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9년 봄 3월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어찌된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가보니 그 곳에는 나무 가지에 금빛나는 작은 상자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보고하였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 상자를 가져와 열게 하였다.

 

그 속에는 어린 사내 아이가 들어 있었고, 그 아이는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

 

왕이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을 알지라고 하였다.

 

그는 금빛이 나는 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부르고, 이를 국호로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왕 9년은 115년이다.

김알지(94-155)는 94년생이다.

 

김일제의 후손인 호공의 아들 알지가

탈해왕 9년(115년)에 탈해의 손녀 阿婁(麻貞夫人)와 결혼하여

신라 김씨의 시조가 되고 이 무렵 신라는 대륙의 산동반도에서 한반도로 이동하여

국호를 계림이라고 하였다.

 

126년 탈해는 유리왕의 아들인 파사에게 양위하고 물러난다.

 

이때 탈해는 81세이고 파사는 37세이다.

 

 

 

 파사의 가계도

 

2.남해(28-84) = 雲梯(36-108)

     재위64-83 |

                阿利(73-133) = 大盧    = 3.유리(46-107)              許婁(80-155)

                                    |           | 재위84-106                       |

                      日知(87-129)  5.婆娑(90-158) = 阿惠(83-136) = 史省(100-173)

                                            재위126-158 |                     |

                                                            德公(120- )       道生(122-174)

                                                                               6.祇摩(131-191)

                                                                                 재위159-191

 

 

 탈해의 가계도

 

다파나君 = 聖帝                                                        萬公 = 月堂

             |                                                                       |

4. 탈해(46-130) = 毛施                                                 = 今堂 = 아효

    재위 107-125                                                        |         |

                    仇鄒 = 未生(祇摩의 누이)                        紇古    阿惠(83-136)

                           |

                        昔鄒(155-209) = 只珍內禮(150-212)

                                            |

                                       9. 伐休(189-256)

                                          재위 244-256

 

 

 

 

※ 참고 <神國과 二聖의 나라 新羅>

 

 

신라의 왕과 왕후는 神으로 여겨졌다.

 

신라의 왕은 神帝이고 왕후는 神后이다.

 

 

有羅之新 故曰新羅

<박창화 필사본 내물대성신제기>

 

 

羅井이 새로이 세워졌기에 新羅라고 하였다.

 

羅井은 신라 시조 혁거세가 태어난 곳이다.

 

天神(혁서거)과 仙桃(파소) 사이에 태어난 이가 바로 혁거세(BC5-66)이다.

 

혁거세는 AD8년 진한{산동반도}에서 사로국의 왕으로 추대된다.

 

AD12년에 알영과 혼인하게 되니 二聖이라 하여

남왕과 여왕이 공동으로 다스리게 된다.

 

신라는 남왕보다 여왕의 권력이 강할 때가 더 많았기 때문에 여왕의 나라였다.

 

신라는 神의 나라 神國이며, 仙道의 나라였고 二聖의 나라였다.

 

神國의 道는 神(왕)의 혈통을 중시하여 모계중심이 되는 근친혼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근친혼은 天孫임을 자부한 우리 민족의 고대 풍습이었고

이러한 풍습은 고려시대 초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남편이 죽은 여자가 남편 가문의 남자에게 승계되듯이 재가하는 혼인,

즉 繼母를 아내로 삼는 수계혼(收繼婚)과

형수나 제수를 아내로 삼는 것을 수혼(嫂婚)이라한다.

 

남편의 형제 또는 남편의 아들 가운데 자신이 낳지 않은 아들에게 계승된다. 

 

이런 혼인관계는 결혼을 가문 대 가문으로 보는 관념이 크게 작용해서

남편이 죽었다고 친정으로 돌아오지는 않고 그 가문에서 생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또, 남편이 죽어서 남긴 재산이 여자에게 상속됐다가 다른 가문으로 시집가면 

재산이 가문 밖으로 이탈하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도 있었다.

 

또한 생존 환경이 척박한 북방의 초원과 사막에서

남편이 죽은 여자의 삶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당의 측천무후도 태종이 죽자 태종의 아들인 고종에게 재가하였다.

 

측천무후가 죽은 남편의 배다른 아들의 후궁으로 들어간 것은 수계혼의 흔적이고,

아들의 후궁으로 들어간 다음 본부인 자리까지 꿰찬 것은 치열한 정쟁의 결과이다.

 

이런 수계혼 이외에 약탈혼도 유목사회에서는 혼인형태의 하나였다.

 

예수게이는 타 부족의 후엘룬을 납치하여 결혼하여 징기스칸을 낳았다.

 

신라는 聖骨과 眞骨만이 모든 권력을 독차지한 신분주의 사회였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한 族內 혼인으로 유지되었다.

 

성골 진골은 근친결혼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신당서 신라전에는

 

‘兄弟女 姑姨 從姉妹, 皆聘爲妻, 王族爲第一骨, 妻亦其族, 生子皆爲第一族’

이라고 하였다.

 

신라에서는 ‘형제의 딸, 부모의 자매, 사촌자매를 모두 처로 맞아들이며,

왕족은 제1골이고 그 처도 같은 친족이며, 그 자식도 모두 제1족이 된다.’는 것이다.

 

신라 지배층의 이와 같은 극단적인 순혈주의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만들어진 흉노의 관습으로부터 이어져 왔다.

 

이것이 불교와 유교의 윤리에 물들기 전의 고대인의 삶이었고 풍습이었다.

 

여자는 삼종지도(三從之道)라 하여

아버지와 지아비 그리고 아들의 자식을 낳는 것조차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지금의 잣대를 들이대어 고대의 풍습을 잴 수는 없는 것이다.

 

 

群臣献 太平萬壽 金冠大冕 袞龍仙袍 于王及天宮 以賀二聖治國 太平萬壽

又獻銅馬宝玩 于勝殿 于淨凰 于般惠 以賀螽斯振振 金枝玉葉

王乃宴群臣 于真宮聖堂 夜深而罷 

<박창화 필사본[소지명왕기]>

 

 

소지 14년 (492년)

 

신하들이 태평만수 금관대면(金冠大冕)과 곤룡선포(袞龍仙袍)를 왕과 천궁에게 바쳐,

二聖이 나라를 다스려 태평만수하는 것을 하례 드렸다.

 

또 동마보완(銅馬宝玩)을 <승전勝殿>, <정황淨凰>, <반혜般惠>에게 바쳐

귀한 자손들이 번성함을 하례 드렸다.

 

왕이 이에 진궁성당(真宮聖堂)에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열고

늦은 밤이 되어서 파하였다. 

 

여기에서 二聖은 소지명왕과 후황(厚凰)을 일컫는 것이다.

 

소지명왕은 초기에는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이후 후황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지도로를 부군(副君)으로 세우게 된다.

 

 

古有簾政 帷詔朕當大柄 先奉母帝

冝爾群臣 體朕之孝 事我二聖 可也

乃奉后于玉座而上坤天大帝法興妙王之號

受傳國璋宝于帝 群臣亦山呼萬歲

命大書郞好知阿飡採二聖當國節目 上之

翌年七月 老帝崩

天后迎帝行祥 于凉宮 卽位于真宮 

<박창화 필사본[금천대제 법흥진왕기]> 

 

 

전부터 수렴청정을 하시고 휘장 속에서 조서를 내려 짐이 대권을 맡게 되었으니,

먼저 모제(母帝)를 받들어 모신다.

 

너희 신하들은 짐의 효를 생각하여, 우리 二聖을 마땅히 섬겨야 하느니라. 

 

이에 후를 옥좌에 모시고 곤천대제(坤天大帝) 법흥묘왕(法興妙王)의 호를 올렸다.

 

전국장보(傳國璋宝)를 제(帝)에게서 받으니, 신하들이 또 산호만세를 하였다.

 

대서랑 <호지好知> 아찬에게 명하여

이성당국절목(二聖當國節目)을 수집하여 올리라 하였다.

 

이듬해 7월, 노제(老帝){지증}가 붕어하였다.

 

천후(天后) 영제(迎帝)가 량궁(凉宮)에서 행상하고 진궁(真宮)에서 즉위하였다.

 

 

서기 513년,지증대제 14년,

천후인 <영제>가 <지증>을 물러나게 하고,

아들인 모진(법흥왕)에게 실질적인 제(남왕)의 지위를 부여하는 기록이다. 

 

지증대제는 이듬해 514년에 붕어하고, 법흥왕이 즉위한다.

 

당시 신라의 二聖은 남왕인 금천대제 법흥진왕(金天大帝法興眞王) <모진>과,

여왕인 곤천대제 법흥묘왕(坤天大帝法興妙王) <영제>였다. 

 

二聖, 즉 남왕과 여왕의 통치체제는

신라를 비롯한 가야 및 주변 소국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남왕의 체제를 대체로 유지하였다.

 

신라만이 여왕의 체제를 고집하는데 대하여 반발도 있었다.

 

이 여왕 중심의 통치체제를 처음으로 바꾸고자 시도한 왕이 바로 실성이사금이다.

 

그는 고구려에 볼모로 있을 때에 고구려와 같은 강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五月 帝謂保反曰 句麗之冨强無他也 政在于男子也

我國貴骨母政多出婦人之手 不能强也

我爲爾夫 爾與我一體也自今使我爲政 當似如句麗之强也

保反曰 汝若在我何事不從乎 自今任汝爲之也

於是 帝大更舊制多設新官 宗臣多不便之 

<박창화 필사본[실성기]>

 

 

(402년) 5월, 제가 <보반保反>에게 말하기를

 

“고구려가 부강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남자가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인데,

우리나라는 골모를 존중하여 정사가 대부분 부인의 손에서 나오기 때문에

강해질 수가 없다. 내가 그대의 남편이 되었으니 너와 나는 한 몸이라.

지금부터 나로 하여금 정사를 하게 한다면 당연히 고구려처럼 강해질 것이다.”

 

보반이 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보살펴준다면, 무슨 일이든 따르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는 그리하도록 너에게 맡길 것이다.”

 

그리하여 제가 옛 제도를 크게 바꾸어 새로운 관리들을 두게 되니,

많은 종신들이 이를 불편해하였다.

 

 

고구려와 백제는 왕족이 퉁구스(몽골)계, 당과 신라는 스키타이 투르크(흉노)계이다.

 

나당연합과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은 투르크계와 퉁구스계의 민족전쟁이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