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마왕 26년(AD.184)

 

정월, 특명으로 <과다흑치果多黑齒>를 이벌찬으로 삼고,

<복생福生>을 품주로 삼았다.

 

(흑)치는 요술(妖術)을 얻어 왕에게 총애가 있었으나,

아버지의 골품이 없음으로 인하여 (뜻을) 크게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왕이 이에 <한문汗門>을 아버지로 삼으라고 하였다.

 

<조호鳥好>를 시키어

 

“<한문汗門>은 어렸을 때 푸닥거리를 하여(부정을 없애고) 명(命)을 모았다.

神이 내린 결과로, 이에 조호와 정중(井中)에서 목욕하고 상통(相通)하여 태어났다.”

라고 하였다.

 

실제로는 (흑치는) 한기부(漢祗部)의 종(奴)이 조호와 잠통(潛通)하여 생긴 자식이다.

 

 

7월 <한석汗昔>태자가 여근사(女根祠)를 여근곡(女根谷)에 세우기를 청하였다.

 

앞서 여근곡에 여근(女根)이 있어 시골 장정들이 혼미해짐이 많았다.

 

<과다흑치>가 사람을 시키어 검사하도록 하였는데, 神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한석>으로 하여금 여근사법(女根祠法)으로 하였다.

 

과부인 공주를 그 곳의 주(主)로 두도록 하였다.

 

아마도 (흑)치가 그 무리를 넓히기 위함이다.

 

 

9월 왕과 <달해達亥>와 <빈기시份其市>가 나라 안을 두루 보살피며

날기(捺己)에 이르러 신산(神山)에서 유람하였다.

 

<빈기시份其市>는 곧 흑치의 딸이다.

 

<흑치>는 날기 신산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하여,

그 딸로 하여금 왕을 유혹하여 밖으로 놀러갔다가 임신하여 돌아오기를 바랐다.

 

<흑치>는 안으로는 일성부군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계해(鷄亥)에게 의지하였다.

 

끝내 왕에게 미치어 서로 넓은 밭과 집을 차지하고,

자녀와 첩과 족속들에게 나누어 두었다.

 

미벌사(彌伐社)라 불리었는데, 위세가 1세(一世, 30년)동안 떨쳤다.

 

 

10월 <홍가洪可>의 처 <문기文其>가

<흑치>의 아들 <두치杜齒>를 도산(桃山)에서 낳았다.

 

<흑치>가 도산의 신지(神池)의 물로 아기를 씻겼다.

 

도산은 성스러운 땅으로 천한 자들이 아기를 낳을 곳이 아니다.

 

(흑)치가 감히 사사로운 첩의 아들을 낳고, 또 신지(神池)의 물을 사용하여,

도산주(桃山主)가 화를 내었으나 위세가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했다.

 

<문기文其>는 <문부文父>의 딸인데 음란함을 좋아하고, 아첨함이 좋았다.

 

<흑치>를 섬기기를 다하니 <흑치>가 그 남편을 호성장군으로 발탁하였다.

 

<문기文其>의 딸 <문개文介>는 <한석汗昔>의 정처로 권세가 품주만큼 컸다.

 

당시 사람들이 노래하여 말하기를

 

“저 성(城)은 여자로써 귀하여지고, 저곳 여자의 딸은 음란하여 귀하여 졌다.”

라고 하였다.

 

아마도 그 말은 모두 <홍가洪可>가 천거한 처(문기)가 벼슬을 얻었다는 것이다.

 

<구신臼臣>이 <홍체洪彘>를 (아슬라의) 남쪽으로 쫓아내었다.

 

<(홍)체>는 아슬라 여주 (臼君의) 사신(私臣)이다.

 

왕이 날기(捺己)에서 환도하였다.

 

<과다흑치>는 방사(方士)로 여성 편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더럽혀진 여자들은 6월 15일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으면

깨끗해진다고 혹세무민하여 이것이 유두(流頭)의 세시풍속이 되었다.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