遷遼東太守 元興元年 貊人寇郡界 夔追擊 斬其渠帥

<後漢書卷十一 列傳 耿夔>

 

요동태수로 옮겼다.

원흥 원년(105년),

맥인(貊人)이 군의 경계를 침범하자 <경기耿夔>가 추격하여 그 거수를 참하였다.

 

 

和帝元興元年春 復入遼東 寇略六縣 太守耿夔擊破之 斬其渠帥

<後漢書卷八十五 東夷列傳 第七十五>

 

화제 원흥 원년 봄, 요동으로 다시 들어와 여섯 현을 약탈하였다.

태수 <경기耿夔>가 그를 격파하였으며 그 거수를 참하였다.

 

 

孝和皇帝下元興元年

春 高句驪王 宮入遼東塞 寇略六縣......

秋 九月 遼東太守耿夔 擊高句驪 破之

<資治通鑒 卷第四十八 漢紀四十>

 

효화황제 원흥 원년 봄 고구려왕 궁이 요동의 변방으로 들어와 여섯 현을 약탈하였다.

가을 9월 요동태수 <경기耿夔>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깨부수었다.

 

 

五十三年 春正月 扶餘使來 獻虎 長丈二 毛色甚明而無尾

王遣將入漢遼東 奪掠六縣 太守耿夔出兵拒之 王軍大敗 秋九月 耿夔擊破貊人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53년(105년) 춘정월 부여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2장이고

털빛이 매우 하얗고 꼬리가 없었다.

 

왕이 장수를 한의 요동으로 보내 여섯 현을 약탈했다.

 

태수 <경기耿夔>가 출병시켜 이를 막아 나서니 왕의 군사가 크게 패했다.

 

추9월에 <경기耿夔>가 맥인을 쳐부수었다.

 

 

三十三年 乙巳 正月 扶余 獻 丈二黃虎 丈一白熊 毛色明無尾 使御苑大牡虎字之 以取種

三月 鎭北將軍麻樂 重修盖馬諸城 率貊騎 伐遼東 取 白岩 長岺 菟城 汶城 章武 屯有 等 六城 漢人大驚慌忙 以耿夔爲守

而來戰 宮太子與使者穆度婁 率輕騎 深入敵陣 左右衝突 大破之 

<고구려사초 신명선제기>

 

신명선제33년(105년) 을사 정월, 부여가 2장 크기의 황호와

털빛이 하얗고 꼬리가 없는 1장 크기의 백웅을 바쳤다.

 

대궐동산에 있는 큰 수컷 호랑이와 교배시켜 종자를 취하라 하였다.

 

3월, 진북장군(鎭北將軍) <마락麻樂>이 [개마]의 여러 성을 다시 고쳤으며,

맥의 기병을 이끌고 요동을 쳐서

백암(白岩), 장령(長岺), 토성(菟城) , 문성(汶城), 장무(章武), 둔유(屯有)

6 성을 얻었다.

 

한인은 크게 놀라 어쩔 줄 몰라 하였는데, <경기耿夔>로 하여금 지켜 싸우게 하였다.

 

<궁宮>태자가 사자(使者) 목도루<穆度婁>와 함께 경기병(輕騎兵)을 이끌고

적진에 깊숙이 들어가 좌충우돌하며 크게 깨부수었다. 

 

신명선제 34년 병오(AD106) 정월 백암(白岩)태수 <정원鄭元>이

<경기耿夔>와 장무(章武)에서 싸우다 손해를 보니, 궁(宮)태자가 쳐서 복구하였다.

<송두지松豆智>를 요동태수로 삼았다.

<고구려사초 신명선제기>

 

위의 기록은 신명선제 33년 105년의 기록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부여가 보낸 호랑이의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김부식은 우리 고기의 기록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부식은  꼬리 없고 털빛이 하얀 희귀한 호랑이를 보낸것으로 기록하였다.

 

꼬리 없는 호랑이가 있을리 없다.꼬리없는 흰곰을 보낸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얼마나 부실한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김부식은 마락이 요동 6성을 공격한 것을 약탈했다고 기록하였다. 

 

도대체 김부식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자기 조상의 요동 공격을 약탈이라고 적고 있으니

중국의 사서를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인간이다.

 

우리는 아직도 삼국사기를 정사로 여기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史實로 여기고 있다.

 

백암 태수 <정원鄭元>이 요동 태수 <경기耿夔>와 장무(章武)에서 싸워 패했으나

이듬해 태자 <궁宮>이 요동 태수 <경기耿夔>와 싸워 이겨 <송두지松豆智>를

요동태수로 명한다.

 

중국의 사서는 이긴 것만 기록하고 패한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 사초는 <정원鄭元>이 장무에서 패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와 고구려사초를 비교해보라.

 

어느 것이 우리의 역사의 실체이겠는가? 

 

고구려에는 어원(御園)이 있었다.

신명선제의 기록에 어원에 꼬리가 긴 토끼와 뿔이 3개인 사슴,

 

황호(黃虎)와 백웅(白熊), 붉은 표범(朱豹)을 길렀으며

 

 

국화, 모란, 백련등의 진기한 식물도 심어 즐겨 구경한 것이다.

 

 

 

 

 

한(漢)은 永元 16년(104년)에 요동군을 복치하여 하북성에 설치한다.

 

 

 

이 때부터 요동은 한(漢)과 고구려가 뺏고 빼앗기는 격전장으로 변한다.

 

 

<마락(麻樂)이 공격한 요동 6城>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