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황제 35년 병술(A.D.146)

 

7월 <수성遂成>과 그 일당 <미유彌儒> 등이 왜산(倭山)에서 폐립을 의논하였다.

 

의로운 신하가 간하여 말하길;

 

“전하(殿下)께서는 효순(孝順, 효행하고 유순함)하시어 왕을 섬기지 오래입니다.

 

지금 나이 드셔 변심한다면 불충하게 되오니,

청컨대 안분(安分,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킴)하며 기다리십시오.”라고 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그를 죽이려 했다.

 

수성이 말하기를

 

“직간(直諫)함이 약(薬)이로다.

또한 이와 같이 불가하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10월에 <고복장>이 왕에게 수성을 베라고 권하였으나,

 

왕께서 이르기를

 

“형제간에 서로 죽이는 일은 옳지 않소.

내가 장차 선위(禅位)를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고)복장>이 <수성>은 어질지 못하니,

나라를 맡기는 것은 불가하며 재앙을 남겨주게 된다고 하였다.

 

대방(帶方)이 반란하여, <을어乙魚>가 대방태수 <유호劉虎>를 공격하여 목을 베니,

나머지 무리들은 두려워 굴복하였다.

 

12월 왕이 <수성遂成>에게 선위하고,

골천(鶻川) 별궁(別宮)으로 물러났는데, 춘추 79세였다.

 

수성이 난궁(鸞宮){서도西都}에서 즉위하였다.

 

상후(尙后)를 중궁황후로, <우羽>공주를 좌궁황후로,

<송기松奇>의 딸 <황룡黃竜>을 우궁황후로 하였다.

 

송기를 우보로 하였다.

<고구려사초>

 

 

이 당시 대방과 낙랑 및 현도는 고구려와 漢의 접경지역으로 양국의 정세에 따라

서로 태수를 임명하여 항상 분쟁이 일어나는 지역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帝名<遂成>, <太祖>之胞弟也. 勇而有威秉軍.

立功(雖)多, 性嗜淫虐好酒. 脅太祖讓位得立.

 

제의 휘는 <수성>으로 태조의 동복아우이다.

 

용감하고 위엄 있어 군권을 장악하였다.

 

세운 공이 많지만, 성품이 음란하고 포악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였다.

 

태조를 위협하여 양위 받고 제위에 올랐다.

 

 

이때 수성의 나이 76세이다.

 

 

※ 수성왕 천도 교서 (八稜碣石)

 

始祖之孫日月之子承故夫余故邑 遂成王十年 東西南北殊

繼明帝逐多护寧東百殊司吏玄菟 定邑都沸流 安久泰長歲禮樂

以百濟高句麗殊 代天府繼祖鄒牟王意 民泰國安

百殊心意□□年功 建國都玄菟郡 紒継...

 

시조지손 일월지자 부여고읍의 계승자

수성왕 10년(서기155년), 동서남북수는,

현도를 다스리는 호영동백수사리 현도로서

비류에 도읍했던 유리명제 축다(수성왕의조부)를 계승하여,

안구태장세 예악하고

백제, 고구려왕은 추모왕의 뜻을 대신하여 민태국안 한다.

백수(수성왕)는 (수십)년 공을 들여

현도군에 국도(=신국성新國城 =불내성)를 다시 세운다.

 

 

수(殊)는 지방단위인 군국의 읍장으로서 왕(王)에 해당한다.

 

백수(百殊)는 왕들의 왕인 태왕, 즉 황제격이다.

 

유리왕계는 고주몽계와 다르다. {유리왕은 계루부 주몽은 순노부}

 

수성왕은 중국의 책봉을 받은 유리왕 축다(逐多)를 명제로 기록하고

고주몽을 추모왕으로 한급 낮게 기록하여서

유리왕계와 주몽계의 깊은 알력을 시사한다.

 

유리왕이 고주몽의 사당을 세우지 않은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는 예씨 부인의 소생은 맞지만 부친은 고주몽이 아니라

졸본부여의 마지막 단제 고무서{解存} 유복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유리왕의 다른 이름은 유류(孺留)라고도 했는데,

젖먹이 때에 고주몽에게 모후를 빼앗기고 혼자 졸본부여에 남겨졌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수성왕이 현도성에 국도(신국성)를 세웠다.

 

그 후 백고가 신국성에 살아서 신대왕이라 불리운 것이 된다.

 

그러나 발기왕자의 난으로 인하여 요동국 공손도와 공손강에게 불탔으며

산상왕이 지금의 조양에 환도성을 다시 세워 천도하니 

[삼국지]에서 갱작신국(更作新國)했다고 하였다.

 

 

팔릉갈석

 

청나라 선종 도광제의 도광년간(1821-1850년)에

심양시 북쪽 철령시 창도현 팔면성에서 처음 발견되어

그 지역을 팔면성이라고 이름하였다.

 

정팔면릉체로서 높이는 39cm, 직경은 35cm이고 글자는 해석이 모호하다고 하였다.

 

팔면성은 요나라 때 한주(韓州), 금나라 때 한주의 유하현이 있었고,

단군상이 남아 있어서 금나라인 왕적이 단군상에 공양을 드렸고,

큰 석불이 지난 문혁 때 파괴되었으며, 발해 때는 안원부 녕주(寧州)였다

 

수성왕 10년(155년)에 현토성(불내성)으로 천도하였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