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황제 21년 임신(AD132)

 

정월 <호화芦花 49-132>태후가 춘추 84세로 죽었다.

 

신장은 8척에 체중도 130근이었고, 상대를 겁주는 힘도 있었고 창과 칼도 잘 썼다.

 

모본(慕本) 초에 부황(夫皇) 재사(再思)대왕을 따라가

부여(扶余)내란을 평정한 공이 있었다.

 

선제(仙帝)시절엔 나라의 큰 일들이 (태)후에게서 결정되었다.

 

왕의 즉위 초엔 또한 태보의 자리에 있었는데,

용기 있는 결단으로 어려운 일을 능숙하게 처결하였다.

 

(정사의) 큰 틀을 알고 일에 요점을 꿰었다.

 

죽음에 임하여 근심(勤心)하며,

<수성遂成 71-165>과 서로 전하게 하여 우애를 도탑게 하라하였다.

 

또 <천화天花(104-180)>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원화(源花)는 <수성>과 공유함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인륜이 무너지고, 정치가 잘못되게 되었다.

 

상후(尙后=天花)가 아들 <춘고春固>를 낳았다.

 

<수성遂成>이 태보, <우혁羽弈>이 좌보, <화직禾直>이 우보가 되었다.

 

후(后)는 부여(扶余)의 태사(太師) <왕문王文>의 딸이고,

어머니 <고야高耶>부인은 부여왕 <대소帶素>의 딸이다.

 

<대무(大武)>가 부여를 쳐서 <대소>를 베었을 때,

<고야>가 <왕문>의 처로 또한 전쟁에 나아갔다.

 

<대무>가 사로잡아 사사로운 욕심을 채웠다.

 

<고야>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잠자는 틈을 엿보며

(칼로) 찌르려고 하였으나 발각되었다.

 

군신들이 <고야>를 베라고 청하였으나,

<대무>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한 것은 가히 상줄 만하다.

 

또 내가 동침할 때 죽이기로 약조하였으니 그녀를 죽이는 것은 어질지 못하다.”

라고 하였다.

 

이에 명으로 부여의 군영으로 돌아가 적을 타일러서 항복하라 하였다.

 

<고야>가 돌아가서, 그 남편과 함께 우리군의 허실을 모두 말하니,

적의 무리가 모두 와서 (대무의 군영을) 둘러쌌다.

 

<대무>가 안개를 타고 벗어나 도망가니,

그런 연유로 <왕문>은 (부여의) 인심을 거두어들일 수 없었다.

 

나라(부여)가 넷으로 나뉘어져, 갈사왕(曷思王)이 갈사에서 서고,

락기왕(絡奇王)은 나라를 들어 우리에게 항복해 왔다.

 

(대무) 24년(A.D.51) <왕문>이 죽자,

그 부하들이 또 서로 다투며 <고야>를 취하고자 난을 일으켰다.

 

<고야>는 그녀의 신하 <부담富覃>을 사랑하였고,

상태등(上太等) <가순加順>이 <부담>과 싸워 패하자 구함을 요청하였다.

 

왕이 <송보松宝>와 <락기絡奇>를 보내 <부담富覃>을 깨뜨렸다.

 

후에 <재사再思>대왕 또한 종군(從軍)하였는데,

<호화芦花>의 나이 스물이고, 거모(渠母, 대모)의 풍치가 있었으며,

용감하며 창(槍)에 능하였다. 재사가 사로잡아, 예로써 서로 공경하였다.

 

<고야> 또한 <송보>에게 사로잡히는 바가 있었다.

 

또한 후의 예로 대우하여 돌려보냈다.

 

<대무>가 <고야>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너를 나의 처로 삼아, 나라를 새로이 하고,

남편을 새로이 하여 아들을 낳음이 마땅하고,

그 세상은 어찌 이와 같음이 있겠느냐?

 

너의 부왕이 나의 부왕을 누차로 괴롭히고, 우리들을 업신여겨 우리를 침략해오니,

그런 연유로 우리가 부득이 너희들을 친 것이다.

 

본래 너의 아버지를 죽일 의도는 없었으나,

너의 아버지가 진흙탕에 빠져 <괴유(怪由)>에게 베임을 당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이기도 하다.

 

지금 <괴유>가 이미 죽었으니, 너는 나의 처가 됨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고야>가 그것이 천명(天命)임을 알고 잠자리를 올렸다.

 

<호화> 또한 기뻐하며, <재사>와 부부가 되어,

국조(國祖) <궁宮>, <수성遂成>, <익翊>태자의 비 <유楡>씨,

<주문朱文>의 처 <훤萱>씨, <마락麻樂>의 처 <양楊>씨와 여러 공주를 낳았다.

 

국조왕이 즉위하자 정사를 총괄 집정하였고, 친히 군사를 사열하였으며,

그 무예를 살펴보고, 병사 10만을 양성하여,

장차 한(漢)과 서부여(西扶余)의 여러 나라를 치려하였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무예를 단련하고,

그러한 후에 또한 선도(仙道)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황(仙皇)과 매년 여름에 태백산(太伯山)에 이르러 기운을 기르고,

공부를 새로이 하여 돌아왔다.

 

을축(乙丑, A.D.125)년 <고야>가 죽자, <호화>가 애통해하며 자신을 상하게 하였다.

 

사신을 갈사국(曷思國)에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며 말하기를

 

“나의 남편과 나의 어머니가 모두 죽고, 나 또한 늙었으니,

내가 죽으면 누가 다시 너희들을 감싸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도두都頭>로 하여금 와서 항복하게 하였다(AD.128.8).

 

앞서 다시 부여로 행차하여 <대소>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며 말하기를

 

“천지의 이원(理元, 다스림의 근원)은 원망함이 없는 것이고,

다만 업과(業果, 前世에 지은 악업을 갚음)가 있는 것이다.

<대무>는 이미 죽었고, 손(녀)가 남모(南母, 고구려의 황후)가 되어 천하를 거느리니

조상들에게 흠향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송(松)씨와 락(絡)씨 2씨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임신(壬申)년 정월(AD.132.1)에 호화궁(芦花宮)에서 죽었다.

 

춘추 84세였고, 신장은 8척, 무게는 130근이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