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황제 10년(121년) 2월

 

<요광姚光>이 유주(幽州)로부터 쳐들어와

구리(丘利) 거수(渠帥) <후돌后突>을 죽였다.

 

<화직禾直>이 구하러 달려가서 크게 깨뜨리고,

<을어乙魚>는 그 대군(大軍)을 용도(甬道)로 끌어들여

험지에 매복하여 막아서 모두 죽였으며, 획득한 병장기와 마필이 무수히 많았다.

 

또 적산(赤山)에서 극성(棘城)으로 추격하여 성곽과 양초(糧草)를 불사르고,

생구(生口) 2천여 명을 사로잡아, 기능(技能)이 있는 자는 선별하여 직책을 주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인들은 장사들에게 첩으로 주었다.

 

4월 요수(遼隧)에서 <채풍蔡諷>을 친정(親征)하여 신성(新城)까지 싸웠으며,

그의 장수들 <경모耿芼>, <용단龍端>, <공손포公孫酺>, <손수孫壽> 등

140여 명을 베었다.

 

극성(棘城)의 동쪽이 우리 땅이 되었다.

 

<채풍>은 유주(幽州)로 도망하여, 다시는 감히 침입하지 않았다.

<고구려사초 태조황제기>

 

 

건광(建光) 원년 (A.D.121) 봄

 

유주자사 <풍환馮煥>과 현토태수 <요광姚光>과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예맥의 거수(渠師)를 붙잡아서 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빼앗았다.

 

<궁宮>은 이에 사자(嗣子, 후계자) <수성遂成>에게 군사 2천여 명을 보냈다.

 

<요광> 등을 만나 사신으로 보내어 항복했다고 사칭하니 <요광> 등이 믿었다.

 

<수성>이 험한 땅을 막아 점거하고 대군(大軍)을 차단하였으며,

몰래 3천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토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살상(殺傷)하였다.

 

〈혜동이 말히기를 “위지(魏志)는 후성(候城)을 불사르고

요수(遼隧)로 들어갔다라고 하고 후성은 현토군(元菟郡)에 속한다.”라고 하였으며,

선겸(先謙)은 말하기를 “관본(官本)에는 2천여 명이다.”라고 하였으니 바로잡았다.〉

 

이때부터 광양(廣陽),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탁군(涿郡)과 속국(屬國)에서

3천여 명의 기병을 출동시켜 함께 (요광 등을) 구원하였으나,

맥인(貊人)은 이미 돌아가 버렸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기사 발췌>

 

 

여름에 다시 요동(遼東)의 선비(鮮卑) 8천여 명과 함께

요수(遼隊)를 침공하여 관리와 민간인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채풍蔡諷> 등이 신창(新昌)에서 추격하다가 전몰(戰歿, 전사)하였다.

 

공조(功曹) <경모耿耗>와 병조연(兵曹掾)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蔡諷>을 호위하다가

모두 진중에서 죽으니, 죽은 사람이 백여 명이었다.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마한(馬韓)과 예맥(濊貊)의 군사 수천 기(騎)를 거느리고

현토를 포위하였다

〈혜동이 말하기를 “본기(本紀)에는 겨울 12월이다.”라고 하였다.〉

 

부여왕(夫餘王)이 아들 <위구태尉仇台>

〈혜동이 말하기를 “대(台)는 어떤 사서에는 치(治)라고 적혀있다”라고 하였다.〉

를 보내어 병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주군(州郡)과 함께 힘을 합하여 (궁을)쳐서 깨뜨리고, 5백여 명을 참수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기사 발췌>

 

 

<요광姚光>이 유주(幽州)로부터 쳐들어와

구리(丘利) 거수(渠帥) <후돌后突>을 죽이니

<화직禾直>과 <을어乙魚>가 요서의 극성(棘城)까지 쳐 들어가

요동태수 <채풍>을 죽이고

포로 2천여명을 사로잡아 요서 이동이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수(遼隊)는 양평의 남서쪽에 있다. 

 

 

 

 

<구리(丘利),용도(甬道),극성(棘城) 및 요수(遼隊)>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