 道生未鄒 鄒卽王位 新羅金氏自閼智始

<삼국유사>

 

영평(永平) 3년 경신(서기 60년)

[혹자는 중원(中元) 6년이라고 하지만 잘못된 것이다. 중원은 모두 2년뿐이다.]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월성(月城) 서쪽 마을로 가다가,

시림(始林)[혹은 구림(鳩林)이라고도 한다.] 속에서 매우 커다란 빛을 보았다.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속에는 황금 상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그 빛은 바로 그 상자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이를 왕에게 아뢰자 왕이 그 숲으로 가서 상자를 열어보았는데,

상자 안에는 남자 아이가 누워 있다가 곧바로 일어났으니

<혁거세赫居世>의 옛 일과 같았다.

 

그래서 <혁거세>가 자신을 알지(閼智)라고 한 일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라고 이름 붙였다.

 

알지는 우리말로 어린 아이를 뜻한다.

 

왕이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왔는데,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오면서 기뻐 뛰어놀고 춤을 추었다.

왕이 길일을 택하여 태자로 삼았지만,

후에 파사(婆娑)에게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金氏)라고 하였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혹은 구도(仇刀)라고도 한다.]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서 시작되었다.

 

삼국유사에서 영평3년(60년)에 <알지>가 태어났다는 것과

<알지>가 <열한>을 낳았다는 것은  잘 못된 기록이다.

 

<알지閼智 94-155>는 <瓠公>과<阿好>사이에서 유리왕11년(94년)에 태어났다.

 

漢 목종 화제 永元 6년이다.

 

신화에서는 <알지>의 금궤를 발견한 이를 <호공瓠公>이라고 한다.

 

그 <호공>을 남당유고 <상장돈장>에서 <알지>의 아버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상장돈장>에 의하면, <알지>의 아버지는 <호공瓠公>이고 어머니는 <아호阿好>이다.

 

호공의 아버지는 <포공匏公>이고 호공의 어머니는 <표암瓢岩>이다.

 

<포공>은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다.

 

<김일제>의 후손중 <알지>는 경주 김씨의 시조가 되고

<수로>는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된다.

 

김알지의 어머니 <아호>는 <차웅>과 <아효>의 딸이다.

 

경주에는 경북기념물 54호로 지정된 <표암瓢岩>이라는 바위가 있다.

 

그리고 그 바위 밑에는 경주 이씨(李氏) 시조 <알평謁平>의 비각과 재실이 있다.

 

사로육촌(斯盧六村)의 하나인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다.

 

김알지의 할머니가 <표암瓢岩>이고

<표암>의 또 다른 남편의 이름이 <알평謁平>이다.

 

<알평>의 손자가 <양산楊山>이고 <양산>의 손자가 <알천閼川>이다.

 

신라 6촌의 지명이 곧 인명인 것이다.

  

 

 

 알지의 가계도

 

김일제(BC134-BC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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匏公 = 瓢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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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瓠公 = 阿好(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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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閼智(94-155)                              

 

 

- 김(金)씨의 시조 김일제金日磾(BC134-BC86)

 

<김일제>의 자(字)는 옹숙(翁叔)인데 본래 흉노(凶奴) 휴저왕(休屠王)의 태자다.

한무제(漢武帝) 원수(元狩) 때 표기장군 곽거병이 군대를 이끌고

흉노의 오른쪽 땅을 공격하여 많은 사람을 죽이고

휴저왕의 제천(祭天) 금인(金人)을 노획했다.

 

그 여름에 표기장군이 서쪽 거연(居延)을 지나면서

기련산(祁連山)을 침공하여 크게 노획했다.

이때에 선우(單于)는 곤사왕(昆師王)과 휴저왕(休屠王)이 서방(西方)에 있었음에도

한(漢)에게 크게 패배한 것을 원망하여 그 왕들을 불러 죽이려 했다.

이에 곤사왕과 휴저왕은 두려워하여 한(漢)에 항복코자 했다.

 

그러나 휴저왕은 그 후 이를 후회하여 항복을 철회했다.

 

이러자 곤사왕은 휴저왕을 죽인 다음 두 곳의 백성을 거느리고 한에 투항했다.

 

한(漢)은 곤사왕을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았다.

 

<일제>는 아버지가 항복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여

어머니 알씨(閼氏)와 동생 륜(倫)과 함께 노예가 되어

漢의 황문(黃門)에서 말을 길렀다.

 

그때 <일제>의 나이는 14살이었다.

 

한무제 원수 2년(BC121)이다.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무제(武帝)가 연회를 베풀어 놓고 여러 말(馬)을 구경할 때

무제 좌우엔 꽃다운 후궁(後宮)들이 가득 모여 있어 마치 꽃동산을 이룬 것 같았다.

 

<일제> 등 말 키우는 노예 수십명이 말을 끌고 전(殿)아래를 지나갈 때

몰래 후궁을 훔쳐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일제>만은 곁눈질 한 번 없이 묵묵히 지나갔다.

 

그 때 일제의 키는 8척2촌(현재의 188.6cm)이고 용모가 매우 엄했다.

 

<일제>의 말(馬) 또한 살찌고 날래 보였다.

임금은 한눈에 쓰윽 들어오는 일제의 풍모를 보고

<일제>를 불러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일제>는 임금이 묻는 데로 막힘없이 대답했다.

 

기특하게 여긴 임금은 즉일로 목욕을 시킨 후 의관(衣冠)을 하사하여

마감(馬監)직을 제수 했다.

 

이후 임금의 눈에 더욱 들게 된 <일제>는

시중부마도위 광록대부(侍中附馬都尉 光綠大夫)로 진급되었다.

 

임금은 나날이 <일제>를 믿고 사랑하여 나갈 때도 같이 수레를 타고

들어와서는 좌우에 시립 하게 했다.

 

이를 본 귀척(貴戚)들이 시샘하여 원성을 높였다.

 

"폐하가 망령되이 근본도 없는 오랑캐 애새끼를 너무 귀중하게 여기니

참으로 병폐로다."

그러나 이런 소리를 들은 임금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일제>를 후히 감싸주었다.

 

<일제>의 에미가 두 아들을 가르침에 매우 법도가 있어 임금이 가상하게 여겼다.

병으로 <일제>의 에미가 죽자 명령을 내려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한 후

휴저왕 알씨(休屠王 閼氏)라 제기(題記)하였다.

 

<일제>는 매번 이 그림 앞에서 절하며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일제>에겐 세 아들이었었다.

 

임금이 <일제>의 아이와 장난하는 것을 좋아하여 항상 옆에 두었다.

 

이런 임금의 총애를 받은 아이들은 버릇이 없었다.

 

함부로 임금의 목을 껴안기도 하며 응석을 부렸다.

 

이것을 본 <일제>가 성난 눈초리로 쳐다보면

아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달아나며 울었다.

 

"옹(翁)이 노했습니다."

이러면 임금이 일제를 꾸짖었다.

"어찌 우리 아이에게 화를 내느냐, 썩 거두어라."

 

그 후 아이가 장대해 지자 행동은 더욱 방자해 졌다.

 

어느 날 궁녀와 더불어 음란하게 희롱하는 장면을 본 <일제>는

노하여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

 

바로 자신의 장자였다.

 

임금이 이를 알고 크게 노했다.

 

<일제>는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고 아이를 죽인 진상을 아뢰었다.

임금은 이후부터 <일제>를 마음속으로 외경(畏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망하라莽何羅> 형제가 반역을 도모했다.

 

<일제>가 그들의 뜻이 범상치 않음을 보고 의심하여 몰래 그들의 동정을 살피며

대전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하라> 형제 또한 <일제>의 기미를 눈치 채고 태연한 척 했다.

  

이때 임금이 임광궁(林光宮)에 납셨다.

<일제>는 신병(身病)이 있어 전(殿) 옆 한구석에 누워있었다.

 

<하라> 형제들은 임금의 명령이라 속여

밖을 지키고 있던 근위병을 모두 죽이고 군대를 일으켰다.

다음날 새벽 임금이 일어나기도 전에 <하라>가 궁으로 들어왔다.

 

마침 <일제>가 변소에 있을 때였다.

 

소매에 칼을 품고 나오던 <하라>는 변소에서 나오는 <일제>와 마주쳤다.

 

얼굴색이 변한 <하라>는 급히 임금 처소로 들어가려다 보매 장식에 부딪쳐 넘어졌다.

이틈에 <일제>가 <하라>를 끌어안고 큰소리로 외쳤다.

"망하라가 반역했다."

임금이 놀라 일어나고 좌우 근위병이 칼을 들고 쫓아와 <하라>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임금은 <일제>가 다칠까 염려되어 호위병을 만류했다.

 

<일제>가 <하라>의 목을 꺾어 제압한 후 그를 결박했다.

 

원흉이 잡히자 모반은 실패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일제>의 충성됨이 더욱 드러났다.

 

임금은 <일제>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려 했으나 <일제>는 사양했다.

 

그의 독실함이 이와 같아서 임금은 더욱 <일제>를 믿고 사랑했다.

 

병이 위독해 지자 한무제는 <곽광>에게 후사를 부탁했다.

 

<곽광>은 일제에게 양보했다.

 

이에 <일제>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외국인입니다.

그런데 제가 태자의 후견인이 되면 흉노가 한(漢)을 경멸할 것입니다.

그러니 후사는 <곽광>이 맡아야 합니다."

임금은 <일제>의 말이 옳다하여 <곽광>이 후사를 맡도록 했다.

 

<곽광>은 자기의 딸을 일제의 사자(嗣子)인 상(賞)에게 시집보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무제(武帝)는 유언을 남겼다.

"<망하라>의 모반을 토벌한 공으로 일제에게 투후(侯)를 내린다."

그러나 <일제>는 아직 임금이 어리므로 투후의 봉작을 받지 않았다.

 

이때 BC68년 昭帝 <유불릉劉弗陵(BC95-BC74 )> 10세, <일제> 49세이다.


새 임금을 보좌하던 연말 <일제>의 병이 깊어지자 <곽광>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일제>에게 어서 투후의 봉작을 거듭 내리소서."

 

이리하여 <일제>는 병석에 누워 투후(侯)의 인수(印綬)를 받았다.

어느 날 일제가 죽었다.

임금은 장구(葬具)와 총지(塚地)를 내렸고 경차(輕車)와 개사(介士)를 보내어

군(軍)이 진(陳)을 치게 하고 무능(茂陵)에 장사지냈다.

 

시호는 경후(敬侯)라 했다.

 

 

<일제>의 두 아들 <상賞>과 <건建>은 모두 시중(侍中)을 했는데

소제(昭帝)와 나이가 비슷하여 함께 눕고 일어났다.

 

<상賞>은 봉거(奉車) 벼슬을 했고 <건建>은 부마도위를 했다.

일제의 사자(嗣子)인 <상賞>이 애비의 투후직을 계승하게 됨에 따라

두 개의 인수(印綬)를 하게 되었다.

 

선제(宣帝)가 즉위하자 상은 태복(太僕)이 되었다.

 

宣帝 유병이劉病已 유순劉詢(BC91-BC48) 재위 BC74-BC50 

 

어느 날 곽씨에게 반역의 기미가 보이자 <상賞>은 상서(上書)하여 곽씨처를 버렸다.

 

임금도 이를 애처롭게 여겼으며 이로 인해 <상賞>은 연좌되지 않았다.

 

<곽광>이 반역을 꾀한 해는 BC68년이다. 

 

원제(元帝) 때에 광록(光綠)의 훈(熏)을 받고 죽으니 아들이 없어 그 뒤를 잇지 못했다.

 

元帝 <유석劉奭(BC75-BC33) 재위 BC49-BC34>

 

<건建>의 손자 <당當>을 봉해 투후로 삼아 <일제>의 뒤를 이었다.

 

처음 <일제>와 함께 잡혀온 일제의 동생 <륜倫>의 자(字)는 소경(少卿)이었는데

그는 황문랑(黃門郞)이 되었다가 일찍 죽었다.

 

<일제>의 두 아들은 귀하게 되었지만 손자 때에 이르러서는 쇠미해 졌다.

<윤倫>의 후손은 매우 융창하여 아들 <안상安上>은 후(侯)에 봉해졌다.

 

<안상>의 자(字)는 자후(子侯)였고 젊어서 시중(侍中)이 되었다.

 

성품이 독실하며 지혜로워 선제(宣帝)의 총애를 받았다.

 

그 후 초왕(楚王) <연수延壽>의 반역도모를 적발한 공으로

관내후(關內侯)의 작위와 300호의 식읍(食邑)을 받았다.

 

곽씨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궁중의 대소문(大小門)을 열지 못하게 하여 반란을 막았다.

 

이 공으로 도성후(都成侯)가 되었다.

네 아들이 있었으니 <상常>, <창敞>, <잠岑>, <명明>이었다.

<잠>과 <명>은 제조중랑장(諸曹中郞將)이 되었고 <상常>은 광록대부가 되었다.

원제(元帝)가 태자로 있을 때 <창敞>은 중서자(中庶子)가 되어 총애를 받았고

원제가 즉위하자 기도위 광록대부 중랑장 시중이 되었다.

<창敞>은 위인이 정직하여 모두들 꺼렸으나 오직 임금만이 그를 믿었다.

 

<창敞>은 병이 깊어지자 임금에게 동생 <잠岑>을 부탁했다.

 

임금은 <창敞>의 부탁을 받아들여 <잠岑>에게 사주객(使主客)을 제수했다.

 

<창敞>의 아들 <섭涉>은 본래 좌조(左曹)로 있었다.

 

<창敞>에겐 <섭涉>, <삼參>, <효曉> 등의 아들이 있었다.

평제(平帝) 때에 <왕망王莽>이 평제의 외가(外家)인 위씨(衛氏)를 숙청한 후

실권을 잡았다.

 

平帝 <유간劉衎(BC8-6) 재위 1-5>

<왕망王莽(BC45-23) 新 재위 8-23>

 

 

 

<왕망>은 족곤제(族昆弟)인 <당當>의 봉록을 올려주었다.

<당當>의 모(母) <남南>은 <왕망>의 모인 <공현군功顯君>의 친동생이었다.

 

<왕망>과 <일제>의 증손자 <당當>은 이종사촌간이다.

 

<당當>은 어머니 <남南>을 올려 대행(大行)에서 태부인(太夫人)으로 하였다.

 

세월이 흐른 후에 <왕망>은 <흠欽>의 동생 <준逡>을 후(侯)에 봉하고

구경(九卿)의 지위에까지 이르게 했다.

 

<흠欽>은 <일제>의 동생 <륜>의 증손자이다.

<일제>와 <륜>의 후손들은 전한 무제로부터 평제까지 7대에 걸쳐

고위 관직에 재직하다가 AD8년 <왕망>의 반정에 참여한다 
후한 광무제 <유수劉秀(6-57) 재위 27-57>가 즉위하자

AD27년경 이들은 산서성 투지역을 벗어나 산동성을 거쳐 한반도로 건너온다.

그들의 후손이 김알지(94-155)와 김수로(142-199)이다.

 

 

찬(贊)하기를,

 

<김일제>는 이적(夷狄)의 망한 나라에서 한(漢)조정에 포로 되어 왔으나

돈독하게 임금을 섬겨 그 충(忠)과 신(信)이 뛰어남으로

상장군(上將軍)에까지 이르렀다.

그러함에 정하는 나라가 있고 후사가 있으며

세세토록 충효의 가문으로 이름을 나타내며 7세(七世)에 이르니

어찌 성(盛)하지 않을꼬.

본래 휴저(休屠)에게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 지냈으므로

그 성(姓)을 김(金)이라 한다.

 

 

 

- 문무대왕릉비에 나타난 김씨의 역사

 

[저자의 견해]

신라고사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을 김씨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 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듣건 데

“신라사람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

[이는 신라 국자박사 <설인선>이 지은 <김유신>의 비문과

<박거물>이 지었고 <요극일>이 쓴 삼랑사 비문에 보인다]

 

고구려는 또한 고신씨의 후손이라 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진서」의 기록에 보인다]

옛 사기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부여에서 나왔다”고 하며,

또한 “진, 한의 난리 때 중국 사람이 해동으로 많이 도망왔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삼국의 조상들은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그렇게 오래도록 나라를 향유할 수 있었는가?   

<삼국사기백제본기〉

 

 

 

문무대왕릉비문

 

[前面]

 

<1행> … 국 신라 문무왕릉의 비이다.

        급찬(及飱)인 국학소경(國學少卿) 김▨▨(金▨▨)가 교(敎)를 받들어 찬하다.

 

<2행> … 하늘을 짝하여 사물을 잘 다스리고, 땅의 경계를 구분하며,

         덕을 쌓아 …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신에 응하여 …

 

 <3행> … 경진씨(鯨津氏)를 파견하여, 삼산(三山)의 궐(闕)을 비추고,

        동으로는 개오(開梧)의 지경을 막고, 남으로는 ▨계(▨桂)의 ▨과 이웃하고,

        (북으로는) 황룡을 맞아 주몽(朱蒙)을 태우고,

     … 백무(白武)를 이어 받아 …을 우러르며 …

 

<4행> … 그 능한 바를 다 잘하여 이름과 실제가 다 이루어지고,

         덕과 지위가 겸하여 융성해지니, 땅은 8방(八方) 먼 곳까지 걸쳐 있고,

         그 훈공은 삼한(三韓))에 뛰어나,

         그 높고 넓음을 다 일컬을 수가 없는 분이 우리 신(라) …

 

<5행> …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지(▨枝)가 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투후(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 하였다.

 

<6행> …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 옥란(玉欄)을 대하니,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뉴(石紐)를 보고 금여(金輿)에 앉아 … 하는 것 같았다.

 

<7행> … 대왕은 생각하심이 깊고 멀었으며, 풍채가 뛰어났고,

         도량은 하해와 같았으며 위엄은 우뢰와 같았다.

         … ▨은 바야흐로 자취를 거두고 봉화는 멎고 척후는 파해지니,

         만리의 맑은 기운은 부지런히 … 를 열었다. …

 

<8행> … 간▨(簡▨)의 덕에 내외가 평화로워지고,

         광대한 기풍에 원근이 편안하고 깨끗해지니,

         ▨공(▨功) 성▨(盛▨)은 장래에 … 하고,

         쌓이고 뭉친 순수함과 곧음은 후예들에게 넉넉함을 드리워 주었다. …

 

<9행> … ▨▨사회(▨▨舍誨)는 곧 성철(聖哲)의 뛰어난 모습이라,

         은혜로써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너그러움으로써 사물을 다스리니,

         … 한 자는 그 시기를 알고, 덕을 이어받은 사람은 모두 그 이웃을 알아보니,

         그 명성이 한하(閒河)에까지 넘쳤다. …

 

<10행> … ▨봉(▨峯)을 ▨하여 ▨간(▨幹)하고,

           5백년을 기약하여 큰 명을 내려주니, 거하면 모두 … 함을 얻었고,

          … 비춤은 단부(丹府)에 거의 가까웠다.

          의(義)는 성(性)에 부합하여 일어나고, 깊은 정은 … 을 살펴 …

 

<11행> … 바탕을 돕고, 정(情)의 근원은 맑디맑아,

           삼키어 받아들임은 금▨(襟▨)에 ▨하였다.

           … 하시는 말씀은 규범을 이루고, 용모와 행동은 가히 볼 만하였으며,

           학문은 고(금)을 두루 통하였다. …

 

<12행> … 시(詩)와 예(禮)의 가르침에 … (하고),

           주나라는 교재(橋梓)의 ▨에 경의를 표하였다.

           … 당나라 태종문무성황제(太宗文武聖皇帝)가 사직의 ▨에 응하여 …

 

<13행> … 임금이 돌아가시고 풍악은 멎었다. 무진 이후에 …

 

<14행> … 순(舜)임금은 바다와 같이 덕을 내려도 절현(截懸)이 있었고,

           요(堯)임금은 해와 같이 밝게 비추어도 은▨(垠▨)이 없었다. …

 

<15행> … 빛나고, 구렬(九列)은 천부(天府)를 관장하여 …

 

<16행> … 천사(天使)도 감통(感通)시켜 그 재앙을 그치게 하니,

           편안하고 쉽게 건너 …

 

<17행> … 이웃나라와의 우호를 어기고 자주 이쪽 저쪽으로 붙으려 하면서,

           겉으로는 …을 믿는 척하니 …

 

<18행> … (소정방을) 웅진도행군대총관(熊津道行軍大總管)으로 삼고,

           군왕(君王)을 …

 

<19행> … 황산(黃山)에 군진을 펼치니, 적들이 고슴도치와 올빼미처럼 모여들어

           (진군을) 가로막고자 하였다. …

 

<20행> … 적의 수도(首都)에 이르자

           그 우두머리가 군문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고, 그 좌리(佐吏)들도 …

 

<21행> … 삼년이었다. 용삭(龍朔) 원년(元年){661년}에 이르러 …

 

<22행> … 보배로 여기는 바는 오직 어진 사람이니,

           선(善)을 행함을 가장 즐거워하고,  인(仁)을 ▨함을 …

 

<23행> … 조야(朝野)가 모두 즐거워하니, 굳이 애써 행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

 

<24행> … 진백(秦伯)의 터전를 다시 일으켰다.

 

<25행> … 교화가 북으로 읍루(婁)에까지 접하니, 벌떼처럼 …

 

<26행> … 군왕에게 조서를 내려, 사지절(使持節) … 으로 봉하였다. …

 

<27행> … 군(軍)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니, 깃발이 …

 

<28행> … 꾀는 손을 뒤집는 일처럼 쉽게 나왔는데, 절묘하기가 …

 

 

[後面]

 

<1행> … 환산(丸山)에 공(功)을 기(紀)한 장수가 있어 …

 

<2행> … 곧바로 9주를 일광(一匡)하고 동정서벌(東征西伐)하여 …

 

<3행> … 궁 앞채에서 돌아가시니, 그 때 나이는 56세였다. …


         <법민法敏(626-681) 재위 661-680>

 

<4행> … 땔나무꾼이나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 부르고,

         여우가 그 옆에 굴을 뚫을 것이니 …

 

<5행> … 화장(火葬)을 하라 하니, 그달 초열흘에 화장하여 …

 

<6행> … 천황대제(天皇大帝)께서 …

 

<7행> … 왕례(王禮)에 맞았다. 군왕(君王)은 국량(局量)이 …

 

<8행> … 나라를 … 하는 방법에 (부합하였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심은 8정(八政)의 ▨과 같았다. …

 

<9행> … 돌아가시니, 참으로 백대(百代)의 현왕(賢王)이시요,

         실로 천(千)(古의 성스러운 임금이셨다.) …

 

<10행> … 맑고 아름답기 선비 같으시고,

           삼언(三言)을 빌지 않아도 준▨(駿▨)을 알았다. …

 

<11행> … 못을 여니 호량(濠梁)을 방불하였고, 비단과 돌을 펼쳐 …

 

<12행> … 손님이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안개처럼 모여 드니,

           이를 말하여 아침에 많고 …

 

<13행> … 묘(昴)에 들어가서는 돌아감을 잊으시고,

           웅(熊)을 맞추시고도 돌아가지 않으셨다. 태자 계(?) …

 

<14행> … 단청(丹靑)은 기린각(麒麟閣)에 흡족하고,

           서책은 운대(芸臺)에서 닳고 헤어졌다.

 

<15행> … 삼가 절을 드리고, 이만 그치며 명(銘)을 쓴다.

 

<16행> … 천 갈래의 가지가 되어, 삼산에까지 뻗어 비치네.

           아름답고 성한 덕은 멀리 …에 전해져 …

 

<17행> … 진실로 무용(武勇)하시고 진실로 대덕(大德) 있으시고,

           다재다예(多才多藝) 하였네.

           아랫사람을 생각하여 거머리마저 삼키시고, …

 

<18행> … 아홉 번 정벌하고, 친히 삼군을 통솔하시어 … 위엄과 은혜는 혁혁히 빛나,

          저 아득히 먼 옥저(沃沮)와 예(濊)까지 찾아와 역(役)을 청하였네.

          잠동하던 …

 

<19행> … 풍교를 흠모하여, 단증(丹甑)이 여러 번 나오고,

           황▨(黃▨)이 하늘을 진호하였도다.

           … 적오(赤烏)가 재앙을 나타내고, 황웅(黃熊)이 우러름을 표시하니,

           갑자기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홀연히 …

 

<20행> … 참됨으로 응집하게 하시고, 도(道)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여기셨네.

           부처의 가르침을 흠미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 …

           경진(鯨津)에 뼈가루를 날리셨네.

           대를 이은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여, 마음에서 우러난 효성과 우애가 …

 

<21행> … 크나큰 이름, 하늘과 더불어 길고 땅과 더불어 오래리 …

 

<22행> … 25일에 대사(大舍) 신(臣) <한눌유韓訥儒>가

           임금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쓰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1992)] 

 

 

 

경진씨(鯨津氏)를 파견하여(派鯨津氏)

 

신라 김씨의 선조는 <소호금천>의 후예로 고대로부터 중국대륙의 산동반도에 살다가

주(周) <효왕孝王 재위 BC 909-BC895>때 대구(大丘)의 <비자非子>가

(진읍(秦邑){감숙성 청수현}에 봉해져 서융의 방위를 맡은 것을 계기로

진(秦)나라의 역사가 시작될 때 감숙성으로 이동하였다.

 

BC 207년 진(秦)나라가 멸망하자

김씨의 후손들이 산동반도를 거쳐 경진(鯨津){今 울산}으로 이동해 온 것을 말한다.

 

 

 

주몽(朱蒙)을 태우고(朱蒙)

 

<왕망(BC45-23) 재위 8-23>이 김씨 세력과 함께 고구려를 공략한 것을 말한다.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昌基於火官之后)

 

김씨가 고대에 하늘에 제사를 주관하는 화관의 후예라는 것이다.

 

 

 

투후(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侯祭天之胤 傳七葉以)

 

투후 <김일제>의 하늘에 제를 주관하는 후손이 전한 무제에서 평제까지

7대 동안 투후를 지낸것을 말한다.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1.세한(성한, 알지)(94-155)→2.아도(130?- )→3수류(욱보)(160?- )

4.구도(218-301)→5.말흔(278-350)→6.말구(297-358)→7.내물(350-402)→

                             미추(292-362)

8.보해(390-441)→9.습보(420-485)→10.지도로(437-514)→11.모진(480-540)→

12.삼모진(534-576)→13.금륜(552-582)→14.용수(573?- )→

15.춘추(603-661)→법민(626-681)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왕(味鄒王) 즉위년에 그의 조상 계보(系譜)를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탈해脫解(51-130) 재위 107-125>왕 대에

계림(鷄林)에서 발견한 금궤(金櫃)에서 나온 <알지閼智>가 <세한勢漢>을 낳았고,

<세한>이 <아도阿道>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가 <미추味鄒>를 낳았다.

 

<세한(알지,성한)>이 <아도>를 낳고 <아도>가 욱보를 낳았다.

 

<알지>가 <세한>이고 <수류>가 <욱보>인 것이다. 

 

신라 초기 기년을 1갑자 올리다보니 알지가 알지를 낳

수류가 수류를 낳은 꼴이 되는 것이다.

 

실성이 120세가 되는 미추의 딸을 왕후로 삼는 실성한 꼴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편찬된『삼국사기』나『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김씨 왕실의 시조를 탄강자(誕降者) <알지>라고 했다.

 

반면 신라 당대 건립된 금석문인「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

「김인문묘비(金仁問墓碑)」,「흥덕왕릉비편(興德王陵碑片)」,

「광조사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廣照寺眞澈大師寶月乘空塔碑)」,

「비로암진공대사보법탑비(毘盧庵眞空大師寶法塔碑)」등에는

성한(星漢, 聖韓)을 시조나 태조로 기록하고

특히「문무왕릉비」에는 <성한>이 탄강(誕降)했었다고 기록했다.

 

이로 본다면 <세한>을 신격화하여 <성한>이나 <알지>라 하였으니 동일 인물이다.

 

그런데 문무왕릉비문에는 성한을 문무왕의 15대조라 하였다.

 

삼국사기의 편찬자가 <세한>을 <알지>의 아들로 하고

또 <아도>와 <욱보> 사이에 <수류>를워넣어

신라기년을 1갑자 끌어 올린 것이다.

 

 

 

진백(秦伯)의 터전를 다시 일으켰다(秦伯之基德)

 

진백(秦伯)은 춘추오패의 한 사람인 진(秦) 목왕(穆王) <熊商臣 재위 BC625-BC614)을 말한다.

 

진 목공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을 닦은 왕이다.

 

진 목공의 훌륭한 덕이 문무왕의 삼한통합으로 다시 재현돠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경주 김씨는 아득한 옛날 화관의 후예로서 역사에 등장하였으며,

이 후손들은 진나라를 이루어 중시조로 진백의 치하에서 나라의 중흥기를 맞았다.

 

이 진백은 하족(族)과는 전혀 다른 역사인식을 갖고 있어서

하(夏)나라를 정통으로 삼는 오늘날의 중국인들의 선조가 세운 나라를 정복하라는

유시를 후손들에게 남겼으며 이 유시를 실현한 인물은 진시황이다.

 

그러나 진시황의 진나라가 대륙을 통일한지 얼마가지 못하고 망하자

1차 망진세력인 경진씨는 동해지역으로 망명을 하게 되었고,

2차 망진세력은 대륙의 서북부에 휴도왕국을 세우고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또 한편으로 일본열도의 용성국 출신이라고 밝힌 <석탈해(51-131)>의 세력도

결국은 한반도 동남쪽에 이르러 박, 석, 김의 삼성이 조우하게 되었고

신라라는 틀안에서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무제의 강력한 영토 팽창정책에 의해 2차 망진세력인

휴도왕국의 태자였던 <김일제>와 동생 <김륜>,

그리고 어머니 알씨 등이 한나라에 포로로 잡혀와 말먹이의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김일제BC136-BC86)>는 한무제의 눈에 들어 관직에 오르게 되었고,

급기야는 한무제 임종시 연소한 아들 소제를 대신해

정사를 처리해 줄 것을 요청받을 정도로 한나라의 실세로 자리 잡았다.

 

김씨 집안은 무제~평제에 이르는 한나라 임금 7대를 거치는 동안

명문거족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투후의 일족은 문무왕 비문의 기록처럼

‘화관(순임금) → 진목공 → 진시황 → 망진세력 → 휴저왕 → 김일제’로 이어져 내려와 한나라에 뿌리를 내렸다.

 

이후 前漢이 김씨 일족의 이종사촌간인 왕망에 의해 新제국으로 교체되었으며,

김씨 일가는 왕망의 ‘新’정권 하에서 권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망(BC45-BC23)>정권이 <유수劉秀(6-57)>에 의해 멸망하자,

김씨들은 먼저 한반도에 자리 잡고 있던 일가를 찾아

지금의 경주에 신라의 터를 잡게 된 것이다.

 

이후부터 김씨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2천 년간 이 땅에서 살아오고 있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金,張,史,許씨 등 4대 성씨가 漢나라의 실세 가문들이며,

특히 漢나라 宣帝 <유병이劉病已, 유순劉詢(BC91-BC48)> 의 처가인 許씨는

楚王 <연수延壽>의 반란을 사전에 막아 선제를 보호한 김씨 가문과

두터운 교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나라가 멸망하자 許씨는 김씨와 함께 산동반도에서 거주하다

<김수로(142-199)>가 금관가야를 건국하자

친분이 깊었던 김씨가 피난 와 있던 한반도 남부로 찾아와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수로>와 혼인한 <許황옥(146-189)>은

漢나라 宣帝의 장인이 되는 평은후(平恩侯) <허광한許廣漢>의 후손이다.

 

이처럼 문무왕 비문은 신라 김씨가 한반도에 나타나게 된 과정을 증언하고 있으며,

김씨 일족이 피난한 지역마다 <왕망>의 오수전이 발견되는 것은 간접 증거가 된다.

 

 

 

 

-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