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천제12년{AD190}경오

 

이 해에 <공손도>가 <요동>태수가 되어서,

고향에 돌아가서 예전에 밉게 보였던 떵떵거리던 집안 10성씨를 죽였으며,

들어와서 눌러앉고 싶어 하며 사신을 보내와 입조하였으나, 물리쳤다.

 

 

※ 참고 <公孫度(145?-204)>

 

<공손도公孫度>는 자(字)가 승제(升濟)이고

본래 요동(遼東)군 양평(襄平)현 사람이다.

 

<공손도公孫度>의 부친인 <공손연公孫延>이 관리(吏)의 추포를 피해

(본래 고향인 요동군을 떠나) 현도(玄菟)에 거주하였고

(현도군에서) <공손도>를 임명해 군리(郡吏)로 삼았다.

 

당시 현도태수는 <공손역公孫琙>이었고

그의 아들 <공손표公孫豹>가 18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당시 낙랑, 대방, 요동, 현토는 고구려와 한(漢)의 격전지로서

서로가 태수를 임명하고 있었다.

 

 

<공손도>가 어릴 때 이름이 표(豹)였고

또한 <공손역>의 아들과 같은 나이였으므로

<공손역>이 그를 만나보고 친애(親愛)하니

스승에게 보내 학문을 배우게 하고 처를 얻어 주었다.

 

그 뒤 유도(有道){後漢 선거제 과목의 하나}로 천거되어 상서랑(尙書郎)에 제수되었고

점차 관위가 올라 기주자사(冀州刺史)에까지 이르렀으나

요언(謠言){뜬소문}으로 면직되었다.

 

같은 군(郡) 사람인 <서영徐榮>이 <동탁董卓>의 중랑장(中郞將)이 되자

<공손도>를 추천해 요동태수(遼東太守)로 삼게 했다

 

<공손도公孫度>는 현도군의 소리(小吏,하급관리,아전)에서 시작했으므로

요동군(遼東郡) 사람들이 그를 경시했다.

 

당초 (요동)속국(屬國) 사람인 <공손소公孫昭>가 양평령(襄平令)을 지낼 때

<공손도>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을 불러 오장(伍長){하급직}으로 삼았었다.

 

<공손도>가 관직(즉, 요동태수)에 취임하자 <공손소>를 잡아들여

양평(襄平)의 저자에서 태형을 가해 죽였다.

 

(요동)군 내의 이름난 호족인 <전소田韶> 등

평소 (자신을) 은혜롭게 대우하지 않은 이들을 모두 법에 따라 주살하니

멸하여 없앤 것이 백여 가(家)에 이르러 군(郡) 중이 진율(震慄)했다.

 

동쪽으로 고구려(高句驪)를 치고 서쪽으로 오환(烏丸)을 공격하여

위엄을 해외(海外)에 떨쳤다.

 

 

초평 원년(190년),

 

<공손도公孫度>는 中國이 어지러운 것을 알고

친임하는 관리(吏)인 <유의柳毅>, <양의陽儀> 등에게 말했다,

 

“한조(漢祚)가 장차 끊어지려 하니 응당 경들과 더불어 왕(王)(업)을 꾀하려 하오.”

 

당시 양평(현) 연리(延里,)의 사묘(社廟)에 큰 돌이 생겨났는데

길이가 1장 남짓이었고 아래로는 3개의 작은 돌이 있어 발(足)이 되었다.

 

어떤 이가 <공손도에>게 이르길,

 

“이는 한나라 선제(宣帝) 때 관석(冠石)의 상서로운 조짐이며

리(里)의 이름이 선군(先君,선친.즉 공손연公孫延)과 같습니다.

 

社는 토지를 주관하니 분명 토지를 가지게 되고

삼공(三公)의 보좌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니 <공손도>가 더욱 기뻐했다.

 

 

예전에 하내태수(河內太守)를 지냈던 <이민李敏>은

군(郡) 내에서 저명한 인물이었는데,

<공손도>의 소행을 증오하고 그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해

가속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갔다.

 

<공손도>가 대노해 그의 부친 무덤을 파헤쳐 관을 쪼개고 시신을 불태웠으며

그의 종족(宗族)들을 주살했다.

 

요동군(遼東郡)을 갈라 요서중료군(遼西中遼郡)을 설치하고 태수를 두었다.

 

바다를 건너 동래(東萊,청주 동래군)의 여러 현들을 거두고

영주자사(營州刺史)를 두었다.

 

스스로 요동후(遼東侯), 평주목(平州牧)에 오르고,

부친인 <공손연公孫延>을 건의후(建義侯)에 추봉(追封)했다.

 

한나라 2조(二祖,한고조 유방과 후한 광무제 유수)의 묘(廟,사당)를 세우고

승제(承制)하였고 양평성(襄平城) 남쪽에 단선(壇墠,흙을 쌓아 만든 제단과

땅을 고른 제사터)을 설치하고

천지(天地)에 교사(郊祀){천자가 교외에서 천지에 지내던 제사}를 지냈다.

 

적전(藉田){제왕이 직접 밭을 갈던 의식}, 치병(治兵)하고

제왕의 수레를 타고 다녔으며,

아홉 개의 술이 달린 관모(冠帽)를 쓰고 우림군 기병을 부렸다.

 

태조(太祖){조조}가 표를 올려 <공손도公孫度>를 무위장군(武威將軍)으로 삼고

영녕향후(永寧鄕侯)에 봉하니 <공손도>가 말했다,

 

“내가 요동(遼東)에서 왕으로 지내는데 무슨 영녕(향후)인가!”

 

그리고는 인수(印綬)를 무기고에 넣어두었다.

 

<공손도>가 죽자 아들인 <공손강公孫康>이 그 지위를 이었고

영녕향후의 작위는 (공손강의) 동생인 <공손공公孫恭>에게 봉했다.

 

이 해가 건안 9년(204년)이다.

 

 

건안 12년(207년),

 

태조(太祖){조조曹操}가 삼군오환(三郡烏丸)을 치고 유성(柳城)을 도륙했다.

 

<원상(袁尙)> 등이 요동(遼東)으로 달아나니

<공손강公孫康>이 <원상>을 참수해 그 수급을 보냈다.

 

이 말은 (삼국지 권1) 무제기에 있다.

 

<공손강>을 양평후(襄平侯)에 봉하고 좌장군(左將軍)으로 임명했다.

 

 

고구려는 발기의 난으로 요동을 상실하고 209년 환도성(今 朝陽)으로 천도한다.  

 

 

<공손강>이 죽자 아들인 <공손황公孫晃>과 <공손연公孫淵> 등이 모두 어렸으므로

그 무리들이 <공손공公孫恭>을 세워 요동태수(遼東太守)로 삼았다.

 

문제(文帝){조비曹丕}가 제위에 올라 (220년 10월) 사자를 보내

<공손공公孫恭>을 거기장군(車騎將軍), 가절로 임명하고 (221년 3월 거기장군 임명)

평곽후(平郭侯)에 봉하고, <공손강公孫康>을 대사마(大司馬)로 추증했다.

 

당초 <공손공公孫恭>은 병으로 음경이 소실되어 엄인(閹人){고자}이 되었고

열약(劣弱,열등하고 유약함)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태화 2년(228년),

 

<공손연公孫淵>이 <공손공公孫恭>을 위협하여 그 지위를 빼앗았다.

 

이에 명제(明帝){조예曹叡}는 <공손연>을 양렬장군(揚烈將軍),

요동태수에 임명했다.

 

<공손연>이 사자를 보내 남쪽으로 <손권(孫權)>과 서로 통하고 왕래하며

선물을 주고받았다.

 

<손권>은 <장미張彌>, <허안許晏> 등을 시켜 금옥진보(金玉珍寶)를 보내고

<공손연>을 세워 연왕(燕王)으로 삼았다.

 

<공손연>은 <손권>이 멀리 있어 의지할 수 없다는 점을 두려워하고

또한 화물(貨物)을 탐내었기에 그 사자들을 유인해 오도록 하고

<장미張彌>, <허안許晏> 등을 모두 참수해 (위나라 조정으로) 보냈다.

 

이에 명제(明帝)는 <공손연>을 대사마(大司馬)에 임명하고

낙랑공(樂浪公), 지절(持節)에 봉하고 예전처럼 군(郡)을 다스리게 했다.

 

(위나라의) 사자가 도착하자 <공손연>은 갑병(甲兵){무장병}을 베풀어

군진(軍陳)을 설치한 채 밖으로 나가 사자를 만났으며

또한 여러 차례 나라 안의 빈객(賓客)을 면대한 자리에서 악언(惡言)을 내뱉었다.

 

 

경초(景初) 원년(237년)

 

그리하여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 등을 보내

새서(璽書,옥새가 찍힌 문서)를 지니고 가게 하여 <공손연>을 소환하자

이에 <공손연>이 군대를 일으켜

요수(遼隧){양평의 서남쪽}에서 역격해 관구검 등과 서로 싸웠다.

 

<관구검> 등이 싸움에 불리하여 돌아왔다.

 

마침내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에 오르고

백관(百官)과 유사(有司,담당관원)를 두었다.

 

부절을 지닌 사자를 보내 선비(鮮卑)에게 선우새(單于璽)를 주고 변민(邊民)들에게

(관작을) 봉배(封拜)하고 선비족을 회유하여 북방(北方)을 침요(侵擾)하게 했다.

 

 

경초 2년(238년) 봄,

 

태위(太尉)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司馬懿)을 보내 공손연을 쳤다.

 

6월, 군(軍)이 요동(遼東)에 도착했다.

 

<공손연>은 장군 <비연卑衍>, <양조楊祚> 등을 보내 보기(步騎) 수만으로

요수(遼隧)에 주둔케 하고 주위 20여 리에 참호를 팠다.

 

선왕(宣王)의 군대가 도착하자

(공손연은) <비연卑衍>으로 하여금 이를 맞아 싸우게 하니

선왕(宣王)이 장군 <호준胡遵> 등을 보내 격파했다.

 

선왕(宣王)이 군대에 명해 포위를 뚫고 군대를 이끌고 동남쪽으로 향하다

급하게 동북쪽으로 돌려 양평(襄平)으로 나아갔다.

 

<비연> 등은 양평에 방비가 없는 점을 두려워해 밤중에 달아났다.

 

제군(諸軍)이 전진하여 수산(首山)에 도착하니

<공손연>이 다시 <비연> 등을 보내 영격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게 했다.

 

다시 이를 공격해 대파하고는 진군하여

(양평)성 아래에 이르러 성 주위에 참호를 팠다.

 

때마침 장마 비가 30여 일 동안 내려 요수(遼水)가 크게 불어나

운선(運船){물자를 운반하는 배}이 요구(遼口)에서 곧바로 성 아래에까지 이르렀다.

 

비가 그치자 토산(土山)을 쌓고 노(櫓){망루}를 세우고

발석(發石){투석기}, 연노(連弩)를 만들어 성 안으로 쏘았다.

 

<공손연>은 군급(窘急){궁지에 몰려 매우 급박함}해졌고

양식이 다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장군 <양조楊祚> 등이 항복했다.

 

8월 병인일(7일) 밤,

 

길이 수십 장에 이르는 큰 유성(流星)이 수산(首山) 동북쪽으로부터

양평성(襄平城)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임오일(23일), <공손연>의 무리가 무너지니 아들인 <공손수公孫脩>와 함께

수백 기를 거느리고 포위를 돌파해 동남쪽으로 달아나자

대병(大兵)으로 급히 들이쳐 유성(流星)이 떨어진 곳에서 <공손연> 부자를 베었다.

 

성을 함락하여 (공손연이 임명한) 상국(相國) 이하 수천 명의 수급을 베었고

<공손연>의 수급을 낙양(洛陽)으로 보냈고,

요동(遼東), 대방(帶方), 낙랑(樂浪), 현도(玄菟)가 모두 평정되었다.

 

당초 <공손연>의 집에 괴이한 일이 여러 번 있었으니,

개가 관책(冠幘)을 쓰고 붉은 옷을 입고 지붕 위로 올라갔고,

밥을 지을 때 어린 아이가 시루 속에서 찌어져(蒸) 죽은 일이 있었다.

 

양평(襄平) 북쪽의 시장에는 살아있는 고기(生肉)가 있어

길이와 둘레가 각기 수척이었고 머리와 눈, 주둥이는 있고 손발이 없었으나 움직였다.

 

이에 관해 점(占)을 치자 말했다,

 

“형(形)이 있으나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체(體)가 있으나 소리를 내지 못하니

그 나라가 멸망하겠구나.”

 

처음 <공손도>가 중평 6년(189년)에 요동(遼東)을 점거하고

3대 째인 <공손연>에 이르러 도합 50년 만인 238년에 멸망하였다.

 

 

※ 공손도의 가계도

 

 

公孫延 .......................................公孫琙(현도태수)

    |                                    |

公孫度(145?-204)<요동태수> 公孫豹(145?-167)

    |

公孫康(170?-210) - 公孫恭 - 보고(宝皐201-257)........ 公孫瓚

    |

公孫晃(205-) - 公孫淵 <燕王>(207-238)

                         |

                      公孫脩(222-238)

 

 

 

※ 참고 <공손찬(公孫瓚 ?-199)>

 

<공손찬公孫瓚>은 자(字)가 백규(伯珪)고 요서(遼西) 영지(令支) 사람이다.

 

군(郡)의 문하서좌(門下書佐){군郡 태수의 속관명}가 되었다.

 

자의(姿儀,좋은 자태와 풍채)를 갖추고 음성(音聲)이 크니

후태수(侯太守)가 그를 기특하게 여겨(器) 자신의 딸을 처로 삼게 하고는

탁군(涿郡)의 <노식盧植>에게로 보내 경서(經書)를 읽게 했다.

 

뒤에 다시 군리(郡吏)가 되었다.

 

유태수(劉太守)가 사고에 좌죄되어 정위(廷尉)에게로 소환되어 나아가니

<공손찬>이 수레를 몰며 몸소 도양(徒養){수행하며 잡무를 시중듦}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다 유(劉)(태수)가 일남(日南,교주 일남군)으로 유배되자

<공손찬>이 양식(米)과 고기를 갖추어 북망(北芒)(산)에서

선인(先人,조상)에게 제를 올리며 술잔을 들고 축도했다.

 

“예전에는 다른 이의 자식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이의 신하이니

응당 일남(日南)으로 가야 합니다.

일남은 장기(瘴氣){유행성 열병,학질 등인 장려瘴癘의 원인이 되는 기운}가 있어

혹 돌아오지 못할까 두려우니 이곳에서 선인들께 이별을 고합니다.”

 

두 번 절하고 강개(慷慨)히 몸을 일으키니

당시 이를 지켜보던 자들 중에 흐느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劉)가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사면되어 돌아왔다.

 

공손찬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郞)이 되었고

요동속국(遼東屬國)의 장사(長史)로 제수되었다.

 

일찍이 수십 기(騎)를 뒤따라 새(塞,요새)를 순찰하다가

선비(鮮卑)족 수백 기(騎)를 만난 적이 있다.

 

이에 <공손찬>이 물러나 비어 있던 정(亭)으로 들어가 뒤따르던 기병들에게 약속했다,

 

“지금 (적진을) 부딪치지 않으면 모두 죽을 것이다.”

 

그리고는 <공손찬>이 몸소 양쪽 끝에 칼날이 있는 모(矛,창의 일종)를 쥐고는

말달려 나가 호(胡,북방민족 통칭,여기선 선비족)를 찔러 수십 명을 살상하고

또한 자신을 따르던 기병 절반을 잃었으나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다.

 

선비(鮮卑)가 징예(懲艾){징벌될까 두려움을 품음}하여

뒤에는 감히 다시 새(塞)를 침입하지 못했다.

 

탁령(涿令,탁군 탁현의 현령)으로 올랐다.

 

광화(光和: 영제 178-183년) 중 양주(涼州)에서 적(賊)이 봉기하자

유주(幽州)의 돌기(突騎) 3천 명을 일으키고

<공손찬>에게 도독(都督)의 사무를 행한다는 전(傳,부첩符牒)을 내려

이를 거느리게 했다.

 

군(軍)이 계중(薊中, 유주목의 치소)에 도착하니,

어양(漁陽) 사람 <장순張純>이 요서(遼西) 오환(烏丸) <구역거丘力居> 등을 꾀어

모반하여 계중(薊中)을 겁략(劫略)하고 장군(將軍)을 자칭했다.

 

관리와 백성을 약탈하고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속국(屬國)의 여러 성들을 공격하여 이르는 곳마다 잔파(殘破)했다.

 

<공손찬>이 거느리던 부대를 이끌고 <장순張純> 등을 추토(追討){추격해서 침}하여

공을 세우고 기도위(騎都尉)로 올랐다.

 

속국(屬國) 오환(烏丸) 탐지왕(貪至王)이 종인(種人)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로 와서 항복했다.

 

중랑장(中郞將)으로 오르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고,

진격하여 (요동)속국(屬國)에 주둔하고 5-6년 동안 호(胡)와 서로 공격했다.

 

구역거 등이 청주(靑州), 서주(徐州), 유주(幽州), 기주(冀州)의 네 주(州)를 초략해

피해를 입혔으나 <공손찬>이 이를 막지 못했다.

 

 

이 당시 청주(靑州), 서주(徐州), 유주(幽州), 기주(冀州)는 황건적의 주 무대였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종정(宗正)인 동해(東海)사람 유백안(劉伯安){<유우劉虞>의 字가 백안)이

덕의(德義)를 갖추었고 예전에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지내며 은혜와 신의를 드리워

융적(戎狄)들이 그에게 귀부하였으니

만약 그에게 진무(鎭撫)하게 하면 힘들이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다.’ 하였다.

 

이에 <유우劉虞>를 유주목(幽州牧)으로 삼았다.

 

유우가 (임지에) 도착해 사자를 호(胡)에게로 보내 이해(利害)로써 고하고

<장순張純>의 수급을 보내라고 꾸짖었다.

 

<구역거丘力居> 등이 <유우>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각기 역관(譯)을 보내 스스로 귀부해왔다.

 

<공손찬>은 <유우>가 공을 세우는 것을 시기하여

이에 몰래 사람을 보내 도중에서 기다려 호(胡)의 사자를 죽이게 했다.

 

호(胡)가 그 정황을 알아채고 사이 길을 통해 <유우>에게로 나아갔다.

 

<유우>가 주청하여 각 처의 주둔병들을 파하고 다만 <공손찬> 만을 남겨

보기(步騎) 1만 명을 거느리고 우북평(右北平)에 주둔하게 했다.

 

이에 <장순張純>이 처자를 버리고 달아나 선비(鮮卑)에게로 들어갔다가

그의 객(客,문객)인 <왕정王政>에게 살해되었고 그 수급이 <유우>에게 보내졌다.

 

<왕정>을 열후(列侯)에 봉했다.

 

<유우>는 이 공으로 이내 태위(太尉)에 임명되고 양분후(襄賁侯)에 봉해졌다.

 

때마침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여 <유우>를 대사마(大司馬)로 올리고

<공손찬>을 분무장군(奮武將軍)으로 삼고 계후(薊侯)에 봉했다.

 

관동(關東)의 의병(義兵)이 봉기하니 이에 <동탁>이 황제를 겁박해 서쪽으로 천도하고

<유우劉虞>를 징소 해 태부(太傅)로 삼았으나

도로가 막혀 신명(信命){사자를 보내 전하는 명령}이 도착하지 못했다.

 

<원소袁紹>, <한복韓馥>이 의논하길,

 

어린 황제가 간신(姦臣)에게 제압되어 있어 천하 사람들의 마음이 귀의할 곳이 없고

<유우>는 종실(宗室)이고 이름이 알려져 있어 백성들이 바라는 사람이라 하여

마침내 <유우>를 황제로 추대했다.

 

사자를 보내 <유우>에게 도착했으나 <유우>가 끝내 수락하려 하지 않았다.

 

<원소> 등이 다시 <유우>에게 상서의 사무를 겸하며 (영상서사領尙書事)

승제(承制){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 권한을 편의로 행사함}하여

(관작을) 봉배(封拜)하도록 권하니 <유우>는 이 또한 들어주지 않았으나

여전히 <원소> 등과 연화(連和){연합}했다.

 

(당시) <유우>의 아들 <유화劉和>는 시중(侍中)이 되어 장안(長安)에 있었다.

 

천자가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해 <유화>를 시켜 <동탁>을 속여 그에게서 달아나

은밀히 무관(武關)을 나와 <유우>에게로 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자신을 영접하도록 했다.

 

<유화>가 도중에 <원술袁術>을 거쳐 가다 <원술>에게 천자의 뜻을 설명했다.

 

<원술>은 <유우>를 외원(外援)으로 삼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아

<유화>를 머물게 하고 보내주지 않고는 (유우의) 군대가 도착하면

함께 서쪽으로 간다고 허락하며 <유화>로 하여금 <유우>에게 서신을 쓰도록 했다.

 

<유우>가 <유화>의 서신을 받아 보고는 이에 수천 기(騎)를 보내

<유화>에게 나아가도록 했다.

 

<공손찬公孫瓚>은 <원술>에게 딴 뜻(역심,야심)이 있음을 알고

군대를 보내지 않도록 하려고 <유우>를 말렸으나 <유우>는 들어주지 않았다.

 

<공손찬>은 <원술>이 이 일(자신이 말렸다는 것)을 듣고 원망할까 두려워하여

또한 그의 종제(從弟)인 <공손월公孫越>을 보내 1천기를 거느리고

<원술>에게로 나아가 자신과 결탁하게 하고,

<원술>이 <유화>를 붙잡고 그 군대를 빼앗도록 은밀히 가르치게(깨우치게) 했다.

 

이로 말미암아 <유우>와 <공손찬>은 더욱 틈이 벌어졌다.

 

<유화>가 <원술>에게서 달아나 북쪽으로 왔으나 다시 <원소>에게 억류되었다.

 

당시 <원술袁術>이 <손견孫堅>을 보내 양성(陽城,예주 영천군 양성현)에서

<동탁>을 막게 하니 <원소>가 <주앙周昂>을 시켜 그 곳(양성)을 빼앗게 했다.

 

<원술>이 <공손월>을 보내 <손견>과 함께 <주앙>을 공격하게 했는데

이기지 못하고 <공손월>이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공손찬>이 분노해 말했다,

 

“내 동생이 죽은 화(禍)는 <원소袁紹>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리고는 출군하여 반하(磐河){강 이름으로 평원군 반현般縣 근처로 보임}에 주둔하며

장차 <원소>에게 보복할 것이라 했다.

 

<원소>가 두려워하여 자신이 패용하던 발해태수(勃海太守)의 인수(印綬,관인과 인끈)를 <공손찬>의 종제(從弟)인 <공손범公孫範>에게 주고 그를 (발해)군으로 보내

(공손찬과) 결원(結援,결탁)하고자 했다.

 

그러자 <공손범>은 발해병(勃海兵)으로 <공손찬>을 도와

청주, 서주의 황건적을 격파하고 그 군세가 더욱 성해졌고,

계교(界橋,현재 하북성 위현威縣의 동쪽. 당시 거록군,위군,청하국의 경계지점.

반현보다는 좀더 남서쪽)로 진군했다.

 

엄강(嚴綱)을 기주(冀州), 전해(田楷)를 청주(靑州),

선경(單經)을 연주(兗州)(자사)로 삼고 각 군현(의 관리)를 배치했다.

 

<원소>가 광천(廣川,청하국 광천현)에 주둔하고

장수 <국의麴義>에 명해 선두에 서서 공손찬과 싸우게 하니 <엄강>을 사로잡았다.

 

<공손찬>군은 발해(勃海)로 패주하고 <공손범>과 함께 계(薊)로 돌아가

(계현의) 큰 성 동남쪽에 작은 성을 쌓으니

<유우>와 서로 가까워 점점 더 서로 원망하였다.

 

<유우劉虞>는 <공손찬>이 변고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공손찬>을 습격했다.

 

<유우>가 거용(居庸,상곡군 거용현)으로 달아났다.

 

<공손찬>이 거용을 공격해 함락하고 <유우>를 사로잡고는

<유우>를 압송해 계(薊)로 돌아왔다.

 

때마침 <동탁>이 죽자 천자가 사자 <단훈段訓>을 보내 <유우>의 봉읍을 늘려주고

6주(州)를 감독하게 하고,

<공손찬>은 전장군(前將軍)으로 올리고 역후(易侯)에 봉했다.

 

<공손찬>은 <유우>가 존호(尊號)를 칭하려 했다고 무함하고

<단훈>을 위협해 <유우>를 참(斬)하게 했다.

 

<공손찬>이 상주하여 <단훈>을 유주자사로 삼았다.

 

그리하여 <공손찬>이 교긍(驕矜,교만)하게 굴고

(다른 이의) 과오는 기억하고 선행은 잊어버리니 많은 이들이 해를 입었다.

 

<유우>의 종사(從事)였던 어양(漁陽) 사람 <선우보鮮于輔>,

제주(齊周), 騎都尉 <선우은鮮于銀>이 (유)주(州)의 군대를 이끌고

<공손찬>에게 보복하려 하였는데,

연국(燕國, 유주 광양군) 사람인 <염유閻柔>가 평소 은신(恩信)이 있었으므로

함께 <염유>를 추천해 오환사마(烏丸司馬)로 삼았다.

 

<염유>가 오환(烏丸), 선비(鮮卑)를 초유(招誘)해

호(胡)와 한인(漢人) 군사 수만 명을 얻고는

<공손찬>이 임명한 어양태수(漁陽太守) <추단鄒丹>과

노현(潞縣,어양군 노현) 북쪽에서 싸워 대파하고 <추단>을 참(斬)했다.

 

<원소>는 또한 <국의麴義>와 <유우>의 아들 <유화劉和>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게 하니 <선우보鮮于輔>와 합쳐 <공손찬>을 공격했다.

 

<공손찬>군이 수차례 패하자 이에 달아나

역경(易京,기주 하간국 역현으로 기주,유주의 접경지점)으로 돌아가 굳게 지켰다.

 

주위에 10중의 참호를 파고 참호 안쪽에 경(京,언덕)을 쌓아

(각기) 모두 높이가 5-6장이었고 그 위에 루(樓)를 세웠다.

 

중앙의 참호(안쪽)에 있는 경(京)은 특별히 높이가 10장으로

(공손찬) 자신이 그곳에 거주하며 곡식 3백만 곡(斛)을 쌓아두었다.

 

<공손찬>이 말했다,

 

“예전에는 천하의 일은 가히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평정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지금 보건대 이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군대를 쉬게 하며 밭일에 힘써 곡식을 쌓아두느니만 못하다.

 

병법에 이르길 ‘백개의 루(樓)는 공격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제 내가 루로(樓櫓,높은 망루,고루)를 천중(千重)으로 세워 두었으니

(쌓아둔) 이 곡식을 다 먹을 즈음에는 족히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원소>를 (이를 공격하느라) 피폐하게 하고자 했다.

 

<원소>가 장수를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으나 여러 해 동안 함락하지 못했다.

 

 

건안 4년(199년)

 

<원소>가 전체 군으로 이를 포위했다.

 

<공손찬>이 아들을 보내 흑산적(黑山賊)에게 구원을 청하고

또한 스스로 돌기(突騎)를 거느리고 곧바로 나와

서남산(西南山) 곁에서 흑산적의 부중을 끼고

기주(冀州)에서 육양(陸梁,횡행)하여 <원소>의 배후를 끊고자 했다.

 

장사(長史) <관정關靖>이 <공손찬>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장군의 장사(將士,장졸)들은 모두 이미 토붕 와해되었으나

그들이 (여전히) 서로 지키며 버티는 것은 그들 거처의 노소(老小,가족)를 돌아보며

그리워하고 장군이 그들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장군이 굳게 지키며 시간을 보내면 <원소>는 분명 스스로 물러날 것이고,

그들이 물러난 뒤에는 사방의 군사를 다시 합칠 수 있습니다.

 

만약 장군이 이제 이들을 버리고 떠난다면

군에 진중(鎭重,위중함;권위를 갖춘 인물)이 없게 되니

머지않아 역경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장군은 근본(本)을 잃어버리고

초야(草野)에 외로이 있게 될 것이니 어찌 성공하겠습니까!”

 

이에 <공손찬>이 그만두고 출전하지 않았다.

 

구원군이 도착하면 안팎으로 <원소>를 공격하고자 했다.

 

사람을 보내 아들에게 서신을 전해 구원군이 도착할 기한을 정하고

불을 올려 호응하기로 했다.

 

<원소>의 척후병이 그 서신을 가로채 기약한 바대로 불을 올렸다.

 

<공손찬>은 구원군이 도착한 것으로 여겨 이에 밖으로 나가 싸우고자 했다.

 

<원소>가 복병을 두어 이를 공격해 대파하였고

(공손찬은) 다시 (역경으로) 돌아가 수비했다.

 

<원소>가 땅굴을 만들고 <공손찬>의 루(樓)를 부딪쳐 파괴하여

점차 가장 가운데 쌓은 경(中京)에까지 이르렀다.

 

<공손찬>은 필히 패하게 될 것임을 스스로 알고

 처자를 모두 죽인 뒤 이내 자살했다.

 

<선우보鮮于輔>가 그 부중을 거느리고 왕명(王命)을 받들었다.

 

<선우보>를 건충장군(建忠將軍)으로 임명해

유주(幽州)의 여섯 군(郡)을 감독하게 했다.

 

태조(太祖,조조)가 <원소>와 관도(官渡)에서 서로 맞서니

<염유閻柔>가 태조에게 사자를 보내 직무를 받고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로 올랐다.

 

그리고 <선우보>가 몸소 태조에게로 와서 좌도요장군(左度遼將軍)에 임명되고

정후(亭侯)에 봉해졌고, 되돌려 보내져 본주(本州,즉 유주)를 진무(鎭撫)했다.

 

태조가 남피(南皮)를 격파하자 <염유>가 부곡(部曲)과 선비(鮮卑)족을 거느리고

명마(名馬)를 바치며 군(軍)을 받들고 삼군오환(三郡烏丸)을 정벌하는데 종군하여

그 공으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

 

<선우보> 또한 그 부중을 이끌고 종군했다.

 

문제(文帝,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선우보>를 호아장군(虎牙將軍),

<염유>를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임명하고 모두 현후(縣侯)로 올려 봉하고

특진(特進)의 지위를 내렸다.

 

 

<공손찬과 원소의 전쟁 역경(易京)>

 

 

 

Posted by 띨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