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120년 김일제의 후손 가야神母 <정견>이 지금의 고령에서 대가야를 건국하였다

 

 

 

※  <정견>의 가계도

 

 

                         김일제(BC134-BC86)

                            |

                            ?

                            |

                            ?

                            |

                            ?

                            | 

夷毗訶(比只) = 1.正見(100?-158)

                      재위 120-157

                 寶日 - 2.朱日(이진아시) - 1.靑裔(首露)(142-199) = 黃玉(146-189)

                            재위 158-176    금관가야 재위 156-198 |

                                                                           2. 居登(162-259)

                                                                               재위 199-259

 

 

 

※ 참고 <가야 흥망사 및 임나일본부>

 

 

- 가야 6국과 그 위치

 

그 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首路)라고 하였는데,

혹은 수릉(首陵)[수릉은 세상을 떠난 뒤의 시호이다.]이라고도 하였다.

 

나라는 대가락(大駕洛)이라 불렀는데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였다.

 

곧 여섯 가야의 하나였다.

 

나머지 다섯 명도 각각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동쪽으로는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蒼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임시로 궁궐을 짓고 살았는데, 검소한 것을 바랄 뿐이어서 이엉의 끝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만든 계단도 3자밖에 되지 않았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아라가야(阿羅伽耶)[라(羅)는 야(耶)라고도 한다. 지금의 함안(咸安)이다.]
고령가야(古寧伽耶)[지금의 함녕(咸寧)이다.]
대가야(大伽耶)[지금의 고령(高靈)이다.]
성산가야(星山伽耶)[지금의 경산(京山)인데 벽진(碧珍)이라고도 한다.]
소가야(小伽耶)[지금의 고성(固城)이다.]

<삼국유사 5가야>

 

 

초기의 가야는 5가야(6가야)로 일컬어진다. 

 

6가야는 낙동강을 따라 상류, 중류, 하류에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소가야는 바닷가의 포구에 형성되어 있다. 

 

번호

가야국명 

위치

현재 위치

비고 

1

가락국 (伽耶國)

김해

김해

 

2

 아라가야(阿羅伽耶)

함안

함안

 

3

대가야(大伽耶) 

고령

고령

 

4

고령가야(古寧伽耶) 

함녕

상주

 

5

성산가야(星山伽耶) 

벽진

성주군 벽진면 

 

6

소가야(小伽耶) 

고성

고성 

 

 

 

<가야 6국>

 

 

- 포상팔국(골포, 칠포, 고사포, 보라, 고자, 사물 외 2국)의 위치 추정

 

번호

 포상팔국 지명

 지리지 소속군

 지리지 지명

현재 지명

 1

골포(骨浦) 

의안군

(義安郡)

합포현(合浦縣)은

원래 골포현(骨浦縣) 

마산합포구 진동면

 2

칠포(漆浦) 

의안군

(義安郡)

칠제현(漆?縣)은

원래 칠토현(漆吐縣) 

마산회원구

 

 3

고사포(古史浦) 

의안군

(義安郡)

의안군(義安郡)은

원래 굴자군(屈自郡) 

창원시

 4

웅지(熊只) 

의안군

(義安郡)

웅신현(熊神縣)은

원래 웅지현(熊只縣) 

진해 웅천동

 5

고자(古自) 

고성군

(固城郡)

고성군(固城郡)은

원래 고자군(古自郡)

고성군

 6

사물(史勿) 

고성군

(固城郡)

사수현(泗水縣)은

원래 사물현(史勿縣)

사천시

 7

보라(保羅) 

고성군

(固城郡)

문화량현(蚊火良縣)

문화(蚊火) -> 뭇화 -> 삼화(三火)

 ->보라(保羅)

삼천포(三川浦) -> 보천(保川)

사천 삼천포

 8

일선(一善) 

고성군

(固城郡)

상선현(尙善縣)은

원래 일선현(一善縣)

남해 창선면

 

 

 

바닷가에 위치한 가야국은 소가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포상팔국으로 불리우는 8개의 가야소국이 존재한다.

 

포상팔국은 창원과 고성지역에 위치한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자세히 보면 포상팔국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포상 8국>

 

 

- 1차 포상팔국의 난; 안라로 몰려간 6천명의 포상팔국 백성들,

   모든 백성을 포로로 잡고 포상팔국의 대표들을 죽이는 물계자

 

 

내해 이사금 14년(서기 209)

가을 7월,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모의하여 가라(加羅)를 침범하자,

가라의 왕자가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은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에게 명하여

6부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삼국사기>

 

 

내해왕 14년(A.D.270) 정월 백호제(白虎=庚寅)를 행하였다.

7월 가야(加耶)왕자 우고(于考)태자가 들어와 고하기를

포상8국(浦上八國)이 (가야를) 침입하였으니 구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우고(于考)와 이음(利音)을 장수로 하여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하였다.

 

8월 이음(利音)이 부딪쳐 8국의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군신(群臣)들이 치하하며, 포로들을 조상의 사당에 바쳤다.


(가야의) 하도(河道)가 그의 딸 대리(大理)를

미지(美知, 벌휴와 미시의 아들)에게 시집보냈다.

<남당유고>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가야 태자 <우고于考>를

<내해>의 아들 <우로于老(277-331)>로 바꾸어 놓았다.

 이때 <우로于老>는 태어 나지도 않았다.

 

<이음利音(226-290)>은 <아달라>와 <자황>사이에서 226년에 태어났다.

 

<내음奈音>은 <이음利音>의 친형으로 220년생이다.

 

209년에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났다면

태어나지도 않은 <이음>과 <내음>이 전장에 나간 것이 된다.

 

<이음>은 270년에 45살의 나이로 가야의 태자 <우고于考>와 함께

전장에 나간 것이다.

 

 

 

당시에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함께 모의하여 아라국(阿羅國)을 치니,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내음을 시켜 인근의 군 및 6부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여

마침내 여덟 나라의 병사를 물리쳤다.

 

이 전쟁에서 물계자는 큰 공이 있었으나

왕손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에 그 공이 기록되지 않았다.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

 

 

 

포상팔국이 안라(安羅)로 모여든다.

 

모양세로 볼 때 포상팔국이 시위를 하기 위해 안라(安羅)로 모이는 것 같다.

 

안라국의 요청으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온 신라의 물계자는

포상팔국 백성 6천명을 포로로 잡고

포상팔국의 대표들을 죽이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하였다.

 

6천명은 포상팔국이 모을 수 있는 남자 백성의 최대 숫자일 것이다.

 

물계자는 안라국과 포상팔국간의 정치적 문제에 직접 끼어들어 무력을 행사하였다.

 

이로인해 포상팔국의 백성들은 신라에 대해 큰 굴욕감을 느꼈고

신라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신라에서는 아무도 물계자의 공을 거론하지 않았다.

 

 

 

- 2차 포상팔국의 난; 갈화에 상륙한 골포-칠포-고사포, 

수십명을 죽이는 물계자 

 

 

그 뒤 3년이 지나 골포(骨浦), 칠포(柒浦), 고사포(古史浦) 등 세 나라 사람들이

갈화성(竭火城)을 공격하자,

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 구원하여 세 나라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

 

 

 

(...) 내해왕 20년 을미(서기 215년)에 골포국(骨浦國)[지금의 합포(合浦)다.] 등

세 나라 왕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와서 갈화(竭火)[굴불(屈弗)인 듯한데,

지금의 울주(蔚州)다.]를 쳤다.

 

그러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으니 세 나라가 모두 패하였다.

 

이때도 물계자가 죽인 적병의 시체는 수십 급이었으나

사람들은 그의 공을 거론치 않았다.

<삼국유사 권5  물계자>

 

포상팔국의 난은 내해왕 14년, 270년에 일어난 난이다.

 

 

<갈화성>

 

- 가야전체로 번진 포상팔국의난; 가야 공통의 적이 되어버린 '신라-금관가야' 

 

 

내해 이사금 6년(서기 201)

봄 2월, 가야국이 화친을 청하였다.

 

 

내해 이사금 17년(서기 212)

봄 3월, 가야(加耶)에서 왕자를 보내와서 볼모로 삼았다.

 

 

내해 이사금 19년(서기 214)

가을 7월, 백제가 나라 서쪽의 요거성(腰車城)을 공격하여

성주인 설부(薛夫)를 죽였다.

 

임금이 이벌찬 <이음>에게 명하여 정예병 6천 명을 이끌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사현성(沙峴城)을 함락시켰다.


 

내해 이사금 23년(서기 218)

백제인이 와서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였다.

 

임금이 몸소 병사를 이끌고 나가 공격하여 격퇴하였다.

<삼국사기>

 

 

 

내해왕 6년(A.D.262)

 

2월 가야(加耶)가 화친을 청하여 왔다.

 

예전에 부여(夫余)와 안으로 응하여 모반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대병(大兵)을 일으켜 치려고 하였다.

 

그 임금과 신하들이 두려워 복종하였다.

 

 

내해왕 17년(A.D.273)

 

3월 가야(加耶)왕자를 불러 인질로 삼았다.

 

 

내해왕 19년(A.D.275)

 

7월 부여(扶余)가 요거성(腰車城)을 공격하고 성주 설부(薛夫)를 죽였다.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6천을 거느리고 가 부여를 쳐서

사현성(沙峴城)을 격파하였다.

 

내해왕 23년(A.D.279)

 

7월 부여(夫余)가 쳐들어 와서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니,

왕이 친히 부딪쳐 깨뜨렸다.
<남당유고>

 

 

함녕의 고령가야 진영은 신라에게 등을 돌리고 요거성을 공격하여

성주 <설부>를 죽인다.

 

대가야 인근의 가야진영은 낙동강을 넘어 장산성(경북경산)을 포위하였다.

 

친 신라 정책을 펼쳔던 금관가야는 가야진영 전체로 번진 反신라 기운으로 인해

국가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신라의 군사지원을 요청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 反신라 열풍속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 가야국 그리고 금성을 포위하는 왜국


 

내해 이사금 32년(서기 227)

 

봄 2월, 서남쪽의 군과 읍을 두루 돌아보았다.


 

내해 이사금 34년(서기 229)

 

여름 4월, 뱀이 남쪽 창고에서 사흘 동안 울었다.

 

 

내해 이사금 35년(서기 230)

 

봄 3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조분 이사금 3년(서기 232)

 

여름 4월, 왜인이 갑자기 쳐들어와 금성을 에워쌌다.

 

임금이 몸소 나가 싸우니 적이 흩어져 도망하였다.

 

날랜 기병을 보내어 그들을 추격하여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조분 이사금 4년(서기 233)

5월, 왜의 병사가 동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沙道)에서 싸웠다.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배를 불태우니, 적들이 물에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삼국사기> 

 

 

내해왕 32년(A.D.288)

 

2월 왕이 나라의 서남(西南, 혹은 서로와 남로)의 군읍(郡邑)을 살폈다.

 

홍후(弘后, 홍모)와 조분(助賁)이 따라갔다.

 

3월 도읍으로 돌아왔다.

 


내해왕 34년(A.D.290)

 

4월 뱀이 남쪽 창고에서 3일 동안 울었다.

 

 

내해왕 35년(A.D.291)

 

3월 왕이 죽었다.

 

홍후(紅后)가 오빠 조분(助賁)태자를 세워 니금(尼今)으로 하였다.

 

상서로운 즉위식을 행하였다.

 

조분왕 3년(A.D.294)

 

4월 왜인(倭人)이 갑자기 쳐들어와 금성(金城)을 포위하였다.

 

왕이 직접 나와 사기를 북돋우었다.

 

적이 궤멸되어 달아나자 흥문(興文) 등이 가벼운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심히 많았다.

 

 

조분왕 4년(A.D.295)

 

5월 왜가 동쪽 변경을 약탈하였다.

7월 우노(于老)가 운량(雲良)과 흥문(興文) 등을 거느리고

사도(沙道)에서 왜인을 대파하였다.

 

바람을 타고 불을 놓으니 그 배들이 불에 탔다. 적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남당유고> 

이때 우로(于老)는 19세이다.

 

 

 

 

내해이사금 당시의 주변국가의 관계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가야제국과 백제가 동맹관계에 있었다.

 

신라는 백제와 길선의 반란 사건이후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백제의 태후인 전씨가 지마계인데 비하여

신라는 일성계에서 석씨계열로 변화되어

신라와 백제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보인다.

 

추모경 후비열전 소서노열전에는

소서노와 고구려의 건국공신 협부와의 사이가 견원지간으로 나온다.

 

석씨계는 협부의 후손이다. 

 

아마도 그 앙금이 계속적으로 이어진 것으로도 보인다.

 

내해이사금이 즉위하기 직전의 상황을 살펴보면

250년 8,9월 기사에 백제와 신라가 원산성에서 싸워 신라가 크게 패배하였다.

 

대가야가 백제에게 동맹을 맺는 기사가 백제왕기 초고왕28년(253년)기사에 나타난다.

 

대가야는 백제가 동맹을 맺음으로 인하여,

신라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을 것이다.

 

262년 2월 신라가 병사를 일으켜 대가야를 치려하자 대가야가 화친을 청해온다.

 

이 때문에 대가야가 가야제국의 일원인 포상8국과 이해를 달리하여

내분이 생긴 듯 하다.

 

270년 7월 포상8국이 백제와 공모하여 대가야를 쳐들어가자

신라는 6부병을 일으켜 포상8국의 난을 진압한다.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을 살펴보면

포상8국의 난이 한 번의 전쟁에서 바로 진압된 것이 아니라

수년을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게 포상8국과의 전쟁은 가볍게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신라가 치고받고 싸우면 가장 즐거운 나라는 고구려다.

 

백제와 신라는 후방인 고구려를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먼저 고구려와 백제를 살펴보면,

 

238년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 시

백제는 낙랑의 변방을 쳐서 위(魏)의 후방을 교란시킨 공로가 있다.

 

토지공사에서 보관중인 팔면성에서 출토된 비문과 연결된다.

 

고구려는 먼저 백제에게 은의를 입은 바가 있어

백제의 뒷통수를 치기엔 미안한 점이 있다.

 

그러나 신라와는 그렇지 않다.

 

당시 신라의 북변을 쳐서 자신들의 욕심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기사가 남당유고 고구려사초(략) 중천대제기에 있다.

 

당시 조분이사금이 죽고 첨해이사금의 모후(母后)인 옥모(玉帽)가

고구려에 입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포상8국과 대적하여 싸우기 위해

고구려에게 입조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옥모는, 군권의 최고 책임자인 구도(仇道)의 딸이고,

태자인 조분(助賁)의 어머니의 신분을 겸하고 있으며,

내해와의 사이에 아들 첨해를 두었으니 이 정도로 볼모의 신분으로 충분한 것이다.

 

옥모와 중천의 관계는

신라에서는 색공(色供)으로 고구려에서는 볼모로 서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 금관가야 년표 

 

 대수

 왕명

 재위 연대

 재위 기간

 수정 재위 연대

수정 재위 기간 

 관련 기록

 1

 수로

  42-198

157

 156-198

43

 

 2

 거등

 199-253

54

 199-258

60

 

 3

 마품

 254-290

   38

 259-290

32

 

 4

 거미질

 291-346

55

 291-346

56

 

 5

 이시품

 347-406

61

 347-406

60

 

   6  좌지

        407-420

      14         407-420

         14

 

 7

 취희

 421-450

30

 421-450

30

 

 8

 질지

 451-491

41

 451-491

41

 

 9

 겸지

  492-520 

29

 492-520

29

 

 10

 구형

  521-562 

41

 521-531

11

 

 

 

- 가야사 시대구분 

 

 시대 구분

 기간

 국가 형태

 가야의 태동기

 120

 부족국가

 가야의 성립기

 156-158

 도시국가

 가야의 발전기

 3세기 - 5세기

 영역국가

 가야의 쇠퇴기

 6세기 초엽 - 6세기 중엽

 영역국가

 

 

 

 

- 倭와 韓이 접경하고 있다고 기술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 둘째는 辰韓, 세째는 弁韓인데,

辰韓은 옛 辰國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倭가 韓과 접경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왜가 3세기 중반에 한반도에 진출하였다는 또 다른 증거로 보인다.

 

 

 

- 대가야로 부터 임나4현과 기문을 빼앗는 무령왕

 

겨울 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調)를 바치고 표를 올려

 

임나국의 상다리,하다리,사타(娑陀), 모루(牟蔞) 사현(四縣)을 청하였다.

 

다리국수(?唎國守)인 수적신압산(穗積臣押山)이 아뢰기를,

"이 4현은 백제에 근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백제와 4현은) 아침저녁으로 교통하기 용이하고

닭과 개의 소리도 어느 쪽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일본서기 계체 6년 (서기 512)>

 

 

여름 6월 백제는 저미문귀(姐彌文貴) 장군(將軍)과

주리즉이(州利卽爾) 장군을 보내 수적신압산(穗積臣押山)

[백제본기에는 위(委)의 의사이마기미(意斯移麻岐彌:오시야마키미)라 했다.]

에 딸려 보내어 오경박사(五經博士) 단양이(段楊爾)를 보냈다.

 

따로 주청해서

“반파국(伴跛國)이 신臣의 나라의 기문(己汶) 이라는 땅을 약탈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바르게 판단하여 원해 속한 곳에 돌려 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

 


겨울 11월 신해삭 을묘(5일) 조정에 백제의 저미문귀(姐彌文貴) 장군,

사라(斯羅)의 문득지(汶得至), 안라(安羅)의 신이해(辛已奚) 및

분파위좌(賁巴委佐), 반파(伴跛)의 기전해(旣殿奚)와 죽문지(竹汶至) 등을 불러

칙명을 알리고, 기문(己汶)과 대사(帶沙)를 백제국에 주었다.

 

같은 달, 반파국(伴跛國)이 집지(?支)를 보내어 진귀한 보물을 바치고

기문(己汶)의 땅을 청하였으나, 결국 주지 않았다.

<일본서기 계체 7년 (서기 513)>

 

 

동성왕이 죽고 무령왕이 즉위한다.

 

동성왕은 한산성을 회복했고 무령왕은 고목성을 회복하고 수곡성을 공격하였다. 

 

거기에 쌍현성 쌓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백제가 임진강 북쪽을 다시 장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고토회복은 왕권강화책이 얻은 결실이었다.

 

다음 백제의 목표는 관미성을 회복하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성왕이 추진하게 된다. 

 

동성왕은 남쪽으로도 영토를 확대했고

전라남도 서남해안을 지배권으로 두기 시작했다.

 

무령왕은 더 나아가 대가야가 차지하고 있던 임나4현(순천,광영,여수 등)을 장악하고 섬진성을 넘어 기문(남원)으로 진출하게 된다.

 

대가야는 위기에 빠졌다.

 

일본서기는 무령왕이 대가야가 차지하고 있던 순천, 광영, 여수등을 차지한 것을

안라에 있는 임나일본부{안라왜신관}가 백제에 하사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기문과 임나4현> 

 

 

-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는 대가야

 

신라 법흥왕 9년(서기 522)

 

봄 3월,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기에,

임금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여동생을 보냈다.

 

 

신라 법흥왕 11년(서기 524)

 

가을 9월, 임금이 남쪽 변방을 두루 돌아보며 영토를 개척하였다.

가야국 왕이 찾아와 만나보았다.

 

 

 

백제가 대가야 영역으로 들어오자 대가야는 신라와의 동맹을 추진한다.

 

대가야의 왕은 비조부의 여동생을 대가야로 보낸다.

 

신라는 모계의 혈통으로 왕권을 이었기 때문에

대가야로 이찬의 여동생을 보낸 것은 전략적 동맹이 성사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 임나를 재건하기 위해 6만 병력 지원 계획을 세우는 왜국

 

일본서기 계체 21년 6월

여름 6월 임신삭 감오(3일),

근강모야신(近江毛野臣;오후미노케나노오미)이 무려 6만을 거느리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 멸망당한 남가라(南加羅)와 탁기탄을 다시 일으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이 때 축자의 국조(國造) 반정(磐井;이하위)이 은밀히 반역을 도모한지 수년이 지났다.

 

그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항상 틈을 보고 있었다.

 

신라가 이를 알고 몰래 뇌물을 반정에게 보내어

모야신의 군사를 막아주기를 권유하였다. 

 

 

 

 

왜국은 계속적으로 임나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일본의 국정이 안정되자 모야신은

임나재건을 위한 군사를 모집하기 위해 왜국조정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모야신은 신라가 점령한 대마도를 되찾기 위하여 왜국 조정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 파탄나는 신라와 대가야의 혼인 동맹, 왜국의 임나재건에 대비하는 신라

 

 

일본서기 계체 23년 3월 (서기 529)

 

 

가라왕은 신라의 왕녀와 혼인하여 드디어 자식을 낳았다.

 

신라가 처음 왕녀를 보낼 때 아울러 1백 명을 시종으로 보냈다.

 

이들을 받아들여 각 현에 나누어 배치하고 신라의 의관을 착용토록 하였다.

 

아리사등(阿利斯等)은 그들이 옷을 바꾸어 입은 것에 분개하여

사자를 보내어 모두 돌려보냈다.

 

이에 신라가 크게 부끄러워하고 다시 왕녀를 불러오고자 하여

"전에 그대의 청혼을 받아들여 내가 혼인을 허락하였으나,

이제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왕녀를 돌려보내줄 것을 청한다."고 하였다.

 

가라의 기부리지가(己富利知伽) [잘 알 수 없다.]가

"짝을 지어 부부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떨어질 수 있으며,

또한 자식이 있는데 어찌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신라는 지나가는 길에 

도가(刀伽),고파(古跛),포나모라(布那牟羅)의 세 성을 함락시켰으며,

또한 북쪽 변경의 다섯 성을 쳤다.

 

 

 

일본서기 계체 24년 9월

돌아가는 길에 등리지모라(騰利枳牟羅), 포나모라(布那 牟羅),

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 아부라(阿夫羅), 구지파다지(久知波 多枳) 등

다섯 성을 함락시켰다.

 

탁순왕 아리사등(阿利斯等)이 탁순국에 사는 신라 왕녀의 시녀들이

신라복장을 고집하자 시녀들을 신라로 돌아보내려 한다.

 

구실을 잡은 신라는 가야에 시집간 이찬 비조부의 여동생과

시종 100명을 데려오면서 탁기탄을 멸망시키고 낙동강변의 성들을 함락시킨다.

 

 

* 기부리지가(已富利知加) : 가야의 이뇌왕(異腦王).

대가야 시조 뇌실주일(惱室朱日, 또는 伊珍阿鼓王·內珍朱智)의 8세손으로

부인은 신라의 이찬(伊飡) 비지배(比枝輩, 또는 比助夫)의 딸(혹은 누이)이다.

 

* 아리사등(阿利斯等) : 탁순국의 왕이다.

529년 대가야 왕에게 시집 온 신라 왕녀의 시녀들 중 일부가 탁순국에 살면서

신라의 복장을 고집하자 그들을 신라로 쫓아 보냈다.  

 

 

 

- 구사모라에 도착한 모야신, 천명이하로 추정되는 소규모의 왜군 병력

 

일본서기 계체 23년 4월 (서기 532)

여름 4월 임자삭 무자(7일),

임나왕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가 내조하였다

[기능말다라고 함은 아마 아리사등일 것이다.]

 

그리고 대반대련 금촌에게

 

"무릇 바다 건너 여러 나라는 태중천황이 내관가를 둔 이래,

원래의 국왕에게 그 통치를 위임한 것은 도리에 합당한 일이었다.

 

이제 신라가 원래 주어진 영토를 무시하고 빈번하게 국경을 넘어 내침하고 있다.

 

청컨데 천황에게 주상하여 신의 나라를 구원해 주시오."라고 알렸다.

 

대반대련은 청에 따라 주상하였다.

 

같은 달, 사신을 파견하여 기능말다간기를 전송하고,

아울러 임나에 있는 근강모야신에게

"보고된 바를 조사하고. 서로 의심하고 있는 바를 화해시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일본서기 계체 24년 9월

가을 9월, 임나의 사신이

"모야신이 구사모라에 택사를 짓고 머문지 이미 2년

[어떤 책에서는 3년이라고 하였으니, 왕복하는 데 걸린 햇수를 합한 것이다.]이

되었으나, 정사는 게을리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모야신의 왜군이 구사모라에 상륙했다.

 

그런데 소문과는 달리 왜군의 규모가 매우 적었다.

 

 

 

- 안라회의; 왜국에 기대할 것이 없자 가야 독자 노선를 추진하는 안라국

 

 

일본서기 계체 23년 3월 (서기 531)

 

이 달에 오구미 게누노오미(近江 毛野臣)를 안라로 보내

조칙으로 신라에 권하여 남가라, 탁기탄을 다시 건립토록 했다.

 

백제는 장군군윤귀(將軍君尹貴), 마나갑배(麻那甲背), 마로(麻鹵)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조칙을 듣도록 했다.

 

신라는 번국의 관가를 부순 것이 두려워 대인을 보내지 않고

부지내마례(夫智柰麻禮), 해내마례(奚柰麻禮)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조칙을 듣도록 했다.

 

이에 안라는 새로이 고당(高堂)을 지어 칙사를 인도하여 올라가는데,

국주는 따라 올라갔고,

국내의 대인으로써 미리 당에 올라와 있는 사람도 하나 둘 있었으며,

백제 사신 장군군(將軍君)등은 당 아래에 가 있었다.

 

그 뒤로 몇달동안 두세번 당위해서 모의 했는데

장군들은 뜰에 있었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520년대 후반에 탁순국이 신라로부터 공격을 받고

그 와중에 탁기탄국이 신라에 병합되자,

가야연맹 내의 남부제국은 그것을 저지하지 못한 대가야를 불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구책으로 자체 내의 단결을 도모했는데 함안의 안라국이 이를 주도했다.

 

즉 안라가 높은 건물을 지어서 새로운 정치적 합의체 맹주로서 의 면모를 갖추고,

백제, 신라, 왜 등의 사신을 초빙하여 국제회의,

즉 안라회의를 개최한 것은 이를 반영한다.

(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任那問題를 包含하여-/ 김태식)

 

 

 

혼인동맹이 파탄되고 탁기탄국이 멸망하면서

대가야는 가야진영 전체에게 욕을 먹게 되었다.

 

그러면서 안라국이 가야연맹의 정치적 맹주로 부상한다.

 

안라국은 높은 건물(고당,高堂)을 짓고 안라회의를 개최하여

안라국이 가야의 정치적 맹주가 되었음을 표방한다.

 

반면 백제사신 윤귀(尹貴)는 가야에게 왕따 당해서 고당에 올라가지 못하고

몇달 동안 뜰에 서 있게 된다. 

 

 

 

- 이사부의 3천병력이 오자 웅천에서 기질기리성으로 도망가는 모야신,

  석 달동안 모야신을 기다리는 이사부

 

일본서기 계체 23년 4월 (서기 532)

 

이에 모야신은 웅천(熊川)에 머물면서

[어떤 책에서는 임나의 구사모라(久斯牟羅)에 머물렀다고 하였다.] 

신라와 백제 두 나라의 왕을 소집하였다.

 

신라왕 좌리지(佐利遲)는 구지포례(久遲布禮)

[어떤 책에서는 구례이사지우나사마리(久禮爾師知于奈師磨里)라고 하였다.]

를 보내고 백제는 은솔(恩率) 미등리(彌騰利)를 보내어

모야신이 있는 곳에 가게 하였으며,두 왕이 직접 오지 않았다.

 

모야신이 크게 노하여 두 나라의 사신을 문책하여,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이 정한 도리이다

[어떤 책에서는 큰 나무의 끝은 큰 나무로 잇고,

작은 나무의 끝은 작은 나무로 잇는다고 하였다.]

 

무슨 까닭으로 두 나라의 왕이 직접 와서 천황의 칙명을 받지 않고

함부로 사자를 보내는가.

 

지금 만일 너희 왕이 몸소 칙명을 들으러 온다고 해도,

내가 칙명을 전하지 않고 반드시 물리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지포례와 은솔 미등리는 두려운 마음을 품고 각자 돌아가 왕에게 알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는 다시 상신(上臣) 이사부(이질부례간기利叱夫禮智干岐)

[신라는 대신(大臣)을 상신(上臣)이라고 한다.

어느 책에서는 이질부례지니말(伊叱夫禮智奈末)이라고 하였다.]를 파견하였으며,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칙명을 듣기를 청하러 왔다.

 

모야신은 멀리 무장을 갖춘 무리 수 천명을 보고

웅천(熊川)으로부터 임나(任那)의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으로 들어갔다.

 

이질부례지는 다다라원(多多羅原)에 머물면서 귀복하지 않고 

석 달을 기다리면서 빈번히 칙명을 듣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칙명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질부례지가 거느린 병사들이 마을에서 구걸을 하며

모야신의 종자(從者) 하내마사수어수(河內馬飼首御狩)가 있는 곳을 지나갔다.

 

어수는 다른 사람의 집에 숨어서 구걸하는 병사들이 지나 가기를 기다렸다가,

주먹을 휘두르며 멀리서 때리는 시늉을 하였다.

 

걸식하던 자들이 이를 보고

“삼가 석 달을 기다리며 칙지를 듣기를 고대하였는데,

아직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칙명을 듣고자 하는 사신을 괴롭혔다.

이제 속임수를 써서 상신(上臣, 이사부)을 주륙하려고 함을 알겠다."고 하면서,

본바를 상신에게 자세히 일렀다.

 

 

 

모야신의 소규모 왜군은 안라, 신라, 백제 등 모든 세력으로 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모야신은 천황의 칙명으로 돌파구를 모색하려 한다.

 

모야신은 과거 신라와 임나가라의 국경인 웅천(우시산, 울주웅촌)으로 가서

천황의 칙명을 전하겠으니 신라, 백제의 두 나라 왕이 직접 웅천으로 와서

천황의 칙명을 받으라고 말한다.

 

이는 모야신이 천황의 칙명으로 임나재건을 선언하겠다는 뜻이였다.

 

백제는 은솔 미등리를 보냈고 신라는 3천명의 군사를 대동한 이사부가 왔다.

 

이사부의 3천 군사를 본 모야신은 바로 기질기리성으로 도망가고

자신의 종자는 웅천에 정보원으로 남겨둔다. 

 

이사부는 칙명을 듣겠다며 석 달동안 웅천의 다다리원에서 대기하고 있다.

 

모야신이 웅천에서 임나재건을 선언하는 순간 이사부는 바로 왜군을 섬멸한 것이다.

 

 

* 웅천 :  진해 웅천동

           

 

* 다다라원 : 부산 다대포

                 

 

 

<웅천과 다다리원> 

 

 

- 모야신과 왜국에 대한 기대를 접고 신라로 귀부하는 금관가야

 

일본서기 계체 23년 4월 (서기 532)

신라는 다시 상신(上臣) 이사부(이질부례간기利叱夫禮智干岐)

[신라는 대신(大臣)을 상신(上臣)이라고 한다.

어느 책에서는 이질부례지니말(伊叱夫禮智奈末)이라고 하였다.]를 파견하였으며,

무리 3천 명을 이끌고 칙명을 듣기를 청하러 왔다.

 

모야신은 멀리 무장을 갖춘 무리 수 천명을 보고

웅천(熊川)으로부터 임나(任那)의 기질기리성(己叱己利城)으로 들어갔다. 

 

(...) 상신(上臣, 이사부)은 네 촌

[금관(金官)·배벌(背伐)·안다(安多)·위타(委陀)가 네 촌이다.

어떤 책에는 다다라(多多羅)·수나라(須那羅)·화다(和多)·비지(費智)의

네 촌이라고 하였다.]을 초략하여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본군으로 돌아갔다.

 

어떤 사람은 “다다라 등 네 촌이 공격을 받은 것은 모야신의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신라 법흥왕 19년(서기 532)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인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과 더불어

자기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임금이 예를 갖추어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직위를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일본서기 흠명 2년 4월

南加羅는 땅이 협소하여 불의의 습격에 방비할 수 없었고 의지할 바도 알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가야재건에 대한 천황의 칙명을 듣기위해 이사부가 석 달을 다다라원에서 기다리자

모야신과 왜국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3개월을 기다린 후 이사부의 군대는 금관국으로 들어간다.

 

왜국에 대해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게 된 금관국은 신라로 귀부하게 된다.

 

금관국은 광개토왕의 가야정벌이후 새롭게 재건되었지만

모야신이 거느린 소규모 부대마저 제압하지 못할 정도로 국력이 약했던 것이다.

 

 

 

- 탁순에 웅거한 모야신을 몰아내기 위해 백제와 신라에 청병하는 탁순왕,

  병력이 절반으로 줄자 이성을 잃은 백제장수

 

일본서기 계체 24년 9월(서기 532)

이때 아리사등(阿利斯等)은 (모야신이) 사소한 일에만 집착하고

약속한 바를 지키지 않음을 알고 빈번히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에 행적을 모두 알고 등을 돌릴 마음을 품었다.

 

드디어 구례사기모(久禮斯己母)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또 노수구리(奴須久利)를 백제에 사신으로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모야신(毛野臣)은 백제병(百濟兵)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배평(背評) [背評은 지명인데 또한 능비기부리(能備己富里)라고도 한다]에서

맞서 싸웠는데 (백제의) 사상자가 절반이 되었다.

 

백제는 노수구리(奴須久利)를 포로로 잡아 여러 가지 형구로 묶고

신라와 함께 성을 포위한 다음 아리사등(阿利斯等)을 꾸짓으며

“모야신(毛野臣)을 내어 놓으라.”고 하였다.

 

모야신은 성을 굳게 지키므로 사로잡을 수 없었다.

 

이에 두 나라는 유리한 지역을 점령하고 한 달간 머물다가, 성을 쌓고 돌아갔다.

 

이를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이라고 하였다.

 

(...) 같은 해, 모야신이 부름을 받아 대마(對馬)에 이르러 병에 걸려 죽었다.

 

 

 

이사부를 보고 도망간 모야신은 탁순의 배평(창원 성산패총 추정)에 웅거하고 있다. 

 

모야신의 부대를 몰아낼 수 없었던 탁순왕 아리사등은 백제와 신라에 청병한다. 

 

먼저 탁순에 도착한 백제군은 전공을 세우려는 욕심에

모야신이 웅거한 성을 공략한다.

 

그런데 백제는 이 과정에서 절반의 사상자를 내었다.

 

화가난 백제장군은 탁순의 백제 청병 사절인 노수구리를 형구에 묶은 후

신라와 함께 성을 포위하고 탁순왕 아리사등을 꾸짓으며

"모야신을 내어 놓으라"면서 소리친다.   

 

 

- 이성을 잃은 백제군이 돌아가자 신라로 귀부하는 탁순왕 아리사등

 

일본서기 계체 24년 10월(서기 532)

겨울 10월. 조길사가 임나로부터 돌아와서

"모야신은 사람됨이 오만하고 정사에도 익숙하지 못하여 포용하는 마음이 없어,

가라를 혼란케 하고 환란을 막지도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목협자를 보내어 불러 들였다. [목협자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같은 해, 모야신이 부름을 받아 대마(對馬)에 이르러 병에 걸려 죽었다

 

 

일본서기 흠명 5년 3월

신라가 봄에 탁순(卓淳)을 침공해서

구례산(久禮山)의 우리(백제) 수비병을 쫒아내고 마침내 점거해 버렸습니다.

 

 

일본서기 계체 25년 3월(서기 533) 

그 기록(백제본기)에서는 이해의 간지 신해 3월,

군사가 안라로 나아가 걸탁성을 쌓았다.

 

같은 달, 고구려는 그 왕 안(安)을 시해하였다. 

 

 

일본서기 흠명 2년 4월

탁순(卓淳)은 임금과 신하가 나뉘어 뿔뿔이 흩어져

왕 스스로가 귀부하려는 생각으로 신라에 내통하였다.

 

이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백제와 신라가 돌아갔다.

 

탁순국 또한 금관국 처럼 소규모의 왜군 부대 조차 감당할 수 없다.

 

탁순왕은 신라에 귀부한다.

 

 

 

- 1차 사비회의; 사비에 모인 가야 소국들 (541)

 

일본서기 흠명 2년 4월 (서기 541)

 

여름 4월에

안라(安羅)의 차한기(次旱岐) 이탄해(夷呑奚)·대불손(大不孫)·구취유리(久取柔利) 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

졸마한기(卒麻旱岐), 산반해한기(散半奚旱岐)의 자식,

다라(多羅)의 하한기(下旱岐) 이타(夷他), 사이기한기(斯二岐旱岐)의 자식,

자타한기(子他旱岐)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갈비신(吉備臣;키비노오미)

[이름이 빠졌다]이 백제(百濟)에 가서 함께 조서(詔勅)를 들었다.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일본 천황이 조를 내린 바는 오로지 임나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이제 어떤 계책으로 임나를 재건할 수 있겠는가.

모두 각자 충성을 다하여 천황의 뜻이 펼쳐지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임나의 한기들은

“이전에 두세 차례 신라와 의논하였으나 회답이 없었습니다.

의도하는 바를 다시 신라에 알린다고 해도 여전히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함께 사신을 천황에게 보내 보고해야 할 것입니다.

삼가 교지를 받드는 것에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하지만 임나의 국경이 신라와 접해있기 때문에 탁순 등이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등이라는 것은 탁기탄(?己呑), 가라(加羅)를 말한다.

탁순(卓淳) 등의 나라처럼 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명왕은

“옛날 우리 선조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의 치세 때에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 등이 처음 사신을 파견하여 통교하고

두텁고 친밀한 우호관계를 맺어 자제(子弟)가 되어 항상 번영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 신라에 속아 천황의 분노를 사고 임나의 원한을 산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후회하고 하부(下部) 중좌평(中佐平) 마로(麻鹵), 성방(城方)

갑배매노(甲背昧奴) 등을 보내어 가라(加羅)에 가서

임나의 일본부를 만나 서로 맹세하게 하였다.

 

이후 이 일을 계속 염두에 두어 임나를 세우는 계획을 조석으로 잊지 않았다.

 

지금 천황이 조를 내려 ‘속히 임나를 세워라’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그대들과 함께 모의하여 임나 등의 나라를 수립하고자 한다.

 

마땅히 잘 계획해야 한다.

 

또한 임나의 국경에 신라를 불러 조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묻겠다.

 

동시에 사자를 보내 천황에게 주상하여 삼가 교시를 받겠다.

 

만약 사자가 돌아오기 전에 신라가 틈을 엿보아 임나를 침공하면

나는 반드시 가서 구할 것이다.

 

걱정할 바 이로 말미암아 그대들과 함께 계책을 모의하여

任那 등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잘 생각하여야 한다.

 

또 任那의 경계에서 新羅를 불러, (조를) 받들 것인가의 여부를 물어야겠다.

 

함께 사신을 보내어 천황에 아뢰고 삼가 교시를 받들자. 걱정할 바가 못된다.

그러나 방비를 잘하고 조심하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그대들이 탁순 등이 화를 입은 것이 두렵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신라가 스스로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탁기탄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서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망한 것이다.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멸망한 것이다.

 

남가라는 땅이 협소하여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할 수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탁순은 임금과 신하가 나뉘어 뿔뿔이 흩어져

왕 스스로가 귀부하려는 생각으로 신라와 내통하였다. 이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삼국이 패망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옛날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여 임나와 백제를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 신라가 어찌 홀로 임나를 멸망시키겠는가?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힘을 함쳐 천황의 힘을 빌리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모두 기뻐하며 돌아갔다. 

 

 

538년에 사비(충남 부여)로 천도하고 국호를 南扶餘로 고치는 등 중흥을 꾀하여,

내외 관청을 22부로 확대하고 수도와 지방을 5부와 5방으로 정비하였다.

 

그는 이러한 통치체제 재정비를 토대로 삼아 적극적인 대외관계를 전개하였다.

 

그래서 백제는 541년에 양(梁)나라에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경의(涅槃經義) 및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을 청하고, 신라에 화해를 요청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백제는)가야연맹의 회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541년 4월과 544년 11월의 두 차례에 걸쳐

安羅(경남 함안), 加羅(경북 고령), 卒麻(경남 함양), 散半奚(합천군 초계면),

多羅(합천), 斯二岐(의령군 부림면), 子他(진주시), 久嗟(고성) 등

가야연맹 7~8개 소국의 旱岐 등이 백제 수도에 모였다.

 

제1차 사비회의에서 가야연맹의 사신단은

자신들의 독립 보장 및 신라의 공격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백제 성왕은

안이한 자세로 가야연맹 제국을 복속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에,

상호간의 구체적인 요구 사항이 잠복해 있는 상태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任那問題를 包含하여-/ 김태식)

 

 

금관국, 탁순국과는 달리 안라와 대가야는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춘 국가로 신라에 귀부하기에는 규모가 크다.

 

안라와 대가야는 나라를 유지하고자 했고 그 방책을 찾고 있었다.

 

그런 중 백제는 가야국들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기 위해 사비회의를 소집한다.

 

1차 사비회의에는 안라(함안)의 차한기(次旱岐)가

안라왜신관의 갈비신(吉備臣)을 대동하고 대마도의 한기(旱岐)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1차 사비회의에서 백제는 신라를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

그리고 가야국들이 어떤 식으로 독립을 유지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 2차 사비회의 (544) ; 독립을 보장해 주는 댓가로

  백제 군령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백제

 

일본서기 흠명 5년 (서기 544)

 

11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일본부의 신과 임나의 집사를 불러

 

"천황에게 보낸 나솔 문득과 허세 나솔 기마, 물부 나솔 가비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지금 일본부의 신과 임나국의 집사는 마땅이 와서 칙명을 듣고

함께 임나의 일을 협의하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길비신(吉備臣), 안라(安羅)의 하한기(下旱岐)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가라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 졸마군(卒麻君),

사이기군(斯二岐君), 산반해군(散半奚君)의 아들, 다라(多羅)의 이수위(二首位)

흘건지(訖乾智), 자타한기(子他旱岐), 구차한기(久嗟旱岐)가 백제에 이르렀다.

 

이에 백제의 성명왕이 조서의 개요를 알리며

 

“나는 나솔 미마사·나솔 기련·나솔 용기다 등을 일본에 보냈다.

 

그러자 (천황이) 조를 내려 ‘빨리 임나를 세우라’고 하였다.

 

또 진수련이 칙을 받들어 임나를 세웠는가에 대해서 물었다.

 

따라서 모두를 부른 것이다.

 

어찌하면 다시 임나를 세울 수가 있을 것인가. 각자의 계책을 말하도록 하라."

고 말하였다.

 

길비신, 임나한기 등이

 

"무릇 임나국을 세우는 것을 오로지 대왕에게 달려 있습니다.

대왕을 따라 함께 주상하여 칙을 듣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성명왕이

 

"임나국은 우리 백제와 예부터 지금까지 자제와 같이 되겠다고 약속하였다.

 

지금 일본부의 인기미를 임나에 보낸 것은 본래 그 나라를 침해하려 한 것이 아니다

[잘 알 수 없다.].

 

예부터 신라는 무도하다. 약속을 어기고 신의를 깨고 탁순을 멸망시켰다.

 

신뢰하는 나라로 사이좋게 지내려고 하면 오히려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를 불러 같이 은조(恩詔)를 받들어 임나국을 일으키고 계승시켜,

옛날과 같이 영원히 형제가 되기를 바란다.

 

듣건대 신라와 안라 양국의 국경지역에 큰강이 있는데 요해의 땅이라고 한다.

 

나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6성을 쌓으려 한다.

 

삼가 천황에게 3천 명의 병사를 요청하여 성마다 5백 명씩 두고,

이곳을 우리 병사와 함께 신라가 경작하는 것을 막으면

구례산의 5성은 자연히 무기를 버리고 항복할 것이다.

 

탁순국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요청한 병사에게는 내가 의복과 식량을 제공할 것이다.

 

이것이 천황에 주상하려는 첫번째 계책이다.

 

남한에 군령과 성주를 두는 것이

어찌 천황의 뜻을 거스르고 조공하는 길을 막는 것이 되겠는가.

 

오로지 바라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강적을 물리치는 것이다.

 

무릇 저 흉악한 무리는 누구와도 손잡으려 할 것이다.

 

북적(北適)은 강하고 우리나라는 미약하다.

 

만일 남한에 군령과 성주를 두어 수리하고 방어하지 않으면 이 강적을 막을 수가 없다.

 

또한 신라도 누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을 두어 신라를 공격하여 임나를 보존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않으면 아마 멸망하여 조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천황에 주상하고자 하는 두 번째 계책이다.

 

또 길비신, 하내직, 이나사, 마도가 계속 임나에 머문다면

천황이 임나를 세우라는 조를 내리더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바라건대 이 네 명을 이주시켜 각각 본읍(本邑)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이것이 천황에게 주상하려 하는 세 번째 계책이다.

 

일본의 신(臣)과 임나의 한기 등과 함께 사자를 보내 같이 천황에게 주상하여

조를 받들겠다고 청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길비신과 한기 등이

 

"대왕이 말씀하신 세 가지 계책은 우리의 마음과도 맞습니다.

 

지금 돌아가서 일본의 대신(大臣)[임나에 있는 일본부의 대신을 말한다.]과

안라왕과 가라왕에게 삼가 보고하고

함께 사신을 보내어 같이 천황에게 주상하겠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천재일우의 기회이니 심사숙고하여 계책을 세워야만 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3년 후에 열린 제2차 사비회의에서 백제 성왕은 세 가지 계책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1) 가야연맹 및 왜의 협조 아래 가야의 변경에 6성을 축조하여

이를 바탕으로 신라의 久禮山 5성을 쳐서 회복하고,

 

(2) 안라 중심의 독자 세력 추진 집단을 무력화시키며,

 

(3) 임나의  下韓 파견된 백제의 郡令과 城主는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성왕이 제시한 것은 가야 영토에 대한 점진적 침탈 정책에 지나지 않았으며

가야를 위한 양보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야연맹 집사들은 그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백제는 545년부터 3년에 걸쳐 문물 증여를 통해서 가야연맹의 마음을 달래고

왜국에 대해서도 백제 문물의 우수성을 입증시킴으로써,

그 대가로 기존의 세 가지 계책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백제와 가야연맹 제국 및 왜로 이어지는 외교-교역망이 구축되어,

546년에 왜는 말 70필과 배 10척을 보내고,

548년에는 왜 병사를 보내줄 것을 약속했다.

(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任那問題를 包含하여-/ 김태식)

 

 

 

성왕의 마스터플랜은 백제의 군령을 둔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구성하여

북적(고구려)를 물리치고 백제가 동맹국 신라를 배신한 후 신라를 누르는 것이다.

 

그리고 임나를 재건하는 것이 마지막 목표이다.

 

신라를 누르면 가야국들이 유지될 것이고

그 후에 가야국들의 유지는 성왕이 보장한다.

 

그러나 백제의 제안은 가야국들이 원하던 것은 아니었다.

 

가야국은 백제의 일원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야국들은 망설인다.

 

 

- 안라국의 요청으로 의해 독산성(마진성)을 침략한 고구려;

  가야세력의 독립이 실패하자 백제 군령을 따르게 된 가야국들 (548)

 

백제 성왕 26년(서기 548)

 

봄 정월, 고구려왕 평성(平成, 양원왕)이 예(濊)와 공모하여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해오자, 임금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朱珍)을 시켜

갑옷을 입은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출발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병사들과 일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

 

 

일본서기 흠명 9년

여름 4월 임술삭 갑자(3일)에 백제가 중부(中部) 간솔(杆率) 약엽례(掠葉禮) 등을 보내

 

“덕솔(德率) 선문(宣文)등이 칙을 받들어

신의 나라에 ‘구원병은 때에 맞춰 파견할 것이다.’라는 말을 전하였습니다.

 

삼가 은조(恩詔)를 받으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마진성(馬津城) 전투

「정월 신축(9일)에 고구려가 군사를 이끌고 마진성(馬津城)을 포위하였다.」에서

사로잡은 포로가‘안라국과 일본부가 (고구려를) 불러들여

(백제를) 정벌하기를 권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참으로 그럴 법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 불렀으나 모두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걱정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공하신 청황께서

「서번[西蕃]들은 일본 천황을 모두 황공하신 천황이라 칭한다.」

먼저 조사하여 주십시요.

요청한 원군을 참시 보류하시고 신의 보고를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상주하였다. 


 

 

(백제가 가야 연맹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자) 안라국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고구려에게 백제 정벌을 요청했다.

 

그러나 獨山城, 즉 馬津城(충남 예산군 예산읍) 전투가

신라의 참전으로 인하여 고구려의 패배로 끝나면서,

고구려와 안라 사이의 밀통이 발각되었다.

 

그러자 안라의 상층부는 백제에게 대항할 계책이 궁해져 무력화되었다.

 

결국 백제의 설득과 문물 증여에 따라 그 뜻이 관철되면서

550년을 전후하여 가야연맹은 백제에게 종속적으로 연합되었다.

 (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任那問題를 包含하여-/ 김태식)

 

 

가야를 계속 몰락시키는 신라에 대응하기 위해 백제에 기대를 걸었던 가야진영은

사비회의에서 백제에게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안라는 고구려와 밀약을 맺는다.

 

백제의 일원이 되어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 보다는

고구려의 일원이 되어 백제를 고립시키고

고구려로 부터 독립을 보장받는 편이 백제의 제안보다 나은 듯 했다. 

 

고구려는 안라의 요청으로 백제를 정벌한다.

 

하지만 고구려는 나제동맹에게 패하고 안라와 고구려의 밀약은 백제에게 발각되었다.

 

고구려, 신라, 왜국을 동맹으로 삼을 수 없자

가야국들은 하는 수 없이 백제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 가야국들이 백제 군령하에 놓이게 되자

  해체되는 안라왜신관(임나일본부) (550)

 

‘임나일본부’의 성격에 대해서는 크게 보아

任那支配說 4種과 外交交易說 4種으로 나뉜다.

 

이제 왜의 임나 지배를 논하던 전형적인 임나일본부설은

설득력을 상실하였다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관련 사료의 분석에 의하여,

‘임나일본부’는 4~5세기에는 존속하지 않았고 6세기에만 존재했다고 본다.

 

게다가 그 6세기의 ‘임나일본부’ 문제도

이제 백제사와 가야사를 배제하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 볼 때,

‘임나일본부’는 6세기 당시의 용어도 아니고

그릇된 선입견을 불러일으키는 용어이기 때문에,

보다 사실에 가까운 安羅倭臣館이라는 용어로 대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안라왜신관은

540년대에 가야연맹이 신라와 백제의 복속 압력을 받고 있던 시기에,

가야연맹의 제2인자였던 안라국이 자신의 王廷에 왜계 관료를 영입하여

왜국과의 대외관계를 주도함으로써,

안라를 중심으로 한 연맹 체제를 도모하기 위해 운영하였던

외무관서와 같은 성격의 기구였다.

 

그러나 550년을 전후하여,

이 기구는 상호간의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해가고 있던 백제와

왜 왕권의 불신임 속에 해체되었다.

(古代 王權의 成長과 韓日關係 -任那問題를 包含하여 / 김태식)

 

 

 

안라왜신관(임나일본부)는 안라국이 가야 독자 노선을 추구하기 위하여

540년대에 왜계 관료를 영입하여 설치한 기구이다.

 

그런데 마진성 전투이후 성왕의 마스터플랜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고

고구려가 제압되면 신라와 동맹관계를 끊은 후 신라를 공격하고

그를 통해 임나재건과 가야 유지를 달성.)이

백제-가야-왜국에 모두 관철되었으므로

안라왜신관(임나일본부)이 추구한 가야독자노선은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안라왜신관(임나일본부)은 마진성 전투에서 백제가 승리함으로써

550년을 전후하여 해체된다.

 

 

-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을 구성하여 옛 땅 6군을 회복하는 백제 (551)

 

일본서기 흠명 12년 (551)

이 해 백제 聖明王이 몸소 군사 및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두 나라는 新羅, 任那를 말한다) 高麗를 정벌하여 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

 

진흥왕 12년(서기 551)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ㆍ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을 시켜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가야가 백제의 군령을 따르게 되자

즉시 백제는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을 구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한다.

 

백제 연합군은 고구려를 쉽게 물리치고 한성과 평양(북한산성)을 장악한다.

 

백제-가야-왜가 북한산성까지 북진하자

신라는 기회를 놓지지 않고 죽령을 넘어 고현까지 진출하여 10군을 장악한다.


 

- 임나를 재건하려는 백제와 왜국의 계획을 확인하고

  고구려와의 동맹을 제안하는 신라 (552)

 

일본서기 흠명 14년(553)

8월 신묘삭 정유(7일)에 백제가 상부(上部) 나솔 과야신라(科野新羅) 와

하부(下部) 고덕(固德) 문휴대산(汶休帶山)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지난해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내신( 內臣) 덕솔 차주(次酒)와

임나의 대부(大夫) 등을 보내 바다 밖 여러 미이거(彌爾居)의 일을 아뢰고

엎드려 은조를 기다리기를 봄에 돋은 풀이 단비를 기다리듯 하였습니다.

 

올해 문득 듣자니 신라와 박국(貊國)이 통모하여

'백제와 임나가 자주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고 있다.

생각컨데 이것은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를 치려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나라의 패망을 발꿈치를 들고 기다리는 꼴이 된다.

일본의 군사가 출발하기 전에 안라를 공격해 빼앗고 일본에서 오는 길을 막자.'

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

 

 

삼국유사 진흥왕조

이에 앞서 백제는 신라와 군사를 합쳐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지만,

진흥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랄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였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서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서 이렇게 침범한 것이다.

 

 

 

백제의 마스터플랜은 2차 사비회의에서 공포되었다.

 

그것은 백제-가야-왜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몰아내면

신라를 동맹에서 떨궈내고 신라를 공격하겠다는 것이였다.

 

그리고 신라가 약화되면 임나를 재건하겠다는 것이였다.

 

일본서기(흥명 14년 8월조)를 보면

신라가 백제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가 고현까지 진출한 후 진흥왕은 구려와의 동맹을 제안한다.

 

고구려는 신라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 신주를 설치하는 신라 (553.7)

 

 

성왕 31년(서기 553)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신라가 신주를 설치하자 백제는 한수이북에 고립되었다.

 

전멸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복을 하고 후퇴하여야 한다.

 

<한성과 평양> 

 

 

- 평양(북한산성)에서 포위된 성왕,

신라에 항복하고 사비로 퇴각하는 백제 (553)

 

 

일본서기 흠명 13년 (553)

이 해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新羅의 牛頭方(우두방)·尼彌方(니미방)이다.

 

 

성왕 31년(서기 553)

겨울 10월, 임금의 딸이 신라로 시집 갔다.

 

 

 

북한산성에 고립된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에게 포위당했다.

 

백제는 항복하고 사비성으로 돌아간다.

   

 

 

- 3만(가야 2만, 백제 1만, 왜군 1천)으로 구성된 백제-가야-왜의 연합군

 

일본서기 흠명 15년 (서기 555)

"(...)올해의 싸움은 전에 없이 매우 위태로우니

보내주실 군사를 정월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내신이 명령을 받들어

 "바로 구원군 1천, 말 1백 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라고 대답하였다.

 

 

일본서기 흠명 15년 (서기 555)

 

죽사도(竹斯島) 근처에 있는 여러 군사들을 보내

신의 나라를 도와주시기를 엎드려 청합니다.

 

또한 임나를 도울 수 있다면 일은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주상하였다.

 

그리고 "신이 따로 군사 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은 정말 급해서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는 것입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554년 6월에 왜군 1,000명을 받아 12월 9일에 函山城,

즉 관산성을 공격하였고, 竹斯島의 왜군을 더 보내 임나를 도와주기를 바라며,

백제는 군사 10,000명을 보내 임나를 돕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전사한 29,600명 중에 18,600명 이상이 임나,

즉 가야의 군대이니, 관산성 전투의 주력부대가 가야군이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백제는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대부분을 가야인으로 구성하여

신라에 대한 공격에 나선 것이다.

 

이는 백제의 말대로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후고(後顧)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백제군을 더 투입하지 못하고 왜 군의 증원을 계속해서 요청했던 듯하다.

(5~6세기 高句麗와 加耶의 관계 / 김태식)

 

 

 

관산성 전투에 참여한 백제 부대의 수는 1만명이며 왜군의 숫자는 1천명이다.

 

따라서 18.600명 이상이 가야의 병력이다.

 

따라서 관산성 전투의 주요병력은 가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를 지원하는 고구려

 

 

양원왕 10년(554)

겨울에 백제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 관산성에서 전멸하는 3만명의 가야-백제-왜의 연합군

 

신라 진흥왕 15년(서기 554)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9천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관산성에서 가야 주력군 2만이 모두 죽었다.

 

이제 가야를 지켜낼 병력은 모두 사라졌다.

 

 

 

- 멸망하는 가야

 

일본서기 흠명 23년 (21년, 서기 560)

봄 정월 신라가 任那官家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어떤 책에서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任那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加羅國, 安羅國, 斯二岐國,

多羅國, 卒麻國, 古嵯國, 子他國, 散半下國, 乞?國, 稔禮國 등 모두 열 나라이다.]

 

 

- 가야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야주를 세우는 신라

 

신라 진흥왕 23년(서기 562)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檀門)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신라 진흥왕 26년(서기 565)

9월, 완산주를 없애고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였다. 

 

 

신라가 대야주를 세운다.

 

이로써 가야는 멸망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