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34년(57년)

 

가을 9월, 왕이 병환이 나자 신하들에게 말했다.

 

"탈해는 신분이 국척이요,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고, 공을 여러 번 세웠다.

 

나의 두 아들은 재능이 그를 따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죽은 뒤에는 탈해를 왕위에 오르게 하라. 나의 유언을 잊지 말라."

 

겨울 10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사릉원에 장사지냈다.

 

탈해 이사금[토해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이며,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태어났다.

 

이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으로 천 리 밖에 있다.

 

본래 그 나라 왕은 여국의 왕녀를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은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이는 상서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리라"라고 말하였다.

 

그 여인이 알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함께 싸서

상자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그 상자는 처음에 금관국 해변에 닿았다.

 

금관 사람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거두지 않았다.

 

그 상자는 다시 진한 아진포 어구에 닿았다.

 

이 때가 곧 시조 혁거세 39년이었다.

 

혁거세 39년은 AD 46년이다.

 

그 때 해변에 사는 할머니가 상자를 줄로 끌어올려 해안에 매어 놓고 열어보니,

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그 노인은 이 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되자 키가 9척이 되었으며,

기풍과 정신이 훌륭하였고,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으나 처음 상자가 도착하였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면서 날아 따라 왔으니,

까치 작(鵲)자를 줄여 '석(昔)'으로 성을 삼는 것이 좋겠고,

또한 상자를 풀고 나왔으니,

'벗을 탈(脫)'과 '풀 해(解)'로 이름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탈해는 처음에는 고기잡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는 한 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격과 관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에 종사하여 공명을 세우라"

라고 말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학문에 전념하였고 동시에 지리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양산 아래에 있는 호공의 집을 보고 그 곳이 좋은 집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꾀를 써서 이 터를 얻어 그 곳에서 살았다.

 

이 땅은 뒷날 월성 터가 되었다.

 

남해왕 5년에 이르러 그가 어질다는 소문이 나자

왕은 자기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남해왕 5년은 AD 70년이다.

 

7년에 그를 등용하여 대보로 임명하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말했다.

 

"선왕은 '내가 죽은 후에 아들과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현명한 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라'고 유언하였다.

 

이리하여 내가 먼저 왕위에 올랐다.

 

이제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107년 10월 유리(46-107)가 죽고 탈해(46-130)가 즉위하니

이 해가 탈해 원년이 된다.

 

이때 탈해 62세이다.

 

 

* 탈해의 가계도

 

협보(BC50-20?)

|

?

|

?

|

다파나君 = 聖帝

             |

          4.탈해(46-130) = 아효 = 毛施 = 阿惠

             재위 107-125 |        |        |

                               薺居   仇鄒    厚福(彡尼今)마복자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