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선제 39년 신해(A.D.111) 2월

<송두지松豆智>가 한(漢)과 화친을 약속하고 국경을 정하였는데 잃은 것이 있었다.

왕이 노하여 (송)두지를 비류(沸流)로 귀양(配)보냈다.

<마락麻楽>에게 명하여 한(漢)을 치게 하였다.

 

 

至安帝永初五年, 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 殺傷吏民.

<후한서 동이열전>

 

안제 영초5년(111년) 부여왕 始는 보병과 기병 7,8천명을 거느리고

낙랑을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夫餘夷犯塞,殺傷吏人

<후한서 본기 안제기 영초5년조>

 

부여 오랑캐가 새(塞)를 침범하여 관리와 백성을 살상하였다.

 

 

高句驪王宮與濊貊寇玄菟

<자치통감>

 

五十九年 遣使如漢 貢獻方物 求屬玄菟

[通鑑 言 是年三月 麗王宮與穢貊 寇玄菟 不知 或求屬或寇耶 抑一誤耶]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59년(111년),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품을 바치고, 현도에 소속되기를 청하였다.

[[통감]에는 "이 해 3월, 고구려왕 궁이 예맥과 함께 현도를 약탈하였다"라고 말하는데, 속하기를 원했다고도 하고 약탈했다고도 하니 뭔지 알 수가 없다.

하나는 잘못된 것이 아닌가?]

 

 

삼국사기는  신명선제 39년 AD111년의 사건을 위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명39년(AD111) 2월에 고구려의 요동태수 <송두지松豆智>가

한(漢)과 국경을 정하는 과정에서 요동의 일부와 낙랑을 뺏긴 일로 인해

신명선제의 노여움을 사 비류로 귀양을 가게 된다.

 

이 시기 한나라는 등태후의 외척이 집권한 안제때이다.

그들의 변방은 남흉노와 동호, 부여(비리),선바족들의 침략이 끊임 없었고

111년에 들어서서는 선령강(先零羌)이 또 서쪽에서 한의 북변을 위협하였다.

3월에 가까스로 선령강을 상당(上黨)에서 진압하자마자

부여가 낙랑을 공격하고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는 것이다.

 

고구려가 漢에 조공을 바치고 일개 군郡에 불과한 현도군(玄菟郡)에

속하기를 원하였다고 기록한 김부식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기록하였는지

그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럽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고구려가 현도를 약탈했다고 하니

어느 기록이 맞는지 알 수 없다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부여(비리)가 낙랑을 침범하자 고구려와 漢이 화친을 하고 국경을 정하게 되는데

낙랑이 고구려에서 제외되자 신명선제가 노하여

요동태수 송두지를 비류로 귀양 보내고 마락으로 하여금 漢을 공격하게 한 것이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