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황제 11년 임술(AD122)

 

2월, 왕이 다시 마한(馬韓), 구다(勾茶), 개마(盖馬) 3국의 군대를 이끌고

천서(川西)와 구려(勾麗)를 쳐서 빼앗았다.

 

<요광姚光>은 도주하다가 자기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위)구태는 서자몽(西紫蒙)으로 피하여 들어가 서부여(西扶余)로 자칭하였으나,

후에 우문(宇文)에게 쫓겨났다.

 

4월 태보 <마락麻楽 54-122>이 죽었다. 나이 69살이었다.

 

아버지 비리왕(卑離王) <의록義鹿>은 <마리摩離>의 아들이다.

 

대무신(大武神)의 딸 <도都>공주에게 장가들어 (마)락을 낳았다.

 

배에는 삼성(三星)의 붉은 문양이 있었다.

 

날래고 용감하여 전쟁에 뛰어나니 여러 번 큰 공을 세우고 (삼)보의 지위에 올랐다.

 

대신(大臣)이 되어 다스림에는 몸소 대사(大事)를 잘 결정하였으니

가히 현명한 재상이라 칭송할 만하였다.

 

그러나 부녀자를 다스림에는 엄하지 아니하여,

시신이 식기도 전에 처와 딸이 달아났다. 사람들이 가여워하였다.

 

<송두지松豆智>를 태보, <을포乙布>를 좌보, <수성遂成>을 우보,

<우혁羽弈>을 대주부, <상온尙溫>을 대평자, <상잠尙岑>을 마장군,

<상번尙蕃>을 전중조의〈사인〉로 삼았다.

<고구려사초 태조황제기>

 

 

태조황제 15년 병인(AD126) 2월 7일

 

<마락麻楽>의 처 오씨(烏氏)가 <목숭穆崇>의 아들 <정靖>을 낳고

마락의 아들로 삼아 달라고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상온尙溫>의 딸 <은화銀花>를 부후로 삼았는데,

<은화銀花>는 <천화天花>의 여동생이다.

 

 

 

121년 12월에 비리(卑離)의 위구태(尉仇台)가 반란하였고,

122년 4월에 태보 마락(麻楽)이 죽었는데 그는 비리왕 의록(義鹿)의 아들이었으며,

그가 죽자 처와 딸들이 도망쳤다고 하였다.

 

그리고 위의 기사에서는

마락의 처 오씨(烏氏)가 남의 씨앗을 마락의 아들로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마락(麻楽)의 아내와 딸들이

마락이 죽기가 무섭게 도망쳐야 했던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락은 신명선제에게는 특별한 공이 있었고,

국조왕 재위 기에도 삼보(三輔)의 지위에 있었다.

 

공신이 죽으면 그 부인들에게 지금의 연금에 해당하는 연곡(年穀)을 내리고,

적자(嫡子)에게는 벼슬을 내리며,

유산 관리권 등 기득권을 챙기기 마련인데

모든 것을 버려두고 도망간 연유는 무엇일까?

 

혹시 위구태(尉仇台)가 마락(麻楽)의 적자(嫡子)는 아니었을까?

 

마락(麻楽)이 죽자, 나라에서 저죄(抵罪)할 것을 두려워하여 달아나고

오씨(烏氏)만이 남아 목숭(穆崇)에게 재가하여 아들을 낳고,

마락(麻楽)의 제사라도 지낼 수 있게 허락하기를 청한 것은 아닐까?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