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마왕 10년(168년)

 

4월, 야인(野人) <가을加乙>과 <오고五古> 등이 <후복厚福>太子의 명이라 하며,

우리의 선박을 빼앗았다.

 

<흔련昕連>은 (그들을) 포박하여 바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야인(野人)들이 많이 도착하였으나,

모두 <흔련昕連>에게 패배 당하였다.

 

 

남당유고는 일본열도에서 건너 온 사람을 야인(野人) 이라 하고,

한반도 남부 해상세력을 왜인(倭人)으로 구분하였다.

 

 

 

※ 참고 <신라와 가야, 왜(한반도남부 해상세력 및 일본열도 세력)의 전쟁사>

 

 

- 부산과 울산을 점령하는 석탈해, 대마도를 탈환하는 왜(123년)

 

 

<거도(居道)>는 그의 가계와 성씨가 전하지 않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탈해 이사금 때에 벼슬하여 간(干)이 되었다.

 

그때,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이 국경의 이웃에 끼어 있어서

자못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는데,

<거도>가 변경의 지방관이 되어 그 곳을 병합할 생각을 품었다.

 

매년 한 번씩 여러 말들을 장토(張吐) 들판에 모아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유희 놀이를 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놀이를 ‘마기(馬技)’라 불렀다.

 

[군사를 동원하였을 때] 두 나라 사람들이 자주 보아 왔으므로

신라의 평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이에 [거도는] 병마를 출동하여 불의에 쳐들어가 두 나라를 멸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거도(居道)전>

 

 

 

 

탈해 이사금 17년(73)

 

왜인이 목출도(木出島)에 침입하였다.

 

왕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그들을 방어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羽烏>는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탈해5년(111년) 대륙신라는 경주로 이동하여 115년에 계림국을 세운다.

 

탈해 때에 울산과 부산, 대마도를 정벌한다.

 

탈해17년(123년) 왜가 대마도를 탈환한다.

 

신라는 왜에게 대마도를 다시 뺐겼지만 부산은 지켜내었을 것이다.

 

한동안 왜의 신라공격이 사라졌다.

 

 

* 거칠산국 :  동래군의 옛 명칭.

                  신라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쳐 지금까지 그대로 쓰고 있다.

                  동래라는 명칭은 옛 독로국의 '독로'라는 음이 '독내','독나'로 바뀌고

                  다시 '동내'로 읽히다 동래로 자리 잡았을 거라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은 거칠산국의 다른 이름인 장산국이나 내산국의 이름이

                  '거침'을 의미하므로 거친 산인 황령산의 동쪽에 위치해

                  동래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 목출국은 대마도로 추정된다.

 

* 우시산국은 울산으로 추정된다. (웃산 -> 울산)

 

 

 

 

- 부산이 왜의 신라 침략의 전초기지가 되는 이유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은 항상 부산을 점령한다.

 

부산은 해안선을 따라 형성되었고 북쪽은 산으로 가로막혀 있어

한번 점령하면 육로로는 공략하기 어려운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시기의 왜가 신라의 해안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대마도와 부산을 점령하고 있어야만 한다.

 

 

 

- 가야와의 국경인 양산에 가소성과 마두성을 쌓는 신라(137년)

 

파사 이사금 8년(87)

 

가을 7월에 영(令)을 내려 말하였다.

 

"나는 덕이 없으면서도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여 있고 남쪽은 가야와 연접해 있다.

[나의] 덕은 능히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이웃 나라를]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니

마땅히 성루(城壘)를 수리하여 침입에 대비하라!"

 

이 달에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의 두 성을 쌓았다.

<삼국사기> 

 

 

파사왕 12년(AD137년)

 

5월, 금관가야(金官加耶)와 월나(月奈)등 7국이 亂을 일으켰다.

 

<길문吉門(93?-152)>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아,

그들을 토평(討平)시켰다.

 

<길문(93?-152)>은 <하루>와 <장씨>의 아들이다.

 

 

7월, <발량發良>과 <백마白馬>에게 명하여

가소성(加召城)마두성(馬頭城)을 쌓도록 하였다.

 

<발량>과 <백마(100?-160)>는 <봉모>와 <산제>의 아들이다.

 

 

상은 <마제摩帝(90?-159)>에게 말하기를

 

 

“짐이 덕이 적은데도 나라를 맡아 위엄이 없고,

 

부여(扶余)와 가야(加耶)는 갈수록 더욱 창궐(猖獗)하여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라고 하였다.

 

 

<마제摩帝>가 말하기를

 

 

“臣의 어리석은 계략은 색(色)을 통(通)해서 서로 친하게 지내,

 

기지(機智)로서 그들을 제어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상은 이를 옳다고 하였다.

 

<마제(90?-159)>는 <월복>과 <홍제>의 아들이다.

 

 

11월, <백자白子>를 마두성주(馬頭城主)로,

 

<거문車門>을 가소성주(加召城主)로 삼았고, 벼슬 1급을 더하였다.

<남당유고 신라사초>

 

<거문>은 <길문>의 친형이다.

 

 

신라는 탈해(46-130) 9년(115년)에 경주로,

가야는 김일제의 후손 정견正見(100?-158)이 120년에 고령으로

백제는 C왕이 126년에 한강 남쪽으로 이동 해

한반도의 소국을 점령하며 세력을 키워나간다.

 

137년은 백제의 C왕이 죽고 기루왕(110-167)이 즉위한 해이며,

수로가 금관가야를 건국하기 5년 전이다.

 

 

파사왕은 137년에 양산의 말머리에 마두성(馬頭城)을 쌓고

말머리성 배후기지로 가소성(加召城)을 쌓아 가야의 국경침입에 대비한다.

 

 

* 마두성 : 양산 북부동 산성. 양산 말머리의 입구에 있는 성이다.

 

* 가소성 : 양산 신기리 산성. 말머리성의 후위에 있는 성이다.

 

 

 

<가소성과 마두성>

 

 

- 부산을 병합하고 가야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신라(140년)

 

 

탈해 이사금 21년(77)

 

가을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가야(加耶) 군사와 황산진(黃山津) 어구에서 싸워

1천여 명을 목베었으므로 길문을 파진찬으로 삼아 공로를 포상하였다.

 

파사이사금15년(94)

 

봄 2월에 가야의 적(賊)이 마두성(馬頭城)을 포위하였으므로

아찬 길원을 보내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가서 공격하여 쫓았다.

가을 8월에 알천(閼川)에서 군사를 사열하였다.


 

파사이사금 17년(96)

 

가을 7월에 폭풍이 남쪽에서 불어 금성 남쪽의 큰 나무가 뽑혔다.

9월에 가야인이 남쪽 변경을 습격하였으므로

가성주(加城主) 장세(長世)를 보내 막게 하였으나 적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왕이 분노하여 용맹한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싸워 그들을 깨뜨렸는데,

사로잡거나 죽인 자가 매우 많았다.

 

파사이사금 18년(97)

 

봄 정월에 군사를 일으켜 가야를 정벌하려고 하였으나,

그 나라 임금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삼국사기> 

 

 

파사왕 20년(AD145년)

 

9월, 가야녀(加耶女)와 <반아半阿>가 자리를 다투었다.

 

가야(加耶)가 거타(居陀){今 거창}를 습격하였다.

 

<장세長世>{加召城主}가 소식을 듣고 급히 구하러 갔으나, 싸우다 죽었다.

 

상은 노하여, <길문吉門>에게 명하여 경기(京騎) 1천명을 이끌게 하였고,

南水(南路와 水路)의 용사(勇士) 5천명을 이끌게 하였다,

 

삼로(三路)는 엄습하여 죽이고, 승리를 크게 얻었다.

<남당유고 신라사초>

 

 

 

부산을 장악한 신라는 140년경

금관가야와의 국경인 양산의 낙동강 나루인 황산진 어구에서 가야의 군사와 싸운다.

 

파사 20년(145년)에는 거타{거창}에서 가야와 싸운다.

 

신라가 양산에 성을 쌓고 부대가 진주하고 있는 것은

가야에게 있어서 매우 위협적인 것이므로 가야는 양산의 성을 뺏기 위해서 노력한다.

 

하지만 신라는 양산의 성을 잘 방어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해와 양산조에도 황산강이 나온다.

낙수[낙동강]가 남류와 동류를 하다가

김해 북쪽 옥지연(玉池淵)에 이르러 황산하가 되고,

이것이 다시 남쪽으로 흘러서 김해 남쪽 취양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원동리 부근으로부터

낙동강 하구 을숙도 부근까지가 황산하 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도 물금낙동강황산강이라 부르고 있으며,

황산강 상류에 있는 가야진신라가야국을 정벌할 때 왕래하던 나루였다고 한다.

이처럼 양산 지역은 낙동강 하류에 있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신라가야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 김해의 구지산에서 가야를 건국하는 김수로(156년)

 

 

서기 156년 : 음3월 변진구야의 9간이 김수로를 추대하고 가야가 건국됨.

                   구지가가 지어짐

서기 161년 : 음3월 김수로 허왕옥을 왕비로 삼음

 

 

흉노왕 <휴도>의 아들 <김일제>의 후손인 <정견正見>의 아들 <청예靑裔(142-199)가

김해의 구지봉에서 아홉 족장(9干)의 추대에 의하여 서기 156년 금관가야를 건국한다.

 

 

 

- 낙동강을 넘어 김해를 공격을 하는 신라(161년)

 

 

파사 이사금 27(106)

 

봄 정월에 압독에 거둥하여 빈궁한 사람들을 진휼하고, 3월에 압독에서 돌아왔다.

가을 8월에 마두성주(馬頭城主)에게 명하여 가야를 치게 하였다.

 

 

지마 이사금 4년(115)

 

봄 2월에 가야가 남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몸소 가야를 정벌하였는데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를 건넜다.

 

가야인이 군사를 수풀 속에 숨겨두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왕이 깨닫지 못하고 똑바로 나아가니 복병이 일어나 몇 겹으로 에워쌌다.

 

왕이 군사를 지휘하여 분발하여 싸워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지마 이사금 5년(116)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가야를 침입케 하고

왕은 정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가야는 성에 들어앉아 굳게 지키고만 있었는데,

마침 오랫동안 비가 내렸으므로 되돌아 왔다.

<삼국사기> 

 

 

지마왕 3년(A.D.161)

 

2월 (가야의) <주일(朱日)(138?-177)>이 거타(居陀)를 침공하였다.

왕이 노하여 <마지나(馬知那)(110?-179)>에게 <주일>을 치도록 명하였다.

 

<주일(138?-177) 재위 158-176>은 <비가>와 <정견>의 아들로 대가야 왕이다.

 

7월 왕이 가야를 친히 정벌하러,

황산강(黃山江)에 이르렀는데 복병에게 둘러싸임을 당하였다.

 

병관 <웅선(雄宣)(135-209)>이 포위를 헤치고 왕을 구출하였다.

 

마지나(馬知那)의 대군과 이어짐에 이르자 적(敵)이 퇴각하여 물러났다.

 

<웅선(135-209)>은 <명선>과 <한제>의 아들이다.

 

 

지마왕 4년(A.D.162)

 

2월 가야의 병사를 황산(黃山)에서 크게 깨뜨렸다.

 

5월 왕이 정병 1만을 거느리고 나아가 비지벌(比只伐)을 둘러쌌으나,

큰 비가 그치지 않았다.

 

<길원(吉元)(110?-178)>이 (정벌을) 그만두기를 청하자,

왕이 노하여 <길원>을 군중(軍中)에 가두었다.

 

8월 왕이 비지(국)에서 환도하였다.

정로군을 마치도록 명하였다.

큰 비가 연이어져 내렸다.

3번의 초하루동안 우리 병사들 대부분이 병이 앓았다.

왕이 이에 <길원(吉元)>을 석방하고, 병사들을 방면하게 하였다.

<남당유고>

 

<길원(110?-178)>은 <길문>과 <경원>의 아들이다.

 

 

신라는 낙동강을 넘어 금관가야의 도성인 김해를 공격한다.

 

가야는 신라의 공격을 막어내지만

위협적인 위치인 양산에 성을 가지고 있는 신라는 가야에게 위협적이다.

 

 

 

- 왜와 화해하는 신라, 부산에 정착하기 시작하는 왜(170년)

 

 

지마 이사금 10년(121)

 

2월에 대증산성(大甑山城)을 쌓았다. 여름 4월에 왜인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였다.

 

 

지마 이사금 11년(122)

 

여름 4월에 큰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와가 날아갔는데

저녁이 되어서야 그쳤다.

 

서울 사람들이 "왜나라 군사가 크게 쳐들어온다."고 말을 잘못 퍼뜨리고는 다투어

산골짜기로 도망하여 숨었다.

 

왕이 이찬 익종 등에게 명하여 타일러 말렸다.

 

 

지마 이사금 12년(123)

 

봄 3월에 왜국(倭國)과 화해하였다.

 


아달라 이사금 5년(158)

 

봄 3월에 죽령(竹嶺)을 개통하였다. 왜인이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아달라 이사금 20년(173)

 

여름 5월에 왜(倭)의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삼국사기>

 

 

 

지마왕 10년(AD168년)

 

2월, 大甑山城(대증산성)을 쌓았다.

<병지(屏旨)>를 성주(城主)로 삼았는데, <한문(汗門)>의 아들이다.

 

4월, 야인(野人) <가을(加乙)과 <오고五古) 등이 <후복(厚福)>태자의 명이라 하며,

우리의 선박을 빼앗았다.

 

<흔련(昕連)은 (그들을) 포박하여 바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野人(야인)들이 많이 도착하였으나,

모두 <흔련昕連)>에게 패배당하였다.

 

<흔련>은 <발량>과 <간시>의 아들이다.

 

 

지마왕 12년(A.D.170)

 

4월 큰 바람이 동해로부터 갑자기 이르러 나무가 꺾이고 기와가 날렸다.

이것을 야적(野賊)들이 크게 이르렀다고 하여,

피하고 숨는 사람들이 들판으로 이어졌다.

 

익종(翌宗) 등이 수색하여 그릇되었음을 백성들에게 보이고 금지시켰으나

(백성들이) 듣지 아니하였다.

 

밤이 되자 바람이 그치고 하늘이 개이자, 바야흐로 민심이 평안해졌다.

 

 

아달라왕 20년(A.D.232)

 

5월 왜 여왕이 동생 박비고(狛比古) 등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물품과 재화를 교역(交易)하기를 청하여 이에 왜전(倭典)을 세우고,

왜와 더불어 교제(交際, 서로 사귐)하기로 하였다.

<남당유고>

 

 

경초 2년(A.D.238) 6월 왜여왕이 대부 난승미(難升米)등을 보내어 군(郡)에 이르러, 천자에게 조헌(朝獻)하기를 구(求)하자 (중략)

<삼국지 위서동이전 왜(倭)의 기사 발췌>

 

 

 

한반도 남단에서 발견되는 야요이 토기의 수량에 주의를 환기해,

“한국의 늑도 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중의 8%가 야요이식 토기지만...

(부산의) 예성 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는 94%가 야요이식 토기”

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원 일본인의 형성 : 한반도로 부터의 야요이 이주 물결 4>

 

 

신라는 부산을 장악하며 왜를 한반도에서 몰아냈지만 왜는 다시 신라를 공격했다.

 

그 이유는 왜가 부산에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는 전쟁을 하여 왜를 몰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전쟁보다는 유화책을 선택했다.

 

신라가 왜에게 부산진을 열어주고 거주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당시 왜의 인구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항구를 열어주어도 신라가 충분히 감당할 수준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또한 가야가 쇠를 이용한 무역으로 큰 호황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왜가 부산을 이용할 수 있게 된 시기를

지마 이사금 12년인 서기 170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고학적 성과와도 어느정도 일치하는데 최근 고고학적 성과에 의하면

2세기 후반 부터는 일본에서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한반도 남부로 건너가 체제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왜의 여왕 비미호가 신라에 사신을 보낼 때인 232년에는

왜의 부산으로의 유입은 이미 일상화되어 있을 것이다.

 

 

 

- 포상팔국의 난, 신라의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가야(270년)

 

 

나해이사금 6년(201)

봄 2월에 가야국이 화친을 청하였다.

 

 

나해 이사금 13년(208)

 

봄 2월에 서쪽으로 군읍(郡邑)을 두루 돌아보고 열흘이 되어서 돌아왔다.

여름 4월에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으므로

이벌찬 이음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나해 이사금 14년(209)

 

가을 7월에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가 가라(加羅)를 침범하려고 하였으므로

가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 이음(利音)에게 명하여

6부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여덟 나라의 장군을 공격하여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6천 명을 빼앗아 돌려주었다.

 

 

나해이사금 17년(212)

 

봄 3월에 가야(加耶)에서 왕자를 보내 볼모로 삼게 하였다.

<삼국사기> 

 

 

내해왕 6년(A.D.262)

 

2월 가야(加耶)가 화친을 청하여 왔다.

 

예전에 부여(夫余)와 안으로 응하여 모반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대병(大兵)을 일으켜 치려고 하였다.

 

그 임금과 신하들이 두려워 복종하였다.

 

 

내해왕 13년(A.D.269)

 

2월 서쪽으로 일선(一善)과 사벌(沙伐)을 돌아

관성(管城)에 이르러 장사(將士)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날기(捺己)에서 지내다가 소문(召文)을 거쳐 돌아왔다.

 

무릇 17일이었다.

4월 왜인(倭人)이 경계를 넘어와,

<이음(利音)(226-281)>이 경기(輕騎)를 이끌고 가 부딪혀 물러가게 하였다.

 

 

내해왕 14년(A.D.270)

 

7월 가야(加耶)왕자 <우고(于考)>태자가 들어와 고하기를

포상8국(浦上八國)이 (가야를) 침입하였으니 구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우고>와 <이음(利音)>을 장수로 하여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하였다.

 

8월 <이음(利音)>이 부딪쳐 8국의 장군을 죽이고 포로 6천명을 빼앗아 돌아왔다.

군신(群臣)들이 치하하며, 포로들을 조상의 사당에 바쳤다.


(가야의) <하도(河道)>가 그의 딸 <대리(大理)>를

<미지(美知(249- ?), 벌휴와 미시의 아들)>에게 시집보냈다.

 

270년은 신라 <내해(230-291) 재위 257-291>왕 14년

대가야 <하도(237-282) 재위 269-281>왕 2년이다.


 

삼국사기는 가야왕자 <우고(于考)>가 내해의 아들 <우로(于老)>로 바뀌었다.

 

<우로(于老)(277-331)>는 <조분(254-329)>의 처인 <아이혜(286-362)>여왕

오빠이고, <조분>의 여동생인 <홍모(紅帽)(261-?)>와 <내해>왕의 아들로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난 해(270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내해왕 17년(A.D.273)

 

3월 가야(加耶)왕자를 불러 인질로 삼았다.

 

대리(大理)가 미지(美知)의 아들 리(車理)를 낳았다.

<남당유고 신라사초>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대대적인 인구 이동은 크게 3시기로 나눠 이뤄졌다.

 

최초 인구 이동이 있었던 시기는 기원전 3세기 전후.

농경 및 금속기가 전파되면서 일본에 야요이 문화가 성립됐다.

 

이때 이동으로 일본 열도의 토착 신석기인이던 조몬인과

여러 면에서 다른 야요이인이 등장했다.

 

10 만 명 미만이던 일본 열도 인구는 50만 명 이상으로 급증했다

 

이는 유물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의 덧무늬토기와 일본의 도도로키식 토기는 닮은꼴이다.

 

빗살무늬토기와 소바타식 토기 역시 모양이 흡사하다.

 

덧무늬토기는 한반도 남해안과 일본 북규슈 해안에서 동시에 발견된다.

 

부산 영도구 동삼동 지역에서 발견된 흑요석도

성분 분석 결과 일본 규슈 지역에서 나는 것으로 확인됐다.

 

5세기 전후 두 번째 이동이 있었다.

 

(중략) 세 번째 이동은 7세기 이뤄졌다.

 

(하략)"

 

부산·양산 역사 교사들 규슈에서 야마토까지 걸어서 쓴 일본 답사기

(부산일보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가야는 김해의 금관 가야를 중심으로 12개 소국들이 합친 변한 소국연맹을 이루고,

발전된 철기생산 능력과 양호한 해운 입지 조건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과 교역하며 발전해 나갔다.

 

그 중에서 해운 입지 조건이 좋은 김해의 가야국은

낙랑(樂浪)과 왜(倭) 사이의 원거리 교역 중개 기지로서 큰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고구려가 낙랑 및 대방군을 병합하자,

가야연맹은 선진문물 교역 대상을 상실하면서 일시적인 혼란에 빠져,

고자국(古資國: 古史浦國), 사물국(史勿國), 골포국(骨浦國), 칠포국(柒浦國),

보라국(保羅國) 등의 이른바 ‘포상팔국(浦上八國)’이

김해의 금관 가야를 공격하는 내분을 겪는다.

 

가야는 신라에 도움을 요청하여 포상팔국의 군대를 물리친다.

 

이 포상팔국의 난이 일어나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의 대규모 인구이동이 이뤄진다.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10만명 미만이던 일본의 인구가 이 시기에 50만명이상으로 증가해 버렸으니

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 가야인이 일본을 지배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 신라-가야 연합의 붕괴, 가야의 일원이 되어 신라를 공격하는 왜(294년)

 

 

조분 이사금3년(232)

 

여름 4월에 왜인이 갑자기 와서 금성을 에워쌌다.

 

왕이 몸소 나가 싸우니 적이 흩어져 도망하였으므로,

 

가볍게 무장한 날랜 기병을 보내 그들을 추격하여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조분 이사금4년(233)

 

5월에 왜의 군사가 동쪽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에 이찬 우로가 왜인과 사도(沙道)에서 싸웠는데,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배를 불태우니 적들이 물 속에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첨해 이사금 3년(249)

 

여름 4월에 왜인이 서불한 우로(于老)를 죽였다.

 


유례 이사금 4년(287)

 

여름 4월에 왜인이 일례부(一禮部)를 습격하여 불질러 태우고는

백성 1천 명을 붙잡아 갔다.

 

 

유례 이사금6년(289)

 

여름 5월에 왜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배와 노를 수리하고 갑옷과 무기를 손질하였다.

 

 

유례 이사금 9년(292)

 

여름 6월에 왜의 군사가 사도성(沙道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므로,

일길찬 대곡(大谷)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고 지키게 하였다.

 

 

유례 이사금 10년(293)

 

봄 2월에 사도성을 고쳐 쌓고 사벌주(沙伐州)의 부유한 백성 80여 집을 이주시켰다.

 

 

유례 이사금 11년(294)

 

여름에 왜의 군사가 장봉성(長峯城)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다사군(多沙郡)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유례 이사금 12년(295)

 

봄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城邑)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꾀하여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서불한 홍권(弘權)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에서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또한 함께 도모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왕이 '옳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조분왕 3년(A.D.294)

 

4월 왜인(倭人)이 갑자기 쳐들어와 금성(金城)을 포위하였다.

 

왕이 직접 나와 사기를 북돋우었다.

 

적이 궤멸되어 달아나자 <흥문(興文)> 등이 가벼운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심히 많았다.

 

 

조분왕 4년(A.D.295)

 

5월 왜가 동쪽 변경을 약탈하였다.

7월 <우노(于老)>가 <운량(雲良)>과 <흥문(興文)> 등을 거느리고

사도(沙道)에서 왜인을 대파하였다.

 

바람을 타고 불을 놓으니 그 배들이 불에 탔다.

 

적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때 <우로(277-331)> 19세이다. 

 

 

 

 

미추왕 7년(A.D.331)

 

4월 왜의 사신이 학포(鶴浦)에 이르러 원상태공(元上太公, 우로)과

서로 만나보기를 청하며 입조(入朝)하는 것을 수긍하지 않았다.

 

앞전에 <우로(于老)>가 희롱하여,

왜의 사신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조만(早晩, 머지않아)간 너희 왕을 사로잡아

찬노비(爨奴婢, 밥을 짓는 노비)로 삼겠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원상(元上, 우로)이 니금(尼今, 미추)과 아후(阿后, 아이혜)를 멸시한 것으로, 왕후(王后, 미추와 아이혜)를 노비와 같다고 본 것이니

경모(輕侮, 남을 하잘 것 없이 보아 모욕하거나 업신여김)하는 마음이 있었다.

 

뜻밖에 왜의 사신에게 전달되었고,

왜의 사신이 돌아가 그 왕에게 가서 보고하니, 왜왕이 노하여 명으로 그 사신을 베고, 다른 사신으로 바꾸어 포구에서 와서 만나기를 청한 것이다.

 

관리(吏)가 흉계가 있음을 알고 만나지 말기를 고하였다.

 

<우로>가 말하기를

 

“나는 일국의 태공(太公)이다. 어찌 작은 오랑캐 따위를 두려워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결국엔 단기(單騎, 혼자)로 가서, 왜(倭)가 그 모욕(侮辱)함을 꾸짖으니,

우로가 “농담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왜의 사신이 믿지 아니하여 불을 지르고 가버렸다.

 

주사(舟師, 함장)에게 추격하도록 하였으나 도달하지 못하였다.

 

<우로>를 후하게 장례를 지내도록 명하고,

<우로>의 어린 아들 <흘해(訖解)(329-392)>에게 작위를 내렸다.

 

혹은 <우로>는 용감하고 장병(將兵)을 다룸에 뛰어난 연유로

걸핏하면 자긍(自矜, 스스로를 자랑함)함을 더욱 높았다.

 

대중의 마음을 얻지 못한 연유로 마음이 몹시 불쾌하여 반란하려는 뜻이 있었다.

 

니금의 신하와 왜의 사신이 서로 통하여 은밀히 제어하려는 뜻이 있었다고 하고,

내홍(內訌, 내부에서 저희들끼리 하는 분쟁)을 염려하여 외세로 친 것이라 말한다.

 

니금이 태공의 상(喪)을 친히 조문하고 <명원(命元)(307-374)>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태공의 아들은 마땅히 나의 아들이고, 태공의 처는 마땅히 나의 처이다.”라고 하였다.

 

<명원>이 울면서 말하기를

“봄부터 비가 오지 않아 나라 안팎에서 기도하고 있으니,

첩과 태공이 또한 산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꿈에 큰 불이 나서 이를 의심하였습니다.

어찌 이와 같이 흉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하고 하였다.

 

니금이 말하기를 “모두 짐의 덕이 없음으로 부른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하들을 남당(南堂)에 모이게 하여

친히 정형(政刑, 정치와 형벌)의 득실(得失, 잘잘못)을 물어 말하기를

“정형(政刑)의 잘못이 있으면 비를 기도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지금 태공이 변란을 맞아 하늘에서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으니,

과인(寡人)과 너희 백관(百官)들은 마땅히 그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니금이 드디어 스스로 매질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후가 그 소리를 듣고, 친히 임하여 매질을 그치도록 하였다.

 

<명원(307-374)>은 <조분(254-329)>왕과 <아이혜(286-362)>여왕의 딸로

<광명(324-392)>여왕의 친언니로 <우로(277-331)>의 처이다. 

 

 

 

 

유례왕 원년(A.D.350)

 

4월 왜가 일례(一禮)를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남녀 일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유례왕 6년(A.D.355)

 

6월 왜가 사도성(沙道城)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인하여 그 기세로 해택(海宅)에 침입하여 불을 질렀다.

 

장차 초궁(綃宮)에 미치려 하자,

초비(綃妃) 사화랑(沙火郞, 남자인 듯)이 선도(仙道)를 얻어,

산복(山腹, 산의 중턱, 산허리)에서 산속에 의병(疑兵, 적의 눈을 속이는 가짜 군사)을 일으켜 (왜로) 하여금 의구(疑懼, 의심하고 두려워함)하여 나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부엌으로 드러 닥칠 때 일길찬 대곡(大谷)을 우두머리로 한 경로군이 와서 구하였다.

 

그 우두머리를 쳐서 크게 깨뜨리고, 죽이고 사로잡은 이가 심히 많았다.

 

 

 

유례왕 8년(A.D.357)

 

5월 왜(倭)가 또 장봉성(長峰城)을 침입하였으나,

격퇴(擊退, 적군을 쳐서 물리침)하였다.

 

7월 다사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진상하였다. 
 

 

 

유례왕 9년(A.D.358)

 

2월 왕이 왜구(倭寇)가 쥐새끼와 같이 도둑질하니,

그 나라를 멸망시키어 뿌리 뽑기를 원하였다.

 

홍권(弘權)이 간하여 말하기를

“저 나라의 땅은 멀고 미리 헤아리기 어려우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에서 싸우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으니

원정(遠征)을 하는 것을 불가합니다.

더군다나 부여(夫余)는 속임이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그쳤다.

<남당유고 신라사초>

 


 

가야는 신라의 신하국이 될 수 없었다.

 

포상팔국의 난의 위기를 극복한 가야는 가야가 된 왜와 연합하여

새로운 가야인 임나가야가 되었고

이전 보다 더 강해진 가야는 신라의 동쪽 해안을 맹공한다. 

 

 

 

- 왜의 공격에 굴복하고 사신을 교환하는 신라(366년)

 

 

기림 이사금 3년(300)

 

봄 정월에 왜국과 사신을 교환하였다.

 

 

 

홀해 이사금 3년(312)

 

봄 3월에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자신의] 아들을 위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아찬 급리(急利)의 딸을 보냈다.

<삼국사기>

 


 

기림왕 3년(A.D.366)

 

정월 왜(倭)와 다시 화친을 하였다.

 

기림왕 5년(A.D.368)

 

3월 급리(急利)의 딸 수황(水皇)을 왜(倭)태자에게 시집보냈다.

<남당유고> 

 

 

 

가야가 된 왜의 맹공에 신라는 버티지 못하고 왜와 사신을 교환한다.

 

아마도 신라는 왜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 주었을 것이다.

 

 

 

- 왜에 대항하는 흉노 김일제의 후손 내물왕(377년)

 

 

홀해 이사금 35년(344)

 

봄 2월에 왜국에서 사신을 보내와 혼인을 요청하였으나,

딸이 이미 시집갔다고 하여 사절하였다.

 

 

 

홀해 이사금 36년(345)

 

2월에 왜왕이 글을 보내와 국교를 끊었다.

 

 

홀해 이사금 37년(346)

 

왜의 군사가 갑자기 풍도(風島)에 이르러 변방의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또 진군하여 금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하였다.

 

왕이 군사를 내어 상대하여 싸우고자 하였으나 이벌찬 강세(康世)가 말하였다.

 

"적은 멀리서 왔으므로 그 칼날을 당해낼 수가 없으니, 그

것을 늦추었다가 그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왕이 그렇다고 여겨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적은 식량이 떨어져 장차 물러가려 하였다.

 

강세에게 명하여 날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쫓아버렸다."


 

나물 이사금 9년(364)

 

여름 4월에 왜의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

 

이 듣고서 대적할 수 없을까 두려워 풀로 허수아비 수천 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서 토함산 아래에 나란히 세워 두었다.

 

그리고 용맹한 군사 1천 명을 부현(斧峴)의 동쪽 들판에 숨겨놓았다.

 

왜인이 자기 무리가 많음을 믿고 곧바로 나아가자

숨어 있던 군사가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였다.

 

왜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다 죽였다.

<삼국사기> 

 

 

흘해왕 4년(A.D.373)

 

2월 왜의 사신이 그 왕자를 위하여 다시 청혼하였으나

딸이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흘해왕 5년(A.D.374)

 

2월 왜왕이 절교(絶交)한다는 글을 보내왔다.

 

 

흘해왕 6년(A.D.375)

 

4월 왜(倭)가 풍도(風島)에서 약탈하고, 더하여 금성(金城)을 포위하였다

(혹은 왜구가 풍도에서 나아가 금성을 포위하였다).

 

그 식량이 떨어지를 기다렸다가, 강세(康世)가 출격하여 크게 깨뜨려서,

그 우두머리 부부(夫妻)를 사로잡아 바쳤다.

 

 

내물왕 3년(A.D.379)

 

2월 당시 <발강發康>의 누나 아이(阿尒)가 근수(謹須, 근구수왕)의 처가 되었는데

그 나라의 정사를 오로지 하였다.

 

그의 모형(母兄)을 맞이하여 데려갔고,

이때에 이르러 또 <공태公兌>를 청하여 진(眞)을 베풀고자 하니,

그런 연유로 허락하였다.

 

<공태公兌>는 부여에는 의원이 많다고 하며 <선해宣亥>를 천거하여 데리고 갔다.

 

4월 왜병이 크게 이르러 <등억登檍>과 <내개乃芥>에게 막도록 하였다.

 

풀로 허수아비 수천을 토함산(吐含山)에 아래에 만들어 놓고,

용사 1천명을 부현(斧峴) 동쪽 벌판에 매복하였다.

 

왜가 마침내 계산하는 대로 걸려들어 크게 패하였다. 추격하여 모두 사로잡았다.

 

이때부터 왜와 가야(加耶)가 상통하여 해마다 와서 구하였다.

<남당유고 신라사초>

 

 

 

신라에 흉노왕 <휴도>의 아들 <김일제>의 후손인 <김알지>가 태어나

그의 후손인 내물왕이 흘해를 이어 377년에 즉위한다.

 

왜는 신라에 총공세를 벌여 금성까지 도달하지만 내물왕의 매복에 속아 전멸당한다.

 

 

 

-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볼모로 보내고 고구려와 동맹을 맺는 신라(392년)

 

 

나물이사금 37년(392)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삼국사기>

 

 

내물왕 16년(392)

 

정월, 마아(馬兒)를 담덕(談德)에게 보냈다.

<남당유고 신라사초>

 

정월, 서구(胥狗)를 보내어 나밀(奈密)의 딸 운모(雲帽)와 하모(霞帽)를 맞아들여

좌우(左右) 소비(小妃)로 삼고 보금(寶金)을 비궁대부(妃宮大夫)로 삼았다.

 

보금(寶金)은 나밀(奈密)의 조카(猶子)이다.

 

몸이 크고(身長) 식견이 있어 과공주(寡公主) 천성(天星)을 그 처로 하였다.

<소수림대제기의 영락대제 2년 임진(392) 기사>

 

 

마아(馬兒) = 보금(寶金) 또는 실주(實主)

<삼국유사>

 

 

고구려는 고구원왕을 죽인 백제를 무너뜨려 원수를 갚고자 한다.

 

광개토대왕은 이미 백제의 요충지인 예성강과 강화만을 장악하여

백제를 공략할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고구려는 백제를 멸하기 위해 신라를 동맹국으로 삼는다.

 

신라는 고구려의 군사지원을 얻기 위해

<대서지(314-382)>의 아들 <실성(359-417)>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다.

 

<실성(359-417)>은 <대서지>와 <예생>의 아들이다.

 

<대서지(314-382)>는 <내물(350-402)>의 아버지인 <말구(297-358)>의

이복동생으로 <실성>은 <내물>의 사촌동생이다.

 

 

 

- 금성을 공격하는 왜를 막아내는 내물왕(393년)

 

 

나물 이사금 38년(393)

 

여름 5월에 왜인이 와서 금성(金城)을 에워싸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칼날을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00명을 먼저 보내 돌아가는 길을 막고,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삼국사기>

 

 

내물왕 17년(393)

 

5월, 야인(野人)이 쳐들어오자 그 공효(功)없이 물러감을 기다렸다가 추격하여

독산(獨山)에서 크게 쳐부쉈다.

 

7월, 부여(扶余)가 수곡(水谷)에서 대패하였다.

 

 

 

신라는 금성을 5일이나 포위한 왜를 수성하여 잘 막아내고

금성 공략에 실패하는 적을 공격하여 무찌른다.

 

왜는 금성 공략에 실패하자 함선이 있는 독산(양포)으로 철군한다.

 

신라군은 왜군이 양포에서 함선에 승선하기 전에 200명의 기병으로 길을 막고

보병 1천명을  이용해 많은 수의 적을 무찌른다.

 

 

* 독산 : 장기면의 옛 지명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금곡리에 독산이 있다.

           왜군은 금성을 공격할 때에는 칠포에 상륙하고

           금성에 침입하면 함대는 칠포에서 양포로 이동한다.

           왜군은 철수할 때 금성에서 포항 오천으로 이동한 후 

           고개를 넘어 장기천을  따라 양포 방향으로를 이동한다.

           왜군이 칠포로 상륙하는 이유는 칠포가 상륙의 최적지이기 때문이고

           양포 방향으로 퇴각하는 것은 신라군의 추격을 막아내기 용이하고 

           부산으로 가는 시간을 절약시켜 주기 때문이다.

 

 

<풍도와 독산>

 

 

- 가야-왜를 물리치는 광개토대왕(400년)

 

 

광개토대왕비문 광개토대왕 9년 (400)

 

"9년 기해에 ...이때 신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국경에 가득하여 성지를 크게 파괴하고
노객을 천민으로 삼으니 왕께서 돌아와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대왕께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시어 그 충성스런 정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사신을 파견하여 X로 돌아올 것을 알렸다.

10년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가서 신라를 구원하였다.

남거성(男居城)에서 나아가 신라성(新羅城)에 이르렀는데 왜인이 그 안에 가득하였다.

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났다.

급히 뒤쫓아 임나가라 종발성(從拔城)까지 쫓으니 성이 복속하여 돌아왔다.

안라인으로 X와 신라성,X성을 병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자 왜인이 크게 무너졌다."

 

 

 

 

광개토대왕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백제 아신왕은 왜의 군사지원을 받게 된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한반도 남부의 왜-가야를 몰아내어

백제의 우방을 몰아내려고 한다.

 

이는 신라의 이해와도 일치한다.

 

(비문에는 신라가 굴욕적으로 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라의 국방력도 상당한 수준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 상황은 왜를 몰아내려는 고구려, 신라 양국의 이해가 일치하여서

신라가 고구려에 병력을 요청하는 형태로 파병이 이뤄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남거성과 신라성은 양산의 가소성과 말머리성으로 보이는데

이 두성을 왜인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된 10만에 육박할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연합부대는

왜가 장악한 양산을 공격하여 양산의 두성을 차지하고

낙동강을 넘어 김해의 종발성을 공략한다.

 

 

<종발성> 

 

 

- 고구려의 군사지원이 끝나고 돌아오는 실성(401)

 

 

 

나물 이사금46년(401)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가을 7월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실성(實聖)이 돌아왔다.

<삼국사기> 

 

내물왕 25년(401)

 

4월, 봄부터 큰 가뭄이 들고 제(帝) 또한 (몸이) 편치 못한데

여러 왕자들은 모두 황음(荒淫)으로 일을 삼았다.

 

제(帝)가 이에 <일동(一同)>과 <구리내(仇里迺)>등을 고구려에 보내

비단과 진주등을 선사하고 <마아(馬兒)>의 귀환을 청하였다.

 

<두씨(杜氏)> 또한 <마아(馬兒)>를 위하여 <담덕(談德)>을 설득했다.

“마아(馬兒)는 우리나라에게는 구우일모(九牛一毛)입니다.

 

돌아가 그 나라에 왕 노릇함만 못합니다.

 

연중(兗中)으로써 전한다면 대왕(大王)의 골육이 남방에서 왕 노릇함이니

또한 좋지 않습니까?” 

<담덕(談德)>은 그럴듯하게 여기고 마침내 보화를 7수레에 싣고

<마아(馬兒)>와 <두씨(杜氏)>를 정기(精騎) 3백으로 호송하여 보냈다.

 

 

고구려는 볼모인 <실성>을 돌려보낸다.

 

 

 

- 왜와의 화해를 위해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는 신라(402)

 

 

실성이사금 원년(402)

 

3월에 왜와 우호를 통하고,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삼았다.

<삼국사기> 

 

 

내물왕 26년(402)

 
2월, 제(帝)의 병이 다시 심해지자 신산(神山)에 약(藥)을 구하였는데

제(帝)가 말하기를

“천명(天命)이 자재(自在)하거늘 약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하고는

편안한 모습으로 붕하였다.

 

제(帝)는 성품이 관인호덕(寬仁好德)하며

무사(武事)에 능하여 남의 업신여김을 능히 제어할 수 있었다.

 

만년에는 신선(神仙)을 좋아하여 정사를 내궁에 위임하였고,

초년에는 오직 신후(神后)에게 순종해서 받들 뿐

(자신의)뜻을위해 새로 창출한 바가 없었다.

 

그러나 신민(臣民)들은 그 덕에 감동하지 않음이 없어서

부모를 잃은 것처럼 애통해하였으니 또한 현(賢)이었더라.

즉일로 부군(副君)이 보반궁(保反宮)에서 상례(祥)를 행하고 보위(寶位)에 오르니

이가 바로 실성제(實聖帝)이다.

 

<실성(實聖)>은 고구려에 있으면서 돌아갈 생각으로

여러 차례 볼모를 바꿔 줄 것(代質)을 청하였으나 되지 않자 안으로 불평을 품었었다.

 

급기야 즉위함에 이르자 비록 <보반(保反)>으로 후(后)를 삼았으나

음(陰)으로는 보복할 뜻을 가지고

<보해(寶海)>와 <미해(美海)>를 나누어서 볼모로 보내고 <눌기(訥祇)>를 내쫓았는데

<호물(好勿)>등이 이에 <눌기(訥祇)>를 옹위하여 그를 안돈시켰다.
<남당유고>

 

 

 

신라는 양산과 김해에 있는 왜를 몰아냈지만 왜가 차지한 부산은 점령하지 않았다.

 

신라가 왜와의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은 확실하다.

 

신라는 양산과 김해에서의 전투에 대한 유감을 표시하고

왜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내물왕의 아들을 볼모로 보낸다.

 

 

-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신라를 공격하는 왜(407년)

 

 

실성이사금 6년(407)

 

봄 3월에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여름 6월에 또 남쪽 변경을 침범하여 100명을 약탈해 갔다.

 

 

실성이사금 7년(408)

 

봄 2월에 왕은, 왜인이 대마도(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군사를 뽑아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였다.


“신(臣)이 듣건대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싸움은 위험한 일이다라 합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다른 사람을 정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만에 하나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으니,

험한 곳에 의지하여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그들이 오면 막아서 쳐들어와 어지럽힐 수 없게 하다가

유리할 때 나아가 그들을 사로잡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남을 유인하지만 남에게 유인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왕이 그 말에 따랐다."

 

 

실성이사금 14년(415)

 

가을 7월에 혈성(穴城)의 들판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왕이 금성 남문에 거둥하여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8월에 왜인과 풍도(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삼국사기>

 

 

 

실성왕 적양(赤羊:정미407) 6년

 

3월, 야인(野人)이 골화(骨火)를 침략했다.

 

6월에 야인(野人) 비고(非古)등이 골화(骨火)의 백성 100인을 겁략하여 (끌고)갔다.

 

 

실성왕 황원(黃猿:무신408) 7년

 

2월에 제(帝)가 대마도(對馬島)에서 야인(野人)을 치고자하니

<미사품(未斯品)>이 간언하여 그를 만류했다.

 

 

실성왕 청토(靑兎:을묘415) 14년

 

8월에 야인(野人)이 풍도(風島)를 노략질하자

급찬(級湌) <진사(進思)>가 그를 격파하였다.

<남당유고>

 

 

 

신라는 왜와 화해를 원했지만 왜는 신라와 화해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왜는 대마도를 대 신라 전진기지로 만들고 부산을 통해 신라에 공세를 펼친다.

 

신라는 왜와의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 왜를 부산에서 몰아내기 위해 장수왕의 군사원조를 얻는 신라(412년)

 

 

실성이사금 11년(412)

 

나물왕의 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눌지마립간 원년(417)

 

눌지 마립간(訥祇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 ...

 

나물왕 37년에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삼았으므로,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자 나물왕이 자기를 외국에 볼모잡힌 것을 원망하여

그 아들을 해쳐 원한을 갚으려고 하였다.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사람을 불러 몰래 이르기를

“눌지를 보거든 죽여라.”고 하였다.

 

마침내 눌지로 하여금 떠나도록 하여 도중에서 만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이 눌지의 외모와 정신이 시원스럽고 우아하여

군자의 풍모가 있음을 보고는 마침내 [그에게] 고하기를

 

“당신 나라의 왕이 나로 하여금 그대를 죽이도록 하였으나,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해칠 수가 없다.” 하고는 되돌아갔다.

 

눌지가 그것을 원망하여 돌아와 오히려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눌지 마립간 2년(418)

 

봄 정월에 몸소 시조묘에 배알하였다.

 

왕의 동생 <복호(卜好)>가 고구려에서 <제상(堤上)>과 함께 돌아왔다.

 

가을에 왕의 동생 <미사흔(美斯欣)>이 왜로부터 도망쳐 돌아왔다.

<삼국사기>

 

 

 

실성왕 흑서(黑鼠:임자412) 11년

 

2월, <보해(宝海)>를 고구려(句麗)에 인질로 하였는데,

내신(內臣) <무알(武謁)>을 그 보좌로 삼아서 떠나보냈다.

 

 

실성왕 적사(赤蛇:정사417) 16년

 

 

7월에 태후가 왕의 아우(王弟) <보해(宝海)>와 <미해(美海)>를 보고 싶어 하므로,

왕이 이에 명을 내려 <제상(堤上)>을 고구려(高句麗)에 사신으로 보내서

<보해(宝海)>의 귀환을 청하게 하고,

<강구리(康仇利)>를 야(野)에 사신으로 보내서 <미해(美海)>의 귀환을 청하게 했다. 

 

 

 

눌지왕 2년은 황마(黃馬:무오418)의 해이다.

 

2월에 왕제(王弟) <보해(宝海)>가 <제상(堤上)>과 더불어 고구려(麗)를 탈출하여

국경(境上)에 이르렀다.

 

때에 <거련(巨連)>은 남하(南下)하여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기고자하여

우리에게 부여(扶余)를 침탈하도록 권했다.

 

제상(堤上)이 이에 미녀와 보화를 <거련(巨連)>에게 바치며 말했다.

“소국(小國)은 동쪽에 야인(野人)이 있고, 서쪽으로는 부여(扶余)와 접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성심을 다해 상국(上國)을 섬김으로써 인민을 보전코자 합니다.”

 

<거련(巨連)>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짐이 장차 부여(扶余)를 토벌함으로써 네 나라의 원한을 갚아 주리라.”

<제상(堤上)>이 이에 <보해(宝海)>를 시켜 <거련(巨連)>을 설득하여 말하도록 했다.

“신(臣)은 상국의 종녀(宗女)를 처로 맞이함으로써 자식 3인을 낳았으니

다시는 두 마음이 없습니다.

 

원컨대 돌아가서 신의 형을 설득함으로써 부여(扶余)를 침공하여

남쪽 땅을 상국에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거련(巨連)>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허락하였다.  

 

7월에 <보해(宝海)>가 돌아왔다.

 

이에 앞서 <거련(巨連)>은 이미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으나

참언을 듣고는 다시 그를 추격했다.

 

이에 변복을 하고 도망쳐 나와 달이홀(達已忽)의 수구(水口)에 이르렀는데

추격자는 <제상(堤上)>에게 금(金)을 받고

(촉을 뺀) 빈 화살로 그를 쏘았으므로 맞지 않았다.

 

마침내 아슬라(阿瑟羅)로 들어와 바다에 배를 띄워서 돌아왔다.

 

왕은 교외에서 맞이하고 들어와서 태후(太后)를 뵙고 나자,

크게 잔치를 열어 공로(功)를 포상하였다.

9월, <제상(堤上)>은 <미해(美海)>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그 처를 보지도 않고

야국(野國)을 향해 출발했다.

 

<치술(鵄述)>은 그 때에 궁중에서 <황아(皇我)>를 낳았는데

그 출발소식을 듣자 뒤쫓아 가 장사(長沙)에 이르러서 그를 불렀으나

(제상은)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남당유고>

 

 

 

 

신라는 나물왕의 아들 '복호'을 볼모로 보내며 다시 한번 고구려의 지원을 받는다.

 

신라는 고구려와 함께 부산을 공격하기 전에

왜에 볼모로 잡혀있는 미사흔을 구출한다.

 

장수왕과 눌지 마립간의 연합 공격으로 부산이 함락되고 전기가야연맹은 소멸한다.

 

 

 

- 고구려를 배신하는 신라, 나제 동맹의 체결(450년)

 

 

눌지 마립간 34년(450)

 

가을 7월에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悉直)의 들에서 사냥하는 것을

하슬라성(何瑟羅城) 성주 <삼직(三直)>이 군사를 내어 불의에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

 

고구려 왕이 그것을 듣고 노하여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내가 대왕과 우호를 닦은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었는데,

지금 군사를 내어 우리의 변방 장수를 죽이니 이는 어찌 의리있는 일이겠는가?”

 

이에 군사를 일으켜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

 

왕이 겸허한 말로 사과하자 물러갔다.

<삼국사기>

 

 

고려 군사 한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사람을 말몰이(典馬)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

[어떤 책에는 ‘너희 나라가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하였다고 한다].

 

말몰이가 그 말을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여 뒤에 처져 있다가

마침내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돌아와 그가 말한 것을 설명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하였다.

나라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려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일본서기 웅략천황 8년>

 

 

눌지 마립간 38년(454)

 

... 8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눌지 마립간 39년(455)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구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나제동맹을 결성한다.

 

일본서기는 실직에서의 반란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가야의 재건과 다시 시작된 왜의 신라공격(460년)

 

 

눌지 마립간 15년(431)

 

여름 4월에 왜의 군사가 동쪽 변경을 침범해 와 명활성을 에워쌌다가

아무런 성과 없이 물러갔다.

 

 

 

눌지 마립간 24년(440)

 

왜인이 남쪽 변경에 칩입하여 백성[生口]을 붙잡아 갔다.

 

여름 6월에 또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눌지 마립간 28년(444)

 

여름 4월에 왜의 군사들이 금성을 열흘 동안 에워싸고 있다가

식량이 다 떨어져 되돌아갔다.

 

왕이 군사를 내어 그들을 추격하려고 하자, 좌우에서 말하였다

 

“병가(兵家)의 말에 '궁지에 몰린 도적은 뒤쫓지 말라.'고 하였으니

왕께서는 그 일을 그만두십시오.”

 

그러나 [왕은] 듣지 않고 수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독산 동쪽까지 뒤쫓아가 싸우다가

적에게 져서 장수와 사졸 가운데 죽은 사람이 반이 넘었다.

 

왕은 허겁지겁 말을 버리고 산에 올라가니 적이 몇 겹으로 에워쌌는데,

갑자기 안개가 어둑어둑하게 끼어 바로 앞에 있는 것도 알아볼 수 없었다.

 

적들이 이르기를 “신이 돌보아 주는구나.” 하고는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자비 마립간 2년(459)

 

여름 4월에 왜인이 병선(兵船) 100여 척으로 동쪽 변경을 습격하고

나아가 월성을 에워싸고는 사방에서 화살과 돌을 비오듯이 퍼부었다.

 

왕성(王城)을 굳게 지키자 적들이 장차 물러가려고 하였다.

 

[이에]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쳐부수고 북쪽으로 바다 어구까지 뒤쫓아갔다.

 

적들 중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반이 넘었다.

 

 

자비 마립간 5년(462)

 

여름 5월에 왜인이 활개성(活開城)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백성 1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자비 마립간 6년(463)

 

봄 2월에 왜인이 삽량성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이 벌지(伐智)와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중도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왕은, 왜인들이 자주 우리 땅을 침입하였으므로 변경에 두 성을 쌓았다.

 

 

자비 마립간 19년(476)

 

여름 6월에 왜인들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였으므로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하여 공격하여 쳐부수고 2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자비 마립간 20년(477)

 

여름 5월에 왜인이 군사를 일으켜 다섯 방면의 길로 침입하였으나

끝내 아무런 성과없이 되돌아 갔다.

 

 

소지 마립간 4년(482)

 

5월에 왜인이 변경을 침입하였다.

 

 

소지 마립간 8년(486)

 

여름 4월에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소지 마립간 15년(493)

 

봄 3월에 백제 왕 모대(牟大)[동성왕]가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벌찬 비지(比智)의 딸을 그에게 보냈다.

 

가을 7월에 임해진(臨海鎭)과 장령진(長嶺鎭) 두 진(鎭)을 설치하여

왜적에 대비하였다.

 

 

소지 마립간 19년(497)

 

여름 4월에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8월에 고구려가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소지 마립간 22년(500)

 

봄 3월에 왜인이 장봉진(長峰鎭)을 쳐서 함락시켰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전기가야연맹의 해체 후

가야세력은 연맹체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로 존속하다가

5세기 후반 고령지역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다시 결집하였다.

 

고령지역은 경상도 내륙지방이었기 때문에

고구려군 침입 때에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대가야는 점차 경남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의 가야국가들을 포용하면서

5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로운 가야연맹을 결성하였는데,

이것을 금관가야가 주도한 가야연맹과 구분하여 후기가야연맹이라고 부른다.

 

대가야를 중심으로 가야가 재건되자 왜의 신라공격이 재개된다.

 

왜의 공격이 이전에 못지 않게 강력하였지만

이 시기의 신라의 국력도 강해졌기 때문에 왜의 강력한 공격을 잘 방어해낸다.

 

이런 왜의 강력한 공격은 무령왕이 즉위하자 즉시 사라지게 된다.

 

 

 

* 명활성, 활개성 : 경북 경주시 천군동(千軍洞)과 보문동(普門洞)에 걸친

                          명활산에 있는 신라시대 석축산성.

                          남산성(南山城)·선도산성(仙桃山城)·지산성(只山城) 등과 함께

                          신라의 도성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했던 것이다.

                          처음 축조한 연대는 확실치 않으며 주위 약 1.8㎞의 석축산성으로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倭寇)를 막기 위한 중요한 산성이었다.

                          활개성은 명활성의 다른 이름으로 생각된다.

 

 

 

 

- 경주 바로 앞까지 진군한 고구려군을 격파하는

   백제-가야-신라 연합군(481년)

 

 

 

자비마립간 11년(468)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에 하슬라(何瑟羅) 사람으로서 15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이하(泥河)에 성을 쌓았다.<이하(泥河)를 이천(泥川)이라고도 하였다.>

 

 

소지 마립간 3년(481)

 

봄 2월에 비열성(比列城)에 거둥하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솜을 넣어 만든 군복을 내려주었다.

 

3월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성(狐鳴城)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가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여러 길로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므로 뒤쫓아가

니하(尼河)의 서쪽에서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천여 명을 목베었다.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과 왜의 침입에 대비하여 형산강 방어성을 세우게 된다. 

 

형산강의 방어성은 니하(형산강)를 해자처럼 두른 호명리였을 것이며 

이때 쌓은 성이 호명성일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가 공격한 실직성은 삼척에 있고 니하도 경주에 있으므로 

니하에 성을 쌓은 하슬라 백성은 강릉의 백성이 아닐 것이다. 

 

삼척 남쪽에 하슬라의 또다른 한자 표기인 하서량(河西良)과 유사한 지명이 

울산 하서현(河西縣)으로 있으므로

하슬라의 백성은 울산의 하서현에 사는 백성들로 보인다.

 

드디어 장수왕은 신라의 수도를 공격한다.

 

고구려는 흥해의 우산성을 점령하고 형산강을 넘어 호명성을 빼앗는다.

 

신라는 백제에 구원을 요청한다.

 

백제는 나제통문을 지나 성주->대구->영천을 거쳐 안강에 도착한다.

 

백제,가야의 구원군이 도착하자 호명성에 있던 고구려군 천여명이

안강과 경주사이에 갇히게 되어 몰살당한다.

 

결정적 패배를 입은 고구려는 군대를 퇴각시킨다.

 

 

<우산성과 호명성>

 

<고구려 신라 침공로>

 

 

 

- 무르익는 백제와 신라의 공수 동맹(490년)

 

소지 마립간 6년(484)

 

...가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백제와 함께 모산성(母山城) 아래에서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소지 마립간 15년(493)

 

봄 3월에 백제 왕 모대(牟大)[동성왕]가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벌찬 비지(比智)의 딸을 그에게 보냈다.

 

 

소지 마립간 16년(494)

 

가을 7월에 장군 실죽 등이 고구려와 살수(薩水)의 들판에서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견아성(犬牙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고구려 군사가 그곳을 에워쌌다.

 

백제 왕 모대(牟大)[동성왕]가 군사 3천 명을 보내 구원하니 포위를 풀었다.

 

 

소지 마립간 17년(495)

 

가을 8월에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雉壤城)을 에워쌌으므로

백제 왕이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게 하자,

고구려 무리들이 도망하였다.

 

백제 왕이 사신을 보내와 고마움을 표하였다.

 

 

 

백제 동성왕과 신라 소지 마립간 시대에는 나제 동맹이 가장 굳건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양국이 필요할 때 상대국으로 구원병을 파견했다.

 

 

진흥왕 9년(548)

 

봄 2월에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으므로

백제에서 구원을 청하였다.

 

왕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내 굳센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치게 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 우산성을 공략하는 고구려(496년)

 

 

소지 마립간 18년(496)

 

가을 7월에 고구려가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해 왔다.

장군 실죽(實竹)이 나아가 니하(泥河) 가에서 공격하여 깨뜨렸다.

 

 

소지 마립간 19년(497)

 

8월에 고구려가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은 신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우산성으로 군대를 파견한다.

 

신라는 고구려의 군대를 무난하게 방어한다.

 

 

 

 

- 무령왕, 성왕 시대가 되자 사라진 왜의 신라 공격(500년)

 

 

지증마립간 원년 (500)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 ...

전왕(前王)이 아들없이 죽었으므로 왕위를 이어 받았다. 당시 나이는 64세였다.

 

 

무령왕 원년(501)

 

무령왕(武寧王)은 이름이 사마(斯摩)<혹은 융(隆)이라고도 하였다.>이고

모대왕(牟大王)의 둘째 아들이다.

 

키가 여덟 자이고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다.

 

모대가 재위 23년에 죽자 왕위에 올랐다.

 

 

동성왕 후반기에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산성, 도살성, 남성골산성을 빼앗기고

무령왕 3년에는 청양, 무령왕 6년에는 고목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긴다.

 

신라가 고구려를 견제하지 않으면 백제는 무너지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백제를 지원해야 되는 왜는 신라를 공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버렸다.

 

왜에 큰 영향력을 가진 무령왕이 백제의 왕이 되자 왜는 무령왕을 지원하게 된다.

 

왜의 신라공격은 사라지고 왜는 백제의 일원이 되어 고구려와 싸운다.

 

 

 

- 금관가야를 흡수하는 신라, 금관가야 왕족 출신 김무력의 등장(532년)

 

 

법흥왕 3년(516)

 

봄 정월에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지냈다. 용이 양산(楊山) 우물 안에 나타났다."

 

 

법흥왕 9년(522)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그에게 보냈다.

 

 

법흥왕 11년(524)

 

가을 9월에 왕이 남쪽 변방의 새로 넓힌 지역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이때 가야국 왕이 찾아왔으므로 만났다.

 

 

법흥왕 19년(532)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즉 큰 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하여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이때 금관국 왕의 아들인 김무력은 신라의 각간이 되었는데

각간 김무력과 그의 손자 김유신은

신라가 삼국을 톨일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인재가 된다.

 

 

 

- 깨어진 나제동맹, 한강을 차지하는 신라(550년)

 

 

진흥왕 11년(550)

 

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에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의 군사가 피로한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이를 쳐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군사 1천 명을 머물러 두어 지키게 하였다.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왕이 백제 왕의 딸을 맞아들여 소비(小妃)로 삼았다.

 

 

진흥왕 15년(554)

 

가을 7월에 명활성(明活城)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만 9천6백 명을 목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백제와 신라는 함께 한산성과 진천의 방어서를 뚫고 한강유역으로 진출한다.

 

이 과정에서 나제동맹은 깨어지고 한강을 신라에게 뺏긴 백제 성왕은 신라와 화친하고

자기 딸을 신라에 인질로 보낸다.

 

 

 

- 반란을 제압하고 가야를 흡수하는 신라(562년)

 

 

진흥왕 23년(562)

 

가을 7월에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이사부에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앞서 달려가 전단문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거기에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으므로,

왕이 좋은 토지와 포로 200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이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왕이 굳이 주므로 이에 받아 포로는 풀어 양인(良人)이 되게 하고

토지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제압한 일등공신인 사다함에게 진흥왕은 토지와 포로를 하사한다.

 

하지만 사다함을 포로를 풀어주고 받은 토지를 군사들에게 준다.

 

법흥왕, 진흥왕대에 이르러 신라는 삼국을 품을 수 있는 기풍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