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황제 9년 경신(AD120)

 

2월, 한인(漢人) <요광姚光>이 토성(菟城)태수라고 자칭하더니,

문성(汶城)에 근거하여 수차례 토성(菟城), 평곽(平郭), 둔유(屯有)를

수차례 침략하여 약조를 어겼다.

 

왕제(王弟) <수성遂成 71-165>에게 <화직禾直>과 <을어乙魚> 등을 이끌고

가게 하여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요광>은 도망갔고, 문성(汶城) 역시 우리에게 귀의하니,

찾아와서 항복한 한인이 천 명이나 되었다.

 

한인 <사대師大>에게 명하여 삼대경 그림 180권을 그리게 하여,

신경(新鏡)으로 삼았다.

 

그 그림이 정해(精解) 요연(燎然)하였고,

구경(旧鏡) 57권은 고색창연(古色蒼然,)하고 간소하였다.

 

법으로 삼을 만하여 정경(政經)이라 이름을 붙였다.

 

<사대師大>는 처음에 구경(旧鏡)을 번역하였는데, 지금 다시 새로이 도달한 것이다.

 

이에 을포<乙布>의 딸을 시집보내고, 소형(小兄)의 작위도 주었다.

<고구려사초 태조황제기>

 

 

건광(建光) 원년(元年)(A.D.121) 봄에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과 현도태수(玄菟太守) <요광姚光>과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그 우두머리(渠師)를 붙잡아서 목베고 병마와 재물을 노획하였다.

 

<궁>은 이에 사자(嗣子) <수성遂成>에게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요광>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수성>이 사자를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니 <요광> 등은 이를 믿었다.

 

<수성>은 이 틈을 타 험요지(險要地)를 점거하여 <요광> 등의 대군을 막고는

몰래 3천여 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 명을 살상(殺傷)하였다.

 

이에 후한은 광양(廣陽)·어양(漁陽)·우북평(右北平)·탁군(涿郡)·요동속국(屬國)에서

3천여 명의 기마병을 출동시켜 함께 요광 등을 구원케 하였으나,

맥인이 벌써 돌아가버렸다. 

 

여름에 다시 요동의 선비족(鮮卑族) 8천여명과 함께

요수현(遼隊縣)을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채풍> 등이 신창현(新昌縣)에서 추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공조(功曹)인 <경모耿耗>와 병조연(兵曹掾)인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인 <공손포公孫酺>) 몸으로 <채풍>을 가리다가 모두 진중에서 죽으니,

죽은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가을에 궁이 드디어 마한(馬韓)· 예맥(濊貊)의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그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2만여 명을 거느리고

유주(幽州) · 현도군(玄菟郡)과 함께 힘을 합하여

<궁>을 쳐서 깨뜨리고 5백여 명을 참수하였다.

 

이 해에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왕이 되었다.

 

<요광>이 상서(上書)하여,

그들의 초상을 틈타 군대를 출동시켜 공격하고자 하니,

후한의 조정에서 논의하는 사람들이 모두 가(可)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궁이 생전에 악독하여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그가 죽은 것을 이용하여 치는 것은 의리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절(使節)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지난날의 죄를 꾸짖고는 그 죄를 용서해 주어

이후 그들이 선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안제는 그 의견을 따랐다.

 

다음 해에 수성이 한나라의 포로(捕虜)를 송환(送還)하고 현도에 이르러 항복하였다.

 

조서를 내려,

 

“<수성> 등이 포악 무도하므로 목을 베어 젓을 담아서 백성에게 보임이 마땅할지나,

다행히 용서함을 얻어 죄를 빌며 항복을 청하는도다.

 

그러나 선비·예맥이 해마다 노략질하여 백성을 잡아가 그 수가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이제 겨우 수십 명 만을 보내니, 교화(敎化)를 받을려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지금 이후로는 후한의 현관(縣官)들과 싸우지 말 것이며,

스스로 귀순(歸順)하여 포로를 돌려보내면 그 숫자만큼 모두 속전(贖錢)을 지불하되,

한 사람당 비단 40필을 주고 어린이는 어른의 반을 주겠다.”

하였다.

 

수성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왕이 되었다.

그 뒤로 예맥이 복속하니 동쪽 변방에 사건이 줄어들었다

<후한서 동이열전>

 

 

至殤、安之間,句麗王宮數寇遼東,更屬玄菟。遼東太守蔡風、

玄菟太守姚光以宮爲二郡害,興師伐之。宮詐降請和,二郡不進。

宮密遣軍攻玄菟,焚燒候城,入遼隧,殺吏民。後宮復犯遼東,

蔡風輕將吏士追討之,軍敗沒。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

 

상제와 안제 연간에 이르러 구려왕 <궁宮>{고구려 태조왕}이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여 다시 현도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蔡風>​과 현도태수 <요광​姚光>​이 두 군(郡)을 해칠 것이라 생각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를 치고자 하였다.

 

<궁>이 거짓으로 항복하고 화의를 청하자 두 군은 진군하지 않았다.

 

<궁>은 몰래 군사를 보내 현도를 공격하여 후성(候城)을 불살라 버렸으며,

요대로 쳐들어가 관리와 백성들을 죽였다.

 

후에 <궁>은 다시 요동을 침범하는데,

<채풍>이 경솔하게 관리와 군사를 이끌고 이를 추격해 토벌하다가

군사가 패하여 전몰하였다.

 

69년(121) 봄에 한의 유주 자사 <풍환 馮煥>, 현도 태수 <요광 姚光>,

요동 태수 <채풍 蔡諷> 등이 병력을 이끌고 침략해 와서 예맥 거수(渠帥)를 공격해서 죽이고 병졸과 군마, 재물을 모두 빼앗았다.

 

왕이 이에 아우 <수성 遂成>을 보내 병력 2천여 인을 거느리고

<풍환> , <요광> 등을 역습하게 하였다.

 

<수성>이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풍환> 등이 이를 믿었다.

 

<수성>이 그에 따라 험한 곳에 의탁하여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 명을 보내,

현도와 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 인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왕이 선비 8천 명과 함께 요수현 (遼隊縣)을 가서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풍> 이 병력을 거느리고 신창 (新昌)에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 병마연(兵馬掾) <공손포 公孫酺>가

몸으로 <채풍>을 막아냈으나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죽은 자가 1백 여 명이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 사당에 제사지내고,

백성으로 딱하고 곤란한 자들을 위문하고 물건을 하사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숙신 사신이 와서 자주색 여우가죽 옷과 흰 매, 흰 말을 바쳤다.

 

왕이 잔치를 열어 그를 위로해서 보냈다.

 

11월에 왕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왕이 <수성>에게 군국의 일을 통괄하게 하였다.

 

12월에 왕이 마한과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 을 포위하였다.

부여 왕이 아들 <위구태 尉仇台>를 보내 병력 2만을 거느리고 와서,

한의 병력과 힘을 합쳐 대항해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자칭 현도태수라고 칭하는 <요광>이라는 자는

태조왕이라면 이를 갈며 독을 품은 사람인데 태조왕시기에 수없이 공격을 받고

무참하게 패배한 그런 인물이었다.

 

121년 신명선제가 죽자 <요광>은 태조가 죽은 것으로 알고 토성을 공격한다. 

 

하지만 <요광>은 토성(菟城) 공략에 실패한다.

 

고구려는 군사를 동원한 김에 요동(遼東)까지 공격하였고

문성(汶城)으로 도망갔던 <요광>은 고구려에 충성을 맹세하며 귀순하게 된다.

 

<요광>이 다시 달아나 유주자사 <풍환馮煥>을 설득하여

요동태수 <채풍蔡諷>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의 변방 제후국인

구리(丘利)를 침공하여 구리거수 <후돌后突>을 죽이게 된다.

 

화가 난 고구려는 <화직禾直>과 <을어乙魚>를 출진시켜 이들을 대파하게 되는데,

특히 <을어>는 한나라의 대군(大軍)을 좁고 험한 길로 유인하여 소수의 복병으로

대군을 몰살시키고 병장기와 마필을 무수히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요동태수 <채풍>이 죽고 풍지박살이 났는데 漢은 <수성>의 죄를 용서해 주고

<수성>이 한나라의 포로(捕虜)를 송환(送還)하고 항복하여 포로들을 속전해주었다고?

 

신명선제가 죽은 것을 태조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 漢이다.

 

그 漢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이다. 

 

현도와 요동이 위험에 처하자 한(漢)은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요동)속국에서

3천여 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보냈다고 <후한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광양, 어양, 우북평, 탁군, (요동)속국 등은 어디에 있었으며

현도와 요동은 어디에 있었겠는가?

 

탁군은 지금의 북경 남쪽 인근이다. 

 

결코 지금의 요하인근이나 한반도 인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시기 後漢의 황제들은 씨가 견실하지 못하여 단명하는 경우가 흔했다.

 

황제는 외척과 환관에 의하여 옹립되고 권한은 축소되었다.

 

105년 <두竇>태후 일족이 사라졌지만

화제(和帝)의 뒤를 이은 <유륭劉隆>은 갓난아기로 그 다음 해에 죽고만다.

 

106년 화제(和帝)의 형인 청하왕 유경의 아들 <유호劉祜(93-125)>가 즉위했는데

그 또한 13세의 어린아이였다.

 

화제(和帝)의 총애를 얻어 황후가 된 <등鄧>태후가

121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섭정을 하게된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28세의 나이로 친정(親政)을 한 안제는

등태후 일족을 타도하는데 이번에도 환관들이 수족이 되었다. 

 

125년 등씨 일족을 몰아낸 환관들과 안제를 주살하고

폐위되었던 <유보劉保>를 즉위시킨 또다른 19명의 환관들이 열후(列侯)가 된다.

 

19명의 열후를 중심으로 환관이 득세하자 이제 이를 견제할 유일한 집단은 외척이다.

 

 

 

<위구태 부여와 어양, 탁군, 광양, 요동속국 및 우북평>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