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을파소의 出師

고대사 2014. 8. 31. 09:34

 

고국천제13년{AD191}신미,

 

2월, 상은 도성들과 도성들 인근의 모든 군사를 서도(西都)로 불러들여서

<좌가려左可慮>와 <어비류箊畀留>를 친히 정벌하여 주살하였다.

 

4부(部)에 현자들을 천거하라고 명하였다.

 

4월, <을파소乙巴素(138-203)>를 국상(國相)이라 불리는 삼보의 우두머리로 삼고,

죽려지인(竹呂之釼)을 주어서 부도(不道)한 자들을 주살하게 하였다.

 

이 시절에 삼보의 자리는 모두 종척들이 평소 진치고 앉아서 놀고먹는 자리였었다.

 

그러한 까닭에, 새로운 인재를 발탁하여 국정을 바로잡게 된 것이었다.

 

이리되었더니, 종척들과 총신(寵臣) 및 행신(倖臣)들이 두려워 떨게 되었다.

<고구려사초>

 

 

좌가려(左可慮)의 난

 

<좌가려>는 고국천제의 황후 <우于>씨의 친척으로서 황후의 도움으로 

평자(平者)의 직을 하사받고 국정을 다스리기 시작한다.

 

고국천제 7년(186년) 중외대부(夫) <어비류(於卑留)>는

<좌가려>를 그의 집으로 초대하여 많은 금상(金像)을 주며 후한 대접을 한다.

 

그때부터 <좌가려>는 국사(國思)보다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 지기 시작하여

사치를 일삼으며 남의 자녀와 토지 및 가옥을 약탈하는 등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폭정을 일삼는 <어비류>와 <좌가려>에게 참수형이 내려진다.

 

<어비류>와 <좌가려>는 쿠데타를 일으킬 궁리를 시작하게 된다.

 

<어비류>는 <명림답부>의 죽음으로 권력이 약해진 연나부(椽那部)와 합세한다.

 

서기 190년 반란군이 황도(皇都)에 도착한다.

 

성루나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 근처에는 버려진 고구려 깃발 만이 있었다.

 

자신들의 대군의 행렬 소식을 듣고 도망갔다고 생각한 그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황도(皇都)로 향해 행군을 게속한다.

 

그들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자 사방의 성문이 닫히며 각 가(家)들의 지붕위에서

황군(皇軍)이 그들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고 그때 <좌가려>는 화살에 전사하였고

<어비류>는 황군에게 붙잡혀 그 후 왕의 명으로 참수형을 당하였다.

 

 

<남무南武155-197> 또는 <이이모>라는 이름을 가진 고국천제의 아버지는

태조의 장자 <만륵萬勒(114~155)>이었으나

패제 차대제 <수성遂成(71~165)>에게 죽임을 당하고

유복자로 태어난 <남무南武>는 고구려 8대 황제 신대제 <백고伯固(121~179)>의

아들로 키워지고 어머니는 황후였으나 황후의 권세를 누리지 못했던

목도루의 딸 <수례守禮(穆后)(133-188)>였다.

 

황가(皇家)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 <만륵萬勒>은

<수성遂成>에게 죽임을 당하고 의부 <백고伯固>는 차대제 수성의 살해 위협을 피해 변방으로 피신해야만 했으며 어머니 <수례守禮>는 차대제의 차지가 되었다.

 

조정은 <천화天花(尙后)(104~180)>의 친정인 상씨(尙氏) 일가들이 차지하고

서로 권력다툼에 정신이 없었던 이른바 외척 정치가 기승을 피우던 시기였다.

 

그런 혼란과 핍박의 시기를 어린 <남무南武>는 모두 지켜보며 자랐다.

 

좌절의 세월 속에 살던 <남무>에게 차대제 <수성遂成>의 죽음과 

의부 <백고伯固>의 등극은 희망을 가져오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의부 신대제는 이름뿐인 황제였고

조정은 여전히 상태후와 우후 그 외척들의 놀이터였다.

 

<남무南武>는 의부 <백고伯固>와 같은 무기력한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다.

 

무기력한 황제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남무南武>였다.

 

그가 제위에 오르던 시기를 전후하여 <명림답부>와 신대제 <백고>가 제거되고

이듬해 정권의 핵심이던 상태후도 죽었다.

 

그의 친모 목태후 <수례守禮>도 자살했다.

 

남은 것은 <좌가려左可慮>와 <어비류箊畀留>

반란을 일으킨 그들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고국천제에게 외척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할 새로운 세상이 왔다.

 

그 첫 걸음으로 그는 전국에서 제대로 나라를 다스릴 인재를 구하기 시작한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을파소乙巴素>이다.

 

을파소는 가산(加山)사람으로

그의 조상이 추모의 아들 <을두지乙豆智(BC34-AD40)>이다.

 

<을두지乙豆智>는 광명대제 시절 우보를 지냈고,

대무신제 시절 태보를 지낸 인물이다.

 

<을파소乙巴素>의 아버지 서하태수 <을어>는 외척들의 미움을 사 파면 당하였고

또한 강한 성격의 <을파소>도 외척들을 혐오하며 시골 좌물촌(左勿村)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나이 50이 되도록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좌물촌장 <연업淵業>은 그런 그의 인물됨을 보고 딸을 시집보내고

밭 800경과 노비 20호를 주었다.

 

신장은 7척이라하니 작은 편이었으나 멋있는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인물도 훤하고 말도 잘하니 세상 사람들이

<이윤>{은나라 명재상}이나 <여상>{강태공}같은 인물이

시골에서 썩고 있다고 아쉬워하였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의 친구 <안류晏留>는 외척정치를 타파할 인물로 그를 고국천제에게 추천하였으며

그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을파소>는 고국천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일약 국상(國相)이라는 최고의 지위로 중앙정치에 등장한다.

 

고국천제는 <을파소>가 원하는 권력을 주었고

<을파소>는 고국천제에게 외척타파와 왕권강화의 기회를 주었다.

 

<을파소>는 고국천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모두 알고 있었다.

 

개혁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작업이다.

 

그가 상국(국상)의 지위를 얻어내고 개혁의 칼을 쥐게 되자

칠정을 내세워 나라의 전반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칠정이란 천체운행의 원리를 정치에 비교하여 치도로 삼은 것인데

<을파소>가 내세운 칠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존궁(尊君), 군주를 존중하고

둘째 정민(正民), 백성을 바로잡고

셋째 용현(用賢), 현명한 자를 기용하고

넷째 훈육(訓育), 가르쳐 길러내고

다섯째 양재(養才), 인재를 양성하고

여섯째 농렵(農獵), 농사와 사냥을 권장하고

일곱째 변새(邊塞), 국경을 튼튼히 하는 것이었다.

 

개혁을 성공시키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을파소>는 해냈다.

 

정치가 제자리를 찾자 태평성대의 시대가 열렸다.

 

권력의 달콤함을 맛본 <을파소>는 점차 그 달콤함에 빠져들어 간다.

 

외척정치는 아이러니하게도 개혁의 주동자 <을파소>에 의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고국천제는 43세(155-197)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산상제 <연우延優(173-227)>의 즉위와 <주朱>태후의 정권장악은

<을파소>에게 크나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비록 <을파소>가 산상제를 즉위시키는데 큰 힘을 발휘하였지만

<주朱>태후는 정권을 잡자말자 친위병력을 비롯하여 주요 지위를

전부 주씨 일가로 교체시켜버렸다.

 

비록 국상이지만 <을파소>도 언제 제거될지 모르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고국천제시절 외척타파의 깃발을 내세우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상으로 등장한 <을파소>이지만

<남무>의 죽음으로 이제 끈 떨어져버린 연(鳶)의 신세가 된 것이다.

 

산상제가 즉위하자 본처인 <연淵>씨를 첩으로 내리고

산상제의 황후 <우于>씨의 동생 <우간于肝>을 본처로 맞아들인다.

 

연씨(淵氏)는 좌물촌 촌구석에 외척들의 탄압을 피해

오갈 데 없이 들어온 <을파소>를 인정하고 양식을 주고 땅을 주었던

좌물촌장(左勿村長) <연업(淵業)>의 딸이었다.

 

산상제는 <대곤大昆>이라는 아들까지 낳은 본처를 내쳐버렸다.

 

졸지에 본처가 첩으로 내려와

본처가 된 <우간于肝>을 섬겨야하는 처량한 신세로 변해버렸다.

 

주태후의 명으로 <연淵>씨는 발기대왕의 비(妃)가 되고

<을파소>는 본처를 첩으로 내리는 산상제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을파소>는 우씨가와 주씨가를 견제하기 위하여

산상제에게 주통녀(酒桶女)를 소개한다.

 

주통녀(酒桶女)가 아들을 낳고 소후가 되고

그 아들이 다음 황제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을파소>는 눈을 감았다.

 

203년 8월, 향년 65세였다.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은 우리 민족의 3대 경전이자,

국선도의 3대 경전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참전계경(參佺戒經)》을 세상에 전한 사람은

고구려의 선인(仙人) <을파소乙巴素>이다.

 

그는 일찍이 백운산 깊은 석굴에서 하늘에 기도하다가

국조(國祖) 단군(檀君)의 성령(聖靈)으로부터 천서(天書)를 얻었다.

 

이를《참전계경(參佺戒經)》이라 이름 하였는데

참전(參佺)이라 함은 사람으로서 온전함을 꾀 한다는 뜻이다.

 

《고기(古記)》에 따르면

조화경(造化經), 교화경(敎化經), 치화경(治化經)이라 하는 삼화경(三化經)이 있는데

단군 왕검께서 《참전계경》366훈(訓)으로 가르쳐

뭇 백성을 치화(治化)하셨던 것이므로, 《참전계경》을 치화경(治化經)이라 한다.

 

한때 연(燕) 진개의 침략 병화(兵禍)를 당해 잠적되었던 것을,

을파소 선인의 지극 정성 수행 기도로 말미암아 다시 세상에 전해지게 된 것이었다.

 

《참전계경(參佺戒經)》은 8가지 강령(綱領)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8가지 진리의 말씀(8理訓)이라고도 하며,

여기에는 총 366가지 진리의 가르침이 들어 있다.

 

을파소 선인은 이같은 천서(天書)를 얻어 수학정진(修學精進)하며,

깨달음마다 낱낱이 주서(註書)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신시(神市) 이화세계(理化世界)에 8훈(八訓)을 날줄(經度)로 하고,

5사(五事)를 씨줄(緯度)로 하여,

그 교화가 크게 행하여져 홍익제물(弘益祭物)하였으니,

참전(參佺)의 이룬 바가 아닌 것이 없다.”

 

또한 《참전계경(參佺戒經)》이라 함은

'대시(大始)에 밝은이가 배달국 신시(神市)에서 인간의 366여의 일을 주재하였다.’

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하늘은 비록 말이 없으나 하늘님은 오르락 내리락 하며 두루 보살피는 것이니,

자기를 알고자 하는 자는 열심히 인간 366사를 구함으로서 그 근본을 성실하게 하여,

참전(參佺)으로서 깨우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 <을파소> 선인과 고국천제의 한판 승부수

 

<을파소> 선인은 도(道)를 이룬 후, 하산하여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고 있었다.

 

이때 고구려 제9대 임금이신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왕비 외척들의 권력 남용에 질려 국정을 쇄신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권력에 뜻이 없는 현명하고 어진 인재(人材)를 간절히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대신으로부터

“서압록(西鴨綠) 골짜기의 좌물촌(左勿村)에 을파소(乙巴素)라는 사람이

큰 재주를 갖고서도 밭을 갈며 숨어 살고 있으니, 정중한 예로써 맞으소서.”

하는 말을 들었다.

 

고국천왕은 사신을 보내 공손한 말과 예(禮)로서 <을파소> 선인을 불러

중외대부(中畏大夫)와 우태(于台)라는 높은 벼슬을 주며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과인이 외람되게 선왕의 왕업을 계승하여 백성들 위에 거처하나,

덕이 박하고 재능이 부족해서 다스림이 알차지 못하오.

 

선생은 쓸만한 재주와 현명한 재능을 숨기고 초야에 묻혀 지낸다고 들었는데,

과인을 버리지 않고 이렇게 와 주었으니,

이것은 나의 기쁨만이 아니라 사직과 백성들의 복이오.

 

청컨대 기쁘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공은 성심을 다해주기 바라오.”

 

그러나 뜻밖에도 <을파소> 선인은 사양하였다.

 

“신은 아둔하여 감히 엄명을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현명하고 선량한 사람을 뽑아 높은 벼슬을 주시어,

대업을 이룩하소서.”

 

고국천왕은 <을파소> 선인의 뜻을 짐작하고

다시 ‘국상(國相)’이라는 최고 관직을 수여하였다.

 

그러자 기득권 대신들과 외척들의 권력 핵심 기관인 ‘제가회의(諸加會議)’에서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제가회의는 신라의 화백제도와 같은 제도로서 왕의 옹립과 폐위, 전쟁선포,

중앙의 고위관리 임명, 국사범의 처리 등 중요한 국사를 결정하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점점 권력 남용 기관으로 치달리면서, 왕권마저 위협하고 있던 중이었다.

 

권력도 없는 평범한 가문 출신의 농사꾼 <을파소>가

기득권 대신들과 외척들의 권력 핵심 기관인 ‘제가회의(諸加會議)’를 주재하는

국상(國相)으로 임명되었으니, 그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반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사실 <을파소> 선인은 왕권마저 위협하고 있는

이 막강한 ‘제가회의’를 다스리기 위하여

바로 ‘국상(國相)’이라는 자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왕으로부터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을파소> 선인은 나라를 위하여 일해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중외대부(中畏大夫) 우태(于台)’ 자리로서는

하늘의 뜻을 이루기에 적합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고국천왕 13년(191년)에 있었던 <을파소> 선인의 국상(國相) 임명은

극적인 요소가 있었으며,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기도 하였다.

 

제가회의의 강한 반발에 부딪친 고국천왕은 더욱 강력하게 왕권을 하달하였다.

 

“국상(國相)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일족을 멸하리라!”

 

고국천왕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국상(國相)의 자리에 오른 <을파소> 선인은

‘제가회의’에 이렇게 출사표(出師表)를 던졌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은거하고,

때를 만나면 나와서 벼슬을 하는 것은 선비의 떳떳한 일.

 

지금 대왕께서 저를 후하게 대접해 주시니,

어찌 지난날 은거하던 일을 다시 생각하겠습니까?”

 

이리하여 평범한 가문 출신인 <을파소>가 최고 관리인 ‘국상(國相)’으로 임명되어

고구려 국사(國事)를 전담하게 되었다.

 

국상이 된 <을파소>는 국정을 살피고 지극 정성으로 나라에 봉사하니,

자연히 정치와 가르침이 밝아졌다.

 

그리고 상·벌을 삼가니 백성들이 평안하고, 안과 밖이 무사하였다.

 

이에 왕은 <을파소>를 추천한 <안류(晏留)>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고구려의 국상(國相)이 된 <을파소> 선인은

먼저 전국에서 20세가 안된 나이 어린 준걸들을 뽑아서

‘선인도랑(仙人道郞)’이라 칭하게 하고,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을 수학(修學)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육예(六禮)를 익히고 닦도록 하여,

이들을 고구려의 꿋꿋한 동량(棟梁)으로 키워냈다.

 

그 가운데서 능히 교화(敎化)를 관장할 수 있는 도랑(道郞)은

‘참전(參佺)’이라 호칭케 하고,

무예가 출중하여 능히 이를 관장할 수 있는 도랑은 ‘조의(皂衣)’라 호칭하게 하였다.

 

194년 7월 서리가 내려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을파소> 선인은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였다.

 

진대법은 춘궁기에 나라의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한 뒤에 갚게 하는 빈민 구제책으로서,

빈농들이 부자들의 종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였다.

 

<을파소> 선인은 또한 고구려의 왕권 확립과 새로운 정치 질서를 수립하여

사회 안정에 이바지하였으며, 태평성대를 이루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203년 8월 평안히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김부식도 《삼국사기》에서 고국천왕의 파격적인 인재등용을 이렇게 예찬하고 있다.

 

‘어느 때나 명철하고 거룩한 임금은 어진 사람에 대하여는

사소한 예의에 구애받지 않았고, 그 사람을 등용하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해야만 어진 사람이 제자리를 바로 지키고,

유능한 사람이 그 직책을 다하여 다스림과 가르침이 밝게 닦아지며,

국가가 잘 보전될 것이다.

 

지금 왕은 결연히 <을파소>를 강가에서 뽑아 뭇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그를 백관 위에 두고, 그를 천거한 사람에게 상을 주니,

가히 명군(明君)이라 할만하다.’  

 

 

Posted by 띨빡