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선제 40년 임자(AD112)

 

2월 <우정羽靖>이 죽어, <호만好萬>을 우보로 삼았다.

 

5월 왕이 해산(海山)으로 행차하여 <궁宮>태자에게 선위하고,

스스로 해산선황(海山仙皇)이 되어 내외선정(內外仙政)을 총괄하였다.

 

<상인尙仁>과 <고덕高德>을 좌우태사(左右太師)로, <호만好万>을 선상(仙相)으로,

<위葦>황후와 <우羽>황후는 좌우선후(左右仙后)로 삼았다.

 

<호芦>后를 섭정태후(攝政太后)로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모든 군국(軍國)의 정사가 태자에게로 돌아갔다.

 

서도(西都)의 난대(鸞臺)에서 즉위 하였다.

 

왕(帝)의 휘(諱)는 <궁宮> 또는 <어수於漱>라고 불렀으며,

신명선제(神明仙帝)의 장자다.

 

어머니는 <호화芦花>태후, 부여(扶餘)씨로 동부여의 태사 왕문(王文)의 딸이다.

 

왕은 태어날 때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볼 수 있었으며,

신통한 힘이 있어 병사를 이끌고 요동을 쳐서 누차 큰 공을 세웠다.

 

이때에 이르러 선위 받았으니 나이 45세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었으며, 효성과 우애가 도타웠으며,

자신을 개의치 않고 타인을 따랐다.

 

부황이 정사에 염증을 느껴 어머니에게 자문을 구하니, 태후가 정사를 결정하였다.

 

태보를 따로 두지 않았었다.

 

원년 임자(A.D.112) 6월 선제(先帝)를 태상황(太上皇)으로,

모후(母后)를 호화궁(芦花宮) 황태후(皇太后)로 높였다.

 

<마락麻楽>을 좌보, <송두지松豆智>를 우보로 하였다.

 

년호를 신명(神明)이라 쓴 것은 선제(先帝)가 살아계신 까닭이었다.

 

삼대경(三代鏡) 57권이 이루어졌다.

 

동명(東明), 광명(光明), 대무(大武) 3대의 성스러운 그림(繪, 채색한 그림)이다.

 

선황(仙皇)이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무릇 임금의 사람됨이란 대경(代鏡, 시대를 비추는 거울)을 가지고 있으니,

경(鏡, 거울)은 선행을 비추는 것이지 잘못을 비추는 것은 잘못이다.

악행을 하는 자는 폐(廢)하여, 나의 자손들을 경계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색두(索頭)에서는 <응묵應默>이 죽어 <두공梪功>이 섰고, <모계母鷄>를 처로 삼았다.

 

 

태조황제 4년 을묘 (AD115) 2월,

 

서하(西河), 남구(南口), 하성(河城), 안평(安平), 장령(長嶺), 토성(菟城),

둔유(屯有), 평곽(平郭), 하양(河陽), 고현(高顯), 남소(南蘇)등의 성(城)을

중수(重修)하여, 서남(西南)을 대비하였다.

 

8월, 나라 남쪽에 황(蝗)이 들어, 순시(巡視)하여 남해(南海)에 이르러,

10월에 돌아왔다. 

 

대무신제 28년(55년)에 쌓은 10성을 50년만에 중수한 것이다.

 

 

<태조황제가 중수한 10성(城)>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