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二月 姚光誘句麗渠帥屠利爲玄菟都尉 與卑離反賊尉仇台 謀復紫蒙故地

新置玄菟府于川西而居之

上親率馬韓盖馬軍一萬騎 而攻川西不克而還

박창화 필사본 <고구려사초>

 

태조항제10년(121) 12월,

 

요광(姚光)이 구려(勾麗) 거수 도리(屠利)를 꼬드겨 현도도위(玄菟都尉)로 삼고,

비리(卑離, 서부여) 반적(反賊) 위구태(尉仇台)와 함께

자몽(紫蒙, 선비)의 옛 땅을 회복하고자 모의하였다.

 

천서(川西)에 새로운 현도부(玄菟府)를 두어 살았다.

왕이 마한(馬韓), 개마(盖馬)의 1만 기병을 이끌고 천서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삼국사 고구려본기>

 

12월, 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시켜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 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대항케 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冬十二月 高句驪,馬韓,穢貊圍玄菟城

夫餘王遣子 與州郡並力討破之

<후한서> 後漢書 卷五 孝安帝紀 第五

 

12월 겨울, 고구려, 마한, 예맥 등이 현토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을 보내 주, 군과 함께 힘써 그들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121년 12월에 漢이 비리 위구태와 손잡고 천서에 새로운 현토부를 설치하고

고구려의 현토로 침공해 온다.

 

이때 고구려는 마한과 개마의 1만 기병을 이끌고 대항한다.

 

이때 동원 된 마한은 한반도로 이주하지않고 하북에 남아 있던 辰의 기병이다.

 

마한과 함께 漢에 대항한 개마의 기병을 삼국사기나 후한서는 예맥이라하였다.

 

즉, 예맥이 개마라는 말이다.

 

이 개마는 한반도의 개마고원과는 상관없는 의무려산에 거주하던 예맥이라는 것이다.

 

현토와 요동이 지금의 영정하와 난하 사이에 존재하였음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기사이다. 

 

서기121년 태조 10년 2월에 한나라의 요광(姚光)이라는 자가

고구려의 속령인 구리(丘利) 땅으로 쳐들어와 그 우두머리를 죽인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요광이라는 자는 한해 전에 고구려를 침공하였다가 패퇴하고

고구려에 귀순한 인물인데 이 자가 도망하여 유주자사 풍환(馮煥)과

요동태수 채풍(蔡諷)과 더불어 다시 고구려의 구리지역으로 쳐들어와

구리거수(丘利渠帥) 후돌(后突)을 죽이게 된다.

 

거수(渠帥)라는 말은 고구려의 제후국인 구리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말이다.

 

이 구리거수를 중국 측 기록에서는 예맥거수(穢貊渠帥)라 기록하였다.

 

즉, 예맥이 구리라는 말이다.

 

예맥이 개마이고 그리고 구리라는 것이다.

 

AD121년 태조10년 고구려는 2월에 漢을 [용도]와 [적산] 및 [극성]에서 크게 이긴 후

포로 2천여 명을 노획한 이후 4월에 다시 태조가 친정을 하여

요서의 [요수]와 [신성]에서 다시 대승을 거두고 [극성] 동쪽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

 

연이어 크게 혼이 난 한(漢)은 고구려의 태조가 죽었다는 오보(誤報)를 접하고

이를 이용해 공격하자는 주전파와 반대하는 주화파가 설전을 펼친다.

 

상황을 살피러 조문사절을 보내 부(簿)를 바치며 화친을 청하게 된다.

 

고구려의 신하들이 다들 간교한 한을 믿을 수 없으니 이들을 죽여 버리자고 하나

태조는 기꺼이 반겨주라 한다.

 

하지만 이들을 맞이한 이는 수성이었다.  

 

수성이 등후의 나이를 묻자, 사신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수성이 말하길 “옛날, 여후는 평성에서 허리띠를 풀어 모돈을 즐겁게 하였는데,

너희들은 어찌 ‘등만’이 나에게 허리띠를 풀게 하지 않아 어륙이 되려하는가?

만약 ‘우’(安帝)의 어미가 내 첩이 되지 않는다면 낙양은 잿더미가 될 것이니라.”하자,

사신들은 한참동안 멍하니 있다가 수성의 명을 받아들였다.

 

혼이 난 한(漢)이 이듬해 속전(贖錢)으로

어른은 비단 40필, 어린이는 그 반을 주고 포로를 돌려받은 것이다.

 

이 부끄러운 기록을 그들의 역사서에

“수성이 한의 포로를 돌려보내고 玄兎로 나와 항복하였다.” 라고 기록하였다.

 

전쟁에 승리한자가 포로를 풀어주며 항복을 하였다는 상식 밖의 기록을 하고

김부식은 중국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고구려의 패전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천서(川西)>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