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年壬子, 九月, <公孫域>․<耿臨>․<喬玄>等與<索頭>合兵來寇

<句麗>․<盖馬>等城, 皆潰. <禾晉>自<丘利>退保<河城>. <答夫>往<南口>,

淸野以待之, 不過旬月, 果飢而退. 此, 所謂“千里運糧勢, 不能久者”也.

乃以勁騎七千擊之. <火晉>亦至合擊于<坐原(通遼東南雙福廟界)>大破之, 匹馬得返.

是謂<坐原>大捷. 賜<答夫><坐原>地, 後改以<質山>.  

<고구려사초>

 

 

신대제 8년(AD172) 임자, 

 

9월, <공손역公孫域>․<경림耿臨>․<교현喬玄> 등이 색두(索頭)와 병력을 합하여

구려(句麗)․개마(盖馬)城 등을 쳐서 궤멸시키니,

<화진禾晉>은 하성(河城)으로 물러나 지켰다.

 

이에 <답부答夫>가 남구(南口)로 가서 들판을 불태워 비우고 기다리니,

불과 달포가 아니 되어 먹을 것이 떨어져 물러갔다.

 

이를 두고, "군량을 1000여리나 실어 날라야 할 형세라면 누구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고 말하는  것이다.

 

이어서 <답부答夫>가 정예 7000 기마군으로 몰아쳤고,

<화진禾晉> 또한 도착하여 좌원(坐原)에서 함께 쳐서 대파시켰다.

 

몇 기만이 살아서 돌아갔다.

 

이를 두고 좌원대첩(坐原大捷)이라 한다.  

 

<답부答夫>에게 좌원(坐原)의 땅을 주었는데, 후에 질산(質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대왕8년(172) 겨울 11월에 한나라가 많은 병력으로 우리나라를 향해 쳐들어왔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물었다.

 

많은 사람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한이 병력이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기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겨서

자주 침략해올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는 이른바 한 사람이 관(關)을 지켜도 만(萬) 사람이 당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의 병력이 비록 많으나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군대를 내어 막기를 청합니다.”

라 하였다.

 

답부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한(漢)은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아

지금 강력한 병력으로서 멀리 와서 싸우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또 병력이 많으면 마땅히 싸워야 하고,

병력이 적으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兵家)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우고 기다리면

저들은 필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곤궁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날랜 병졸로 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왕은 그러하다고 여기고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졸들이 굶주리므로 이끌고 돌아갔다.

 

답부가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저들을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싸워,

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주어 식읍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제 8년(172년)에 漢이 선비족 색두와 연합하여

대군을 이끌고 현토성과 개마성으로 침공한다.

 

고구려는 일시 패하여 하성으로 물러난다.

 

명림답부는 청야전술로 들판을 비우고 그들의 양식이 떨어질 때를 기다려

반격하여 대승을 거둔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고구려가 일시 패하여 현토성이 점령된 것을

왕이 스스로 항복하여 현토군에 속하기를 원하였다고 망발을 하였지만

명림답부의 청야전술로 대승을 거둔 이 좌원대첩만큼은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시기 後漢은 125년 19명의 열후를 중심으로 환관이 득세하자

순제(順帝) <유보劉保>는 대장군 <양상梁商>의 딸을 황후로 책봉하니

또다시 외척 가운데 가장 흉포하고 방탕한 <양기梁冀>의 전횡이 20년간 진행된다.

 

그 기간에 순제가 죽고 두살된 충제(沖帝)가 즉위 1년만에 또 죽었다.

 

다음 8세의 질제(質帝)가 즉위했으나 <양기梁冀>에게 독살되고

146년 15세의 <유지劉志(131-167)> 환제(桓帝)가 즉위했다.

 

159년 환제는 환관과 모의하여 양기와 그 일족을 제거한다.

 

이 때 파면된 이가 300명을 넘었다. 조정은 텅 비었지만 황제와 환관은 축배를 들었다.

 

매관매직을 일삼던 환관에 대항한 새로운 세력은

낙양의 태학에서 공부하는 태학생들이었다.

 

166년 제1차 당고(黨錮)의 화(禍)로 200여명의 태학생들이 체포된다.

 

168년 환제가 죽고 영제(靈帝) <유광劉宏(156- )>이 13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한다.

 

또다시 외척 <두竇>씨가 득세한다.

 

두태후의 아버지로 대장군이 된 <두무竇武>는 외척이자 호족의 대표였다.

 

<진번>등이 그를 찾아가 환관을 주살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두무>는 자살하고 <진번>은 살해되었다.

 

이 때 살해된 이가 100여명, 금고를 당한 이가 600-700명이었다.

 

이것이 제2차 당고(黨錮)의 화(禍)이다.

 

민심의 이반이 일어나자 176년 장각을 중심으로한 태평도의 난이 일어나고

184년에는 전국에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후한은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